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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서양 근대 미술 II

카지미르 말레비치, <구보하는 붉은 기병대>, 1918~1930년, 러시아 미술관, 상테페테르부르크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말레비치는 붉은 기병대와 그 정복을 통해 미니멀적이면서도 웅장한

하나의 비전을 표현하였다. 말레비치의 독특한 구성 원칙으로서 무리들의 수평 상태는 하늘,

그리고 색계와 상상 세계의 힘을 통해 승화된 땅의 무한 면적을 강조하고 있다.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볼셰비키 당원>, 1920년, 소비에트연방 군사박물관, 모스크바

붉은 깃발을 앞세운 볼셰비키 당원이 교회를 포함한 장애물들을 짓밟으며서 단호하게 전진하고 있다.

쿠스토디예프는 1917년 혁명의 위대함을 강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충만하고 장식적인 색들은

러시아 전통 양식 '루복' 을 연상시킨다.

 

 

 

 

알렉산드로 로트첸코, <포토몽타주>, 1920년 혁명박물관, 모스크바

"예술을 삶으로 전이시키는" 작업을 더 잘 이행하기 위해 로트첸코는 포토몽타주와 같은

새로운 미술기법에 구축주의 이론을 적용하였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VII을 위한 초벌그림 2, nº 182>, 1913년, 시립미술관 렌바흐하우스, 뮌헨

이 작품은 칸딘스키의 최우선적 성향인 음악을 연상시킨다. 그는 선과 색,  그리고 음악 사이의

등가( 等價)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후 역시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된는 작곡가 쉰베르크는

이 작품에서 12음 기법과의 대비를 발견하였다. 입체파 시기를 겪지 않은 드문 추상 화가들 중

하나였던 칸딘스키는 대상에 대한 어떠한 집착도 내보이지 않았다.

 

 

 

 

알베르토 마넬리, <서정적 폭발, nº 8>, 1918년, MNAN,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전쟁의 종결은 나넬리에게 <서정적 폭발> 연작의 영감을 주었다. 이 연작은 타원 절단면들로

이루어진 세션된 추상 작품으로, 미래파 운동에 대한 화가의 결연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미래파 스타일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프란츠 마르크, <작은 노란 말들>, 1912년, 국립미술관, 슈투트가르트

마르크는 모든 작품에서 동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동물은 아름다운 것, 순수한 것, 진실한 것을 향한 그의 열망을

구체화 시켜주는 이상적인 존재였다. 이 강렬한 은유 속에서 노란 말들은 - 노란색은 감미로움을 상징한다 - 내면적인

존재의 지혜와 자유를 표현한다. 이러한 말들은 인간의 주거지가 흐릿하게 표현된 우주의 움직임 속에 포착되어, 불안감

을 띠고 있는 검은 하늘의 풍경과 대비를 이룬다. 말들의 숙인 머리와 완전히 곡선으로 이루어진 몸의 표현은 그들의 순진

성과 내면화된 쾌락을 강조한다. 1912년에 이미 칸딘스키는 마르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전쟁 발발의 예감을 드러냈다.

 

 

 

 

라줄로 모호이노디, <A.XI>, 1925년 주립미술관, 뮌스터

헝가리 출신인 모호이노디는 바우하우스 구축주의의 가장 충실한 대표자가 되었다.

엄격학 순수주의에 속하며 정제된 색게를 사용하고 있는 이 추상 구성은

20년부터 전개된 구축주의의 두 번째 시기에 속한다.

 

 

 

파울 클레, <붉은 풍선>, 1922년,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있으면서 이 공상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구축주의 경향과 무관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회화에 대한 생기 있고 역동적인 개념을 통해 칸딘스키에 근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개념을 언제나 음악과 연관시켰는데, 여기에서 음악은 공의 상승과

색채의 선명함 속에서 나타나는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좌) 오스카 슐레머, <여인들의 계단>, 1925년, 바젤 미술관

이 그림은 슐레머의 <그림-화랑> 연작에 속한다. 이 연작들은 모두 사전 습작 단계를 거쳤으며

그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제작되었다. 형체 표현 구조의 강조, 인체 모형

과 같은 인물 윤곽의 도식적 표현은 조각가로서의 재능 역시 보여주고 있다.

 

우) 바실리 칸딘스키, <밝은 타원 속에>, 1925년, 티센-보르네미차 소장, 마드리드

중심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왼쪽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고유의 기하학적 형태들은 원심력에 의해 움직이는

동양풍의 기호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 기호들은 명랑한 리듬 속에서 자유로운 추상적 표현에서

벗어난 색계는, 좀더 어두우나 여전히 강렬한 색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처럼 강렬한 색들은 1930년에 다시 중심적인 색채가 된다.

 

 

 

 

좌) 빌모스 후스자르, <구성> , <<데스테일>>의 표지, 1916년, 헤이그 시립미술관

1905년 네덜란드로 이주한 헝가리인 후스라르는 신조형주의의 관점에 동의하였다.

그는 1917년 '데 스테일' 운동과 동명 잡지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우) 피터 몬드리안, <청색 구성>, 191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오텔로

'덧셈' 과 '뺄셈' 기호들로 이루어진 연작 그림들을 그린 후, 몬드리안은 중간색의 사각형과

흰색 배경에 자유롭게 배치된 절단 형태들이 이루는 리듬 쪽으로 선회하였다.

이러한 스타일은 반 데어 렉에 가까운 것이었다.

 

 

 

 

테오 반 되스부르크, <역 구성>, 1924년, 스테델릭 미술관, 암스텔담

반 되스부르크는 그의 구성을 사선으로 기울어지게 만듦으로써, 몬드리안에 의해 엄격하게 비판받은

운동(運動)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역 구성>이라는 제목은 이 운동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927~1928년에 스트라스부르의 카페 극장 '오베트'를 장식하면서

신조형주의 법칙을 한층 더 위반하였다.

 

 

 

 

게리트 리트벨트, <적색과 청색의 의자>, 1917년

숙련된 가구 제조인이었던 리트벨트는 이 유명한 의자에 데 스테일 이론을 적용시켰다.

즉, 공간 속에 기하학적 형태와 순수한 색들을 투영해 놓았다.

 

 

 

 

쿠르트 슈비터스, <콜라주>

이 메르츠는 우연과 조롱에 의해 구상된 것으로, 다다이스트들에게서 차용한 기법인

'회수해 모은 요소' 들을 통해 표현되었다. 휴고 발의 표현을 빌자면 다다이스트들은 '새로운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 내기 위해 기한이 지난 문화의 비참한 파편들' 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메르츠는 그것을

예술작품의 범주 안에 위치시키게끔 만드는 미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조르지오 키리코, <형이상학적인 실내>, 1917년, 폰 데어 하이트 미술관, 부퍼탈

15년부터 1918년까지의 전쟁 기간에 페라리에 피신해 있던 키리코는 1917년 카라와 함께 '형이상학적 회화'

의 원칙들을 정립하였다. 겉으로 보아 무질서하고 낯선 방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실제로는 건축과 기하학적

요소들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다. 이 요소들은 원근법과 심도, 반사, 실제 세계와 상상적 세계에

대한 성찰을 암시한다. 키리코의 영향력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 근본적인 것이었다.

 

 

 

막스 레른스트, <세 증인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그리고 화가 앞에서 아기 예수를 혼내는 성모>

1926년, 장 크렙스 부인 소장, 브뤼셀

기 로솔라토의 표현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는 '신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인 성모와 아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사이의 우상파괴적 분리가 나타난다. 에른스트는 몇몇 그림에서 자신을 아기 예수와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리는 다다의 정신과 피학적 쾌락 원칙,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신성모독에

속한 것이었다. 여기서 삼위일체는 브르통과 엘뤼아르, 그리고 에른스트로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공들인

데생과 매끈한 기교, 삼각형에 초점이 맞추어진 구조는 초현실주의 양식과 잘 부합한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1928년에 뚜렷이 부각되었다.

 

 

 

 

르네 마그리트, <가면을 벗은 우주>, 1931년 또는 1932년, 개인 소장

사막의 대지와 파괴된 집 위에서, 하늘은 상상적 세계의 힘에 의해 육면체들의 유희가 되었다.

이 그림은 유년기의 색인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프란시스 피카비아, <여인과 얼굴>, 1933년경, 개인 소장

칸에서의 사교 생활이 끝난 후 피키비아는 브르통과 뒤상으로부터 멀어짐과 동시에 1933년 일종의 고독을 되찾았다.

그는 거트루드 스타인과의 오랜 서신 교환을 시작하였으며,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1927년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전통 회화와 유리의 투명성에 관한 뒤상의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투명성> 연작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맥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린 소녀>(1935년, 개인 소장, 밀라노)에 가까운 이 투명성은 오히려 전통적인 초상화 위에 성모상의

슬픈 얼굴을 겹쳐놓은 것이었다. 또한 이 투명성은 두 개의 이미지를 뒤섞기 위한 것이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보이지 않는 사물>, 1933~1935년, 메그 재단, 생폴드방스

자코메티는 아르키 펭코의 아틀리에에서 조각을 공부한 후 다색배합과 추상이라는 가장 변화무쌍한

스타일 쪽으로 변화해나갔다. 그리고 1930년에서 1935년까지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나의 토템을 연상시키는 이 인물상은 낯설고 은밀한 것에 관한 초현실주의적 맥락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이미 선의 연장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 경향은 1947년 이후의 작품에서 분명해진다.

 

 

 

 

호안 미로, <달팽이, 여인, 꽃, 별>, 1934년, 개인 소장

1934년 미로의 '야생 회화' 시기가 열렸다. 이 시기는 193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1939년에는 '성좌(星座)'

시기가 이어졌다. 캔버스의 표면을 차지한 것은 낮설거나 불안감을 주는 기호들, 생물체 형태의 단편들

혹은 인체의 단편들(얼굴, 활짝 벌려서 뻗은 손)이다. 해독이 어려운 문자들, 논리적 관계없이 위약(僞藥)적

몽환적 내용을 담은 필적들이 이를 에워사고 있다. 미로는 파시즘 이후 나치즘의 출현, 그리고 특히 그를

혼란에 빠뜨린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사회적 긴장의 시대 속에서의 불안을 표현하였다.

 

 

 

 

살바르도 달리, <욕망의 수수께끼>, 1929년, 오스카 슐라그 소장, 취리히

달리는 무의식적 충동과 환영(幻影)의 장소인 사막의 공간에서, 새에 가깝게 변형된 형상화를 통해

정신적 이미지들의 결합을 창조해 냈다. 이는 꿈의 해석에 관한 초현실주의적 맥락 안에 위치한 것이다.

세밀한 기법과 정교한 데생, 그림자를 드러낸 표현은 상상의 자유로운 유희를 가능케 한다.

 

 

 

 

살바르도 달리, <깨어나기 1초 전 사과-석류 주위의 꿀벌 한 마리의 비행에 의해 야기된 꿈>,

1944년, 티센-보르네미차 소장, 마드리드

달리는 1930년부터 고유의 편집관적-비판적 방법론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내면세게의 초상학을 창조하기 위해' 착란적 · 몽환적인 이미지들을 관람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맡겼다. 1941년에 그는 고전적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 하였다.

 

 

 

 

벤 니콜슨, <채색된 부조>, 1939년, MOMA, 뉴욕

니콜슨은 활동 초기이 사실주의로부터 추상 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리고 1933년과 1934년에는 추상-창조 그룹의 행동에 참여하였다.

 

 

 

 

 

프란티섹 쿠프카, <수직선들의 언어를 위한 습작>, 1911년, 티센-보르네미차 소장, 마드리드

수직선의 이러한 변형은 쿠프카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고딕 성당들의 건축술과

음악에서 음의 진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다. 쿠프카는 1911년 황금 분할 그룹의 일원이 되었으나

그로부터 급속히 멀어져 오르피슴에 합류했다. 오르피슴은 색에 ㄷ한 그의 취향에 더 잘 들어맞았다.

 

 

 

 

 

 

 

 

 

페르낭 제제, <화살표를 따라가시오>, 1919년,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시카고 운동의 상징으로서 화살표의 주제는 클레오 칸딘스키에 의해 사용된 바 있었다.

기계적인 요소들의 이러한 동시적 병치는 대각선의 효과와, 직사각형과 함께

대위법을 이루는 원반들의 효과에 힘입어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메데 오장팡, <세상의 창조>, 1929년, 개인 소장

이 공상적인 구성에서는 순수주의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로의 변화가 명확히 나타났으며, 참신하고

복잡한 소재가 일련의 정물을 대신하고 있다. 정물들의 건축적이고 엄격한 기하학은

시적 · 유희적인 정신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헨리 무어, <길게 드러누운 거대한 형상>, 1938년, 무어 재단

무어는 인간 형상을 양식화시킨 조각들을 통해 고졸기 조각과 초현실주의,

추상, 자연주의 원칙들의 융합을 실현하였다.

 

 

 

 

장 아르프, <머리>, 1927년, 나탈리 세루시 갤러리, 파리

식물적 구조에 가까우며 불안정하고 분간할 수 없는 형태는 이 작품에 유머가 깃든

시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1916년에서 1922년까지 아르프가 가담했던 다다이즘의

맥락속에 위치한 것이다. 구성의 간결성과 색계의 세련미 역시 추상으로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러나 그에게 자연은 예술의 근원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1930년 그가

원과 사각형 그룹 내에서 문드리안의 엄격주의와 대치하도록 이끌었다.

 

 

 

 

오토 그리벨, <인터내셔널>, 1930년, 독일 역사박물관, 베를린

그로메르와 피뇽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여전히 표현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스타일을

통해 그리벨은 30년대 독일의 위기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장식적 효과를 배제한 소름끼치는 다수의 효과를

배제한 소름끼치는 다수의 효과를 통해 나타난다. 그 자신 역시 좌파적인 정치적 신념을 확신하는 모습으로

맨 앞줄에 표현되어 있다. 노벰버루페의 일원이었다가 이후에 신즉물주의의 일원이 된 그는 1927년 딕스와

함께 드레스덴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그는 1933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마르셀 그로메르, <실업자>, 1936년, 개인 소장

화가는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종합적 사실주의 양식을 통해 1929년 공황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조건의 가혹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인물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흙빛에 호소하고 있다.

이때는 그가 입체파 스타일을 포기한 이후였으나, 건물의 표현에서 입체파 스타일이 눈에 띤다.

 

 

 

 

 

그랜트 우드, <스톤 시티>, 1930년, 조슬린 미술관, 오마하, 네브래스카

1928년 뮌헨 여행을 마친 후 우드는 미국으로 완전히 돌아와 황토주의적인 주제들에 몰두하였다.

자유로운 스케치들 후 세밀한 데생과 채색을 거친 <스톤 시티>에서는 산업용 건물들에서만 인간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드는 구성의 힘을 통해 풍경화의 원시적 스타일을 쇄신하였는데, 이는 미국 자연에 하나의 찬가를

바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국가적 아이콘이 된 <아메리칸 고딕>을 통해 초상화의 장르를 넘어섰다.

 

 

 

 

에드워드 호퍼, <밤의 배회자들>,1942년,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미국의 향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호퍼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미국 사회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는 데 전념하였다. 유럽 사실주의자들보다 덜 비판적인 그의 기법은 사진술의 영향을

드러내며, 팝 아트를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기법은 또한 이 야행성 인간들의 고독을

민감하게 재생해 낸다.

 

 

 

 

디에고 리베라, <정복에서 혁명까지>, 1930년, 코르테스 궁전, 쿠에르나바카

이 프레스코화의 스타일은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과의 단절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원근법 처리에 있어 지방의 민간 전통뿐 아니라 아즈텍과 마야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사파타>, 1930년,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혁명적 사실주의가 깃들어 있는 오로스코의 기법은 아스텍 미술의 전통과

지극히 구조화된 표현주의의 종합에 의해 유명해졌다.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자화상>, 1945년, 멕시코 미술관

어두운 색들로 이루어진 이 시케이로스의 자화상에서는 입체파와 표현주의적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몸짓의 강렬한 역동성과 매우 강한 표현력을 담고 있는 표정의 강조를 통해 나타난다.

 

 

 

 

카럴 빌링크, <아인슈타인>, 1932년, 빌링크 부인 소장

빌링크는 1928년부터 사실주의로의 회귀를 실행하였으며, 이때 마술적 사실주의 정신의 삽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조적인 그림을 제작하였다. 그는 아인슈타인과 한 프린스턴 대학 교수와의 만남을 베를린으로

옮겨 놓았다. 이 만남은 나무 방책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를린 장벽을

예고하고 있다. 이 장면은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대학에 받아들여지는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사실주의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또한 마술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한데, 이는

야릇한 경관과 사실적인, 혹은 극사실적인 색들의 효과 때문이다.

 

 

 

 

벤 샨, <핸드볼>, 1939년, MOMA, 뉴욕

이 미국인 화가는 삽화가이자 석판공이기도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1906년에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31년 사코와 반제티의 소송과 같은 사회적 소재를 다루었으며, 1932년

에는 리베라의 록펠러 센터 프레스코 벽화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도식화되어 있으나 사실주의

적인 방식으로 일상적 환경 속에 있는 인물들을 포착하였다.

 

 

 

 

좌) <대도시> 왼쪽 패널,  우) <대도시> 오른쪽 패널

 

<대도시> 가운데 패널

오토 딕스, <대도시>, 1927~1928년,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

딕스는 부르주아와 상이군인, 매춘부들이 섞여 있는 밤의 광경들을 통해, 니체의 허무주의에 가까운 신랄한

야유로써 도시의 인위적 쾌락의 추악함과 위선을 고발하였다. 작품의 중심부는 따뜻한 색들로 채색되어 어두운

옆면들과 대조를 이룬다. 붉은색이 주를 이루는 중앙 패널은 마치 화산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야행성 인간

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 교차하지 않으며, 그들의 즐거움은 진짜가 아니다. 왼쪽 패널은 딕스

자산과 동일시된 상이군인이 아무런 환상 없이 매춘부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발치에

있는 사람의 형체는 개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화가와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 동안 전투에

참가했다가 잊혀진 사람들, 즉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희생자들의 비참함을 육화하고 있다. 오른쪽 패널에서는

야단스럽게 치장한 여인들의 순회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신흥부자들의 취향에 들어맞게 대리석과

돌로 된 공상적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배경 속에 표현되어 있다. 이 건축물들은 여성에 관한 성적 표현에 대한 암시

로서 지각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딕스는 신즉물주의적 사실주의를 포기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매너

리즘과 제단 장식화의 위대한 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원근법 없이 세계를 표현하였다.

 

 

 

 

게오르게 그로츠, <꿈>, 1930년, 개인 소장

이 공상적인 작품은 전쟁의 현실을 둘러싼 신화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성격을 띠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스타일은 1914년 오토 딕스에 의해 제작된 <꿈>(폴크방 미술관, 에센)과는 매우 다르다.

그로츠는 잡지 <행동>과 <파산>의 캐리커처리스트로서 베를린에서 데뷔하였고,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6년에 부상을 입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반군국주의자로 되돌아왔으며, "인간은 하나의 짐승이다"

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1918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59년 독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 사망하였다.

 

 

 

 

폴 내시, <영국 전투>, 1940년 8월~10월, 왕립 전쟁미술관, 런던

2차 세계대전 기간 왕립 공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내시는 심하게 병을 앓았다.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까운 시기를 지난 후, 상징주의적 방식을 되찾아 폭격의 장면을 그렸다.

이 장면에서 비행기들은 새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영국 전투>는 한 마리 새의 시선의 각도를 따라

템즈강 어귀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습을 연상시킨다. 하얀 연기의 자유분방한 모양은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독일 비행기들의 빈틈없는 대형과 대조를 이룬다.

 

 

 

 

조지프 코넬, <비누 거품 세트>, 1936년, 워즈워드 아테네움, 하트포드, 코네티컷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초현실주의에 속해 있던 코넬은 193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환상 미술 다다와 초션실주의' 전시회에서 장기 연작 <거품 세트>의 첫 번째 견본을 전시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뒤상을 만났으며, 뒤상의 <가방 속의 상자>에서 영감을 얻어 <박물관> 연작을 제작하였다.

 

 

 

오스카 코코슈카, <우리는 왜 싸우는가>, 1943년, 취리히 미술관

1938년부터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코코슈카는 1차 세계대전의 현실을 체험했다.

그는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십자가 수난 주위의 연합자들 위에 구축된 이

냉소적인 알레고리는 주교와 가톨릭교회를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전경에 위치한 볼테르의

야유하는 시신 아래 나치의 깃발에 둘러싸여 있다.

 

 

 

 

빌리 바우마이스터, <아프리카 회화>, 1942년, 쇠포르 소장, 파리

1928년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의 교수직에서 해고된 바우마이스터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염료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는 수상-창조 그룹 이후로 원과 사각형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이후에는 1937년에서

1941년까지 표의문자와 아스켁 도는 아프리카의 모티프들로 구성된 그림들을 그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호안 미로의 풍경화에 가까운 형이상학적 · 초현실주의적 풍경화들을 그렸다.

 

 

올리비에 드브레, <다카우의 죽음>, 1945년, 흑연과 검정 구아슈,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파리 미술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드브레는 1942년부터 순수 추상 작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축소된 기호들의 집합ㅁ을 통해 존재에 대한 감정을 옮겨놓았다. 여기서는 전쟁과 외국인 수용소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 화가의 억제된 몸짓과 검정색, 흰색은 액션페인팅의 충동을 부인하며, 자오 우키와 이마이 같은

동양의 서예가 혹은 화가들의 기법과 닮아 있다. 전쟁 후에도 추상을 고수한 드브레는 점점 더 큰 판형의 서정적

 제작하였다. 이 그림들은 종종 자연 상태의 강렬한 색들로 채색되었다.

 

 

 

 

 

한스 아르퉁, <T. 1938. 32>, 1938년, 개인 소장, 다이넬 제르비 갤러리, 파리

아르퉁은 1935년 조국 독일을 떠나 장 엘리옹과 앙리 괴츠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그는 1939~1943년 외인 부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벨포르 공세 |때 심하게 부상을 입어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데생을 했고, 이는특히 비바람이 치는 저녁들에 연필로 그렸던 <번개의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오랜 훈련으로 인해 그는 단번에 극단적 엄격성을 띤 추상 작품들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의 습관에

따라 명백하게 기법, 제작년도, 일련번호(32)를 가르킨다. 자연스럽게 늘어지면서 퍼지는 것처럼 보이는 물감이 분출

되어 있는 그림의 배경은 아직 밝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전도되어 배경은 어둡거나 검정색이 되며, 빛의 모습은

밝거나 흰색이 된다. 아르퉁은 일종의  고독 속에서 독자적인 미술을 구현하였다.

 

 

 

인용 : 에디나 베르나르 저 · 김소라 옮김 <라루스 서양미술사 중 근대미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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