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파토리, <팔미에리 원형건물>, 1866년, 피티 궁, 현대예술 갤러리, 피렌체
현재 외관이 심하게 손상된 이 차고는 리보르노의 팔미에리 해수욕장 끝에 위치해 있다.
그림은 밝음과 어둠을 해석하려는 종합적이면서도 격렬한 묘사법인 마키아이올리의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다.
언론기자 디에고 마르텔리는 1787년 파토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언제나 밝고 찬란한 색감에 머무르고 있지만, 우리들은 밝음과 어둠의 마키아이올리를 추구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 떼 나는 밀밭>, 1890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이 밀밭 그림은 반 고흐가 1890녀 7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여겨진다.
빈센트 반 고흐, <두 여자아이>, 189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 쉬르 우아즈 성당>, 189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폴 시나크, <생 트로페 항>, 1894년, 아농시아드 미술관, 생 트로페 시냐크
시냐크는 일찍이 인상주의에 참여한 후 클루아조니즘에 가담하여
쇠라의 방식을 적용하고 있지만 터치를 굵게 하고 있다.
조르주 쇠라, <서커스>, 1891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1891년 독립화가 살롱에 전시된 <서커스>는 미완성작이다.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스런 병으로 인해 쇠라는 전시회의 개장 며칠 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신인상주의 경향의
수장으로 여겨지는 쇠라는 작품의 선을 조화로우모가 결합하기 위해 '논리적이며 과학적이고, 그러면서도
그림 같은' 체계를 발견하길 원했다. 이 작품의 평행선들은 흥겨움과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4~1906년, 바젤 시립미술관
현대 예술, 특히 큐비즘과 야수파에 문을 연 프랑스 회화의 거장인 세잔은 단 한 번도 살롱에 초대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몽상에 심취한 부르주아의 아들이 아니라
한 화가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 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년경, 오르세 미술관, 파리
정물은 화가에게 자신의 '사소한 감동' 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화가가 원근법에 가한 비틀기에 주관적인 시선이 새겨져 있다.
단색의 사용에서 빛깔의 긴장이 드러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붓꽃이 핀 아를 정경>, 1888년, 암스텔담, 국립 미술관
고갱이 자신을 만나러 오기 5개월 전에 반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였다.
그는 '일본 화가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더욱 정확한 생각' 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어떤
모호함의 장막이 제거된 색채를 보기 위해 '다른 빛' 을 보기를 원했다. 색채에 관한 이 깊은
몰두 덕분에 그는 상징적인 의미를 색채에 부여할 수 있었다.
폴 세뤼지에, <부적> (사양다목의 풍경화, 퐁타뱅), 1888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모리스 드니는 이 그림을 "보라색, 주홍색, 베로나의 녹색, 그리고 물감 통에서 나올 때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다른 많은 단색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비정형이 되어버린 풍경"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페르디낭 호들러, <주네브 호수의 저녁>, 1893년, 취리히 시립미술관, 고트프리드 재단 대여
호들러는 풍경화만을 전적으로 그리지는 않았지만 이 장르를 선호했고 또한 가장 뛰어난 개혁자가 되었다.
그는 '풍경화에 의해 광대한 공간을 관통하는 어떤 감정, 즉 숭고한 상승에 대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라고 생각했다.
윌리엄 헌트, <영국해안 (흩어진 양 떼들)>, 테이트 갤러리, 런던
이 그림은 창작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외국 군대 침입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다.
양떼들은 군대 지원자를 상징한다. 그러나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헌트는 제목을 <흩어진 양 떼들> 로 수정하였다.
이로 인해 작품은 방황하는 인류라는 매우 보편적인 의미로, 아니면 성서의 우화가 의미하는 좀 더 협소한 의미에서
당시 논쟁의 대상이었던 종교상의 교리에 관한 입장으로 읽힐 수 있다. 극도의 사실주의와
각 세부의 상징성이 헌트의 특징을 이룬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초원의 연주자>, 1872년, 맨체스터 시립예술갤러리.
얼굴, 실루엣, 옷의 주름, 인물들의 동작에서 보티첼리의 영향이 명확히 나타난다.
에드워드 번 존스 <황금계단>, 1876~1880년, 테이트 갤러리, 런던
276×117cm 크기의 이 유화의 주제는 음악이다. 악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음악의 천사들처럼
보이는 이눌들이 그 점을 재현하고 있다. 애매 모호하며 여러 해석이 가는한 특성으로 인해
번 조스는 영국의 탐미주의 그릭 상징주의 운동과 연관된다.
피에르 푸비 드샤반, <예술과 뮤즈에게 귀중하고 성스러운 숲>, 1884년, 시카고 예술대학
1888년 세대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드샤반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점점 더 소박하고 단순해지길 원했다. 나는 간결히 표현하고 요약했으며 압축 했다.
각 행동이 무엇인가를 표현 하도록 노력했다. 가능한 한 적은 말로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았는데, 거기에서
나는 종합에 대한 욕구를 발견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구스타브 모로, <에우리디케 무덤의 오르페우스>, 1890년, 구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오르페우스 테마는 회화에 자주 등장한다. 17세기의 화가들은 동물에 마법을 거는 오르페우스를 선호했다.
19세기에 이 테마는 상징주의 화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지옥으로의 추락과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잃어버린 후 비탄에 빠진 오르페우스 에피소드를 선택하였다.
주요 상징주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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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알퐁스 무하, 잡지 <라 플림> 표지, 자크 두세 도서관, 파리
우) 카를로스 슈바베, 로즈 크루아의 첫 번째 살롱을 위한 포스터, 1892년, 로즈 갤러리, 런던
앙리 팡탱라투르, <베누스베르크의 탄호이저>, 1864년, 로스앤젤레스 주립미술과
바그너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이런 유형의 작품을 그린 팡탱라투르는 또한 근대 화가들의 벗이자
옹호자였다. 그 증거로서 그의 선언문으로 여겨지는 유화 작품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 (1864년)
<바티뇰 아틀리에> (1870년)를 들 수 있다. 그는 정교한 기법으로 많은 정물화를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 1898~1900년경, 크롤러-뮬러 미술관, 오델로
1890~1900년까지 르동은 흑백의 목탄화나 석판화를 그렸다.
이 시기부터 그는 조금씩 '묵화' 를 포기하고 색채를 도입한다.
바위 뒤에 있기 때문에 젊은 처녀를 괴롭히지 않게 될 키클롭스는
르동 자신이 극복한 음울한 세력을 상징한다.
오귀스트 로댕, <지옥의 문>, 석고, 1880~1917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전반적인 주제는 단테의 <신곡>에서 가져왔지만, 사랑과 삶에 대한 염세주의적 개념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향식 측면에서는 오히려 절충주의에 속한다. 피렌체 세례당에 소장된 지베르티의 <천국>
과 트맄티가 1841년에 완성한 마들렌 성당의 문이 작품의 모델이다. 작품 전체는 고전 르네상스 양식을 환기 시키지
만, 후기 고딕양식에서 빌려온 요소들을 덧붙이고 있다.
제임스 엔소르, <가면과 죽음>, 1897년, 보자르 미술관, 리에주
연극가면은 가족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판매되었다. 엔소르는 이점에서 영감을 받아 위선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상징적 의미를 가면에 부여하였다. 이런 조소와 비극의 결합으로 그는 인상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펠리시앙 롭스, <조셉 펠라당의 애정입문>, 루브르 박물관, 드로잉관, 파리
롭스는 동판이나 석판에 새긴 조각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들은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로 건너가는
시대의 문학적 경향을 증명하고 있다. 롭스는 기독교 영성신학과 신비술을 결합한 펠라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그의 작품에서 여인은 자주 등장하는 테마이다. 그는 승리자이자 마녀 그리고 창부이기도 한
여인을 보여주고 있다.
페르낭 크눕프, <나는 내 자신의 문을 잠근다>, 1891년, 네우 피나코택 미술관, 뮌휀
라파엘 전파에 속하는 화가의 누이동생인 크리스키나 G. 로세티의 시 <누가 나를 구할 것인가?> 에서
영감을 얻은 이 회화 작품은 상징주의 세대의 특징을 이루는 고독과 번민 그리고 염세성을 표현하고 있다.
조지 왓츠, <희망>, 1885년, 테이트 갤러리, 런던
이 예술가에 따르면 젊은 여인은 리라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현으로 음악을 창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루이앙 레비 디ㅜ르메르, <이브>, 파스텔과 고무 수채화, 1896년, 미셀 페리네 소장품, 파리
화가의 영감을 분석한 레옹 테브냉은 "에덴 동산엣의 유배는 이교세계, 자연 세계
그리고 감각 세계의 상징이다" 라고 주제이 선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알퐁스 오스베르, <고대의 석양>, 1908년, 프티 팔레, 파리
오스베르는 로즈 크루아 살롱에 꾸준히 참여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석양에 몽상을 하는 젊은 여인들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폴 세뤼지에, <샤토뇌프 뒤 푸의 노트르담 데 포르트 순례지>, 1896년경, 보자르 미술관, 캠페르
신지학 교리에 흥미를 지녔던 세뤼지에는 나비파의 열렬한 이론가이다.
브르타뉴 지방은 "내가 그곳에서 정신적으로 태어났기에 나의 진정한 조국" 이라고 말하고 있다.
브르타뉴는 예술가의 신념이 표출되는 선택받은 땅이다. 그는 이 지방 풍경에서 영원성에 대한 감각
그리고 의복과 인물에서 발견되는 비시가성을 포착하여 거기에 자신의 장식예술에 대한 관심도를 덧붙인다.
는 1893년부터 뢰브르 극장에서 뤼네 포와 공동작업을 한다. 항식에 관하나 편집증이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다.
폴 고갱, <노란 예수의 자화상>, 1890~1891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폴뒤(Pouldu)에서 그려진 이 그림은 고갱 자신이 1889~1891년에 완성한 자화상 연작의 하나이다
화가가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에게 준 도자기 단지의 사진이 있다.
고갱은 또한 '원시인(Sauvage)' 이었다고 여동생 마들렌은 회고했다.
귀스타브 카이보트, <유럽교>, 브란느 · 로랑소의 소장품
카이보트는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재산을 이용하여 회화에 전념하였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재정과우정을 지원하였다. 노동자들의 작업모습과 파리정경에서 그는 자신의 개성을 발견한다.
일본 판화기법을 연상시키는 그가 사용한 양식의 대표적 특징은 색 배합기법을 통해 관객에게 그림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앙투안 보드르메르, 상테 감옥, 1864년, 파리
별 모양의 배치는 감시를 위하 최고의 해결책처럼 보인다.
샤를 가르니에, <오페라 외관 소묘>, 외랑 상부에 테라스를 갖춘 1860~1862년의 첫 번째 초안, 파리 국립도서관
파리의 이 새로운 오페라는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다. 테오필 고티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2제정기의
이 '세속 성당' 은 예수창작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며, 뛰어난 통일성을 지닌 증거물이다. 가르니에는 통일성을 예술
작품의 보급을 위한 토대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건축 작업에 모든 예술을 수용하며, 건축가의 역할을
관리자이자 조정자로 파악했다.
카미유 피사로, <오페라가, 태양, 겨울 아침>, 1898년, 생 드니 미술관, 랭스
그 유명한 오스만가(家)가 완성된 지 20년 에 피사로는 루브르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오페라가, 테아트르 프랑세 광장
그리고 생 토노레가(街)에 관한 15개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피사로는근대 파리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에두아르 반 데어 눌과 아우구스트 폰 시카르츠부르크 '스탓초퍼(Staatsoper)' 라 불리우는
빈의 신 오페라, 카이저를 모방한 피쇼의 동판, 파리 국립도서관.
비엔나의 왕립 오페라는 1869년 5월 25일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공연과 더불어 그 막을 올렸다.
장 바티스트 카르포, <무도>, 1869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파리 오페라 우현에 위치했던 이 작품은 노늘날 다른 조형물로 대체되었다.
루이 14세 치하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르 브룅이 했던 것처럼 가르니에는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예술가들에게 정확한 규모뿐 아니라 구상의 주제, 실루엣, 인반색조, 호과, 양식을 요구하였다."
피에르 쥘 카발리에가 탈퇴한 뒤에 가르니에가 선발한 카르포는 걸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청동시대>, 청동, 1876년, 로댕 미술관, 파리
이탈리아 여행에서 미켈란젤로 작품에 강한 인상을 얻고 돌아온 뒤 로댕은 이 조각품을 제작하였다.
당시의 아카데미에 대립하는 이 예술가는 살아 있는 모델을 연구하여 그것에 해부학적 요소를 부여하였다.
피에르 보나르, <실내복>, 1890년경,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아르누보의 기원 가운데 하나는 회화와 문학 그리고 음악을 종합하려는 상징주의와 연관 있는
화가들에게서 발견된다. 그 뒤를 이는 세대는 그 기원을 모든 예술의 통합으로까지 확대했다.
이것은 후대에 맥이 이어지지 않은 나비파의 목적이기도 했다.
윌리엄 모리스, <모리스의 데생에 따라 제작된 면포>, 빅토리아 · 앨버트 미술관, 런던
"존 러스킨과 윌엄 모리스의작품과 영향이 우리의 정신을 비옥하게 만들고, 우리의 활동을 일깨우고, 응용예술의
장식과 형태를 완전하게 뒤바꾸도록 부추긴 씨앗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업ㅁㅅ다" 라고 1903년 헨리반 데 벨데는
말하고 있다. 빈 공간을 남겨두지 않고 균형 있게 곡선과 S형을 되풀이하여 촘촘하게 짠 당초문이 그려진
이 직물의 데생은 모리스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외젠 그라세, <봄>, 스테인드글라스, 1884년, 파리 장식예술미술관
그라세는 아르누보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가장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을 바탕으로 일본의 선례에 따라 신 고딕과 장식 선의 연구를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빅토르 오르타, 호텔 솔베의 명예계단, 1895~1900년, 브뤼셀, L. 비타메르 드캉 소유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신인상주의 회화 작품을 골랐다.
작품은 20세기 그룹(le groupe des ××)설립회원인 벨기에인 테오 반 리셀베르헤(1682~1962년)가 그렸다.
엑토르 기마르, <카스텔 베랑제의 출입문>, 1894~1898년, 파리 16구 라퐁텐가
이 유명한 철문은 비대칭적이고 역동적이며 극도로 양식화된 꽃 모양 데생을 보여주고 있다.
에밀 갈레, <해초와 조개껍질로 만든 손>, 1904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삽입과 접착을 거치며 조각된 크리스털 작품이다.
안토니오 가우디, 카사 바틀로 외관, 1904~1906년, 바르셀로나
건축허가를 얻지 못한 가우디는 단지 보수공사만 수행할 수 있었다.
예전의 사각형 창문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 채 그는 비올레 르뒥의 원칙에 따라 구조를 손질하였다.
폴 고갱,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1897년, 보스턴 현대 미술관
이 기념비적인 작품에서 고갱은 회화와 정신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그 운명에 대한 성찰일 뿐 아니라 자기 시대의 관심사를 완벽하게 상징화 하며
20세기 문을 여는 예술에 대한 성찰이다.
인용: 니콜 튀펠리 著 (라루스 서양미술사 V) <19세기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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