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현대미술 II

에두아르도 아로요, <온 도시가 그 이야기를 한다>, 1982년, FRAC 프로방스 알프 코트 다쥐르

1979년에 시작된 <굴뚝 청소부> 연작 이후에 나온 이 그림은 도시와 밤을 연극의 무대 배경처럼 그려 보인다.

아로요는 포스터 화가적인 시각적 효과를 이용하면서, 로트렉을 본받아 이미지와 한밤중 방황의 혼잡에서

끌어낸 느낌의 퍼즐을 선명하게 영사하였다. 화가-굴뚝 청소부인 그는 단 한 장면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그만의 영화를 만들었다.

 

 

 

 

에로, <피쉬스케이프>, 1974년, '헬싱티 회의' 연작

이미지의 놀라운 포식자였던 에로는 책과 잡지, 삽화가 들어간 서적에 그물을 던져, 보고, 알고, 웃고,

울부짖게 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배에 실었다. 최대한의 집적을 ㅂ모여주는 그의 '스케이프' 들은

미국 추상의 '올 오버' 방식을 이어받았으나,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각적 정보들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스케이프'는 베트남 전쟁 당시에 그려졌다. 이 그림 속에서는 각양각색의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이

뒤엉켜 살아 있는 미끄러운 땅을 이룬다. 그리고 그 위에는 군사 선동 만화에서 곧장 뛰어나온 듯한

낙하산 특공 부대원들이 자동 병기를 난사하고 있다.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 <랭보>, 1978년

거리에 붙인 실크 스크린, "나는 데생과 자세, 어깨에 걸친 웃옷, 연약한 손목, 옷의 선택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

카르자의 놀라운 사진과 판탱 라 투르의 그림, 그리고 다른 몇 가지 문서에 근거하여 그의 초상을 족히

백 번은 다시 그렸다." 이 이미지는매우 평범하고 약하고 찢어지기 쉬운 신문지 위에 그물눈 없이 검은색으로

인쇄되었다. 랭보의 모습은 그래피티로 덮인 담벼락과 샤를빌가를 비롯한 여러 곳에 붙여짐으로써 증식되었다.

'조상(彫像)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방랑하는 여러 명의 일시적인 랭보의 모습을 만들었다.

 

 

 

 

 

두에인 핸슨, <슈퍼마켓 레이디>, 1969~1970년, 루트비히 신 갤러리 컬렉션, 엑스라샤펠

유리 섬유와 의복 조직 사용. 이것은 자신의 나라와 시대에 '참여' 했던 조각가의 사회적이자

사회학적이며 반체제적인 강한 풍자가 오랜 시간에 걸친 고된 작업의 기교에 더해진 작품이다.

원형적인 반열로까지 격상된 이러한 작품들은 가장 대중적인 현대 미술 작품이다.

 

 

 

 

장 올리비에 위클뢰, <묘지 nº7>, 1976년, 본인 소장

위클리가 제작한 첫 번째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이 그림은 다른 무덤 보다 꽃이 많이 놓여 있는 한 무덤을 좀더

가까이 잡은 것이다. 베르나르 아마르슈 바델의 표현에 따르면, 이 그림은 "이미지를 고갈시키는 이상하고

치밀한 의식" 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또한 가장 참을 수 없는 침묵의 '사회화된' 광경을 정확하게 나타내 준다.

 

 

 

 

맬컴 몰리, <베트남 응급 치료 센터에서> 上) 작품의 왼편 부분, 下) 작품의 오른편 부분

1971년, 엘리 & 에디트 엘브로어드 소장, 미국

그가 자신의 '완전한 회화' 라 지칭했던 것과 단절했던 <레이스 트랙>을 그린 지 1년 후, 문자 그대로

극사실주의의 전환기에 있었던 맬컴 몰리는 아크릴릭을 포기하고 유화로 돌아섰다. 촘촘하고

미끈거리며, 넓은 붓질의 '변조'를 통해 다듬어진 이 유화는 구체적 형상을 흐리게 뒤섞어놓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사물은 화려한 동시에 진흙투성이의 질감 속에 교묘히 파묻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의

한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눈에 비친 사물은 떠다니는 잔해처럼 조금씩 드러난다. 그리고 백지의 빈

윤곽은 결국 사물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책 속의 페이지처럼 표현된 이 빈 가장자리는

마치 가상의 연극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널드 저드, <무제>, 1973년, 현대 미술관, 생태티엔

강철과 플렉시글라스 사용. 이 '특수한 오브제'는 가능한 한 가장 객관적으로

실제 공간 속에 위치해 있다. '물질성' 만을 강하게 지닌 이 작품은 외부적이거나

선행적인 것을 배제한 채 즉각적인 미적 체험을 제시한다. 공업적으로

제작된부분들은 각기 동일한 간격의 높이로 벽에 배치되어 있다.

 

 

 

 

프랭크 스텔라, <아그바타나 II>, 1968년, 생테티엔 현대 미술관

스텔라는 1967년부터 3년간 '보고자들' 연작에 뛰어들었다. 거대한 크기인 이 93점의 회화에는 의도적으로

장식적인 표현이 사용되었고, 이슬람의 모티프와 아일랜드의 채색 문자에서 영감을 얻어 매우 강렬하게 채색

되었다. 이 연작은 그에게 영광을 안겨다준 '블랙 페인팅' 시기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또한 마티스의 유산, 특히

반즈 컬렉션의 ,춤>에서 보인 반복적인 원의 활모양, 또는 로베르 들로네의 동시적 원반의 형태를 내세웠다.

 

 

 

 

클로드 비알라, <무제>, 1988년, 앙티브

1970년 여름 비알라는 다른 네 명의 젊은 미술가들과 함께 남불의 해변과 마을에 틀을 떼어낸 캔버스와

밧줄 작품을 설치하였다. 가을에 이 작품들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었는데, 이들은 '쉬포르/쉬르파스'

라는 명칭으로 그들의 '작업물' 을 전시하였다. 1966년 이후 비알라는 작은 뼈 같기도 하고 스펀지 같기도 한

'그려야 할 형태' 에 충실하게 임했다. 이러한 형태는 벽돌공에게 벽돌이 그러하듯 생산의 도구였다.

따라서 이 형태는 의미의 문제를 몰아내고 '제조'를 위한 것이었다.

 

 

 

 

월터 디 마리아, <폭풍 전의 들판>, 1971년 구상, 1974~1977년 제작, 뉴멕시코, 디아 미술 센터 컬렉션, 뉴욕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막 한 가운데, 폭풍우가 빈번하기로 유명한 장소에다 400개의 거대한 피뢰침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다. 피뢰침들은 이 계략의 덫에 빠진 광란적인 번개를 튀어 오르게 만들 태세를 하고 있었다.

또한 방문객들은 작은 오두막에서 폭풍우를 기다릴 수 있었다. 물리적, 시각적 효력을 지닌 완벽한 이

기하학적 배치는 하늘의 모든 불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는 무한함과 숭고함,

게다가 세상의종말까지도 동시에 연상시켰다.

 

 

 

 

토니 크래그, <화가의 팔레트>, 1985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물건 조각 사용. 토니 크래그는 '대 역사의 건반을 연주하기보다는' 모래톱에 실려 온

플라스틱 조각 모으기 같은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어떤 재료도 경시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사용했던 것

이라면 무엇이건 모든 재료를 이용한다. 색의 선택은 가장 작은 분모를 나타내는 공급 단계에 머무를 뿐이다.

색이란 다른 재료와 접촉하면서 대기와 빛에 반응하여 수명을 다한 후에라야 흥미로운 것이 된다."

 

 

 

 

배리 플래너건, <십자가 위에서 권투한는 토끼들>, 1985년, 빌뇌브다스크 현대 미술관

배리 플래너건은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는 형상 주조의 취향이나 조상술의 위대한

전통에 대한 존중보다는 중력의 법칙을 농락하는 듯한 역학적 특징에 의거하여 청동 작품을 만들었다.

불안정성과 무례한 취향은 서로 결합하여 친숙한 동물 우화를 온전히 빚어냈는데, 그는 특히 토끼를 자주

등장시켰다. 조각가- 마법사의 모자에서 튀어나온 토끼는, 여기에서 텍스 에이버리의 만화 주인공의 특징인

불손한 생기를 통해 모든 종류의 인간 활동, 또는 모범적인 공공 기념물을 경쾌하게 패러디했다.

 

 

 

 

베르나르 파제스, <접시꽃 빛 장식., 1986년, 국립 현대 미술 센터 소장, 파리

화려한 다색상을 띤 베르나르 파제스의 조각은 놀라운 조우의 장소다.

그 장소에서는 가장 조화를 이루기 힘든 친숙하고 평범한 재료들이 바로크적이며, 커다란 울림을 주는

편성 속에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조화에서 즐거운 감정이 솟아난다. 아주 원초적이면서도

기교적인,  동시에 문화적 참조로 가득한, 또한 도발적이고 태양을 지향하는 그의 조각은 여기에서

마치 세상의 지리멸멸함에 다시 형태를 부여하는 듯하다. 그리고 파제스는

그 세상의 가장 소란스러운 에너지를 취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무제>, 1998년, 개인 소장

비극적 기념비로서 유태인 대학살을 환기시키는 이 작품은 성상벽과 유사한 모습을 통해 성(聖)과 속(俗)

사이에서 사진술의 신비로운 힘과 살인적 폭력을 보여준다. 볼탕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깨지기 쉬운

약함과 소멸의 개념을 검토한다. 나의 작품이 유년기가 나의 흥미를 끌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유년기이기 때문이다."

 

 

 

 

백남준, <올랭프 드 구쥬>, 1989년,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파리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파리시의 미술 주문품이다.

이 사진은 1989년 라울 뒤피의 <요정 전기> 앞에 설치될 당시 찍은 것이다.

존 케이지의 동료이자 플럭서스의 결정적 인물이었던 백남준은 전문가들의 손아귀에서 비디오를 빼앗아

온갖 새로운 실험을 단행했다. 그는 모니터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창조해 냄으로써 비디오-조각을 고안했다.

그의 비디오-조각품들은 이 작품에서 보듯 호의적인 로봇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다니엘 비랑, <카페 드 리슬리외>, 1993년, 그랑 루브르

그랑 루브르에 위치한 이곳은 이전에 재무성 장관 사무실로 쓰이던 장소이다. 장 미셀 빌모트는 예술품으로 가득한

이 장소의 재단장 작업을 맡아었다. 그리고 그 노정 한가운데에 잇는 이 카페의 살롱 장식을 다니엘 뷔랑에게 맡겼다.

뷔랑은 사신이 즐겨 사용하는 '시각적 도구'  각각 8.7센티미터 너비이 교차되는 줄무늬로 무장하고 작업에 뛰어들었다.

 

 

 

 

로베르 콩바스, <R. F.>, 1988년

1987년부터 자유 구상의 신동이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던 콩바스는 '좀더 회화적인' 어떤 것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콩바스의 회화는 의도적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지니고 세분화된 양상을 띠었으며, 스테인드글라스나 채색 문자를

연상시켰다. 또한 가장 방대한 주제들을 다루는 현대적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회화적 맹렬함은 경쾌하

면서 은어(隱語>적인, 그리고 성적인 강박 관념으로 넘치는 대중적 영감을 마음껏 분출시켰다.

 

 

 

 

장 미셀 바스키아, <붉은 얼굴>, 1981년, 개인 소장, 파리

바스키아는 아이티 이주민의 아들로 뉴욕 브룩클린의 빈민 구역에서 태어난 흑인이었다.

그는 곧 이름을 날렸는데, 오히려 'Samo' 라는 고유명으로 더욱 알려졌다. 그는 영광스러운 월계관을 쓰고

갤러리 구역과 지하철을 침범하는 보복적 그래피티 작품에 서명했다. 뉴욕 전체가 단어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야만적이며 열광적인 그의 그림에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따라서 1982년부터 그는 자잘한 작업들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미완성인 자신의 성급한 그림들처럼 바스키아는 너무 강렬하고 너무 빠르게 살았다.

그는 28세가 되기도 전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였다.

 

 

 

 

지그마르 폴케, <필경사>, 1982년, 사치 컬렉션, 런던

폴케는 뒤셀도르프에서 요제프 보이스에게 비우고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만났다.

그는 1960년대 독일의 비평 방식에 미국 팝 아트의 메아리를 만들어낸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세대를 특정지었던 표현주의로의 회귀 흐름가 멀찍이 떨어져, 플력서스의 뒤를 이어 수많은

경험과 실험의 장으로서 회화를 고안하였다. 이때부터 모든 수단은 '민감한 표면' 을 탐구하기에 적절한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그 표면 위에서는 매우 다양한 화학적, 테마적 구성 요소들이 조우하였다. 여기에서는, 먼 옛날의

데생 작품에 대한 어렴풋한 인용과 불확실한 몇 점의 색채가 나나내는 우연한 윤곽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윤곽은 장엄하고 낭만적인 풍경을 표현하는 듯한 모습을 띠었다. 변덕스러운 감각에 의해 좌우된다.

이러한 감각은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듯한 기법을 통해 '엷은 인프라'의 섬세한 유황질을 탐험하는 데 적합한 것이다.

이 새로운 감각의 영역을 설명하기 이해, 뒤상은 '방금 사람이 떠난 자리의 열기' 를 자주 예로 들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 <무제. 16 IV>, 1987년, 보부르 갤러리, 파리

바젤리트는 1969년부터 형상을 거꾸로 놓았는데, 이는 오직 회화적 요소들만을 통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현주의적이라기보다는 도발적인 그의 회화는 다양한 영향력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의 회화 속에는

포트리에이 '인질' 연작과 셰삭의 조각, 통속화, 19세기 독일 회화, 그리고 에밀 놀데와 에드바르 뭉크,

나아가 바젤리트의 동료인  펭크 회화의 영향이 나란히 나타나 있었다.

 

 

 

 

 

외르크 ㅇㅁ멘도르프, <카페 도이칠란트-슈테른>, FRAC에 이해 생테티엔 현대 미술관에 기탁

이 악몽의 세계는 여러이미지와 음울한 역사적 인용으로 잔뜩 짓눌려 있다.

또한 그 세계는 여기에서 거대한 독수리를 쓰러뜨려 바의 의자로 땅에 못 박아 놓았다.

이 독수리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에세서 비롯된 해빙되는 빙산에 갇혀, 역사의 겨울의 볼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겨울은 이 볼모에게 치유될 수 없는 무기력이라는 천형을 내린다.

 

 

 

 

 

안토니오 사우라, <초상 nº2-87>, 1987년

삶의 비극적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흑백의 강렬함은 초상화 기법과 예수 수난도의 주제,

또는 고아의 그림 속 개의 고독에 뿌리 박고 있다. 안토니오 사우라는 과거와 현재 미술의

몇몇 강렬한 시기에 대한 흥미, 기괴한 것에 대한 매혹, 시각의 잔인성과 아이러니, 외설적

인 것의 아름다움에서 동기를 얻었다. 그는 지시적이거나 상징적인 모든 고려 위에 위치한

현상학에 대한 도발적 풍자를 통해 '현대성을 조명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미겔 바르첼로, <세 개의 빛>, 1986년

'미술관과 아틀리에, 도서관을 오가는 빵장수처럼 작업' 했던 이겔 바르첼로는 잭슨 폴록과의 근접성을 내세웠다.

폴록은 현기증 나는 '드리핑' 기법 앞에서 이미지가 새로이 떠오르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바르첼로는 그림을 가득히 장악하여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끈적임'을 변형시키고자 했다.

또한 마그렙과 아프리카 땅, 또는 도서관 서가로의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사드로 키아, <푸른 개의 전설>, 1988년, 다니엘 탕폴롱 갤러리

트랜스아방가르드의 선구자인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는 이렇게 썼다.

"키아의 문화적 방랑벽은 이중의 기억을 가진 장소에 있다. 이 이중의 기억이란 유럽 미술 스타일의 위대한 전통,

그리고 대중 사회에서 이용되는 이미지의 일상적인 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패러디적인 기억의 아이러니는

비록 가장 피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키치나 지시적 효과, 이미지의 과도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세이 미야케, 카르티에 재단 전시회, 1998년, 파리

上 ) 전시회 왼쪽 부분, 下) 전시회 오른쪽 부분

모든 종류의 규칙과 관습 탐구의 교차 지점에서, 종합 문화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는 네 명의 미술가를 초청,

자신의 '폴리츠 폴리츠' 의 의상 라인에 참가시켰다. 그리고 이 공조 작업의 결과는 '메이킹 씽즈' 전시회 때

장 누벨이 지은 건물의 높은 유리창에서 나타났다.  이 네 미술가는 놀라운 패치워크로 투명성을 포장했으며,

이 투명성이란 바로 모든 이질 문화를 수용하는 창조 작업에 의해 요구된 것이었다.

 

 

 

 

일리야 카바코프, <축제nº 4>, 1987년, 프랑스 갤러리, 파리

"뛰어난 서술적 미술인 카바코프의 미술은 포스트모던한 우리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전능함이 붕괴된

시대에 속한 것이다........" 라고 1985년 보리스 그로이스는 서술하였다. 도미니크 보조는 카바코프에세서

'자신의 창조 행위의 밑받침으로서 자기 자신을 가둘 줄 아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훌륭한 화가들 중

한 명'의 모습을 발견했다. <축제> 연작에서는, 캔버스에 꿰매 붙인 다채로운 색의 표현이 화풍을

대신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초등학생 노트의 바둑판 모양 페이지의 짜임을 준수하고 있다.

 

 

 

 

마르셀 부추타스, <벨기에의 흑인 문제>, 1963년

40세가 되기  직전 조형 예술 쪽으로 돌아서기로 결심한 이 벨기에 시인의 아주 초기 작품들 중 하나다.

이후 마르셀 브루타스는 철을 미술 상품 및 미술관과 교배시켰다. 그는 '무의미한 형태' 가 미술 속으로

유입되어 들어오는 것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조롱과 자조, 절망은 이처럼 아방가르드의 마지막 현신을

뒤엎으려 시도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미 게으른 사람들에 대한 오래된 속담 - '새로운 트릭,

새로운 술책' - 과 전시회의 해묵은 찬란함에 침착하게 굴복해 있었다.

 

 

 

 

얀 케르살레, <부두의 밤>, 1991년, 생나제르

역광을 어둠 쪽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만질 수 없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일시적인 빛의 조각을

만들어냈다. 그는 결코 적절치 않은 조명등이나 신중치 못한 탐색으로 어둠을 헤치지 않으면서

어둠을 그려냈다. 그는 여러 개의 작은 기둥을 붓으로 삼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되고

방치된 조선소에도 불구하고 이 항구는 도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장소였다.

이 항구 위에서, 얀 케르살레는 표면을 비스듬히 비치는 조명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자일로의 천연 콘크리트의 질감을 고양시켰다. 그리고 나사못의 끝없는 움직임을 통해

크레인에 생기를 부여하였다. 또한 현장에서 포착된 모든 정보를 컴퓨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표현함으로써조명의 활력에 역동성을 부여했으며 점등과 소등의 장면을 조절했다.

 

 

 

 

인용 : 장 루이 프라델 지음 · 김소라 옮김 <라루스 서양미술사 중 현대미술>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미술 II  (0) 2021.02.19
중세 미술 I  (0) 2021.02.18
현대미술 I  (0) 2021.02.15
서양 근대 미술 II  (0) 2021.02.14
서양 근대 미술 I  (0) 2021.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