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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태백산>

 

 

이인상李麟祥 <설송도雪松圖>, 18세기.

117.2×52.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상은 선비 화가로서 기상이 뛰어나 훗날 이덕무나 박규수 같은 인물의 칭송을 받았다.

눈과 소나무의 대비를 통해서 소나무의 정절을 부각시켰다. 곧 세한후조歲寒後凋의 뜻을

경물 묘사 속에 가탁한 것이다. 또한 소나무의 얽히고 서린 모습을 통해

내면의 웅혼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이인상李麟祥, 「태백산 유람기遊太白山記」

 

 

 

나는 퇴어退漁 김 공(김진상金鎭商)을 따라서 태백산을 구경하러 갔다. 

안동과 순흥 등 여러 고을을 거쳐 구불구불 100여 리를 가서 봉화에 이르렀는데, 그곳들은

모두 태백산 기슭이다. 처음으로 산에 들어가 각화사에 묵었는데, 절은 봉화에서 50리 떨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 두 개의 견여肩與를 정돈시키고 승려 90인을 선발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겹옷 한 벌을

입었는데도, 모두 얼어 죽을까 봐 걱정하였다. 이날 산 아래에는 여전히 따스하였다. 5리를 올라가서 사각

史閣(태백산사고)을 구경하였는데, 하늘이 비로소 밝아왔다. 처음으로 상대산上帶山 중봉으로 향하였다.

 

 

산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길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축 늘어진 회나무와 언건偃蹇(우람하게 솟음)한 떡갈나무가 마치 귀신처럼 서 있다.

바람과 불에 꺼꾸러져 있는 나무가 언덕에 옆으로 누워 있고 길은 끊었으나, 눈이 쌓여서 형체가 흐릿하다.

서 있는 나무들은 바야흐로 억센 바람과 싸우느라 그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 동쪽에서 진동을 하면

휘이휘이 서쪽에서 메아리를 친다. 어두컴컴하게 그늘이 졌다가 갑자기 번쩍하기를, 그치지 않고 그러한다.

따라오는 사람들이 모두 추위에 얼어 서 있기에, 마른 나무를 꺾어다가 불을 피워 몸을 덥히게 하였다.

다시 눈을 밟으며 산등성의 길을 열었다. 끈을 견여의 앞과 뒤에 묶고 골짝에 줄을 매어서 매달린 상태로 나아갔다.

바라보이는 곳이 멀어질수록 흰 눈도 점점 깊어지고 바람도 점점 매서워지며 숲의 나무는 점점 짧아졌다.

 

상대산에 오르자, 나무라고는 한 치 한 잔 길이의 것조차 없고, 다만 바람이 있을 뿐이다.

사방 백 리에 산이 모두 흰 눈빛이어서, 마치 못 용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듯도 하고, 마치 일 만 필의

말이 내달려 돌진하는 듯도 하다. 안개 속에 불쑥 드러났다가 사라져 없어지고, 어두컴컴 하다가 활짝

열리기도 하면서, 번쩍번쩍 반짝반짝, 희디희고 맑디맑게, 빛의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다.

따라오는 사람들이 미친 듯 외치면서 발을 구른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바다색이 구름과 같고, 하늘에 둥실 떠서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안개 속의 돛배처럼 춤추며 날아서 구름 속에 콸콸 흐르고 바다와 뒤섞인 것은

울릉도다. 올망졸망 또렷또렷하게 머리를 숙이고 빙 둘러 열 지어 있으면서 함부로 나대지 않는 것들은 일흔

고을의 산들이다. 뚝 자른 듯이 앞에 막아서서 마치 사악四岳(지방의 목민관)이 제후를 인솔하여 조회를 하는

듯한 것은 청량산이다. 서북쪽은 구름과 안개가 참담하여, 시선이 닿는 데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산이 순전히 바위로 이루어져서, 동쪽에 마치 칼과 도끼처럼 쫑긋 서 있다.

 

 

 

 

 

 

 

 

마침내 동북쪽으로부터 길을 잡아나가 천왕당으로 향하였다.

해가 지고 달이 나와, 다만 산꼭대기의 나무만 보일 따름이다. 높이는 고작 서너 자에 불과하고 일 만

줄기가 우그러져, 하늘하늘하게 기생하고 있고, 울퉁불퉁해서 기기하고 고고하며, 너울너울하면서 아래옷을

잡아 끌고 소매를 찢는다. 그 억셈이 쇠와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구부려 가게 만든다. 뿌리를 꼭꼭

싸맨 듯 뒤덮은 눈은 사람의 무릎까지 빠지게 만들고, 바람이 불면 휘날린다. 북방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을 어둡게 만들고 땅을 찢어서 우르릉 우레 소리를 내고 동탕하기를 바다처럼 한다. 거대한 나무는 울부짖어

분노하고 작은 나무는 슬피 운다. 승려들의 정수리가 다시 일어나면 눈이 그 등을 짓누른다.

견여를 운반하는 어려움은 마치 급한 여울을 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승려는 말하였다. "나무는 천 년을 살 수 있을 따름입니다만, 만고토록 눈이 싸여 있습니다. 

대개 산의 등성은 더욱 북쪽에 가까워서 상대산과는 기후가 다르므로, 바람이 극도로 장대하며

 나무는 극도로 괴이하여, 눈이 더욱 녹지 않습니다."

 

 

천왕당에 이르렀을 때는 대략 인정(人定, 사람이 잠드는 시각, 곧 오후 10시)의 때였으며, 겨우 60리를 간 것이었다.

서쪽 법당에는 석불이 있고, 동쪽 법당에는 나무 인형들이 있으니, 이른바 천왕天王이다. 다시 나무를 불태워서

한기를 덜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점사店舍를 찾았다. 달빛은 음침하고 어두운데, 북두성이 마침 떠서는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숲에 걸려 있다. 서너 리를 가자 달이 다시 밝아지고, 사방의 산들이 온화하고, 하늘의 빛은 씻은

듯하다. 나는 길게 시를 읊조려 마지않았는데, 구름 속으로 솟구치고 바람을 몰아 내달리는 상상이 들었다.

소도리점素逃里店에 이르자 밤은 이미 삼경의 때였다. 모두 20리 길을 갔다.

 

 

 

 

 

 

 

태백산 太白山

 

강원도 영월군과 태백시 및 경상북도 봉화군에 걸쳐있는 해발고도 1,567미터의 산으로 태백산맥의 주봉이며

북쪽의 황지黃池는 낙동강의 원류다. 이 산은 명산으로 알려져 망경대望景臺에 태백산사太白山祠, 소도동所道洞

에 단군 성전이 있다. 위쪽의 함백산을 포함한 일대는 태백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때 자장이 창건한

정암사淨巌寺와 홍제사弘濟寺 등 고찰이 있고 봉화 쪽에는 조선시대 사고史庫 중 하나인 태백산사고가 있다.

 

 

 

1735년(영조 11, 을묘)에 이인상(1710~1760)은 태백산을 3일 동안 유람하고 수필을 남겼다.

위의 글은 각화사覺華寺를 출발하여 천왕당을 거쳐 소도리점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인데, 태백산의 설경을

활동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이인상은 그림에 뛰어난 문인이었으니, 그의 이 유산록은 정말로 혀끝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왕당으로 향할 때 매몰찬 산등성을 앞으로 전진하는 산행의 모습은 견인불발

堅忍不拔의 정신 경계를 드러낸다. 천왕당을 벗어나 소도리점으로 향할 때 사방의 산들이 온화하고 하늘의 빛이

씻은 듯한 광경은 고난을 극복한 후의 평온한 심경을 반영한다. 

 

 

이인상은 소도리점의 점인店人 남후영南後榮의 말을 빌려 태백산의 승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백산은 세 로路, (도),  열두 고을에 걸쳐 서려 있다. 동북쪽으로부터 관동에 걸쳐서는 강릉 · 삼척 · 평해 ·

영월 · 정선이 이 산과 접한다. 그 가운데 삼척의 소나무는 덧널(관을 넣는 곽)로 사용할 수 있고, 인삼도 아주 좋다.

남쪽으로는 안동 · 봉화 · 순흥 · 영천 · 풍기 등 영남의 고을이 있다. 그 가운데 봉화는 사각(태백산사고)이 중요하다.

부석浮石이라는 사찰은 남방에서 가장 유명한데, 실은 순흥에 위치한다. 호서의 고을도 넷이나 접해있다. 그중

영춘永春은 태백산의 서쪽 가지에 있다.

 

 

 

 

 

 

 

태백산의 봉우리로는 천의天衣 ·  상대上帶 · 장산壯山 · 함박含朴이 높고 강물로는 황지黃池 · 공연孔淵 · 오십천

五十川이 있다. 태백산 신령 천왕은 황지의 신이다. 함박은 모란을 뜻한다. 아주 고운 산으로 소뢰현素耒峴에서

가장 조망하기가 좋다. 장산의 북쪽은 순전히 흙이고 남쪽은 순전히 바위로 보물이 난다. 황지의 물은 줄거나 더

하는 법이 없고, 공연에는 용이 있다. 강은 하나의 물 흐름이면서 오십 구비에 걸쳐 있어서 오십천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쓴 이인상은 본관이 전주이고, 호는 능호凌壺 혹은 보산자寶山이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 천보산天寶

山 아래서 태어났으므로, 호를 보산자라고 하였다. 서울 남산에 있는 집은 능호관凌壺觀이라고 당호를 붙였다.

이인상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1585~1657)의 고손이지만 증조부 이민계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음보로 한양의 북부 참봉을 지낸 후, 내자시 주부와

경상도 사근역 찰방을 거쳐 1750년에 음죽현감이 되었다. 1752년 관찰사와 불화가 있어서 현감 직을 사퇴한 후,

단양의 구담에서 지냈다. 그 후 음죽현 설성雪城에 종강모루를 짓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일생 궁핍하고

은 병약하였으나 성격이 고결하고 강직하였다. 

 

 

이인상은 노론의 명유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특히 이윤영李胤永(1714~1759) · 오찬吳瓚(1717~1751) · 송문흠

宋文欽 ·  김무택金茂澤 등과 가깝게 지냈다. 노른의 과격한 지식인으로서 의리 존중의 의식이 강하였다. 벗 이

윤형은 명나라에 대한 절의의 뜻으로 은둔하였고, 벗 오찬은 반대당인 소론을 심하게 징계할 것을 주장하다가

귀양을 갔다. 이윤형은 시 · 서 · 화 삼절로 추앙받았으며 전서도 잘 쓰고 전각도 잘하였다. 그림은 18세기 남종화

에서 강세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분지법粉紙法을 잘 이용하였다. 분지법이란 쌀가루를 탄 물에 종이를 축여 다듬

질해서 종이 빛을 아주 깨끗하고 곱게 만든 다음, 딴 종이로 난초와 댓잎사귀처럼 오려 그것을 분지 위에 놓고 먹

이나 혹은 여러 가지 채색을 지면紙面에 뿌려서 무늬가 아른거리게 하는 방식이다. 또 메마른 갈필선渴筆線을 잘

사용하였고, 담채와 선염渲染에 뛰어났다. 그 화풍은 이윤영과 윤제홍 등에게로 이어졌다. 현재 60여 점의 유작이

전한다. 소도리점에서 묵은 다음날 이인상 일행은 겨울 산의 풍광을 만끽하였다. 또한 함박치의 주지周池가 지닌

기이한 영통성에 관심을 보였다.

 

 

다음 날 남생(소도리점 점인 남후영)을 데리고 점사의 문을 나섰다. 바람이 맹렬하고 눈발이 일어나며, 들판의 쌓인

눈이 모두 일어나 구름과 안개로 뒤엉켜, 천지사방이 아득해서 걸음이 한 자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주고받는 말

이 통하지 않는다. 20리를 가서 황지에 이르자 비로소 갰다. 사방 끝을 둘러보니, 들판이 10리에 평평한데 못이 그 가

운데에 모여 있다. 실로 전체 산의 한가운데로, 함박치가 그 서쪽에 있다. 넓이는 고작 반 이랑 정도이고, 모습은 호박

에 구멍을 뚫어둔 것 같아서, 속은 널찍하고 바깥은 오그라들어 있다. 땅을 울리기를 세 丈이나 하는 것이 주지周池인

데, 겨울철이 아니면 걸어서 가까이 가려고 하는 자들이 없다. 샘물은 산의 배 위에서부터 솟구쳐 나와 쌓여, 색은 칠흙

같고 시리기는 얼음 같다. 대개 어룡이 거처하지 않는 곳인데도, 예로부터 예측할 수 없이 신비하다고 한다. 만일 그 물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바람의 괴변이 한 해 내내 계속되어 사람들이 편안할 수가 없다. 아마도 신명한 신이 있어서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고 가뭄에도 줄어들지 않으며 장맛비에도 보태지는 것이 없는 듯하다. 정성定性과 정도定度

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물이 남쪽으로 넘쳐흘러서 공연孔淵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진다. 첩첩 산을 뚫고 지나

는 것이 100리이고, 바다로 조회하는 것이 1,000리이니, 그 물 흐름이 대단히 길다. (중략)

 

 

이윽고 채색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 송림에 은은하게 비치니, 어른어른하고 번쩍번쩍하여 마치 자개 같기도 하고

무지개 같기도 하여, 한참 동안 변하지 않았다. 대개 산이 아주 높아서 낙조가 아래에 있으면서 그 빛이 거꾸로 위로

닿아서 현란한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두 기슭의 바위는 어룡의 등지느러미 같아 가지런히 촘촘하게 우뚝 솟아서,

서로 견제하는 듯하다. 그 물은 공연에 합한다고 한다.

 

 

이인상은 태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평하였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되었으므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100리에 달하므로 그 공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대인大人이 내면의 덕(中德)을 지닌 것과 같다.

 

 

 

이윤영은 이인상의 글씨를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다" 라고 평하였다.

한편 이덕무는 이인상의 「금강산」이란 시에 나오는 "만 줄기 계곡물은 다투어 명월을 담아 쏟아지고,

일천 봉우리는 맑은 구름 따라 날아가려고 하네" 라는 구정이 정말로 상쾌하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이윤영의 평어는 비단 글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평론으로도 삼을 만 하다고

하였다. 이인상은 글씨나 그림이나 모두 상쾌한 맛이 있으며 「태백산 유람기」도 그러하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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