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鄭敾, <세검정洗劍亭>, 18세기, 23×62.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검정의 기둥과 난간, 처마의 테에 붉은색을 칠한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조선 후기 서울 선비들의 유관遊觀 장소로 대표적인 세검정을 그렸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정자가 있는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咽喉 : 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 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도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산과 백운산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탕춘대(蕩春臺)라는 언덕이 있었고, 부근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래의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丁若鏞)의
〈유세검정 遊洗劍亭〉이 있다.
이덕무李德懋, 「북한산 유람기記遊北漢」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사찰 11개와 암자 · 누각 · 정자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못 본 사찰은 봉성사와 보국사이다. 승려는 "이것들은 사찰 중에서
최하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남복수南復秀의 자), 와 여수汝修(남홍래南鴻來의
자) 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다. 시는 모두 41편을 지었고, 암자 · 사찰 · 정자 · 누각에는 각각 기記를 지었다.
이 산은 대개 백제의 고도로서, 우리 왕조의 선왕 때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으로
삼은 곳으로, 서울에서부터 떨어진 거리가 30리이다. 문수문으로 들어가 산성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영조 37, 1761 9월 그믐날이다.
◈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바위를 따라 올라가니 정자가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빛이고,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간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이다.
왼쪽에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 라 새겨져 있다.
◈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세 개의 석불이 앉아 있다. 예로부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만 보았고 감실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스님은 정화淨和라고 한다.
◈ 문수사文殊寺
오후 늦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에 이르러 있는 듯하다.
불감佛龕이 큰 석굴에 마주하여 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 오듯이 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어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00개의 돌로 만든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두어 옹글옹글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인데, 혹은 문수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이고 옥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대가 있어서, 칠성대라고 이름 한다
여기에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에 들어갔다.
◈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 · 소나무 · 삼나무
가 많다. 휑뎅그레하여 골짜기는 메아리가 잘 울리고,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한다. 마침내 보광사의 법당
에 이르렀다. 오른쪽에 조정藻井(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 모양의 그림을 그려 넣은 천장)이 있고, 거기에
세 사람의 성명을 크게 써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벽실에는 창 · 칼 · 활 ·
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황혼 무렵에 태고사에 이르러 투숙하였다.
◈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 국사 보우普愚의 비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고려말의 승려)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따졌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佛價로서 탁월하게 지절志節이 있는 자이다. 입적하자 100개
의 사리가 나왔는데 부도浮屠를 세 개 만들어서 저정하였다. 비음碑陰(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가 옥좌에 오르기
전의 벼슬과 성명이 적혀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 라고 되어 있다. 상上(영조)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글을 조금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로 향하였다.
◈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에서도 동쪽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 · 만경봉 · 노적봉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과 용암봉은 작은 것이다.
◈ 증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서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절이 있어서 이름을 중흥사라 하는데
고려시대에 세운 것이다. 11개의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크다. 앉아 있는 금불은 한 길丈이 넘는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부를 창설함)하여 주둔하고, 팔도의 승병을 영솔하는데, 이름은 '궤능軌能' 이라 하고
직책은 '총섭總攝' 이라 한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서쪽으로 가면 나무숲이 하늘을 가려 어둑하고 시냇물은 맑고도 콸콸 소리를 낸다.
큰 돌이 많아서 갓 같기도 하고 배 같기도 하다.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 같으나 그쪽보다 더 그윽하다.
◈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곳과 짝하기 어렵다. 임진왜란 때 승장이었던 사명대사의 초상이 있는데, 서안에 의지하여 백주미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쥐고 있다. 모발은 밀어 없앴으나 배를 지나는 긴 수염은 남겨두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이어져 있다. 마리산摩尼山 등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
크기만 하다. 나한봉이 있어서, 우뚝한 모습이 마치 부처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시대에 3,000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그것에서 '삼천승동三千僧洞' 이라 이름 한다.
◈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한 길을 따라 북으로 가니, 세 길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백운동문白雲洞門' 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절 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골짝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다.
◈ 상운사祥雲寺
긴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기까지는 고개가 그 사이에 있는데, 그 고개를 적석積石이라고 한다.
해가 진 뒤에야 절에 이르러 밥을 먹고 묵었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 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누워 간다. 대개 고개의 좌우는 자못 넓고도 으슥하다.
◈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 가까운 곳에 큰 누대가 물과 바위의 교차지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일으키는 여울 소리와
솔숲에서 이는 소리가 휑뎅그레하게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을 만들어 낸다. 쏴쏴 하는 소리는 비 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해도 말소리를 분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절은 가장 낮은 데 위치하지만 아주
깨끗하고 툭 틔어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밥을 먹고 진관사로 향하였다.
◈ 진관사津寬寺
서문을 나서 10리쯤 가면 들에는 밭이 많다.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과 나무가 있다. 이 절은 고려의 진관대사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만 못하지만
불화佛畵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함은 뒤지지 않는다.
북한산
서울 도봉구 · 은평구 · 성북구 · 종로구 ·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836 미터의 산.
서울의 진산으로 화산華山 · 부아악負兒岳으로 불렸다. 서울 일원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백운대 · 인수봉 ·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며 우뚝 솟아 있어 일명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린다. 삼국시대에 이미 산성
이 있었고, 신라 진흥왕은 순수비를 세웠다. 현재의 성터는 조선 숙종 37년(1711)에 8킬로 길이로 쌓은 것이다.
이 글은 북한산의 유람기이되, 세검정 · 소림암 · 문수사 · 보광사 · 태고사 · 용암사 · 중흥사 · 산영루 · 부왕사
· 원각사 · 진국사 · 상운사 · 서암사 · 진관사에 대한 기記만을 묶어 두었다. 모두 14개의 기는 어느 것이든
간결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기마다 표제를 두어 전체를 개조식個條式으로 구성하였다.
다른 유산기들과는 매우 다른 문체와 구성이다.
실은 이 문체와 구성은 명나라 말 원굉도라는 문인의 유기遊記를 모방한 면이 있으나 글을 더욱 짧게 지었다.
그러면서도 감각적이다. 현대어 번역문보다도 한문을 보면 더욱 짧고 간명하며, 실은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소품小品의 산문 문체인 것이다. 그렇다고 원굉도의 소품문을 모방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 이덕무는 북한산에 편재해 있는 사찰과 국가 소유의 병영, 성곽 등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요령 있는 저술을
하였다. 기록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체계를 세워 적으려는 그의 저술 요령이 이러한 문체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이덕무로 말 할 것 같으면 조선 후기 지식인으로 간서치看書痴(독서광) 아니던가?
본디 북한산 일대에는 사찰이 많았다. 원효가 참선하였다는 바위굴에 덕암사德岩寺(원효봉 암벽 아래)
원효암元曉庵(원효봉 꼭대기)이 있고,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상운사와 참천사가 있다. 그리고
수태선사는 승가사, 도선국사는 도선사, 보조국사는 내원사, 보우국사는 태고사를 조성하였다. 고려 태조는
중흥사를 창건하고, 현종은 진관대사를 위한 진관사를 지었으며, 예종 때 탄연坦然은 문수사, 조선 중종 때
신원화상은 화계사를 세웠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조 될 때, 136칸 규모의 대사찰
중흥사를 비롯해서 11개의 절이 증축되거나 창건되었다.
"목멱산 아래 멍청한 사람이 있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졸렬한 데다 오로지 책 읽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겼다" 라고 말할 정도로 이덕무는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모양. 그는 풍열로 눈조차 뜨기 어렵고
동상으로 열 손가락이 터져도 책을 읽었고, 추운 겨울에는 <논어>를 병풍삼고 <한서>를 잇대어 덮고 잤다고.
이덕무는 정종의 별자 무림군의 후손이었다. 신분적 한계 때문에 일생 괴로웠지만 "티끌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더라도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책 읽을 여유를 가진 사람을 군자라고 하리라" 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가 쓴 여러 호들에도 '박문博聞(두루 공부함)' 과 '소심익익小心翼翼(늘 삼가고 조심함)'의 뜻이 담겨 있다.
이덕무는 독서를 작의 몸에 시험하여 그 효험을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공령문攻令文(과거 시험의 문체)에 사용하려고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논술시험이나 잘 보기 위해서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글을 읽어서 아첨하는 태도나
짓는 자를 누구나 사랑하다니 슬프다." 이덕무는 이렇게 상식이나 자랑하려는 공부를 싫어하였다.
상식 자랑의 공부를 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 한다. 귀로 들은 것을 입으로 내뱉어 과시하는 공부라는 뜻이다.
이덕무가 가장 배격한 것이 구이지학이었거는, 그의 독서를 두고 마치 룸펜이나 페인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이덕무를 위해 슬퍼할 일이다. 박지원은 <형암행장>에서 이덕무를 평하기를 "유학자를 자처하지 않았으나
일상의 행실을 삼가 정주程朱(정이 형제와 주자)의 문호를 지켜 조금도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며, 문장을 이룸에는
화려함을 힘쓰지 않고 말과 뜻이 잘 통하게 하며, 조리 있고 간결하기로 일가를 이루었다" 고 하였다.
필자미상, <금란계첩金蘭契帖>, 1857년, 27×4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계첩은 1857년 안시윤安時潤이 음력 3월에 여러 벗들과 북한산 중흥사에서 모임을 갖은것을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림은 승려와 문인들이 함께 어울려 있는 광경을 담았다.
승려들과의 교유를 화폭에 담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 동진 때 도연명이 여산의 동림사 승려 혜원과
어울렸던 고사를 의식하여 탈속의 경지를 부각시킨 듯하다. 안시윤은 고종 때 보령현감으로 마쳤다.
이덕무는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영구히 전할 총서를 집필할 계획을 세워 독서에 매진하였다.
곧, 이덕무 민족문화총서를 간행하려는 방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백과사전적인 지식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던 지성사의 맥을 이은 것이다. 이덕무가 독서를 하고
메모를 하였던 것은 인간과 역사(현실)를 이해하려는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이었다.
이덕무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주체의 성숙과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책을 읽었다. 도덕적 이상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베꼈고, 민족문화와 관련된
중국 기록들을 필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서치 이덕무의 본 모습인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북한산, 즉 삼각산을 각별히 사랑하여 많은 헌사를 바쳤다.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삼각산 유람기遊三角山記」는 이른 시기의 글이다.
그는 금강산에서 돌아온 후 오히려 마음이 쓸쓸해서 즐겁지 않았다.
당시唐詩에서 "현산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마치 고향 사람과 헤어지는 듯해라" 라고 했던 그런 마음을
경험 한 것이다. 한 해가 넘도록 예조에서 문장으로 응접하고 있노라니 더욱 뜻에 맞지 않았다. 연거푸 세 번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그때 삼각산 중흥사의 승려 성민性敏이 사미승 천민天敏에게 펼지를 들려 보냈다.
"산속에 늦서리가 내렸습니다. 단풍잎이 정말 붉답니다. 며칠 지나면 시들고 말 것입니다.
뜻이 있으시면 한 번 오시지요.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표연히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월사月沙는 곧바로 간단한 행장을 갖추었다.
신응구申應榘(1553~1623)에게 편지를 내어 피리 부는 하인 억량億良을 대동하고 홍제동 다리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1603년(선조 30, 계묘) 9월 15일이다. 사미승 천민이 길을 인도하고,
자신과 아들이 각각 술 두 동이를 지고 갔다.
그렇다 삼각산 유람은 '표연히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북한산 유람을 하루 사이에 즐길 수 있는 일흥逸興으로 여겼다.
이덕무보다 앞서 송상기宋相琦(1657~1723)는 어느 해 9월 초하루, 창의문을 나와 탕춘대를 찾았다.
북한산 유람은 대개 탕춘대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무계武溪의 일만 그루 소나무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탄하였으나 북한산의 여러 승경들이 얼마나 빼어난지 하나하나 묘사하였다.
1707년(숙종 33, 정해) 중춘, 이익李瀷(1579~1624)은 북한산을 유람하고 삼각산 유람기를 남겼다.
곧 2월 17일(경자일)에 집을 출발하여 다음 날 동소문을 거쳐 조계동에 들어가 조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 다음 날 북한산을 유람하였다. 새벽에 석가령을 넘어 삼각산 여러 봉우리를 조망하고 중흥사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은 후, 백운봉에 오르려 하였으나 얼음이 녹지 않아 가지 못하고, 내성의 남은 터를 따라가며
석문을 구경하고 길을 바꾸어 문수암으로 들어갔다. 다시 문수암의 오른쪽 등성이에 올라가 서해를
조망하고 절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보현봉에 올라가 왕성을 굽어본 후 정오에
탕춘대를 따라 내려와 도성의 북문을 경유하여 돌아왔다.
18세기 초 문인화가로 저명한 강세황姜世晃은 포의 시절에 탕춘대에서 벌어진 사대부들의 봄놀이에 참여하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축軸으로 만들었다. 이익李瀷이 그 시축에 서문을 써서 "탕춘이란 도성 북문 바깥의 승경지
인데, 우뚝 솟은 산은 아스라하고 흘러가는 시내는 넘실대며, 또 새로 정자를 얽어서 단청이 으리으리하니, 가히
삼절三絶이라 할 만하다" 고 하였다. 영조 말에 박지원 · 홍대용 · 박제가 · 이덕무는 승가사에 올라 북한산과 조계
를 유람한 일이 있는데, 그때의 유람 사실을 박제가는 장편 고시로 기록하였다. 정약용은 1794년 9월 18일과 19일
에 둘째 형 정약전 · 문학적 스승 윤지범 · 친구 윤무구 · 이휘조와 함께 북한산성에서 세검정에 이르는 길을 따라
산수를 구경하고 곳곳에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들만 아니라 여항 문인들도 북한산을
즐겨 찾았다. 이를테면 홍세태洪世泰는 "어제는 벽련봉, 오늘은 적취대. 두 산 사이에서 노니니, 봄 흥취가
유유해라" 라고 하였다. 그는 여항 친구들과 더불어 백련봉 · 적취대 · 중흥동 · 중흥사 · 북한산성 ·
승가사 등 북한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시회를 즐겼다.
정조의 문체순정 정책 때문에 배척을 받아 불우했던 이옥李鈺(1760~1812)이라는 문사는 젊은 시절의 어느 해
음력 8월, 멋진 절기에 멋진 친구들과 함께 멋진 승경지인 중흥사에 올랐다. 중흥사는 삼각산 서남쪽 중흥동에 있으며
천석이 그윽하고 아주 맑았다. 중흥사 아래 산영루도 현재는 초석만 남았지만 당시는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이옥은 기록을 엮으면서 중흥사 자체는 전혀 언급치 않고 북한산 승경들을 개괄하였다.
바람이 메말라 까실까실한 느낌을 주고 이슬이 깨끗하여 투명하게 하는 것은 8월의 멋진 절기이다.
물은 힘차게 운동하고 산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 북한산의 멋진 경치이다. 개결하고 운치 있으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두세 사람이 모두 멋진 선비이다. 이런 사람들과 여기에서 노니니, 그 노니는 것이 멋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동紫峒을 거친 것도 멋지고, 문수사 수문에 올라간 것도 멋지고, 대성문에 임하였던 것도 멋졌다.
중흥사 그윽한 골짜기에 들어간 것도 멋지고, 용암봉에 오른 것도 멋지고, 백운산 아래 기슭에 임한 것도 멋졌다.
상운사 골짝 어구도 멋지고, 염폭簾瀑은 기막히게 멋지고, 대서문도 멋지고, 서수구도 멋지고, 칠유암은 극히
멋지고, 백운동문과 청하동문의 두 동문도 멋지고, 산영루는 대단히 멋지고, 손가장孫家庄도 멋졌다.
정릉동 어구도 멋지고, 동성東城 바깥 평사平沙에서 일단의 무리가 말을 내달리는 것을 본 것도 멋졌다.
사흘 만에 다시 도성에 들어와 취렴방翠帘坊 저자에 붉은 먼지가 일고 수레와 말이 빈번하게 다니는 것을 보는
것도 멋지다.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역시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날이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 단풍도 멋지고 바위도 멋지다. 멀리 조망하여도 멋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멋지다. 부처도
멋지고 스님도 멋지다. 비록 좋은 안주는 없어도 탁주라도 멋지다. 절대가인은 없어도 초동의 노래라도 멋지다.
요컨대 그윽해서 멋진 것도 있고, 상쾌하여 멋진 것도 있고, 활달해서 멋진 것도 있고, 아슬아슬하여 멋진 것도
있고, 담박하여 멋진 것도 있고, 알록달록하여 멋진 것도 있다. 시끌시끌하여 멋진 것도 있고, 적막하여 멋진
것도 있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 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보지도 않았을게야."
이 글은 '멋지다' 라는 말을 중복 사용하였다.
경관을 대하여 느낌 감흥을 그저 '멋지다' 라는 말로만 표현하였다.
'멋지다' 라는 말의 반복은 독자를 점점 멋진 광경 속으로 인도하는 주술의 힘을 지녔다.
그렇다. 이옥은 이 글에서 언어의 주술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옥은 산문 문체의 모든 형식들을 이지러뜨리고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을 실험한 산문작가이다.
과거에 대비해 연습하였던 부賦도 산문의 문체로 훌륭하게 부활시켰고,
일반 민중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장첩)도
인간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허구적 요소를 지닌 산문으로 멋지게 사용하였다.
불경의 어조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일상의 삶에서 그저 매일을 반복 하다 보면 개성은 훼손되고 감정은 억눌리기 마련이다.
이옥은 삼각산 여행을 통해서 권위나 예교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내면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메말라 까실까실한 느낌을 주고 이슬이 깨끗하여 투명하게 하는 것은 8월의 멋진 절기이다."
음력 8월의 가을 공기를 얼마나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는가.
지금 삼각산은 우리에게 이런 감각적 인상을 허여하는가?
아니, 지금 우리는 삼각산에서
그런 감각적 인상을 얻어낼 만큼 자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있는가?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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