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의립尹毅立, <산수도山水圖> 6면 중 1폭,
17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의립은 조선 중기의 선비 화가로서 역시 선비 화가였던 윤정립尹貞立의 형이다.
1594년 과거에 급제하여 의정부의 좌참찬을 지냈다.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물어서 이 《산수화첩》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 화첩은 실경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유산遊山의 흥취를 잘 담아내었다.
허목許穆, 「감악산紺嶽山」
9월 29일, 한산으로 송상사宋上舍를 방문하였다. 송상사는 나이가 여든 일곱으로, 우리 인조 임금께서 즉위
하신 2년에 과거 합격한 진사이다. 효종 때 여든 이상의 분들에게 작위를 내린 일이 있었으나 송상사는 작위를
받지 않았다. 머리가 온통 희고 바짝 마르고 키가 큰데, 산택의 유람을 즐겼다.
상사는 고조 · 조부 · 부친 3대가 모두 장수를 하였는데, 그것을 일러 한산 수고지세寒山壽考之世
(한산에서 장수하는 집안)라고 한다. 나와 함께 감악에 노닐었다.
저녁에 견불사見佛寺에 머물고, 새벽에 절정에 올랐는데 그늘진 벼랑에 급신정汲神井이 있다.
그 위에 감악사紺嶽祠가 있어, 석단石壇이 3장丈이다. 단 위에는 산비가 있는데, 하도 오래되어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곁에 설인귀薛仁貴 사당이 있다. 혹자는 왕신사王神祠라고 하니, 음사淫祠이다. 그 신이 능히 요망한 짓을 부려
화복을 가져오므로 사람들에게 제삿밥을 얻어먹는다고 한다.
산은 모두 석봉石峯이다. 절정은 2,300丈으로 시야가 아주 멀다. 그 동쪽은 마사산이고 그 바깥은 왕방산이며
그 바깥은 화악산과 백운산이다. 동북쪽은 환희대가 경기와 관서의 경계에 있다. 그 바깥은 고암高巖이니,
옛 맥貊 땅이다. 서북쪽으로는 평나산 · 천마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삼각산 · 도봉산이 바라보인다.
그 북쪽은 대강이다. 오강에서부터 아미 · 호로 · 석기 · 임진이 되며, 조강에 이르기까지 100리이다.
조강의 서쪽은 옛 강화이다. 강화는 서쪽으로 연평延平의 대양大洋이니,
실은 옛날 연燕나라 · 제齊나라의 앞바다이다.
신사神祠의 곁 산석 사이에 석굴이 있어, 돌로 만든 노자老子를 보았다.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뒤덮고 있으며 손을 모으고 있어서 마치 신통력이 있는 듯하다.
태사 사마천은 「노자열전老子列傳」을 짓고, 공자의 말을 일컬어 "새는 태가 그것이 능히 나는 줄 알고 물고기는
내가 그것이 능히 헤엄치는 줄 알며 짐승은 내가 그것이 능히 달리는 줄 안다. 용의 경우에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줄 알 수 없다. 내가 노자를 보내, 마치 용과 같도다" 라고 하였다.
노자는 주나라 주하사柱下史를 지냈다고 한다. 《사기정의》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나라 평왕 때 노자는 주나라가 쇠망하는 것을 보고 책을 저술하여 도덕道德에 관한 5천여 언을 말하고 떠났다."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경왕景王의 때에 해당하므로
평왕과는 열두 왕의 시대나 떨어져 있다." 그 전傳에는 이러하다.
"공자가 죽은 후 129년이다. 《사기》에 보면 주나라 태사 첨이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알현하여,
'진나라와 주나라는 합하였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가는 다시 합하였습니다.
합한 지 70년 만에 패왕이 나옵니다." 라고 하였는데. 그 첨이 바로 노자이다.
《사기색은史記索》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노자가 살았던 해로부터 공자의 때까지는 160년이다. 태사 첨까지는 200여 년이다."
대개 노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석기石記를 고찰하건대, 성화成化 4년에 등신상을 세웠다고 한다.
돌 위에 앉아 석이石耳를 채집하였다. 《본초本草》에는 "영지靈芝가 명산의 바위 벼랑에 난다" 고 하였다.
그 서쪽 석봉 아래에 운계사가 있다. 운계폭포를 관람하였다.
그 북쪽 동구는 봉대鳳臺이다. 봉대의 서쪽에는 옛날 은자의 자취가 있다.
저녁에 동쪽 기슭으로 해서 내려와,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감악산紺嶽山, 紺岳山
경기도 양주시 남면 · 연천군 전곡면 · 파주시 적성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고도 675미터의 산.
「신비지기」에 의하면 감악산이 서울의 주산인 삼각산을 뒷받침하여 수덕水德을 이루어서 서울의 땅기운을
북돋워준다고 한다. 1982년에 진흥왕 순수비로 추정되는 신라고비가 발견되었다.
신라고비
운계폭포
허목許穆(1595~1682)은 1666년(현종 7, 병오) 9월 감악산을 유람하고 제명기題名記를 지었다. 당시 72세였다.
감악산은 서울을 에워싼 외산의 하나이다. 적성현積城縣은 칠중성七重城 혹은 중성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와고구려두 나라의 국경에 감악紺嶽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감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감악은 경기와 관서의 경계에 있다. 칠중성에서부터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바위 벼랑이 아스라하고 깎아지른
듯하며,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다. 평지로부터 맨 꼭대기까지 2,300丈이다. 그 위에 감악사紺岳寺가 있다. 석단의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고, 그 곁에는 설인귀 사당이 있는데, 음사이다. 석굴에는 노자의 석상이 있다. 절정에서 조망
하면, 동쪽에서 마사산과 백운산이 있고, 서북쪽에는 평나 · 천마가 있으며 남쪽에는 삼각 · 도봉이 있다. 그 북쪽은
대강 · 아미 · 호로 · 임진을 거쳐 그 하류는 조강이다. 조강의 서쪽은 강화로 강화는 서쪽은 연평의 대양이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우리나라 산악과 관련한 비기秘記를 인증한 기록이 있다.
고려 숙종 때 김위제가 올린 글에 《신지비사神誌秘祠》를 인용하여 "마치 칭추稱錘 · 극기極器와 같으며 칭간稱幹은
부소扶疎이다" 라고 하였는데, 칭추라는 것은 오덕五德의 땅이요, 극기는 백아강白牙岡이니, 이것은 저울로써 삼경
三京을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덕이라는 것은 가운데 있는 면악面岳이 원형圓形으로 토덕土德이 되고,
북쪽에 있는 감악紺岳이 곡형曲形으로 수덕水德이 되며, 남쪽에 있는 관악冠岳이 첨예尖銳하여 화덕火德이 되고,
동쪽에 있는 양주楊州 남행산南行山이 직형直形으로 목덕木德이 되며 서쪽에 있는
수주樹州의 북악北岳이 금덕金德이 되므로··· 라고 하였다.
허목은 1667년(현종 8, 정미) 10월에도 감악의 운계雲溪에 노닐고 「운계 유람기遊雲溪記」를 지었다.
이때 윤휴尹鑴와 동행하였다. 허목은 그해 4월에는 삼부폭포를 구경하고, 9월에는 심원사深源寺에 들어갔는데,
그 두 산은 모두 운계의 수석만 못하다고 하였다. 「운계 유람기」에서 허목은 그지방 풍속과
인물에 대해 전하고, 민간 신앙의 실태도 다시 밝혔다.
10월에, 한산寒山 송宋 노인이 희중希中(윤휴)와 함께 운계사雲溪寺(적성 감악산에 있다)에서 만나기로 약속
하였는데, 희중이 또한 또한 편지를 보내어 나를 불렀다. 나는 경구景久(박태원)과 같이 가자고 약속했더니,
경구는 병이 생겨서 가지를 못하였다. 나는 희중과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하며 한산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 이튿날 운계사로 가는 길에 중성重城(적성)의 현감 송여수를 만났는데, "대사마大司馬가 여러 고을의
군대를 소집하여 남한산성에서 열병식을 한다" 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운계에 이르니,
눈이 온 후라서 바위와 벼랑, 돌길과 폭포 등이 아주 기이하였다.
나는 4월에 삼부폭포를 보았고 9월에 심원사에 들어가서 산수기를 지었는데, 그 두 산은 모두 운계의 수석水石만
못하였다.그 석동石洞을 청학동이라 하고 그 가장 위층의 바위를 무학대無鶴臺라 한다. 무학대에 올라가
운계비雲溪碑를 읽어 보고 운계사에서 잤다. 그 이튿날 희중이 미원迷源으로 떠나려 하기에 청성靑城
석문으로 나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다가 산 아래의 풍속과 선행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송 노인이 말하였다.
"신산新山의 백성 이귀남의 아내는 병자호란 때 산중에 숨어 있다가 적에게 끌려가다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게
되자, 적을 꾸짖으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칼을 빼어 그 살점을 베어 내고 배를 갈라 죽였는데,
그 집에서 기르던 개가 삼일삼야三日三夜을 지켰으므로 까마귀와 솔개가 감히 먹지 못하였습니다.
동리 사람들은 '참으로 훌륭하다. 절부의 행실이여, 기르던 개도 의리로써 보답할 줄 알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종 조남趙男은 어릴 때 그 아비가 임진왜란에 죽었는데, 장성한 후에 뒤미쳐 3년 상을 치렀죠.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그의 선행을 칭찬해 온지 60년이 됩니다. 조남이 죽을 적에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지 말고 길가에 버려두어 나를 편안케 하라' 고 하였으나, 그 아들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시신을 섶으로 싸되 구덩이도 파지 않고 봉분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 이 또한 효자의 마음이로다.
산 위에는 설인귀의 사당이라는 것이 전해 온다. 혹은 왕신王神이니 곧 연산군을 말한다고 한다.
희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귀 입니다. 무릇 홍수와 가뭄, 질병과 역병에는 여귀에게 제사 지냅니다."
나는 탄식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옛 사람 말에 '그가 살아 있을 적에 일을 행한 것이 크고 일을 경력한 것이 많으면, 그 정신이 강하게 되어
죽어서도 능히 화복을 이용해서 사람에게 얻어먹는다' 라고 하였소. 대개 요귀를 두고 하는 말이랍니다.
허목의 글이나 이만부의 글에 나타나 있듯이 감악에는 설인귀의 사당이 있었다.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 당태종의
명을 받아 이적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한 인물이다. 동대문 밖 전기수傳奇叟(소설 따위를 구연하는 자)가 그를
소재로 한 「설인귀전」 이라는 전기傳奇를 구송口誦의 대본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고 하니, 그만큼 설인귀의 사적은
민간에 친숙하였다. 하지만 외적의 장수를 우리 민중이 신으로 떠받든 것은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그런데 허목은 여귀는 결국 요귀라고 규정하였다.
유학 등 합리주의 사상은 미신을 배격하고 인간의 지혜를 발달시킨 의의가 있다.
그러나 민중이 공유한 공동체적 의지처로서의 기복 행위와 질서 유지 기제를 모두 음사淫祠로 규정하여 배격하기만 하고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할 때, 합리주의 사상은 또 다른 파괴와 억압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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