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그리, <체스놀이>, 1915년,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스페인 태생의 후안 그리는 피카소, 브라크 등과 함께 입체파 운동을 시작했으며,
일생을 입체파 화가로 지냈다.
그의 그림은 주로 녹색과 흑색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앙리 마티스, <강둑>, 1907년, 바젤 미술관
마티스의 이 풍경화는 색의 고취, 그리고 물에 비친 이미지의 전도 효과에 의해 강조된
대각선의 움직임을 통해 여전히 야수파와 결부되어 있다.
폴 세잔, <멱감는 여인들>, 1906년, 테이트 미술관,런던
알몸의 여인들 여럿이 호숫가이 외딴 숲 속에서 쉬고 있다. 가장 오른쪽의 두 여인은 몸을 말리고 있으며,
가운데이 세 여인은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의 피부에 빛이 반사되고, 수면과 하늘의
푸른색이 일렁거린다. 세잔은 모델보다 기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이 작품에서 그가 의도한 것은
실제의 충실한 재현ㅂ모다는 멱감는 사람들과 풍경의 어우러짐이라는 전통적 주제의 탐구였다.
펠릭스 발로통, <집과 갈대>, 1921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조르주 퐁피두 센터
활동 초기에 사실주의자였던 발로통은 뒤이어 나비파의 원칙들을 받아들였다가
1918년 이후 다시 사실주의자가 되었다. 그후 그림의 힘은 소재를 몇 가지 중심적인 색면들과 담백하고
시적인 색계(色界) 로 환원함으로써 얻어지는 표현의 자율성의 확립에 있다.
발로통은 다리파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리스 이트리요, <라삥 아질(날렵한 토끼라는 뜻. 여기서는 동음이의의 언어 유희로 사용됨)>
1910년,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이 그림은 이트리요의 '백색 시대' 작품이다. 그는 습관대로 자신이 좋아한ㄴ 장소들 중 하나였던
몽마르트르 언덕의 술집에서 영감을 이끌어냈다. 이곳은 한때 '암살자들의 술집' 이라고 불리었다가,
캐리커처리스트 앙드레 질 을 기념하기 이해 생겨난 말장난인 '라삥 아질 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알코올 중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위트리요는, 고전적인 하강 실서를뒤엎으면서 가장 높은 건물들을
원경에 위치시키는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앙드레 질은 이러한 대담성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있어
일관성과 조화를 유지한 위트리요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작가 롤랑 도르즐레스가 프레데의 당나귀인
알리보롱으로 근대미술에 대한 가장 짓궂은 사기극을 준비한 것도 라삥 이질에서였다. 이 당나귀는 꼬리로
<아드리아해의 일몰>이라는 훌륭한 추상 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1910년 독ㄹ핍화가전에 전시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근대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조롱을 나타낸 짓궂은 장난이었다.
이두아르 뷔야르, <보나르의ㅣ 초상>, 1930~1935년경, 프티팔레 미술관, 파리
보나르 초상화의 예비 단계인 이 습작은 실내화를 좋아하는 뷔야르의 취향과, 두 화가를 이어준는 깊은
우정을 보여준다, 뷔야르는, 습관대로 화가에 올려놓지 않고 벽에 걸어놓은 자신의 그림을 끊임없이 수정했다.
주의 깊게 참관하고 있는 작은 개의 유머러스함은 보나르가 동물에 대해 품었던 애정을 상기시킨다.
피에르 보나르, <보트를 탄 시냐크와 그의 친구들>, 1914~1924년, 취리히 미술관
이 시기에 보나르는 친구인 화가 망갱, 시냐크와 함께 생트로페즈에 자주 머물렀으며, 바다의 푸르스름한 빛과
반짝임에 기꺼이 매혹되었다. 그는 변함없는 습관에 따라 이 그림을 수없이 수정하였다. 그는 1911년과 1913년
사이에 한 번의 위기를 겪었다. "빛이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둔" 후, 인상주의 화가들의 희미한 터치로 되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금 선과 구성에 충실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쁠랑(원경)의 병치를 통해 공간을 제어
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림에서 소실점을 제거하였다. 대각선 효과와 퐈폭의 한계에 의해 잘려나간 보트의 배치는
일본식 기법을 연상케 한다. 빛을 차가운 색으로, 그늘을 따뜻한 색으로 표현한 채색법의 대담성은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엄격한 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라울 ㅜ디피, <세 개의 양산>, 1906년, 휴스턴 미술관
아브르에서 태어난뒤파는 노르망디의 해안에서 자주 영감을 얻었다. 1905년 파리츼 가을 살롱전에 출품된 마티스의
그림 <사치, 고요, 그리고 쾌락>을 보고 감탄한 뒤파는 야수파의 원칙들에 동의하게 된다. 양산들의 순수하고 강렬한
색과 역동적 선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데생의 힘은 이미 1908년의 짧은 입체파 시기를 예고하고 있다. 1918년부터
그는 고유한 스타일을 찾아가게 되는데, 이는 선명한 색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화풍, 하강하는 원근법으로 특징지어진다.
앙드레 드랭, <에스타크>, 1905년, 개인 소장, 파리
1905년 드랭은 마티스와 긴밀한 협력 관계에서 작업하였으며, 에스타크의 풍경에 대한 관심을
마티스와 공유하였다. 드랭은 가장 순수한 야수파 스타일을 사용하면서, 보색인 녹색에 의해 고양된
빨간색으로 에스타크의 풍경을 표현하였다. 그는 1908년부터 입체파로 선회하였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사투의 다리>, 1906년, 아농시아드 미술관, 생트로페즈
모든 야수파 화가들 가운데 블라맹크만이 생의 마지막까지 야수파의 원칙에 충실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드랭과 함께 샤투파를 조직했던 파리 근처의 마을 샤투의 풍경을 표현한 이 그림은 순도 높은 색들의
터치에 의해 고양되어 있다. 이러한 터치는 화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 <클리우르를 향해 열린 창문>, 1905년, 존 헤이 휘트니 부인 소장, 뉴욕
야수파의 원칙에 따라, 마티스는 풍경과 같이 여러 개의 창틀 역시 비자연적인 강렬한 색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스타일은 신인상주의적인 몇 가지 흔적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흔적들은 소실점이 없는 쁠랑들을
통해 뚜렷이 나타나며, 짧고 강한 터치에서 은근히 엿보인다. 마티스는 이창문의 주제를 일생 동안 반복하여
그렸다. 그 마지막 작품은 1914년에 그리기 시작한 <콜리우르의 프랑스 창> 이었다. 아라공의 표현에 따르면
은 "지금까지 그려진 그림들 중 가장 신비스럽다. 또한 인생과 마찬가지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작가 자신은
아직 전혀 알 수 엄ㅄ는 어떤 소설의 '공간' 을 향해 열려 있는 것 같다."
앙리 마티스, <창가 풍경, 탕헤르>, 1912년, 푸슈킨 미술관, 모스크바
마티스는 1912년에서 1913년에 걸쳐 모로코의 항구도시 탕헤르에 체재하였으며,
아랍풍의 화려한 색채와 이국정서에 1세기 전의 들라크루아처럼 매혹되었다.
푸른색에대한 마티스의 집념은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했지만, 모로코의
풍경을 다룬 작품들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프리차 리드러의 초상>, 1906년, 외스터라이히 미술관, 비엔나
클림트는 에밀리 플뢰게, 소냐 닙스, 엘리자베트 비텐슈타인 등 비엔나 지식인 계급 부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비대칭 구성을 통해 엿보이는> 일본미술의 경향과, (배경에서 나타나는) 중세와 비잔틴
미술의 경향을접목시키려 하였다. 전경과 원경이 뒤섞여 있으며, 모티프의 반복과 표면의 2차원성을 통해
형태가 비물질화되어 있다. 이 시기 비엔나의 다른 유명한 초상화가들 중 하나인 리하르트 게르스틀과는
반대로, 클림트가 그린 인간 형상의 엄숙함은 그 형상이 매우 고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에
일종의 차분함을 부여한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화가와 그의 모델>, 1907년, 함부르크 미술관
키르히너가 다리파 그룹을 조직한 지 2년 후 그려진 이 그림은 형태와 인물의 양식화에 있어 판화가로서의 재능,
그리고 원시 미술에 대한 지식의 적용을 보여 준다. 배경에서는 여전히 실내화파와 일본미술 애호 및 발로통과
마티스의 영향, 그리고 막막하고 고독한 인물의 처리와 반 고흐 및 뭉크의 영향이 나타난다. 도발적인 사선과,
유사한 색조로 표현된 순색들은 보색 효과에 의해 완화되어 있다.
좌) 에드바르 뭉크, <다리 위의 소녀들>, 1905년,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쾰른
뭉크는 1899~1935년까지 12점의 유화와 몇 점의 판화를 통해 이 주제를 반복했다.
선의 힘, 비현실적이고 충만한 색들이 이루는 유사색조의 힘은, 이 장면에 자연에 대한 시(詩)적 통찰과
결부된 감정적 강도를 부여하고 있다. 거꾸로 뒤집혀 물에 비친 영상들이 빚어내는 소용돌이와 현기증
효과는, 상징주의자들이 지적하였듯이 소녀들의 정신세계를 연상시킨다. 뭉크는 이 주제에 대해
점점 더 차분한 버전들을 내놓았는데, 특히 <선창(船艙)가의 부인들>이 그러하다.
우) 오스카 코코슈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초상>, 1924년경, 개인 소장, 뉴욕
비엔나파의 창시자인 작곡가 쇤베르크의 이 초상화는 코코슈카가 비엔나에 체류할 때 제작되었다.
당시 쇤베르크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화가는 일종의 정신적 혼란을 표현함
으로써 모델의 심층적인 심리 상태 를 적나라하게 나타냈다. 모델은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그린
쇤베르크의 초상화와는 매우 달리,엄숙하게 무게를 잡지 않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가는
그레코나 고야처럼 얼굴의 미세한 변형을 지향하는 표현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오스카 코코슈카, <바람의 약혼녀>, 1914년, 바젤 미술관
이 그림은 코코슈카가 1913년 나폴리에서 알마 말러와 함께 목격한 폭풍우의 장면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 틴토레토와 베네치아 하가들의 정교한 색계(色階)를 모방하였다.
이 그림에서 코코슈카는 알마 말러의 곁에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당했다.
원소들의 휘몰아침 속에 실려 가는 두 연인의 모습에 깊은 우수가 깃들어 있다.
에곤 실레, <손가락을 벌리고 있는 자화상>, 1911년, 시립 역사박물관, 비엔나
실레는 본래 아르누보에 근접해 있었다가 비엔나 표현주의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황량하고 공상적인 풍경화와
초상화,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강박적 탐색과 인간의 존재, 삶과 죽음에 관한 고통스런 성찰을 보여주는 자화상
들을 그렸다. 정신분석학에서 영감을 얻은 실레는 도발적인 에로티시즘을 담은 누드화들도 그렸는데,
이로 인해 1912년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세라핀 루이, (일명 세라핀 드 상리스), <석류>, 1930년, MNAN,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세밀하게 그려낸 꽃과 잎들의 반복적 밀도가 그녀의 정신적 혼란을 잘 나타낸다. 이때는 화상이자
후견인이었던 빌헬름 우데가 그녀를 버렸던 힘든 시기였으며, 이후 그녀는 그로 인해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식물세계에 대한 애니미즘적인 접근, 윤기 나는 기법 새계(色階) 의 세련미는 화가
로서 그녀의 재능을 증명한다. 소재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성들 때문에
그녀는 가장 훌륭한 화가들의 반열에 위치할 수 있었다.
앙리 루소(일명 두아니에 루소), <표범의 습격을 받는 흑인>, 1907년, 바젤 미술관
두아니에 루소의 상상력과 공상적인 정신은, 판에 박힌 이국적 풍경의 소박한 느낌을 정교하게 묘사된
천국 같은 숲으로 변모시켰다. 이 작품으 인간에 대한 동물의 잔인한 공격을 통해 공포에 짓눌린 느낌을 준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장식깃을 한 부인(한스카 즈보로브스카)>, 1917년,
국립 현대미술갤러리, 로마
생전에 거의 인정받지 못했던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양식화된 누드화와 초상화들이었다.
세련되고 우울한 기품을 띤 이 얼굴은 모딜리아니가 이탈리아의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연구했던 에트루리아
미술과 시에나의 고딕 미술을 연상시킨다. 그는 또한 세잔의 초상화들 및 바올레족과 야운데족의
아프리카 가면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모이즈 키슬링, <난파당한 여인>, 1927년, 클라이만 소장, 파리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태어난 키슬링은 가난하고 병든 모딜리아를 자신의 아틀리에에 맞아들였다.
차갑고 절제된 농도를 띠고 있는 그의 초상화와 풍경화에서는 초창기부터 세잔과 드랭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영향은 1918년 전쟁이 끝난 이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 전쟁에서 외인부대에 복무했다.
강렬한 색으로 이루어진 장식적 모티프에 대한 그의 취향은 깊은 시정(詩情)이 깃든
구성의 간결한 처리와 결합되어 있다.
쥘 파생, <잠자는 두 여인>, 1928년,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가볍게 하강하는 시점이 이 장면의 비현실적이고 관능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파생은 그의 작품을 여인이나 친구들의 초상화에 할애했다. 이 초상화들은 반쯤 변화된 투명한 색조의 조화
속에서 그려졌으며, 사랑과 죽음의 주제를 관통하는 가벼운 아이러니로 가득 했다.
레오나르 후지타, <주이(Jouy) 산천이 있는 누드>, 1922년,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1961년 화가 기증
가벼운 유머를 담고 있는 이 세련된 누드화는 일본인 미술가에 의해 그려졌다. 그는 방랑기를 거쳐
1913년 이후 파리에 정착했으며, 1925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레오폴드 1세 훈장을 받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누드 초상화와 자화상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림에서 보이는 데생의 정확성과 담백한 색계, 알코브(alcove, 벽을 움푹하게 만들어 침대를 들여놓은곳)
의 소실점 없는 검정색 배경과 대조를 이룬 진주모빛 육체는 그가 일본미술의 원칙에 충실했음을 증명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주이 마을의 풍경을 그려낸 '트왈드 주이' 패턴은 다양한 소재의 천에 여러 톤의 색채로
프린트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 수틴, <박피된 소>, 1925년, 개인 소장, 뉴욕
수틴은 유태인 전통문화의 금기들과 죽음의 주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채도가 높은 색들, 그리고 차가운 색 배경으로 돋보이게 만든 빨간색을 특히 좋아했다.
매우 표현주의적인 형태의 해체는, 정면 구성상 원근법적 요소의 결여로 인해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 1884~1895년, 로댕미술관, 파리
로댕은 백년 전쟁 당시 영국인 점령자에게 스스로 투항함으로써 도시를 파멸에서 구했던 칼레 시민들 여섯 명의 희생을
기념하는 이 조각상을 제작하였다. 이 죽음의 행렬 속에서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 장 데르, 장 드 피엔느, 앙드레 당드리외,
피에르 드 웨쌍과 자크 드 웨쌍은 모든 감정적 뉘앙스, 특히 손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이 선택한 비극적 죽음 앞에서의 고독
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영웅적 움직임의 표현에는 통일성이 없으며, 작품의 구성 역시 피라미드형을 기본
으로 하지 않고 지면에 고정된 입방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격렬한 비판을 유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칼레
시의회는 "이들의 의기소침한 태도는 우리의 종교와 상충된다" 고 비판하였다. 로댕은 다비드의 피라미드형 구성 법칙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파리에 있는 나는 저 과장된 에콜(Ecole) 미술의 반대자이다. 그런 미술을 한다는 것은 내가 경멸
하는 관습적 미술가들의 추종자가 되기를 스스로 원한다는 의미이다." 공권력의 뒷받침, 그리고 실패에 대한 강박관념
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자신의 주변성을 지켰다. 에드몽 드 공쿠르가 '인상주의적' 이라고 평가했던 그의 작품은 1889년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모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러나 로댕은 인상주의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특수성을
지켰다. 이 특수성이란 곧 작품의 독립성과 3차원적 입체성, 그리고 결정면들로 이루어진 표면작업을 의미한다. 특히
이 표면작업은 움직이는 느낌을 주며 늘 불안정의 극에 닿아 있는 감정들의 사실성을 전달한다. 반 아카데미적이고
상징적인 조각을 통해, 로댕은 초월에 대한 영원한 의지를 나타내는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였다.
파블로 피카소, <수병(水兵)의 흉상>, 1907년, 피카소 미술관, 파리
이 그림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리기 위한 일련의 장편 습작들 중 일부를 이루며,
<아비뇬의 처녀들> 최종판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의 여성적인 표현과 수병의 의상을 통해 화가가 표현하고 있는
모호성이 이례적이다. 그러나 시선의 깊이는 전형적인 피카소의 스타일이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MONA, 뉴욕
자연과 미술 사이의 결정적인 단절을 만들어냄으로써 어떤 그림보다도 혁신적이었던 피카소의 이 첫 번째
입체파 회화는 세잔의 초상화와 아프리카 가면에 대한 그의 매혹을 보여 준다. 또한 입체파 회화란 "시각의
현실이 아니라 관념의 현실에서 차용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아폴리네르의 정의를 예증한다.
머리가 둘 달린 코트디부아르 가면, 아프리카 · 오세아니아 미술관, 파리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이 재현적이면서 동시에 반자연주의적 예술임을 깨달았으며,
수많은 아프리카 미술가들이 몸체와 두상을 합체하는 것이 자기의 주제에 대한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르주 브라크, <포르투갈 사람>, 1911년, 바젤 미술관
이 그림은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순수한 시기에 속한다. 인물들의 주요 형태는 아직 식별이
가능하다. 한편 형상의 해체와 갈색 및 회색의 색조로 그려진 기하학적 요소로 해체된 배경
을 통해 그림 전체는 놀라운 동질성을 보여준다. 브라크는 처음으로 형지(型紙)로 뜬 문자와
숫자들을 도입하였다. 그는 이 문자와 숫자들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기호들 자체의 형태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는 1912년의 파피에 콜레 작품들을 통해 이 시도를 계속해 나갔다.
좌) 파블로 피카소, <인생>, 1903년, 클리블랜드 미술관
스페인 표현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피카소 청색 시대의 이 알레고리 속에는
우수와 모성이라는 주제의 심각함이 드러나 있다. 그림 속의 장치는 입체파 시기에 있어
지각 작용과 미술작품의 한계에 관한 피카소의 성찰을 나타낸다.
우) 자크 비용, <모험>, 1935년, MNA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입체파 운동이 1914년에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모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세잔의 영향을 받은 바 있었던 비용은 1912년 황금 분할 그룹에 합류하였다.
그의 형태 표현은 과학적 논리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여전히 구성의 정확성을
색의 순수함 및 투명성과 결합시키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 소피아 왕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몰라 장군의 '철의 원'에 의해 바스크 지방이 포위되었을 때, 독일에 의해 파견된 콘도르 부대의
참모본부장인 폰 리흐토펜은 프랑코 장군의 군대와 함께 '게르니카'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37년 4월 26일
월요일이자 장이 서는 이 날, 독일 공군은 공화국 저항군의 근거지인 작은 도시 바스크를 폭격하였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따라서 게르니카가 보여주는 세상 종말의 광경은 앞으로 이어질
긴 어둠을 예고한다. 피카소는 "회화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위한 전쟁의 한 수단이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그는 "스페인 내전은 민중과 자유에 대한 반동세력의 전투이다. 예술가로서 나의 온 생애는 반동과 미술의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전투일 뿐이었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게르니카>라고 부를 벽화를 통해 나는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 속으로 침몰시킨 군인 패거리들에 대한 공포를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시간
속에 인간과 동물의 형상들이 뒤섞여 있는 이 기념비적 작품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통스러운 여인들의
얼굴과 맹목적 야만성의 상징인 황소, 민중의 상징인 말이다. 반면 자유의 상징인 비둘기는 상처를 입어 죽어가고 있다.
삼각형 구도에 기초한 공간은 입체파의 원칙에 따라 직각의 선과 대각선의 대비에 의해 혼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해된 신체 윤곽선의 확장과 얼굴에괴로움은 피카소의 스타일에 있어 표현주의으 지속적 영향력을 대변한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 공화국 관(館)을 위해 피카소에게 주문된 작품인 <게르니카>는
프랑코의 사후인 1981년 스페인에 반환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앙브루이즈 볼라르의 초상>, 1909년 푸슈킨 미술관, 모스크바
20세기 초으 화가들은 앙브루아즈 볼라르(1865~1939)에게 신세진 바가 많았다.
그는 훌륭한 화상이었으며 천재를 발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이미 1901년에 피카소를 발굴해 냈다.
피카소는 분석적 입체파의 법칙에 따라 투명한 갈색과 베이지색, 회색조를 띤
수많은 기하학적 결정면들을 통해 이 인물을 통해 시적이고 심도 있게 표현하였다.
마르셀 뒤상,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º2, 1912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뒤상은 1913년 뉴욕 아모리 쇼에서 움직임이 해체되어 있는 이 누드화를 전시함으로써
매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매우 간결하고 구조화되어 있는 이러한 해체는
마레와 브리지의 시차사진술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오토 딕스, <전쟁>, 1929~1932년, 국립 미술켤렉션, 드레스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딕스는 <신약성서>와 니체의 <즐거운 지식>을 가지고 참전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의 전선에서
일반 병사로 싸웠으며, 두 번 크게 부상을 입었다. 참호의 끔직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600점 이상의 크로키를
그렸다. 1921년부터 그는 자신의 표현주의 스타일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독일 회화의 근본으로 돌아가 제단 장식
화의 오래된 전통을 다시 취하고, 정교한 글라시(마른 물감위에 투명 물감을 얇게 칠하는 기법)로 채색된 장식 병풍
<전쟁>을 제작하였다. 알트도르퍼의 작품에서처럼 빛과 차가운 색, 구성의 힘은 전투 장면에 비극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병사들은 인간의 틀을 벗어나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딕스는
오른쪽 패널에서 과학적 객관성에 가까운 사실주의적 스타일은 한스 홀바인의 <죽은 예수>(1521년, 바젤 미술관)
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었다. <죽은 예수>는 서양미술에 있어 예수에 대한
첫 번째 세속적 묘사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앙리 고디에 브르제스카, <앉아 있는 여인>, 1914년, 오를레앙 미술관
프랑스 조각가인 고디에 브르제스카는 1911년 런던에 정착하여 소용돌이파의 일원이 되었다.
로댕과 브랑쿠시, 아르키펭코, 그리고 특히 오세아니아 원시 미술의 예찬자였던 그는 인간과 동물의 유기적
형태에 관한 연구를 통해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하였다. 형상의 토템적 · 전통적 양식과 부피의 긴장감, 평평하고
기하학적인 면들로 이루어진 표면 처리는 1922년 헨리 무어의 형태의 단순화에 대한 탐구를 예고하고 있다.
옴베르토 보치오니, <공간의 연속성 속의 독특한 형태>, 1913년, CIMAC,
시립현대미술관, 레알레 왕궁,밀라노
이탈리아 미래파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1912년과 1913년에 나타났다.
입체의 길게 뻗은 형상을 통해 운동을 나타낸 공간적인 조각에 대한 개념은 아르펭코와 나움 가보,
러시아 미래파 미술가들(특히 타틀린의 <탑>에 직접적 영향을 주게 된다>에 의해,
더 후에는 무어에 의해 되풀이된다. 이 작품에는 몇가지 버전이 존재하는데,
가장 큰 것들 중 하나가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노 세베리니, <형태의 역동성 : 공간 속의 빛>, 1912년경, 국립현대미술갤러리, 로마
세베리니는 1906년부터 파리로 망명해 있었지만, 1910년에 이탈리아 미래파 운동에 가담하였다.
또한 1911년에는 미래파 미술가들과 입체파 미술가 피카소, 후안 그리, 브라크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원형의 면들로부터 뻗어나가는 듯한 삼각형 형태로 배열되어 있고 쇠라(Seurat)식의 점묘법으로
구성된 이 추상 작품을 통해 그는 빛과 운동의 조형적 등가(等價)를 실현하였다. 형태와 감정의 이러한 혼합은
현대 기술에 대한 즐거운 오마주이며, 망막의 잔상 현상을 이용하였다.
자코모 발라, <애국적인 데몬스트레이션>, 1915년경, 주커 소장, 밀라노
강한 선들의 조합인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애국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분쟁 속에 참여한 것을 촉구하였으며
이탈리아 미래파 첫 번째 시기의 이데올로기적 노선에 위치한다. 이 작품은 카라의 <애국적 축제>와
세베리니의 <행동 규범>과 마찬가지로 행동 미술을 표명하였다.
발렌틴 세로프, <용감한 어린 병사들! 그런데 너희들의 영광은 어디 있는가?>, 1905년,
러시아 미술관, 상테페테르부르크
세로프는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1905년의 혁명 진압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미하일 라리오노프, <붉은 광선주의>, 1911년, 라리오노프 부인 소장
<청색 광선주의>와 동시에 완성된 이 추상 작품에서 라리오느프는 이탈리아 미래파의
형식 법칙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 사회적 ·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는 삭제하였다.
나탈리아 곤차로바, <황금 수탉>을 위한 무대 배경, 발레 뤼스, 1914년, 오페라도서관, 파리
1914년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에 의해 상연된 <황금 수탉>은 파리를, 특히 H.G. 웰스를 매혹시켰다.
("눈이 부셔 흐려질 정도였다.") 곤차로바는 디아길레프의 두 번재 요청에 응해 라리오노프와 함께
파리로 건너갔고, 무대 배경을 통해 러시아 민간 미술인 '루복' 을 새롭게 되살렸다. 주를 이루는 붉은색과
소박한 화풍, 그리고 초점 없는 공간과 복잡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이 벽화 속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레옹 바크스트, <'목신의 오후'의 니진스키>, 드뷔시의 작품에서 유래한 발레,
1912년, 국립도서관, 파리
'예술의 세계' 운동의 주창자이자 샤갈의 스승이었던 바크스트는 19세기 말의 유럽 미술과
인상주의, 아르테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등 디아길레프 발레의 무대 장치
제작을 맡고 있던 그는 이 수채화에서 목신으로 분한 무용수 니진스키의 모습을 1912년 5월 첫 상연
때의 모습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형태와 색의 매너리즘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의해 심하게 비판받았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호밀 수확>, 1912년, 스테델릭 미술관, 암스테르담
노동의 세계에 바쳐진 이 그림에서 직선원근법이 결여된 공간은 러시아 입체파-미래파의 법칙들에 따라
대조적인 색의 반원형 입체로 표현되었다. 인물들은 금속성을 띤 다발들의 면과 동일화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미래파 작품들과는 달리 전혀 감정적 요소가 드러나 있지 않다. 새로운 인간은 스스로
기계 속에 통합됨으로써 기계를 능가하고 지배한다. 말레비치는 정적인 방식으로 기계를 표현하면서
이탈리아 미래파가 시사한 현란한 움직임을 배제하였다. 말레비치에 다르면 인간은 "인간이 주인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자연의 손길을 추방하여야 한다."
블라디미르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물 모형(복제품)>
1919년, 슈츄제프 건축박물관, 모스크바
타틀린은 19109년 제 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물의 설계를 구상하였다. 이 기념물은 축에서 벗어나
기울어진 나선 형태로, 그 당시 혁명 상황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타틀린이 구상한 <탑>의 세 모형 가운데
모스크바 건축박물관에 소장된 모형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작품이다. 타틀린은 보치오니으 미래파 조각에서
떠올린 구조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조각과 건출의 기능을 융합하려고 시도하였다. 설계 단계에서 <탑>은
유리로 만들어진, 천천히 회전하는 작업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작없실들은 아래에서 위로 각각 육면체, 피
라미드,원기둥, 반구형의 형태이다. 이 작품은 미래파 미술가들의 계획이 겪게 될 운명,
즉 몽상 속에서의 퇴화를 예고하는 하나의 신호였다.
미하일 라리오노프, <타틀린의 소상>, 1911년, MAN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라리오노프의 제자였던 타틀린을 그린 이 초상화는 미래파적인 광선주의와 러시아 전통 미술의
뛰어난 조합이다. 또한 문자들과 '미친 사람' 이라는 뜻의 'balda' 라는 단어의 기입에서
다소간 입체파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다. 얼굴의 종교적인 근엄함은 성상 미술에 가깝다.
이반 푸니, <조각-몽타주>, 1915년, MNAM, 파리
푸니는 1910년 파리에 체류하면서 야수파와 입체파를 발견하고 30점 가량의 <구성>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기본적인 기하학 요소들인 직사각형, 삼각형, 원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요소들은
있는 그대로이거나 채색되 상태의 흔한 재료들을 오려낸 것이었다. 다다의 작품들로부터
구분 짓는 조형적 효과는 이런 엄격성에서 비롯되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절대주의 구성>, 1914~1918년, 스테델릭 미술관, 암스테르담
이 구성은 말레비치 잡신이 절대주의의 채색기라고 정의한 시기에 속한다. 또한 선명한 색의 사용을
통해 절대주의 초기 회화들에서 보이는 흑백의 이완에 비해 일종의 후퇴를 표현한다. 마야코프스키처럼
비행과 우주에 관한 발견에 매혹되어 있던 말레비치는 미술에 있어서의 3차원을 탐색하였으며,
이러한 탐색은 초점이 없고 비대칭적인 공간의 표현을 통해 나타났다.
인용 : 에디나 베르나르 著 · 김소라 옮김 <근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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