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고야, <정어리의 매장>, 1813년 이전, 산페르디난도 왕립 미술아카데미 미술관, 마드리드
격렬한에까지 이른 기법이 경쾌하다. 양식화된 얼굴은, 덧없는 축제에 만족하면서 시간에 빼앗긴
피상적인 인간성을 비추는 거울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민중 축제는 단지 즐거움의 분출일 뿐으로,
그것은 자연의 풍요라는 심오한 의미가 상실되고 가면에 가려진 카니발의 우발성을 나타낼 뿐이다.
회화를 판화 예술과 결합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빈약하게 채색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조상을 찾아서> (<로스 카프리초스>에서 발췌한 판화), 1799년, 국립도서관, 파리
이 연작은 검열 때문에 매우 적은 수의 사본만 판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야는 1813년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 다시 한번 죄를 저지른다. 몰상식함의 외면 뒤에서
그는 인간의 결점을 함부로 비웃고 있으며, 그의 작품이 지닌 야만성은 풍자를 환상으로까지 끌어올린다.
그는 여기에서 족보에 대한 광기를 비난하고 있다. 당나귀는 당나귀의 후손일 뿐이다.
자기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려 해봤자 바보짓일 뿐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늙은 여인들, 혹은 시간>, 1796년, 릴 미술관
'가버린 젊은 시절' 이라는 낭만적 주제가 여기에서는 악몽이나 시체같이 나타나 있다.
전통적으로 낫을 들고 있어야 할 '시간' 이 빗자루를 들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비크 해안> 혹은 <인생의 세 단계>, 1835년, 라이프치히 조각박물관
프리드리히는 여러 그림에서 인간의 운명을 종합하여 표현하려 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실제로 발틱 해안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자신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남자이고, 정장을 한 남자는 그의 조카이며, 다른
인물 셋은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다. 커다란 돛단배는 가운데에 있고, 어린아이들이 있는 위치는 삶이 계속됨을
상징한다. 그와 반대로 저 멀리 보이는 배는 강박적인 죽음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있다. 석양은 하늘에서부터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암시인가?) 황혼 무렵은 매우 특별하게 색채를 다루는 프리드리히가
작업하기에 유리한 시간이었는데, 이 그림의 색은 까칠까칠하고 섬세한 터치의 집적으로 인해
조금씩 색이 옅어져 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자코브 사블레, <로마의 애가>, 1791년, 빌 미술관, 브레스트
이 그림은 로마의 신교도 묘지에 있는 두 사람의 초상화라기보다는 프리메이슨의 종말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같은 제목의 괴테의 시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피라미드와 작은 돌기둥은 고대를 가리킨다.
작은 판형으로 된 이 그림은, 극도로 섬세하면서도 견고함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덕분에 매우 낭만주의적인
분위기를 띤다. 뤼시앵 보나파르트와 매우 가까웠던 이 스위스 화가는 이탈리아에서 20년 간 살았다.
앙투안 그로,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첫 번째 부인, 크리스틴 부아예>, 1801년경, 루브르 박물관, 파리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젊은 아내는 매우 일찍 사망했는데(떨어져 있는 장미가 비극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가 소중히 여기던 장식물과 함께 대단한 감수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폭포 역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사후에 그려지는 초상화는 당시에 드물지 않았다. 약동하는 역사도 영원하려는 욕망을 거부하진 못한다.
장 자크(일명 제임스) 프라디에, <프시케>, 182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루이 필리프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파리의 조각가가 표현한 우아함은 도처에서 빌려온 것이다.
벗은 가슴을 고혹적으로 가리는 모습은 낭만주의 회화 제라르의 <프시케>에서, 머리 모양과
흘러내리는 옷을 암시하는 서있는 모습은 헬레니즘 조각에서 차용했다.
프랑수아 뤼드, <라 마르세예즈>, 1830~1836년, 개선문
(때늦기는 했지만) 1792년에 출정했던 한 무리의 자원 입대자들은, 그 시대로서는 드물게 우스꽝스러움에서 힘을
끌어내온다는 현대 조각적 알레고리에 의해 지배되며, 혁명과 낭만주의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물이 되었다. 뤼드는 직각 형태 주위에 단 하나의 움지임, 반은 그리스적이고 반은 갈리아적인 얼굴들과
나폴레옹 시대의 장식물로써, 고대의 모든 상징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부분), 1818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처음에 화가는 세 점의 시리즈를 구상했다. 저항, 뗏목, 생존자들이 그것이다.
제리코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강조하지 않고, 커다란 축에 의거하여 구도를 잡았다.
인물들은 소위 '바로크적' 고전주의의 웅장한 조각 기술을 따르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로마의 야생마 경주>, 헝겊 위에 붙인 종이, 1817년경,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당대 로마의 사육제가 고대 로마의 저부조 형태로 환기되어 있다.
(제리코는 수많은 사육제 소묘화를 그렸다).
높이 위치한 지평선과 거대하고 단일한 벽은 출발 준비가 되어
매우 흥분된 말들의 격렬한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미친 여자, 혹은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건강관리>, 1822~1823년, 리옹 미술관
우스꽝스럽게도 오랫동안 엉뚱한 이름으로 불린 제리코의 이 정신착란자 초상화에는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작가의 매력이 세삼스럽게 느껴지는 이 그림들의
의도는 다소 애매하다. 이 그림은 열 점이 있는데 그중 네 점이 남아 있다.
제리코의 방식으로 그려져 있으나, 그의 힘도 명확성도 지니지 못한
다른 그림들이 오래 전부터 그의 그림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제리코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 조르제의 병원실습에
이 인물화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외젠 틀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니네베의 전설적인 왕 사르다나팔루스는 왕궁이 화재로 불타게 되자
자기 부인들과 말의 목을 조르게 하고, 적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기 몸에 불을 지른다.
사치스러움과 결합된 자기 파괴(바이런과 들라크루아에서부터 랭보에 이르는)는 매우 현대적인 관념이다.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오른쪽 인물들의 사디즘은, 이 화가에게 흔히 나타나지 않았던 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형태 속에는 베네치아 화가들에게서 영향 받은 반원의 기하학이 감춰져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데생), 1828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수채화는 괴테의 비극을 예시하기 위한, 유머와 생동감으로 가득 찬 스케치이다.
학생의 모습을 한 악마는 원무를 추는 요술사 같은 처녀들에게로 파우스트의 관심을 돌리려 한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종종 피상적으로 이해되었지만, 낭만주의자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사로잡았다.
외젠 들라크루아, <혼혈여성 알린>, 1824년경,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화가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시기에 그려진 이그림에서, 모델은 덧칠과 색채 작업의 구실이 될 뿐이다.
조형성이나 표현성은 전혀 없고, 뻐기는 듯 과시되어 있는 여성성은 일말의 에로티시즘도 암시하지 않는다.
토니 요아노, ,베르테르>, 1844년, 국립도서관, 파리
매우 작은 크기의 나무 판형에서는 자신의 환상적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이던 요아노가
이 삽화에서는 괴테의 소설을 단지 감상적 멜로드라마에 가깝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당시의 젊은 낭만주의자들은 작가의 자기비판(혹은 자가분석)은 고려하지 않은채,
이 소설을 찬미하고 모방하고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거의 반세기 동안
사랑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목록 중 하나였으며, 회화 중 특히 데생이
이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피에르 앙리 드 발렌센, <호숫가의 폭풍우>, 1784년경, 루브르 박물관, 파리
표구된 종이에 그려진, 아마도 이탈리아 여행의 회상인 듯한 이 유채화는
금세,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졌던 한 예술가의 재능을 보여준다.
소실점에 의해 도입되고 있는 왜곡된 거리감이 눈에 들어온다.
성채는 산에 비해 너무 작고, 집중적으로 내리는 비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인다.
고정된 위치와 시간으로부터 신비스러운 시정이 느껴지는데, 이는
나중에 외젠 부댕과 인상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쉴 드베리아와 루이 불랑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 1827년, 국립도서관, 파리
'베로나 연인들' 의 동반자살은 청동조각에서처럼 석판화에서도 수많은 장식화를 낳았고,
이것이 낭만주의를 가장 부자연스럽고 멜로드라마 같은 양상으로 축소시키게 된다.
장 도미니크 엥그르, <알젤리크를 구하는 로제>(부분), 1819년경,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앵그르에게 여인의 나체는 어떤 자세에서도 조화로움을 유지해야 하는 전체적인 곡선일 뿐이다.
소녀의 애통한 시선 때문에 악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에 나타난 관능성을
표현해 내려면 앵그르의 엄청난 예비 작업을 능가해야만 할 것이다.
오리스 베르네, ,레오노르의 발라드>, 1839년, 낭트 미술관
독일의 낭만주의자 뷔르거의 강박적인 발라드(「죽은 자들이 빨리 가고 있다」)는
이 아카데믹한 화가에게 젊은 시절의 우정과 현대적 조류에 참여했던 열정을 상기 시켰다.
레오나르도 알렌사, <자살의 알레고리>, 1845년 이전, 로만티코 미술관, 마드리드
고야의 한 평범한 제자가 그린 이 작품은 1800년무터 광란적 문학이 애호하던 주제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서,
자살을 풍자하거나 고발하는 그림이다. 당시에 자살은 정신적 소외의 한 형태이든가, 아니면 숭고한
행위로 여겨졌다. 이 그림은 자살에 관심을 보인 문학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앙투안 조제프 비르츠, <미녀 로진>, 1843년, 비르츠 미술관, 브뤼셀
능란한 장사꾼인 비르츠는 이 그림에서 방향을 돌리면서 '바나타스' 장르를
소생시키고 있다. 상당히 저속한 에로티시즘이지만, 비르츠
의 다른 작품에서보다는 그래도 점잖은 편에 속한다.
존 마틴, <음유시인>, 1817년경, 램 미술관, 박물관, 뉴캐슬
오시언을 참조한 것이 은근히 드러나 있다.
성과 기사들은 원시 시대의 전설적인 스코틀랜드보다는 덜 야만스럽고,
보다 시기적으로 가까우며 관습적인 중세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진정한 주제는빛과 구름, 산,
그리고 폭포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도 영감을 얻는 고독한 시인이
그를 둘러싼 넓은 세계와 맺는 관계이다.
존 마틴, ,발타사르 왕의 축제>, 1830년경, 대영박물관, 런던
마틴은 거대한 규모의 자기 그림을 스케치나 수채화로 축소해 그리곤 했는데, 그 명성은 대단했다.
그의 그림은 구상의 규모 면에서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비견될 정도로 놀랍다.
그러나 사실 유럽에서 그는 조각으로 더 유명했다.
윌리엄 터너, <해안으로 다가오는 배>, 1840~1845년경, 테이트 미술관, 런던
이 그림 앞에서 테오필 고티에는 이렇게 외쳤다. "단 한번의 뭇질로 하늘과 땅을 뒤섞어, (......) 세상의 종말을
장식한다고 말했으리라! 천재의 광기가 만들어낸 진정 엄청난 일이다." 몇몇 상징주의자들(오딜롱르동)과
인상주의자들이 터너에 매혹된 것은 바로 형태를 색채로 분산시켜 놓았다는 점이었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 : 알프스 산을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부분), 1812년, 테이트 미술관, 런던
터너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일화적' 인 주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그림은 요크셔의 산에서 화가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결과물이다.
하늘에서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베누스부르크의 탄호이저>, 벨렝지(紙) 위에 고무수채, 1861년 이후
파리에서 상연된 바그너 오페라에 영감을 받은 이 그림은,
장식과 의상에서 이 오페라의 혼합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낭만주의 음악에 기울인 들라크루아의 관심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카를 불레첸, <베를린 파옹 섬의 종려나무 숲 속>, 1832~1834년, 함부르크 미술관
'동방의' 정자는 18세기 이후 이미 정원 미술에 알려져 있었다
. 하지만 여기에 이미 뻐기는 듯 드러나 있듯이
낭만주의의 동방주의는 좋지 못한 취향 때문에 급속히 쇠퇴했고, 1850년부터는
바비에르나 오스트리아 성의 혼합 고안물 속에서 꽃피우게 된다.
알렉상드르 에바리스트 프라고나르, <돈 주앙과 운명의 사자>, 1830년 이전,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위대한 프라고나르의 아들인 이 화가는 '트루바두르' 회화의 가장 낭만적인 측면을 뛰어난 솜씨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본질적으로 모차르트 오페라의 시대적 해석을 위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데, 여기에서
돈 주앙은 요란하고 거대한 유령과 더불어 '고딕' 적이라 할 만한 환영으로 해석되어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침소에 있는 알제리 여인들>, 183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보들레르는 이 "작은 시" 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멜랑콜리와 "설명할 수 없는 슬픔" 을 발견하고자 했지만,
"교태부리는 화사함" 밖에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평온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기 그림의 구도는
큰 성공을 거두어 일화를 표현하는 동방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랴를 메리옹, <폭풍우 속의 배 한 척> 또는 <유령선>, 1847년, 들라크루아 미술관, 파리
메리옹이 수많은 여행 스케치를 가져왔던 짧은 바다 생활의 추억이 선명한 이 파스텔화에서는,
환상적인 주제의 선택, 돛의 활대와 슈라우드의 정확한 묘사가 흥미를 끈다.
정확성은 바다와 하늘의 '흐릿함' 과 대조를 이루고,
조각가로서 메리옹의 극도로 예리한 필치를 예시하고 있다.
카를 구스타프 카뤼스, <페허가 된 성을 통해 바라본 고딕 성당>, 데생과 담채화, 1852년, 폴크방 미술관, 에센
이 그림의 스타일은 프리드리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배치는 예기치 못한 기지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에 많이 출판되었던 '중세' 의 시와 이야기집을 위한 표지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달빛은, 대중은 알지 못했지만 비평가의 눈에는 한물간 낭만주의의 원형을 참고한 것이다.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데캉, <거북이와 놀고 있는 터키 어린이들>, 1836년, 콩데 미술관, 상티이
데캉은 단 한번의 동방여행에서 갖온 여러 자료들을, 25년 동안 재능은 없지만 시원한 솜씨로 그려진
유쾌한 그림들에 활용한다. 그의 상당한 고전주의적 교양과 기법상의 솔직함은, 관객에게
'관찰력' 의 한계, 대조되는 색채의 단조로움을 잊게 한다.
테오도르 샤세리오, <단장하는 에스더>, 1841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아라베스크의 추구가 앵그르에세서 비롯되었다면, 반복되는 엄숙한 구도와
값진 장식은 샤세리오에게서 나왔으며, 이는 귀스타브 모로가
샤세리오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장 바티스트 코로, <모르트퐁텐의 추억>, 186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연회색에 초록빛이 도는 금색과 보라색이 퍼져 있는 무지갯빛 교향악은
제목의 섬세한 서정성과 완벽하게 어울리고 있다.
이 같은 그림들이야말로, 코로의 모작이 진품보다 더 많았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들은 코로의 정의할 수 없는 완벽함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못했다.
만년의 코로는 이 그림에서 루소를 사로잡았던 전낭만주의의 정신과 마을을 다시 엮고 있다.
장 바티스트 코로, <붉은 옷을 입고 독서하는 소녀>, 1845~1850년경, 비를 재단, 취리히
모델의 내면적인 진실함이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코로의 주된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다.
그는 관객들이 자유롭게 꿈꾸도록 하면서, 섬세하고 확고하게 구조화된 그림을 내세운다.
그는 채색과 데생이라는 유일한 마술로써, 존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을 포착하고 관심을 끄는 데에 진력했다.
장 바티스트 코로, <보볼리 정원에서 바라본 피렌체>, 1834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풍경은 그림자와 빛을 대조시키면서, 나무까지 포함하여, 커다란 도면과 큰 덩어리로 다루어져 있다.
그러나 빛은 마을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데, 실제의 시각에서 보면 마을은 살짝 들어올려져,
언덕에 있는 한 가족처럼 나타나고 매우 가까워 보인다. 자연과 사색의 융합은
코로가 표방했던 비범한 작가 멜길리우스를 생각나게 한다.
오노래 도미에, <봉기>, 1848~1849년, 필립스 컬렉션, 메모리얼 미술관, 워싱턴
도미에는 1848년 2월 23일의 학살에 반발하여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공감했다.
이 사건은 기조와 루이 필리프에 대한 적대심의 표현을 봉기와 혁명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직설적인 예술은 1830년 혁명 이후 들라크루아가 이끌어낸 수사학의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도미에는 그의 단순성 자체만으로도 사실주의를 초월하고 있다.
폴 위에, <그로나르의 귀환>, 1840~1845년, 보베 도립미술관
게랭의 옛 제자이자 제리코의 팬이었던 위에는 간혹 풍경화에 일화를 살짝 집어넣는 경우가 있었다.
그의 서정성은 (후기 작품에서는 예외지만) 눈에 잘 띄지 않게 남아 있다.
그는 패배했지만 타협하지 않은 병사의 작은 실루엣 위
폭풍우 치는 하늘을 몰아 그려 넣으면서 제국의 전설을 기념하고 있다.
그 시대 전체가 나폴레옹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르시스 디아스 데 라 페냐, <숲의 경계>, 1871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그의 작품 중엔 이것처럼 농부나 요정이 나오는 숲 속 그림이 여러편 있다.
비참함과 병으로 특징지어지는 낭만적 삶을 영위한 디아스데 라 페냐는
선명히 대조되는 색채와 섬세하게 떨리는 터치에 의해
순수한 바르비종 화가들과는 구분된다.
오노래 도미에, <돈키호테>, 1868년, 노이에 피나코텍, 뮌헨
도미에의 만년기 회화는 현란하고 대조되는 색조로 귀착되는데,
여기에서도 태양이 짓누르는 사막을 방황하고 있는 환상적인 기사와 로시난테의 유령 같은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내면적인 흥분 상태는 전형적으로 낭만주의를 이어가고 있다.
빅토르 위고, <읍과 마을>, 1863년, 국립도서관, 파리
수채화로 강조하고 펜과 수묵, 목탄으로 그린 이 데생은 <흥겨운 성> 이라는
제목(반어적임이 분명하다)으로 위고가 그린 환상적인 <읍> 연작과 관계 있는 듯하다.
시인이 여행했던 라인강 유역 라인란트 지방의 추억은 꿈의 소재가 될 뿐이다.
그의 꿈에서는 탑의 위용이 비틀거리는 모습과 대조되어 있고,
맑은 하늘이 구석진 곳의 어두움과 대조되어 있다.
오른쪽의 교수대에는 죽음의 강박관념이 서려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빅토르 위고, <바다의 노동자들>을 위한 표지 그림 계획. 1866년,국립도서관, 파리
담채화는 이 소설의 두 가지 조형적 모티프를 연결시키고 있다.
암초 속의 동굴이 그 하나이고, 이 암초에서 끌어내야 하는
난파되었으나 온전히 남아 있는 기계가 다른 하나이다.
요컨대, 심연의 모슨은 물결과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바위로 요약되며,
그 모습이 시인의 이름을 이루고 있다
. 그에게 계시의 힘은 펜을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데생을 통해서도 표현되어 있다.
귀스타브 도레, <폭풍우 지난 후의 스코틀랜드 호수>, 1875~1880년, 회화와 조각박물관, 그르노블
여행에서 영감을 받기는 했어도, 도래의 그림은 삽화의 인물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장식들처럼 보인다.
어둠의 영역과 창백한 조명의 대조에 근거한 이 그림과 같은 예가 프랑스 미술에서는 전혀 없었다.
그의 그림은 풍부한 터치로 광대한 공간의 인상을 직접 전달하려 한다.
외젠 들라크루아, <사자 사냥>, 1854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모로코 여행에서 가져온 추억인 이 주제는 영국의 위대한 동물 화가 조지 스텁스의 영향을 상기시킨다.
들라쿠루아 만년의 특징이 되는 '솜뭉치 같은' 터치를 이용한 어지러운 광란은 루벤스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낭만주의적 알레고리를 읽을 수도 있다. 즉, 사냥꾼들에게 혼란을 주면서 위협받는
사자는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대항하는 천재일 수도 있다.
인용 : 제라르 르그랑 지음 · 박혜정 옮김 <라루스 서양미술사 낭만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