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지(法泉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48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명봉산 소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등의 문헌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법천사(法泉寺)는 신라 말인 8세기에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重創)된 사찰이다. 화엄종(華嚴宗)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法相宗)의 고승 정현(鼎賢)이 주지를 맡아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다.
특히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초년(初年)에 수학하고 은퇴하여 머물다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유방선(柳方善)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으며,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여기 모여 시를 읊고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하였다.
금당(金堂) 터와 탑비전지(塔碑殿址)
명봉산鳴峰山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 620미터의 나즈막한 산이다.
치악산 남태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이 가라파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휘어져 백운산과 덕가산을 이루고,
그 여맥이 북쪽으로 이어나가 원성군 문막면의 동편에서 솟은 산이다. 메나동과 동화골로 흐르는
계곡이 좋고, 북서쪽의 간현이나 관대역에서 바라보는 원경이 훌륭하다.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국보 제59호-
고려 문종24년(1070년) 지광국사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럽고 단아한 필체로 썼으며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허균許筠, 「원주 법천사 유람기遊原州法泉寺記」
원주의 남쪽 50리에 비봉산飛鳳山이라는 산이 있다. 그 산 아래 법천사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나는 일찍기 듣기를,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선생이 그 절 밑에 살자, 길창군吉昌君(권남權擥의 봉호)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의 봉호) · 사가四佳(서거정徐居正의 호) · 삼탄三灘(이승소李承召의 호) · 화중和仲(성간成侃의
자字)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배워, 이 절에서 학업을 익혀 혹은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고
혹은 공적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한다. 절의 이름이 이로 말미암아 드러났으니,
지금도 사람들이 태재가 옛날 가르친 터가 어디인지 지적할 수 있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그 북쪽 10여 리쯤에 장사 지내졌으므로 나는 매년 한 번씩 가서 성묘하였으나, 법천사라는 곳에는
아직 가본 적이 없었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왔는데, 얼마 있다가 마침 지관이란 승려가 묘암墓庵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러면서 기축년(1589, 선조 22)에 법천사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유람의 흥취가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는 꼭두 새벽밥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두멧길을 따라 험준한 곳을 어렵사리 거쳐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에 이르렀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봉우리 넷이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하고, 개천 둘이
동쪽과 서쪽에서 흘러나와 계곡 어구에서 합쳐 하나로 되었다.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으나
난리 중에 불타고 남은 터의 무너진 주춧돌은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있다. 살펴보니 고려 승려 지광智光의 탑비塔碑였는데,
문장이 심오하고 필력이 굳세었다. 누가 짓고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나,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기를 한참 동안 하고는 탁본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스님은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거처하던 소위 선당禪堂이란 곳은
지금 확인하려 해도 가려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서로 한참 탄식하였다. 절의 동편에 석상과
자그만 비석이 있다. 가서 살펴보니 묘가 셋인데 모두 표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본조本朝(여기서는 조선을 기리킴)
의 정승 이원의 모친을 모신 분묘요, 하나는 태재 유방선의 묘인데 그 아들 승지 윤겸이 뒤에 묻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원의 부인은 곧 나의 선조 야당埜堂 선생 이금李錦의 따님이시라오. 나는 듣기를, 이 정승이 처음에
그 모친을 장사할 때 술자術者가 '그 땅에는 왕기王氣가 있다' 고 말하였는데, 끝내 이 때문에 죄를 얻었으므로 자손들
이 감히 뒤따라 묻히지 못했다 하오. 태재는 그분의 사위이시니, 이곳에 거주하신 것은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게요. 그리고 끝내 곤궁한 처지로 죽었기 때문에 여기에 묻힌 것이 아니겠소?
다만 연대가 하도 오래되어 알 수 없구려."
그리고는 서성이면서 위를 쳐다보고 또 아래를 굽어보며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지관에게 또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에게 궁달窮達과 성쇠盛衰가 있는 것은 실로 운명이오만, 불후의 명성이란 것은 그런 데 있지 않지요.
이원은 좌명공신으로서 정승의 지위를 차지하여 부귀와 권총權寵이 일시에 자자해,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며
추종했건만, 끝내 이 때문에 기휘忌諱를 당하여 버림받아 죽고 말았소. 유윤겸은 정헌왕(세종대왕)을 섬겨 시종신이
되어 대궐을 출입하며 여러 번이나 거룩한 은총을 입어 마침내는 왕명의 출납을 맡기에 이르렀으니, 귀하게 되었
다고 할 만하오. 태재는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도 가환家患으로 인하여 그 몸이 금고禁錮되어 한참 곤궁할 때에는
배옷조차도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허구한 날 끼니는 걸러서 도토리며 밤 따위을 주워 자급하면서, 산중에서
여위고 시들어 가서 남은 일생을 마쳤다오. 지금 태재의 시를 보면 맹참모孟參謨와 가장강賈長江과 같으니, 얼마나
궁핍하고 가난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오. 위의 두 분에 비교하면 영달과 초췌의 차이가 어떠하다 하겠소만,
오늘날까지 수 백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태재의 글을 외며 그 인품을 상상해 마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보잘것없는 산과 촌스런 절이라 우람하고 화려한 구경거리도 아니거늘 역시 이것들도 세상에 소문이 나고
《여지승람》에 실려 전한다오. 저 두 분의 화려하고 드날리던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소?
비단 그 육신만 매몰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은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조차 모른다오.
그렇다면 일시에 이득을 누리는 것이 어찌 만대에 이름을 전하는 것보다 낫겠소?
만일 후세 사람들이 취사 선택한다면 전자를 고르겠소? 후자를 고르겠소?"
지관은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공의 말씀인즉 옳습니다. 다만 '천추만세토록 이름이 남는다지만 몸은 죽어 적막하여라' 라는 두보의 시
「이백을 꿈꾸며」가 있고, 옛사람 가운데는 또한 명성이 누가 된다고 하여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
자도 있었으니,대체 그것은 유독 무슨 마음에서였을까요?"
나는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것은 그대 불가의 교리라오."
그리고는 서둘러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돌아왔다.
기유년(광해군 원년, 1609) 9월 28일에 쓰다.
높이 455㎝로서 비면 주위에는 아름다운 국화문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양쪽에는 각각 두 마리의 나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양각으로 조각하였는데,
이는 11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비석 뒷면의 음기(陰記)
84세(1067년)에 이른 지광국사는 자신의 생이 다했음을 알고 출가동진했던 법천사로 돌아와
그해 10월 23일 열반에 들었다. 이에 문종은 시호를 지광(智光), 탑호를 현묘(玄妙)라 내리고
비문을 지으라 명하니 그것이 곧 지광국사 현묘탑과 탑비인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잊혀짐이 두렵기 때문이리라.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름이 썩지않기를 기원하였다.
하지만 인격을 완성하여 덕을 세우거나, 국가 민족을 위해 큰 공을 쌓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래서 글 공부한 사람들은 큰 이념을 담은 저술을 하여 말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허무를 딛고 일어설 것인가? 그 고민이 위에 글에 담겨 있다.
원주는 고려 말 원천석元天錫(1330~?)이 이성계의 조정에 서지 않고 은둔하였던 곳이다.
이방원은 어려서 원천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즉위한 후 그의 집을 찾아가자 그는 담을 넘어 달아났다.
그 이후로도 원주에서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었는데, 대개 은둔객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웃사이더의 전형이라고 할 허균(1568~1618)이 원주 비봉산(명봉산)을 찾아 그곳에 은둔하였던
조선 초기의 문인 유방선(1388~1443)의 삶을 추모하였다. 유방선의 호는 태재泰齋이다.
허균은 조선시대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불복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아버지 허엽許曄(1517~1580)은 서경덕의 제자이자 동인의 영수로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형 성宬과 봉篈은 재사요, 누이 난설헌은 재녀였다. 그러나 그가 12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20세 초반에는
중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의 죽음을 보아야 했으며, 24세 되던 때에는 임진왜란 와중에서 아내와 첫아들을
떠나보내야 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사상이 진보적이어서
예교의 속박을 벗어나는 행동을 자주 하였다.
허균은 1597년 3월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그해 8월에 중국에 다녀왔다.
1599년, 병조좌랑에서 황해도도사로 나아갔으나 '기생을 이끌고 다니고 무뢰배들이 드나들게 했다' 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2월에 파직되었다. 「파직 소식을 듣고서」라는 시에서 그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예교가 어찌 나의 방달함을 구속하겠는가, 뜨고 가라앉는 것을 다만 정에 맡겨 하겠노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지켜라, 나는 내 뜻대로 살아가리라. 가까운 벗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처자들은 불평의 마음을 가지지만,
나는 좋은 일이 생긴 듯 즐거워하나니, 이백과 두보처럼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되었잖나."
34세 되던 1601년의 8월에는 부인 김씨가 죽었다.
37세에 수안군수로 있었고, 1606년에 원접사 유근柳根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안내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1609년(광해군 원년) 1월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내정되고, 6월에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9월에는 형조참의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불교를 숭상하고 경박한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자주 탄핵을 당했다.
그가 비봉산의 법천사 터를 지관 승려와 함께 찾은 것은 형조참의가 되어 조정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다.
이 유람에서 그는 인간세계의 영욕榮辱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까 회의하였다.
허균은 태재 유방선의 삶을 유방선의 장인 이원, 유방선의 아들 유윤겸과 대비하여 보면서,
인간 삶에서 불우함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사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은 본관이 철원이다. 정몽주의 문인인데, 고려와 조선에서 벼슬을 하였다.
세종조의 재상이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그가 탄핵을 받은 것은 노비 문제
때문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허균의 이 글을 보면 다른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즉 이원이 모친을 장사할 때
술자가 '그 땅에는 왕기가 있다' 고 말하였기 때문에 죄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권세를 부리다가 기휘(해서는 안 될 말)를 범한 모양이다.
유방선은 이원의 사위이고, 유윤겸은 유방선의 아들이다.
그는 본관이 서산瑞山으로 1388년(고려 우왕 14) 송도(개성)에서 태어났다. 부친 기는 대학자 목은의 외증손으로,
태종 즉위년에 삼등공신에 꼽히고, 좌산기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유방선은 18세 되던 1405년(태종 5)에
국자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하지만 민무구의 종지제거 음모에 부친이 연루되면서 고통을
겪는다. 당시 22세이던 유방선은 청주에 유배되었다. 12월에 민무구의 극형이 결정되고, 이듬해 정월, 유기는
해진海珍에서 사약을 받게되고, 2월에 유방선은 영천(영주, 영양)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40세 되던 세종 9년
1472년 7월, 특별 사면으로 19년 만에 풀려나자 다음해 3월, 원주 법천의 명봉산 기슭에 있는 별장으로 이사하였다.
법천은 처가의 선산이 있는 곳이었으니, 당시에는 처가의 재산을 사위가 물려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그에게 보내어 시문을 공부하게 하였다. 12월 4일 마침내 경외종편(서울 바깥의 편한 곳에 거처할 것)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유방선은 1431년 10월, 아직 영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이끌고 법천으로 이주하였다.
그때의 심경은 칠언율시 「신해 시월에 가족을 이끌고 법천 촌집에 이르다」에 잘 나타나 있다.
시골에 돌아와 문 앞 세 길은 풀에 묻히든 말든
남창에 편히 기대 앉아 도체道體 양성이 넉넉하다.
출처 문제는 한유韓愈의 글을 다시 보아 깨우치고
풍류는 왕유王維의 망천장輞川莊 그림에 못지않다.
마을 깊어 감과 밤이 책상머리에 쌓이고
물 가까워 고기와 새우가 주방에 들어온다.
거친 밥과 탁주로도 하루를 보낼 만하니
궁하면 통한다는 이치를 소옹邵雍에게 묻노라
1443년 54세로 죽기까지 유방선은 법천에 살면서 시문을 강의하였다.
민무구 옥사는 고려 구족과 건국 훈족들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구족이었던 서산 유씨는
이 옥사를 계기로 도태되고 말았다. 유방선의 아들 유윤겸과 조카 유휴복은 1455년 8월 상소하여 겨우
과거 응시의 윤허를 얻었다. 유휴복은 세조 6년인 1460년 급제하여 교리의 관직에 이르렀고, 유윤겸은 세조
연간에 생원, 진사 양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어섰다. 유윤겸은 성종 때 대사간에 이르렀지만
가문을 중흥시키지는 못하였다.
자유를 추구했던 허균은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나 개성을 중시하였으며 사대부 질서에서 소외된
서얼들의 처지에 동정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 5년인 1613년에서 서자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佑英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일곱 서자 사건이 일어나자 허균도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곧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 서익의 서자 어양갑, 평난공신 박충간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7명은 허균과 이사호를
비롯하여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 라고 일컬었다.
이들은 광해군에게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당하자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화적질을 하다가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그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대북파의 이이첨과 심복 김개 · 김창후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 정항 등과
모의하여 서얼 출신 화적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자백을 얻어내고, 일곱 서자의 한 사람인 박응서
로 하여금 비밀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박응서은 자신들이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군자금
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하게 해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그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도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축옥사'라고 한다.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세상과 불협화음을 빚어내던 허균은 결국 반역죄로 처형되고 말았다.
당대에는 불우하였지만 그의 시문은 오늘날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그가 지관 스님의 입을 통하고
두보의 시구를 빌려 말했듯이 "천추만세토록 이름이 남는다지만 몸은 죽어 적막하여라"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 삶은 참으로 덧없기만 하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인들의 유람록 <인왕산> (0) | 2021.06.09 |
---|---|
선인들의 유람록 <북한산> (0) | 2021.06.08 |
선인들의 유람록 <태백산> (0) | 2021.06.03 |
선인들의 유람록 <치악산> (0) | 2021.06.03 |
선인들의 유람록 <오대산> (0) | 2021.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