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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미상, <산수도山水圖>, 17세기 후반, 28.5×20.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봄 풍경을 그린 산수화이다. 푸른 도포를 입은 선비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고,
그를 향해 동자가 차나 약주를 들고 오고 있다. 실경의 묘사라기보다는
유유자적한 정신 경계를 상징적으로 그려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허목許穆, 「백운산白雲山」
백운산은 경기지역의 큰 산으로, 영평현 치소 동쪽 20리에 있다. 그 수동水洞에 와룡대가 있는데,
이것은 물속의 석대石臺로, 길이가 10장丈에 이른다. 물이 깊고 바위가 많으며, 강가는 모두 장송과 긴 협곡이다.
그 위에 사당이 있다. 10리에 걸친 강물이 산속에서 발원하며 양 기슭에는 흰 자갈과 짙푸른 소나무가 많고,
왕왕 너럭바위와 험준한 암석이 많다. 30리가 모두 그러하다.
깊이 들어가자 석장石場이 있어, 수백 명은 앉을 수가 있다. 강의 물은 그 바위 아래까지 이르러 와서 시내와
못을 이루며, 그 아래는 석만石灣(바위로 이루어진 물굽이) 이다. 석장을 지나서부터는 산이 더욱 깊어지고
물이 더욱 맑아진다. 골짝 가득히 소나무인데, 이 못에 이르러서는 물이 푸르고 깨끗하며, 피라미가 많다.
그 위가 백운사이다. 앞의 누대에 올랐더니 앞에 바위 봉우리가 마주해 있으며, 높은 벽이 시내에 임해 있다.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가 벽기壁記를 지었다. 신라 승려 도선이 처음 창건하였으니, 지금까지 800여 년이 지났다.
숭정崇禎 연간에 오대산 승려 색름賾凜이 중창하였다. 동쪽 구석에는 서역 승려 민敏의 부도가 있어 달을 맞이하
고 있다. 동쪽 창에서는 섬암蟾巖의 바위 봉우리가 바라보인다. 9월 12일 밤, 섬암의 석봉 위로 오르자, 앞 시내는
위아래로 반석이 많아 그 위에서 노닐 만하였다.
조계曹溪는 작은 고개를 넘어 5리 쯤에 있는데, 옛 선적禪寂(혹은 積으로 적는다)이다.
그 가장 고승이었던 도선의 부도가 있다. 산속의 바위 골짝으로 20리를 들어가자, 산이 깊고 길이 끊어져 다한
곳이다. 색름이 쌓은 것이다. 그 아래 반야(절)에 자휴自休와 색름의 부도가 있다.
섬암의 서쪽 기슭에 있는 보문사는 석민釋敏이 쌓은 것인데, 역시 아름다운 절이다.
종일 산 아래 사람들이 나무 열매 줍는 모습이 골짝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지난해 겨울, 화개花開에
이르렀을 때, 섣달부터 정월에 이르기까지, 눈이 쌓이고 지독하게 추워, 큰 나무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얼어 죽었다.
3월에도 꽃이 없었고, 2월부터 5울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고 열매를 맺지 않고 초목이 자라지 않아서, 산의 나무가
대부분 말라죽었다. 그러니 나무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백운산 남쪽의 화악은 경기와 관서의 경계에 있다. 수춘(춘천) · 동음 · 가평의 지역에 있으며, 둘레가 300리이다.
그 서쪽 기슭은 바위가 겹겹히 쌓여 높고 가파른 바위산이다. 그 절정에 이르러 시야가 닿는 데까지 바라보니,
구름과 안개가 대낮에도 흐릿하다. 사람들은 대개 두려워하고 벌벌 떨어 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한다. 날이 가물면
고을에서 많은 사람들을 징발해서, 그 꼭대기에 올라가 비를 얻는다. 봄과 여름의 교체 시기에 우레와 번개, 비와
우박이 크게 치고 내려, 천마산 박연朴淵에서부터 삭북 · 과말 · 지장 · 화적 · 삼부 · 학령을 거쳐 백운의 절정에
이르렀고, 맨 마지막에는 화악에 이르러 그쳤다. 산중 사람들은 용이 이동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백운산白雲山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904미타의 산.
화악산과 잇닿아 있다 강원도 북부지방에서 뻗어온 광주산맥이 광덕산에서 남쪽으로 계속 뻗어오다가
타라멜고개(광덕고개)에서 주춤하고 다시 백운산 - 도마치봉 - 국방봉 - 개이빨산 - 강씨봉 - 청계산 - 운악산으로
연면히 뻗어간다. 삼각봉에 오르면 왼쪽으로 암릉이 있어 백운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남인 정파를 이끌었던 허목(1595~1682)이 포천의 백운산을 유람하고 적은 글이다.
허목은 본관이 양천이고, 호는 미수眉叟다. 현감 허교許喬(1567~1632)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
(1549~1587)의 딸이다. 부인은 오리 정승으로 유명한 영의정 이운익李元翼(1547~1634의 손녀이다.
1626년(인조 4) 성균관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인조가 생부 정원대운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는 데 대해 박지계朴知誡(15673~1635)가 동의 하자, 박지계의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 당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경기도 광주 자봉산에서 은거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영동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후 상주 · 사천 · 창원 · 철원 등지를 전전하였고,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종 원년인 1660년(기해)에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여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송시열 등 서인은 맏아들과 중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1 년 상복)
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허목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종묘의 제사를 주재하여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계가 소란해지자 현종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새로 즉위한 숙종은 기해(1660) 복제가
잘못이라 판정하여 송시열 등 서인을 물리쳤다. 남인이 집권하자 허목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1675년(숙종 1) 덕원에 유배 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1610~1680)의 의견에 맞서
가혹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대립해서 청남淸南의 영수
가 되었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 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었다.
허목에게는 이인의 풍모가 있었다고 전한다. 허목은 허적의 아버지와 함께 어느 절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매월 보름이면 이무기가 나타나 중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허적의 아버지가 그 이무기를 탈로 죽이자,
이무기의 파란 기운이 허적의 집으로 뻗쳤다. 허목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하였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으나 셋째 아이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두었다. 허목은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의를 끊었다. 허적은 신동이었지만
결국 역적이 되어 가문에 화를 입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허목이 미래를 투시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알려졌기에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허목은 백운산을 유람하고 위의 글을 대단히 차분하게 적었다.
기후의 난조와 그에 얽힌 민간의 속설도 말하는 넉넉함도 보인다. 용의 조화라고 설명하는 민간 속설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일체 첨부하지 않았다. 사실의 기록에서 포폄褒貶을 가한다든가 기견己見을
삽입하는 식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허목은 경기도 동두천 동북쪽에 솟은 소요산소逍遙山을 유람한 후에 지은 「소요산 유람기」에서는 산에 위치한
소요사의 창건 연기에 관한 부분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시문을 직접 인용하였다. 그 인용의 방식에는 그의 평소
학적 태도와 지적 인식의 방법이 잘 나타난다. 우선 그는 소요사에서 벽기壁기를 전재하여 사찰의 연기를 밝혔으
며 목은 이색의 기記 가운데 일부를 적기摘記하여 벽기의 기록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였다. 하나의 사실에 이론
이 있고, 그 사실의 진위를 갑작스레 판정하기 어려울 때 이설을 병기하여 두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경전의 해석
에서는 그것을 궐의闕疑(의심스러운 것은 판정하지 않고 훗날의 재고에 맡김)와 병록幷綠(두 가지 이상의 이설이
있고 정설을 확정하기 어려울 때 이설들을 함께 실어둠) 이라고 한다. 허목은 진지한 학문 연구에서 사용하는 굴의
와 병록의 방식을 유람록에 전용한 것인데, 그만큼 주변 사물에 대해서도 탐구의 정신, 객관인식의 태도를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원효정元曉井에 관해서는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시를 완전한 형태로 인용하였다.
이규보의 시에는 소요사를 원효가 지었다고 하였고, 원효가 거처하여 단물이 돌구명에서 솟아났다는 전설이
반영되어 있다. 그 시를 인용함으로써 비록 이색이 지적하였듯이 여러 가지 사실 관계가 맞지는 않지만, 소요
사와 원효정 등의 유적이 원효와 관련이 있다는 설을 지지한 것이다. 다만 그러한 지지의 논평을 가하지 않고,
읽는 이들에게 판단을 맡겼다. 더구나 이규보의 시는 이색의 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므로 원효 관련 전설의
유래가 더 오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옛 설들에 대해 곧바로 주관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옛 설들
을 병기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자연히 우위의 설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곧 옛 것을 가지고 옛 것을 정정 하는 방법이 것이다.
허목은 유산기에서 다른 어떤 지식인들보다도 민간의 전설과 신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었다.
「백운산」에서 봄과 여름의 교체기에 우레와 번개, 비와 우박이 천마산 박연에서부터 백운의 절정을 지나 화학에
이르러 그치자 그것이 용이 이동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허목은 영평현 백운산에 대해 또 다른 글을 남겼다. 곧, 1668년(숙종 9 무신) 중추 15일에 쓴
「백운산수기白雲山水記」이다
용주공龍洲公, 조경이 편지를 연천으로 보내어 산수 구경을 같이 가자고 약속하셨다. 나는 일이 없었으므로,
편지를 받고서 아주 기뻤다. 그래서 손령蓀嶺으로 가서 공을 따라 백운산의 수석을 구경하였다. 손령에서부터
사당까지는 40리이다. 사당산 밑에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어, 들 언덕과 천석川石이 볼 만하다.
골짜기 어구에는 와룡암臥龍巖이 있다. 사당에서부터 백운사 까지는 30리이다.
개천가에는 흰 자갈과 우거진 소나무가 많이 있고, 험한 바위와 긴 여울이 드문드문 있다. 반석이 아주 넓고,
푸른 소나무 5, 6그루가 바위 위에 늘어서 있다. 냇물은 바위 밑으로 흘러서 깊는 곳은 못이 되고 얕은 곳은
물굽이가 되었다. 마당바위에서 동쪽으로 15리를 더 가니, 산은 더욱 깊고 물은 더욱 맑으며, 간간이 높은
절벽과 기이한 바위가 있다. 계곡 어구에 이르자, 못물이 프르고 깨끗하여 아주 아름다웠다.
백운사는 백운산 속의 옛 절로, 절의 남쪽 누각이 암벽과 마주해 서 있어서 너무도 기이하게 생겼다.
그 누각 벽에는 동주東洲 이학사李學士(이민구李敏求)의 '산루기山樓記' 가 있다. 개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돌 위로 흐르는 물이 아주 멀리 뻗쳤고 그 위에 조계사가 있다. 백운사에서 동북으로 5리를 올라가면 상선암이
있는데, 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석봉石峯이 둘러섰으며, 산은 깊고 골짜기는 먼데, 여러 봉우리에 떠 있는
산빛이 이 산중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 아래 옛날 견적사見跡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빈 터에 밭이 일구어져
있다. 밭 가에는 도선의 부도가 있는데 조각해 놓은 물상들은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아마도 천 년에 가까운
고적일 터인데, 돌이 닳아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백운사에서 서남으로 5리쯤 가면 보문사인데, 이 또한 훌륭한
절이다. 용주공은 <노춘추정의魯春秋正義>와 <주역>의 육십사괘효상六十四卦爻象과 괘서卦序를 손에 들고
있다. 이분은 오도吾道(유교)의 대종大宗이시다. 공은 지금 연세가 83세인데도 많이 보고 많이 외시면서 정력
이 쇠하지 않았으나, 나는 공보다 9세나 적으면서도 권태와 피로를 느끼는 것이 심하다. 그 미요한 말씀과 지극
하 이론을 들어 보면 모두가 사람을 깨우치고 사람을 교훈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한다.
금상 9년 중추 15일에 미수는 쓴다.
산의 유람은 산의 풍광만이 흥취를 북돋는 것이 아니다.
누구와 같이 가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매우 달라진다. 허목은 이날 조경(1586~1669)과 함께 백운산에 올라
유학의 경전인 <춘추정의>와 <주역>에 대하여 논하였다. 그는 당시 74세였는데, 조경이 83세인데도 정력이
쇠하지 않고 경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허목이 백운산 유람에서 체험한 내용은 노론의
문인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백운산 유람에서 체험한 내용과 상당히 다르다. 김창협은 숙종 때 남인의
집권으로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철원에 유배되자 영평의 응암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경신대출척으로 부친이
영의정에 배수되자 김창협도 대사성 · 대사간 · 승문원부제조 등을 거쳤다. 하지만 시국에 관한 상소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청풍부사로 좌천되고, 기사환국 때 부친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후명後命(사형)을 받자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응암으로 들어갔다. 김창협은 영평에 전장을 두고 있었으므로 백운산을 자기 집안의 외포外圃
(바깥 장포) 라고 불렀다. 김창협의 「백운산 유람기遊白雲山記」에 그러한 말이 나온다. 김창협은 어느 해
8월 무술일에 흥이 발하여 소를 타고 갔는데, 아악阿嶽은 말을 타고 따라왔다. 절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이
미 저물었다. 말과 소를 돌려보내고 백련당에 묵었고, 다음 낮ㄹ에 아침밥을 먹고 조계동에 들아가 폭포를
보고 태평동에 이르러 돌아왔으며 저녁에는 조계폭포를 구경하였다. 그 다음 날에는 상선암과 선유담을
구경하였다. 김창협은 조계의 아래에서 폭포를 쳐음으로 발견하고 환희하였다.
조계폭포로부터 3, 4리를 올라가면 시냇물이 두 길로 갈라졌다. 동북쪽은 태평암 부근에서 발원하여 오는 물이다.
김창협은 그 물이 흐르는 태평동에 주희朱熹의 운곡雲谷 고사를 본받아 은둔할 집을 두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세가 평평하지 않고 시내에는 잡석이 많아 경관이 흥성하지 않았으므로 그만두었다.
허목의 백운산 유람은 백운산을 자기 집 외포로 생각했던 김창협의 경우와 달랐다.
걸음걸음 조심스럽고, 눈에 마주치는 경관 하나하나를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하려 하였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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