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그림의 좌측 부분, 下) 그림의 우측 부분.
장 도미니크 앵그르, <오시언의 꿈>, 1813년 앵그르 미술관, 몽토방
아일랜드의 전설적 영웅 오시언은 19세기 초 낭만파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앵그르는 로마의 키리나레 궁전의 천정화를 주문 받았을 때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 방은 나폴레옹의 침실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1814년 나폴레옹 실각 후 앵그르는 이 천정화를 다시 매입해서 수정했으며, 후에 고향 몽토방에 기증했다.
악기에 기대서 잠드 노시인의 머리 위에는 그가 꿈꾸는 서사시의 한 장면이 마치 얼음에 갇힌 세계처럼
모노크롬으로 그려져 있다. 고전파 화가로서는 드문 시적 표현의 작품이다.
존 트럼벌, <1775년 6월 17일의 벙커힐 전투>, 1785년경, 예일대 미술관, 뉴헤이번
벤저민 웨스트의 제자인 트럼벌은 유럽 신고전주의 화가들 가운데 독립전쟁의 혁혁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공식적인 주문을 받은 첫 세대 미국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아카데믹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로(Gros) 를 예고하는 열정을 담고 있다.
에드워드 힉스, <코넬 농장>, 1832년경, 윌리엄과 크라이슬러 가르비치 기증, 워싱턴 국립미술관
청교도주의의 대표자인 힉스는 개척자들의 '신세계' 와 유사한 '지상의 천국' 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시 돌아온다.
그림의 조명을 보면 그 시대의 미국 풍경화가들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화가는 고전풍을 애호하는
의고작가로 남아 있으면서(섬세한 묘사와 '건설자 아버지들' 에게 호소하는 연출을 통해 알수 있다)
20세기에 공식적으로 재등장하기까지 '소박화파' 조류에 영향을 주게 된다.
토마스 제퍼슨, <몬티첼로>, 1796년, 살러츠빌, 버지니아
미국 독립선언문의 아버지인 제퍼슨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 대사로서
프랑스에 거주하며 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하였던 경험을 활용하였다.
때문에 다양한 로마식 건축물(님의카레 저택)이 장엄하고 정감어린 그의 건축물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곳은 그 자신의 별장이다)
리처드 윌슨, <낸틸 호수에서 바라본 스노든 산>, 1760년경, 캐슬 박물관, 노팅엄
윌슨은 푸생의 영향과 살바토레 로사의 영향을 적절히 조화시킨 덕에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풍경화가가 되었다. 그의 투명한 제작 과정과 신중한 장소 선택은 여전히
고전적이지만, 역사적이거나 장식적인 요소가 없는 야생의 자연에 대한
취향은 전낭만주의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장 자크 프랑수아 르 바르비에, <철학자와 교육>(장 자크 루소의 오레라 <마을의 점쟁이>를 위한 판화),
1783년, 국립도서관, 파리
<에밀>과 <사회계약론> 의 저자 루소는 또한 '자연으로의 회귀' 를 주장한 예언자이기도 했다.
그는 저서에서 모순되는 당대의 거의 모든 열망을 요약하고 있는데, 그 열망은 이미 그의 죽음과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그의 명성이
이 판화에 잘 형상화되어 있다. 루소 자신은 오른쪽에 나타나 있고, 시골 풍경 속에서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축제를 이끌고 있다.
중앙의 그리스 사원은 '신성' 이 존재함을 은근히 상기시키고 있다.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위대한 고대 유적에 감동받은 예술가>, 1778~1780년, 취리히 미술관
갈색의 담채와 어우러진 멋진 붉은색은, 사물을 대담하면서도 빠르게 단순화시키는
데생화가 퓌슬리의 독창성 뿐만이 아니라 그 색채에 담긴 낭만주의 예술가의 멜랑콜리까지 보여주고 있다.
고대를 찬탄하는 심정 속에는 위대한 고대에, 그 삶의 양식에 필적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스며 있다.
물론 실제로 고대의 위대함은 이미 쇠락한 세계와 관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림 속에 등장한 거대한 큰스탄티누스 황제 동상의 두 조각은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다)
조제프 베르네, <난파>, 1777년, 칼베 미술관, 아비뇽
화가는 폭풍우의 효과를 관찰하기 위해 범선의 돛대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사실주의가 아니었으며, 자연은 여기서 '숭고함' 으로 번역된다.
이는 이미 '낭만적' 인 개념으로서, 디드로는 종종 베르네를 그 예로 들었다.
조제프 베르네, <아침> <목욕하는 여인들>이라는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1772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그림은 바닷가의 하루 중 여러 순간을 묘사하는 연작의 한 부분이다. 겉보기와 달리, 이 조용한
풍경과 베르네의 다른 작품 속 소용돌이치는 바다 사이에는 아무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가 지중해 근처에서 볼 수 있었던 '고대적' 무대는 자연의 평온함을 반영하는데,
이에 대한 가벼운 향수는 당시 중요한 소재였다.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 <로마의 고대 유적> 제2권의 표지 그림(동판화), 1756년, 국립도서관, 파리
이 그림에서 판화가는 당대의 고고학자들이 재구성한 다양한 시대의 장례 기념물들을
현기증 나는 모습으로 모아놓고 있다. 윤관의 정확성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쌓아올려진 수많은 건물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신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의 구상도를 맡기신다면 나는 미친 듯이 착수할 터이다.
' 빅토르 유고를 선두로 하여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이 그림을 칭송하고 인용하게 된다.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 <감옥> 의 도판, 동판화, 1745~1750년, 국립도서관, 파리
이 그림은 놀랍게도 19세기 말에 '고딕' 소설과 사드의 소설이 출현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 도판이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가능한 일인데, 그것은 처음에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재판(1761년) 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당당히
펼쳐지는 명암효과를 통해 그의 강박적인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지만, 피라네시의
생애 중 어디에서도 이 같은 상상력과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프랑수아 제라르, <로라 강변엣 하프 소리로 유령을 부르는 오시언>, 함부르크 미술관
제라드가 북구 양식으로 그린 유일한 그림으로, 네 개 이상의 판본이 있다.
능숙하고 안개 낀 듯 흐릿한 이 그림은, 같은 테마로 그려진 앵그르의 투명하고 정확한 그림과 비교된다.
조지프 라이트 오브 더비, <진공 펌프 실험> 1768년, 영국 국립갤러리, 런던
영감을 받은 눈빛의 물리학자, 새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우는 어린 소녀, 소녀에게 실험의 재미를 설명
하고 있는 중년 남자, 그리고 미래를 명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또 다른 사람 등은 저물어 가는 18세기의
수사학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극적인 빛, 특히 감정과 꿈의 권리를 요구하는 '달빛' 이라는
세부 장식은 산문적인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위베르 로베르, <빨래터>, 1781년경, 오를레앙 미술관
그림의 경관에는 성채와 공원의 재개발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프랑스와 이탈리에 대한 추억이 혼합되어 있는 듯
하다. 빨래하는 아낙네들은 실제로 영지의 하녀들이다. 인물들과 건축물 사이에
미묘하게 과장되어 있는 구성을 통해서도 심리적 암시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약간 연극적인 조화는 흘러가는 가운데 느려진 시간의 조화이며,
앙시앵 레짐 말기에 잘 알려진 '사는 즐거움' 의 조화이기도 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베르사유의 테니스 코트 서약>, 1790년, 베르사유 국립박물관
연필, 펜, 흑갈색 물감의 담채 위에 유약을 입힌 이 거대한 그림을 위해, 다비드는 우선 수많은 남성의
누드 크로키를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역사적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을 덧입혔다. 그러나
이 엄청난 작업의 초벌 그림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등장인물 중에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동 제를(전면의 사제)과 같이 실존하지 않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제3신분에 주교가 가담했음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칠리에트 발뇌브의 초상>, 182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다비드가 망명중에도 직업의식을 가지고 비교적 초연한 태도로 그렸던
사교계 인물 초상화의 전형적인 예. 모델의 무표정한 얼굴보다는 선명치 않은 배경 덕택에
돋보이는 색채들의 조화(보면대, 숄, 치장된 의자,모자의 장식)에 눈길이 간다.
장식물은 은근히 애잔하고 낭만적이며 품위를 지니고 있다.
프랑수아 그라네, <산들의 삼위일체와 빌라 메디치>, 1808년, 루부르 박물관, 파리
전원풍의 로마 경치로서, 화가는 과장하지 않고 피상적인 풍경마저도 추구하지 않고 있다.
(인물도 거의 없다) 양감과 원근법의 유희(오벨리스크와 계단), 그리고
구름 낀 하늘이 강조하고 있는 채광의 선명함에 주목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 <그랑 생베르나르 산을 넘는 보나파르트>, 1800년, 말메종성(城) 국립박물관과
브아프레오 국립박물관
다비드는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서사적인 초상화 다섯 점을 제작했다.
(이탈리아 정복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에서화가의 서명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성(이 의상은 보나파르트가 마렝고 전투에서 입고 있었던 것 그대로이다)
과 서정성(원래 보나파르트는 말이 아니라 수노새를 타고 있었다)을 결합함으로써,
다비드는 낭만적인 보나파르트 전설의 탄생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단일한 양식이 지닌 힘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성공하고 있다.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1802년, 카르나발레 박물관, 파리
이 그림의 장식은 모델의 고독감(그녀와 샤토브리아와의 관계는 이 그림이 그려진 후의 일이다)
을 은근히 암시 하는 듯하다.초연한 태도와 수줍게 유혹하는 태도, 그리고 장식이 대조되어 있다.
이 작품이 성공한 것은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듯한 내밀한 분위기 때문이다.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 1799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로마 역사의 일화(로마로 돌아온 추방자는 죽은 아내와 절망에 빠진 딸을 보게 된다)
에서 따온 이 그림은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서는 망명자들의 귀환이 눈물겹게 암시되어 있다. 르
뇨의 제자인 게랭은 그림을 그린 후에 제목을 붙인 듯하다.
게랭이 비장미와 잔인한 표현의 대가로서 인정받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장 바티스트 르뇨, <자유, 또는 죽음>, 1795년, 함부르크 미술관
다비드와 다소 가까웠던 공화주의자 화가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다비드파인 르뇨가 보다 운이 좋았다고 한다면, 그가 진지하고 독립적으로
자기 시대의 역사를 해석하면서 정치적인 알레고리를 사용한 작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의 복잡한 구성은(프랑스의 수호신이 죽음을 격퇴시키고 공화국의 이념과 힘을 세상에
퍼뜨리고 있으며, 예술가는 이를 영원의 상징에 호소한다) 오페라의 무대 장치처럼 대담하다.
르뇨의 재능은수호신이 세상을 한 눈에 내려다보도록 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작품은 찬란한 빛 속에서 양연되고 있는 듯하다.
위베르 로베르, <페허가 된 루브르 그랑갤러리의 상상도>, 1796년 살롱 그림을 위한 초안, 루브르 박물관, 파리
루브르 궁전을 박물관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폐허의 로베르' 라고 불린 그는
같은 해에<그랑갤러리의 이사 계획>(루브르 박물관)을 전시, 모든 계획이 엄청나게 파괴되었음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는 이미 낭만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리러니는 있으나
조롱은 전혀 없다, 미래는 파편더미로서, 이미 과거에 속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다.
한편, 다른 그림에서 로베르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은 다른 세기가 오면 실현될 수 있으니, 그림 꼭대기에서 비춰지는 빛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토피노 르브룅,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1797년, 보자르 미술관, 마르세유
로마의 호민관은 적에게 암살당하는 순간, 충성스런 노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 그림은 1796년에 처형당한 혁명 웅변가이자 화가의 친구인 그라쿠스 바뵈프에게 헌사되었다.
화가 자신도 보나파르트의 명령에 따라 다른 테러리스들과 함께(그중에는 주세페 세라치도 있다)
처형당한다. 반쯤 웨손된 채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 그림(작가가 남긴 유일한 작품)은
잔인스런 석양빛의 조명과 비극적 절망을 결합시키고 있다.
필리베르 루이 드뷔쿠르, <스탈 부인의 연설>, 1879년경, 국립도서관, 파리
관습적이지만 부적합한 제목이다. 인물 몇 명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자기 활에 개대어 선
큐피트의 존재를 보면 대화의 주제는 아름다운 세상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드뷔쿠르는 곧이어
채색 판화로 자신의 그림을 전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림에서 흰색을 주조로 하여 밝은
조화를 추구하는 감각을 보여준 그는, 곧 사라지게 될 사회를 증명하는 예리한 증인이었다.
그 우아한 사회는 이미 낭만적인 신경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퐁텐과 페르시에, 카루젤의 개선문, 1806~1808년, 파리
로마 광장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대제의 개선문을 상당히 정성들여 모방한 이 작품은
제국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희귀한 제국 기념의 증거물 중 하나이다.
집정정부가 약탈한 분홍 대리석 기둥 네 개를 반드시 사용하려 했으므로
균형 잡힌 지뷸로 건축될 수 밖에 없었다.
장 도미니크 앵그르, <리베에르 부인의 초상>, 1805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매우 드문 화면 형태인 타원형 속에 갇혀 있는 이 그림 속에서 심리적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이다.
직물의 주름, 주요 부분들, 원의 아치가 계산보다는 직관에 의해 결정되어 서로 녹아들고 있다.
손(들라크루아가 그 완벽함에 절망한 바 있다)과 얼굴은 무위로운 생활을 드러내는 대상물로,
깊이 없는 묘사(模寫)라는 앵그르 특유의 놀라운 테크닉을 통해 그려져 있다.
장 도미니크 앵그르, <스타마티 가족>, 1818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섬세하고 신경질적이지만 나무랄데 없는 필치로 그려진,
흑연 데생화가 앵그르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장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공식적인 주문(이 경우는 나폴리의 여왕 카를린 뮈라)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이해되지 못하고
소외되는 것에 신경쓰던 앵그르는 '무시해도 좋은 장식' 그림을 위해 환한 유채색을 고수하였다.
거장 라파엘로의 그림 같은 이 멋진 누드화는 동방의 장식과 함께 그가 위대한 채색화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여인의 자세는 다비드의 초벌그림에 기원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고대의 님프 조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육체와 직물을 다루는 솜씨는 앵그르만의 것이다.
앙투안 장 그로, <에일로 전장의 나폴레용>(187년 2월 9일), 1808년, 루르르 박물관, 파리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에서는 보나파르트가 자기 자신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그로의 이 새로운 걸작에서는 보다 복잡한 독법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패전
병사이지만, 여기서는 동정심 많은 나폴레옹의 매력에 굴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1810년에 '10년마다
수여되는 상' 이 창설된 것은, 이 그림의 내용 면에도 황제가 직접 개입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화면의 구성과 특히 전면의 프리즈 효과는 제리코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며,
반면 배경의 빛나는 대조 효과는 들라크루아를 예고하고 있다.
안 루이 지로테 드 루시 트리오종, <아탈라의 매장>, 1808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화가는 슬픔에 짓눌린 '젊은 야만인' 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 로마의 모델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런데 나무는 조금도 이국적이지 않다. 죽은 처녀를 비추고 있는 빛은 고독한 동굴 속에서 맞은 죽음과
다음 날 거행될 매장을 결합시키고 있다. 지로테는 샤토브리앙의 작품을 따르고 있으나 신화적 비장감은
축소했는데, 그럼에도 샤토브리앙이 이 그림을 매우 좋아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안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종, <급류 건너기>(베르나르댕 생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를 위한 판화), 1806년, 국립도서관, 파리
소설가 베르나르댕 생피에르가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될 정도로(그는 이를 거부했다)
<폴과 비르지니>는 18세기 말에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낭만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제 순진한 척하는 청소년이 아니라,
전율하는 원초적 가슴과 직접적인 육체의 접촉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청소년이다.
피에르 폴 프ㅜ리동, <황후 조제핀>, 1805년,루브르 박물관, 파리
말 메종의 자연 배경은 상투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져 있다.
이 유명한 그림은 프뤼동의 위대한 재능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운명에 번민하는 희생자로서, 감상적인 조제핀의 전설을 전하는 데는 많이 기여했다.
피에르 폴 프뤼동, <처녀>(데생), 1810년경, 다종 미술관
이 초벌 그림은 프뤼동 예술의 모호함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다.
로마에서 국제적인 신고전주의의 영향(안젤리카 카우프만의 초상화)을 받은 그는
코레조의 방식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나 전통적 윤곽선과 대조를 이루는 신경질적인 필치와
속눈썹에서 보이는 근대적 감수성은 그의 재능뿐 아니라 혼란스러운 마음도 나타낸다.
베르텔 토르발센, <가니메데>, 1830년경,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아름다운 트로이 청년(그의 모자는 프리지아식이다) 의 부드러우면서도 건조한 초상은, 제우스가 아니라
제우스가 변신한 모습인 독수리에게 술을 따르고 있다.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했던 이 조각가는, 단순히
기분전환용으로 시도한 작은 판형으로 우아한 여성상을 조각함으로써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숲 속의 수도원>, 1809년, 샤를로텐부르크 국립 궁전과 정원, 베를린
가장 위대한 독일 낭만주의 화가인 그의 전 작품은 신(다소간은 자연과 동일시되어 있다)과
인간을 갈라놓는 거리와 공간, 그리고 양자간의 화해 가능성을 성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대인인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첨두아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황폐한 수도원과 죽은 나무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묘지가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칼 구스타프 카뤼스, <산맥의 바위들>, 1826년, 드레스덴 미술관
이 그림에도 물론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이미지를 응시하는 지질학자의 세심함이 있다.
그러나 특이한 바위 삼총사는 지속성과 평온함의 상징으로서, 겨울에 헐벗고
인간 손에 의해 비극적으로 손상당한 늙은 나무들과 대조되어 있다.
토머스 로렌스 경, <다이애나 리본 공주의 초상>, 1812~1820년경, 테이트 미술관, 런던
로렌스 경은 여러 해 동안 유럽의 왕족이나 유명한 인물들에 매혹된 초상화가였다.
레이놀즈에세서 빌려온 몇 개의 기법 덕분에 그는 매우 일직 궁정에서, 이후에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레이놀즈의 후임자가 될 수 있었다. 비록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힘있는 거장의 솜씨로 그는
낭만주의 미술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는데, 그 자신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었다.
토머스 롤런드슨, <건강염려증>, 국립도서관, 파리
롤런드슨의 풍자적 기질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전낭만주의적인 점은 찾아보기 힘들다.
상상으로 병에 걸렸다고 믿는 건강염려증이 공격적이고도 대중적인
스타일로 표현되어 호가스를 생각나게 한다.
요한 파인리히 퓌슬리, <니벨륭겐의 노래>를 위한 삽화, 1805년, 취리히 미술관
민중의 영혼을 직접 표현하기 위해 소박하게 그려진 이 작품은, 1757년에 발표되어 <니벨륭겐의 노래>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레나니의 중세 이야기들을 익명으로 잡다하게 편집한 것으로, 바그너가 부활시키기까지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다지 읽혀지지 않았다.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악몽>, 1781년, 괴테 박물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퓌슬리는 친교가 있었던 블레이크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주제의 작품을 즐겨 제작하였으며 명암의
대조를 강조한 환상성과 상상이풍부한 독자적 화풍을 개척하였다. 음산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극적이고 잔인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림 속 형상들은 아름다운 꿈처럼 보인다.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몽유병에 걸린 맥베스 부인>, 178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18세기 말 영국 연극계에서는 다시 셰익스피어가 유행되었다. 그리고 퓌슬리는 실제 연극에서 영감을 받았던 듯하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잘 부각시키기 위해서 채색된 미광 속에 형태를 잠기게 하는데, 이 점이 바로 그의 작품의
특징이 된다. 이 그림은 비극의 내용 자체를 묘사하고 있는데, 프로이드보다 낭만주의자들이 먼저
셰익스피어를 통해, 인간 무의식의 혼란스런 충동에 대한 예감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 <단테이 지옥, 색욕의 원,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1824~1827년, 버밍엄 시립박물관 미술관
레이크는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그릴 때에도 자신만의 강박관념에 충실했다. 지옥에 떨어진 이들이
헤엄치고 있는 듯한 나선은 그에게 매우 빈번히 나타나는 은유(나선형)와 관계가 있다.
윌리어 블레이크, <영원>, 1827년, 휘트워스 미술관, 맨체스터 대학교
블레이크의 혼합된 테크닉(잉크 동판화와 수채화의 혼합)은 여기에서 특별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플라톤의 신처럼 기하학에 따라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이 기괴한 노인은, '태고 시대' 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성서적인 언급을 환기시킨다. 영원함에 대해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던
블레이크의 열정적인 상상력이 잘 나타나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커다란 숫염소., 1799년, 라자로 갈디아노 미술관, 마드리드
대중의 미신을 직접 전사한 그림으로, 야회(夜會)에서 악마는 그를 찬양하는 여성들에게 마술사로 나타난다.
살아 있는 어린이들, 심지어 태아까지도 악마를 존중하여 경의를 표한다. 거친 장소, 거리의 부재, 황혼녘의
빛 등이 이미지로 가득 찬 악몽에 몽환적인 사실감을 부여한다. <로스 카프리토스>와 같은 시기 작품인
이 그림은, 빈곤한 지성과 모호성에 근거한 모든 종교를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잇는 듯하다.
마술사들은 '낙태 시술가' 를 상징하기도 한다.
인용 : 제라르 르그랑 지음 · 박혜정 옮김 <라루스 서양미술사> (낭만주의)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