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그림의 左 부분, 下) 그림의 右 부분.
길버트 & 조지, <HIM>, 1985년, 앤서니 도페이 갤러리, 런던 사진
1950년대 이후 영국 현대 작가들의 공통된 작품 경향은 부조리에 대한 저항, 일상성과 불안한
개인 심리를 담아내기 위한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화 등의 크로스오버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미국의 신개념주의와 팝 아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이 트웜블리, <로마>, 1964년, 개인 소장
종이 위에 색연필, 데생, 50×6cm, 글씨와 흔적의 중간에서, 선은 인간 지진계와 데생의 맹목적
기억이 이끄는 대로 부서지고 분노하며 지워지거나 드러난다. 자크 데리나는 이러한 데생을
'생략과 소멸' 사이에 위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작품은 다양한 문화적 기준을 다룸으로써 불가사의한
성격을 띤다. 롱랑 바르트는 이렇게 서술하였다. "요컨대 이것은 기울어진 형태와 갈겨쓴 흔적만이 남은
필체와도 같다...... 이것은 떨어지고 미세하게 쏟아지며, 풀처럼 눕고 무력감을 통해 삭제한다.
마치 시간과, 시간의 떨림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처럼....."
칼 안드레, 리처드 롱,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놓여진 자이틀로스 전시회 전경, 1998년, 베를린
하랄드 제만은 이 전시회를 통해, 1980년대의 신표현주의 회화로 '회귀' 할것을 독려하기 위해
6년 전 베를린에서 크리스토스 요알히메데스와 노먼 로젠탈이 개최한 '자이트가이스트(시대사조)'
전시회에 응수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시대정신 대신, 시대를 초월한 기념비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의 함부르크 반호프역을 용도 변경한 공간 속에 놓여진 이작품들은 조용하고 근엄하며 신비스럽다.
아무런 사용 목적도 없는 이 작품들은 현대 미술에 내재한 숭고미의 영속성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궁녀들>, 1957년, 8월 17일, 피카소 미술관, 바르셀로나
캔버스 위에 유채, 194×260cm, 이 유화는 58점의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벨라스케스의 구성을 따른다.
피카소는 60년 전인 1897년 마드리드에 머물 당시 그 구성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대한
형제애적인 아이러니의 뉘앙스가 깃든 재해석이라 할 수 있는 이 <궁녀들> 연작은 프라도의 거장에 대한
친밀감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재해석은 1955~1956년의 <아틀리에>의 작업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작품
들 역시 같은 아틀리에인 칸의 켈리포니아에서 제작되었다.
위 <궁녀들>의 왼쪽 부분 확대.
위 <궁녀들>의 오른쪽 부분 확대.
아스게르 요른, <공급과 수요>, 1969년, 개인 소장
캔버스 위에 유채, 130×97cm, 코브라 그룹의 본능적 격렬함에 충실했던 요른은 순수한 색과
풍부하고 충만한 표현을 향한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폭발시켰다. 그의 친구인 시인 그리스티앙
도트르몽은 "그는 걸작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는 너무 크게 웃었고 너무
격렬하게 살았으며 너무 많이 즐겼다" 라고 표현했다. '원시적인 현대인' 이었던 요른은 자신이
창작한 작품에서 야생 그대로의 에너지를 보여주고자 했으며 미술의 육체적, 관능적 기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장 뒤뷔페, <파랑이 일렁이다>, 1964년, 개인 소장
이 그림은 1962년부터 1974년까지 12년 동안 전념했던 '우를룹' 연작 특유의 특성을 띤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미술에는 쓰이지 않는' 재료의 표현을 포기하고, 선영(線影)과 두꺼운 검정 윤곽선
안에 표현된 세 가지 일관된 색조의 균형 잡힌 회화적 구조를 활용한 것이다. 총체적 미술을 추구하는
이 얼룩덜룩한 퍼즐 속에서 모든 종류의 친숙한 모티프는 공간 속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말 그대로
헤게모니적인 목적으로 효과적인 견제 세력을 구성하고, 세상의 현실을 얼마간 문제 삼는다.
장 뒤뷔페, <네 그루 나무의 그룹>, 1970~1972년, 체이스맨허튼 광장, 뉴욕
반 문화의 선구자가 제작한 이 반자연적인 기념물은 전부 페리니 쉬르 예르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되었다.
이 아름다운 우르룹 덩어리는 폴리에스테르 모형을 뜨거운 줄로 자른 다음 흰새과 검은색의 폴리우레탄
그림이 입혀진 에폭시수지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곳은 배로 운송되어 뉴욕의 큰 은행들 중 하나 앞에
설치되었다. 10미터 이상의 폭에 높이가 12미터에 달하는 이 굳어진 나무 부케는 "잠재성의 파도'를
향해 열린 '정신적 공간' 의 윤곽을 그려 보인다. 그리고 그 잠재성 안에서는 땅 전체를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번식성의 화풍이 어느 정도 명확히 드러난다.
피에르 알레친스키, <어린 소녀와 죽음>, 1966~1967년, 마리온 르페브르 소장, 비벌리힐스
이 그림은 먹으로 그린 '가장자리 표시' 연작으로서, 유령의 출현에 의한 순수한 환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벽한 사각형을 표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림의 기법과 묘사나 서술에서 기법의 명백한 정확성은
아크릴릭의 미끄러짐을 포함하고 설명하며 해설한다. 완전히 새로운 이 회화 재료는 액체성으로 매우 빨리 마르는
성질이 있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복잡다단한 많은 표현이나 덧칠하기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또한 아크릴릭을
통해 거대한 심연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는 괴물들의 무리에 거침없이 저항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코브라의
생기와 자연스러움, 자유가 회복되었다. 이러한 몸짓의 환희는 시와 회화를, 그리고 불치의 이미지들과 우연에
의해서인 것처럼 솟아오르는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얼굴들을 보는 즐거움을 경쾌하게 뒤섞어놓았다.
발튀스, <터키 침실>(세부), 1963~1966년,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발튀스는 오라스 베르네가 장식한 빌라 메디치의 배경 속에 일본인 여자 친구 세츠코를 그려놓았다.
그는 15세기 시에나 회화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분화되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장식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멀리 있는 한 줄기 진주모 빛이 나타내는 부재의 윤곽을 뚜렷이 보여준다. 배경의 기하학적
문양은 도발적인 곡선을 따라 박혀 있듯 촘촘히 그려져 그림의 표면에 그 곡선들의 반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곡선들 자체는 시선과는 무관하게 거울에 포착된다. 피에르 장 주브는 이렇게 말했다.
"발튀스의 그림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이 존재한다. 보이는 것이 더 억압적으로
나타날수록 더욱 그러하다.
프랜시스 베이컨, <이사벨 로스돈의 초상화를 위한 세 개의 습작>
렘브란트 혹은 벨라스케스의 전통 속에서, 베이컨은 결코 중단하는 법 없이 비극적이고 비장하며
피와 색채들로 가득찬 초상화와 자화상을 그리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 그림들은 생명의 에너지와
실존적 고통으로 가득 차 우리의 면전에서 폭발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몸짓의 소요를 통해 그 못짓과
고통은 단번에 지워질 수 있다. 그는 타세에게 "나는 가장 일상적인 자신의 삶, 매일매일의 삶 속에
있으면서 우리의 죽음과 대면해 있는 인간을 표현한다" 라고 고백했다. "인간들은 이미지와 움직임
으로 귀착된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확신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프랜시스 베이컨, <울부짖는 교황 또는 이노켄티우스 10세>, 1953년, 윌리엄 버든 컬렉션, 뉴욕
벨라스케스 작품의 재구성. 벨라스케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는 "너무나 진짜 간다!"
라고 외쳤을 것이다. 찬탄을 받는 만큼 비난도 받았던 그 작품은 결코 전통적인 계보에서 나온 작품이 아니었다.
대중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 작품은 거의 은밀한 성격을 띠고 고독한 화가들의 독점적 관심사가 되었다.
티티엥의 말에 따르면, 영광의 절정에 있던 벨라스케스는 인간 계층의 가장 높은 자리에 다다랐던 그의 특별한
후원자와 대등하게 소름끼치는 정면 맞대면을 한 것이다. 베이컨의 숭배의 표현 중 하나를 빌자면, 인물을 놀랍
도록 고립시키는 그림 속에 깊은 고독의 '이미지' 가 남아 있었다. 벨라스케스에서 베이컨의 작품까지 한결같은
'집중' 이 나타난다. 그것은 화려한 치장과 변장한 모습의 인간, 사치스럽게 넘쳐나는 천과 레이스 속에 뒤덥힌
육체 너머의 것이거나 그것들에 기인하는 집중이다. 공식적인 초상화란, 그림의 기술을 측정하는 이미지이자,
젊은 시절의 베이컨이 1920년대의 베를린에서 대면했던 가장을 통해 미술사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통행증
에 지나지 않았다. 이 그림에서 위대한 벨라스케스가 사용했던 시간과 공간에 화답하는 것은 베이컨의 격렬한 흥분
과, 죽음을 향해 열린 뚜껑 문을 통해 아래로 떨어지는 한 사형수의 울부짓는 흔적이다.
피에르 술라주, <회화 1956>,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술라주의 회화는 그것의 모든 물질성의 힘과 있음의 효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정면성에 대한 시선과
곧장 맞서게 되었다. 그의 회화적 성격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흔적과, 그 흔적에 의해 펼쳐지고 진동하고
튀어 오르는 빛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공간 관계자들의 리듬' 이 덧붙여졌다. 이 공간에서는, 어두운 빛에 의해
잠식된 표면의 여기저기에서 배경의 광채가 뚫고 나왔다. 로제 바이앙에게 술라주는 일단 '캔버스 위에서 달리기
시작하면' 그 '스타일' 을 알아볼 수 있는 한 명의 '챔피언' 이었다. 술라주는 구성보다는 조직에 대해 이야기했다.
구성이란 '이미 존재하는 상투적인 요소들로 만들어낸, 부자연스럽고 판에 박혀 있으며 미리 계획한 조직' 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릴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우리를 휩쓸어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조직한다. 그것은 조각난
. 우리는 그것을 다시 조직한다. 그리고 우리도 조각나 버리자."
로베르토 마타, <예언자>, 1954년, 개인 소장
1939년 뉴욕으로 건너간 마타는 동작(動作)의 오토마티즘과 공간적 자유의 방식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기법들은 아주 세로운 미국의 화가 세대에 영향을 끼쳤다. 화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에너지가 중지된 상태의
이 그림은 "원근법을 일종의 미해학으로 대체하고, 동시에 거리의 공간을 의미의 공간으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일종의 즐거운 묵시록이며, 화가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겁먹은 채로'
그것의 위대한 주관자로 남아 있다.
위프레도 람, <정글>, 1942~1943년, MOMA, 인터 아메리칸 펀드, 뉴욕
이 선명한 작품은 람이 쿠바로 회귀함을 나타낸다. 이 작품과 더불어 마침내 국제 미술 무대에
제3세계가 등장했으며, 혼혈종의 세계적 미술이 나타남으로써 기존의 문화적 지형도가 깨지게 되었다.
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여전히 숲의 잔해들을 간직한 채 식물 상태에서 동물 상태로
옮겨간다. 치명상을 입힐 준비가 딘 칼은 주의 깊고 불안한 존재가 된다.... 부드럽거나
잔인한 성(性)은 마치 번개와 같다..... "
잭슨 폴록, <푸른 기둥, 11번>(그림의 오른쪽 부분), 1952년, 호주 국립 갤러리 캔버라
극도의 밀도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캔버스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강렬한 리듬을 부여한 것은 페인트를 적신 나무
막대기의 흔적들이다. 이 작품은 회화적 '멜팅 팟' 의 혼란스러운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 회화적 멜팅 팟이란 피카소
와 미로, 마송의 유산과 1930년대 멕시코 벽면주의의 공헌 및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래 회화에 대한 열정이 뒤섞여
생겨난 것이다. 화면 전체는 '드리핑' 기법의 '조절된' 우연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효과는 구멍 뚫린 통에서 흘러
내리거나 제과용 주사기에서 뿜어져 나온, 혹은 딱딱한 털의 붓이나 솔에서 솟구쳐 나온 색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미술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액션 페인팅' 이라 지칭한 모든 작업은 작품 속에서 무의식을 나타냈다.
잭슨 폴록은 이 뒤얽힌 세계를 열광적으로 개척하여 그 속에서 균등한 시각적 재료인 '올 오버' 를 재단해 내고자 하였다.
이것은 천체의 운행을 마치 내면적 욕망처럼 친근하게 만들 수 있었다. 추상표현주의 '거인' 인 잭슨 폴록은 '혼란을 더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그림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번호를 매겼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눈에 그는
'회화의 역사에서 미국 최초로 중요한 공헌' 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윌렘 데 쿠닝, <들판의 두 여인>, 1954년, 허션 미술관, 워싱턴
새로운 뉴욕화파의 모든 화가 중에서도 윌렘 데 쿠닝은 가장 많은 파문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추상표현주의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했으며, "미술은 결코 나를 달래주거나
정화시킨 적이 없다" 라고 되풀이해 이야기 했다. 그는 자신이 '감각의 입김' 이라고 일컫던 것을 중시하였으며,
망설임 없이 인물상으로 돌아가 미술관을 채우는 모든 회화적 영감을 담은 신성불가침의 여성 누드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이작업은 그러한 누드화를 모든 면에서 공격하고 부수며, 형태와 비형태가 서로 괴롭히는 고통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러한 그림은 두 눈을 감은 채 느끼는 무의식 미학의 극한에 닿아 있었으며, 격렬한 몸짓 속에
회화와 데생을 뒤섞음으로써 결코 작품이 완성된 듯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남자>, 1947년, 에메 & 마그리트 매그재단, 생 폴 드 방스
보편적 인간을 상징하는 이 형상은 기억에 의거해 만들어졌으며, 이집트 미술과 "걷는 인간은 자유인"
이라는 포르루아얄의 논리를 되살린 청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자코메티는 장 클레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거리를 걷는 인간은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으며, 어쨌건 죽거나 쓰러진 인간보다 훨씬 덜 무겁다. 작품들의
실루엣을 빚으면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이 가벼움이다.
리처드 해밀턴,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흥미롭게 만드는가?>, 1956년,
게오르그 준델 박사 컬렉션, 튀빙겐 미술관, 25×26cm
이 작은 콜라주 작품은 "이것이 내일이다" 라는 전시회 포스터와 카탈로그 표지용으로 구상된 것이다.
이 전시회에는 열두 그룹이 모였는데, 그들이 참여하면서 주제로 삼은 것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관계였다.
이 작품은 팝 아트 최초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으며, 마르코 리빙스턴은 이 작품의 '매우 예언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리처드 해밀턴은 그때까지 미술과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새로운 종류의 기법들을 모색하여 복제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다양화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중 지배적인 것은 가전제품과 광택지 위의 관능성으로 표현된
'독신(獨身) 기계' 들이었다. 해밀턴은 10년 후 마르셀 뒤상의 요청으로 <큰 유리>를 재구성하였다.
데이비드 호크니, <클락 부부와 퍼시>, 1970~1971년, 테이트 갤러리 수탁, 런던
"나는 이 그림이 자연주의에 가장 근접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은 거의 실물 크기 그대로이고, 그리느라
더욱 힘이 들었다..... 내가 해내고 싶었던 일은 이 두 인물 사이의 관게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맥 샤인씨는 두 인물을 그린 내 초상화들이 모두 '수태고지' 와 같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즉, 한 인물은 언제나 흔들
림 없는 자세이고 다른 인물은 그 사람을 '방문' 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앉아 있는 이눌이 오씨라는
점이 이상해 보인다. 보통은 서 있는 실리아가 그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앤디 워홀, <아홉 명의 재키>, 1964년, 일리아나 소나벤드 컬렉션, 뉴욕
1963년 댈러스에서 일어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전후에 언론이 찍은 사진들 덕분에 앤디 워홀은
이 사건의 변화무쌍한 이미지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재키 케네디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흑백의 표현을 통해 효과를 높였다. 그는 1963년 말 모든 팀을 이끌고 이스트 47번가 231번지의 커다란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 작업실은 곧 '팩토리' 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회화와 영화의 '공장' 인 이곳에
퍼져 있는 기상천외한 흥분을 표현해 냈다. 그는 모든 수단을 섭렵하였으며, "내가 블루진처럼 단순한 무언가를
발명해 냈으면 좋았을 것" 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단지 빠르고 강한 효과만이 중요했다. "나는 늘
내가 삶을 사는 것 대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추적자>, 1964년, 프랭크 틸먼 부부 소장,
"회화는 미술, 그리고 삶과 연결되어 있다. 둘 중 어느 것도 제작될 수는 없다.
(나는 그 둘을 갈라놓는 틈 안에서 활동하고자 한다.)" 라우센버그는 추상표현주의나 팝 아트와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그의 '컴방인 페인팅' 작품들은 추상적 캔버스 위에 아무 관련 없는 물건들을 마구 가져다 붙임
으로써 팝 아트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기법은 뒤샹의 '레디메이드' 와 블랙 마운틴 칼리지의 '헤프닝' 에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라우센버그는 앤디 워홀처럼 전사 사진을 이용하여 역설적인 추상 구성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저명한 문화적 인용과 미디어의 성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조지 시걸, ,레스토랑 윈도우 1>, 1967년, 루트비히 미술관, 퀼른
텅빈 주형 속에 유령같은 인물들이 정체성의 희끄무레한 익명성을 체념하고 닫아들인 채
친숙한 사물들의 세계를 드나든다. 이 무심한 행인들 위로는 신비한 세상의 종말이 닥친 듯하다.
일상의 무대 설계자라 할 시걸은 그 금욕적인 간결성으로 곧장 핵심에 다다르게 되는 형태적
구조 속에 인물들을 위치시켰다. 도시의 파편 속에서 포착된 이 고독한 인물들의
기이한 침묵은 부재를 향해 열린 공간을 영원으로 가득 채운다.
홀리오 레 파르크, <연작 31 D nº 2/2>, 1957~1970년 개인 소장
콜라주. 홀리오 레 파르크는 캔버스나 단순한 입체 위에 14색계의 무한한 가능성과 기초적인 그물눈
스크린 전개를 표현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행하였다. 구조와 움직임, 빛, 또는 환경에 관한 이러한
탐험을 통해 시각 미술의 객관적 법칙의 효율성과, 야릇하 매혹이나 황홀감의 기쁨이 결합되었다.
방법상의 철저한 엄격성과 정확한 표현은 감미로운 색의 풍요로움을 창출해냈다.
이 풍요로움은 놀라운 파동의 떨림과 인상적인 3차원적 환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장 탱글리, <유래카>, 1963~1964년, 취리히호른 공원, 취리히
장 탱글리가 만든 가장 큰 조각품이 이 작품에서 그는 모든 것을 검은색으로 칠함으로써
'반(反) 누보 리얼리즘' 을 나타내 보인다. 이러한 검정 채색은 빛을 흡수하는 동시에, 이 작품을 구성하는
'습득물' 들의 일화적이고 회고적이며 친밀한 성격을 없애고 형태의 윤곽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기념비적이고 비극적인 이 <유레카>는 의미와 기능의 부재를 통해 '호모 파베르' 의 터무니 없는
낙관주의를 뒤흔들기 위한 시한 폭탄과도 같았다. 이 작품은 1959년 트리스탄 차라에게서
다다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은 미술가라는 칭송을 들은 적이 있는 탱글리의 요동치듯
소란스러운 조롱을 극명히 표현하기 위해 공간 속에 세워졌다.
이브 클링, <부조-스펀지 16, 블루, 도, 도, 도>, 1960년 개인 소장
클랭에게 색이란 회화 그 자체였다. "나는 색이 무제한의 차원으로 퍼져나가고 도시와 국가의
대기를 흡수했으면 좋겠다......" 안료를 머금은 스펀지는 상징적인 효과를 위해 붙여놓은 것으로,
재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색이 퍼질 수 있게 해준다.
아르망, <쇼팽의 어털루>, 1962년,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1961년부터 아르망의 '분노' 는 도용 작업의 행보를 격화시켰다. 이러한 행보는 '도장 자국'에서 시작되어,
'쓰레기통' 으로 연장되고 '직접' 작업을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베르나르 라마르슈 바델은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외연을 강조하였다. "아르망은 사용 설명서와 교환 가치의 광신자들을
후퇴의 욕망과 철저한 파괴의 업적에 대조시켰다."
인용 : 장 루이 프라델 지음 · 김소라 옮김 <라루스 서양미술사 중 <현대미술>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미술 I (0) | 2021.02.18 |
---|---|
현대미술 II (0) | 2021.02.16 |
서양 근대 미술 II (0) | 2021.02.14 |
서양 근대 미술 I (0) | 2021.02.13 |
19세기 서양미술 II (0) | 2021.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