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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변월룡 II

1953년 7월 변월룡은 소련 문화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파견되어

러시아 아카데미 시스템과 교과 과정을 모범삼아 전쟁에 파괴된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전수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당시만 해도 미술 창작에 대한 김일성의 구체적인 지침이나 민족적 형식교시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예술가들은 소련의 문예이론과 실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변월룡은 그 매개였다.

 

15개월 남짓 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해방 이후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혀진 북한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처음으로 밟은 조국산천의 풍경과 북한주민들의 소박한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그의 존재는 분단 후 반쪽이 되어버린 한국현대미술사에 귀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귀국 후 변월룡은 정치적인 이유로 북한으로부터 입국을 금지 당했다.

북한을 주제로 한 에칭 대부분은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변월룡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며 제작한 것이다.

 

 

 

 

 

<조선인 학생> 1953, 63.5×43.5cm, 캔버스에 유채

 

사회주의적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듯, 남학생의 고정된 시선과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밝게 웃는 모습은 소년의 모범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한 진보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책을 들고 있는 자세는 성경 속 예언자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도상으로 막스와 레닌의 묘사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관습적인 것이다. 소년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젊음의 도상인 동시에

소련에 귀속된 북한의 지정학적 위상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양지의 소녀> 1953, 47.5×29cm, 캔버스에 유채

 

짧은 기간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변월룡은 작은 휴대용 캔버스와 스케치북에 평범한 북한

주민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단면을 포착했다. 이 작품은 스케치 작업을 거치지 않고

켄버스에 직접 몇 번의 붓질만으로 완성되었지만, 동양인의 얼굴 윤곽, 수줍게 미소 지은 표정,

앉아있는 여인의 체형, 옷의 주름 등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양지에서의   명암이 명쾌하게

처리되어 자연스러운 표현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예술아카데미의 견고한 사실주의를

체득한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냈다.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1954, 43.5×33cm, 캔버스에 유채

 

이듬해 위 <양지의 소녀>를 모델로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려낸 것으로

작가가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을 구현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뜨개질 하는 소녀> 1954, 32×25.2cm, 합판에 유채

 

 

 

 

 

<파란 치마를 입은 여인> 1954, 47.5×29cm, 캔버스에 유채

 

 

 

 

 

 

<인민배우 박영신 초상> 1954, 78×60cm, 캔버스에 유채

 

일제 강점기 1939년 극단 '아랑' 에 참여하여 문정복, 차홍녀 등과 함께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광복 후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다 1947년 경 월북했다. 1949년 배우 황철 등과 함게 공로메달을

수여 받았고, 1952년에는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중앙위원과 최고

인민회의대의원을 거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문화상까지 역임하는 등 문화행정 분야에서 핵심 관료로 일했다. 소련의 문화와 제도를

견학하기 위해 1946년 8월 구성된 제1차 '방쏘사절단' 중 한 명이다.

 

 

 

 

 

<조류학자 원흥구 박사 초상> 1954, 79×5cm, 캔버스에 유채

 

평북 삭주(朔州) 출생, 1910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로 부임하여 박물학과 생물학을 가르쳤다. 이후 식물학과 조류학에 뜻을 두었고,

특히 조류채집 및 분류에 전념하였다. 1929년부터 41년까지 한국 전국을 여행하면서 한국산 미기록 조류를 발굴

연구하여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7년 김일성대학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하고, 과학원생물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조류원색도설》(1958) 《조선조류지 1~3》(1963~65), 《조선짐승류지》(1968) 등과

30여 편의 학술논문이 있다. 슬하에 4남 2녀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세 아들만 남으로 피신했다.

막내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조류학자로 활동중이다.

 

 

 

 

 

 

<작가 한설야 초상> 1953, 78.5×59cm, 캔버스에 유채

 

광복 후 평양에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50년대 반 김일성 세력에 동조하다 노동교화소로 보내졌지만, 그의 작품은 북한 주체문학의

단초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을 세운 작가 중 한 명이다.

 

 

 

 

 

 

<민촌 이기영 초상> 1954, 78.5×59cm, 캔버스에 유채

 

충남 아산 출신으로 1924년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E)에 가담한 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의 위치를 차지했다.

 

 

 

 

 

 

<무용가 최승희 초상> 1954, 118×84cm, 캔버스에 유채

 

 

<보살춤을 추는 최승희> 1954, 28.8×20cm, 종이에 먹, 펜

 

 

 

 

 

 

 

<미술사학자 한상진 초상> 1958, 100×75cm, 캔버스에 유채

 

해방공간에서 미술연구회 일원으로 서양미술사 미술이론의 소개에 힘쓴 인물.

49년 한글로 쓴 최초의 서양미술사 입문서 《먼나라 미술의 발달-학생 서양미술사 입문》과

허버트 리드의 《예술과 사회》를 번역 출간했다. 한국전쟁 시 월북(또는 납북) 이후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북한 미술사학의 기초를 다졌다.

 

 

 

 

 

 

<근원 김용준 초상> 1953, 51×70.5cm, 캔버스에 유채

 

경북 선산 출신으로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수필가. 1946년 서울대 회화과 교수 역임,

1948년 수필집 《근원수필》출간, 1949년에는 《조선미술사대요》발간, 6.25 때 월북 평양미술대학 교수 역임.

 

 

 

 

 

<미술가동맹 대표 화가 정관철 초상> 1954, 28.6×20cm, 종이에 먹, 펜

 

평양 출생으로 북한 미술분야 최초로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화가.

1945년 최초로 김일성의 초상화 제작.  북한미술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보천보의 횃불>(1948)을 그렸다.

 

 

 

 

 

 

<화가 배운성 초상> 1953, 29×26cm, 종이에 목탄

 

서울 출생으로 한국미술사 최초로 유럽에서 유학한 화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당대의 부호였던

백인기 집안에서 집사 겸 하숙을 하며 주경야독하였다.  와세다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중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독일 유학길에 오르자 몸종으로 함께 독일로 떠나게 되었다. 이후 백명곤이 병으로 귀국하자 홀로 남아 자력으로

1925년 베를린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다. 6.25 이후 월북해 1956년까지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최초로

김일성의 얼굴을 판화로 형상화한 그는 북한 미술계에서 간결한 양각 깁법의 목판화를 창작하고,

그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가 이팔찬 초상> 1955, 64×3cm, 종이에 목탄

 

충남 공주 출생으로 이당 김은호를 사사하고, 1943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공주관립여자사범학교, 서울 휘문중학교 교사 재직. 1.4후퇴 때 월북,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화가 한병렴 초상> 1953, 38×25cm, 종이에 목탄, 연필

 

 

 

 

 

 

<북조선 풍경> 1953, 70cm, 캔버스에 유채

 

 

 

 

 

 

<대동강변의 여인들> 1954, 79×59cm, 캔버스에 유채

 

 

 

 

 

 

<대동강변의 여인들> 1954, 79×59cm, 캔버스에 유채

 

 

 

 

 

 

<압록강변> 1954, 40×69cm, 캔버스에 유채

 

 

 

 

 

 

<압록강변> 1960, 32.2×63.7cm, 에칭

 

 

 

 

 

<모란봉> 1953, 51×7cm, 캔버스에 유채

 

 

 

 

 

<평양 모란봉> 1958, 23.4×35cm, 에칭

 

 

 

 

 

 

<개성 선죽교> 1953, 36×55cm, 캔버스에 유채

 

 

 

 

 

 

<북조선 개성 선죽교> 1954, 10.2×27.8cm, 에칭

 

 

 

 

 

 

<평양 대동문> 1953, 42.5×65cm, 캔버스에 유채

 

 

 

 

 

 

<평양의 누각> 1954, 36.5×94cm, 캔버스에 유채

 

 

 

 

 

 

<평양 재건> 1953, 36×55.7cm, 캔버스에 유채

 

 

 

 

 

 

<평양> 1953, 36×50cm, 합판, 캔버스에 유채

 

 

 

 

 

 

<판문점에서 북한 포로송환> 1953, 51×71cm, 캔버스에 유채

 

 

 

 

 

<1953년 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 1953, 29×48cm, 캔버스에 유채

 

 

 

 

 

<소나무가 있는 풍경> 1954, 59.5×97cm, 캔버스에 유채

 

 

 

 

<정주> 1958, 19.8×48.5cm, 에칭

 

 

 

 

 

<북조선 풍경> 1958, 35.4×23.3cm, 에칭

 

 

 

 

<북조선 정주> 1958, 32.5×49.5cm, 에칭

 

 

 

 

<평양의 아침> 1960, 34.2×60.8cm, 에칭

 

 

 

 

<금강산> 1958, 23.3×35.3cm, 에칭

 

 

 

 

<북조선 금강산>(만물상)

1959, 49.3×64.7cm, 에칭

 

 

 

 

<송정리>(평안북도 피현군) 1958, 23.4×35cm, 에칭

 

이 에칭은 변월룡이 소련 문부성의 명령으로 파견되었던 평양미술대학이 위치한 마을을 그린 것이다.

평양미술전문학교로 개교(1952년 평양미술대학으로 개명)한 평양미술대학은 한국 전쟁 중 

평북 피현군 송정리로 이전했다.

 

 

 

 

<바람> 1959, 40×63.8cm, 에칭

 

변월룡은 '바람'을 소재로 한 에칭을 많이 남겼다. 평양미술대학이 소재한 송정리를 묘사한 이 작품은

화면 내에 거침과 세밀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다양한 효과를 이해 원경의 산과 대기의 부분을

점묘로 표현했고, 부식을 반복했다.

 

 

 

<개성의 인삼농장> 1950(1958), 32×49cm, 에칭

 

 

 

 

<북조선에서는 노인들까지 노어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1959, 64.8×39.2cm, 에칭

 

해방 후 북한은 새로운 조국건설에 밑거름이 될 만한 자양분으로 소련을 택하고

소련의 문헌 번역 및 출간 문학전집 시리즈 발간 등 활발한 문화사업을 추진 하였다.

 

 

 

 

 

<북조선 농민> 1958, 22.6×15.4cm, 에칭

 

변월룡은 북한의 농부와 노인을 대상으로 한 드로잉과 에칭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특히 에칭은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선으로 대상 인물의 생김새와 표정, 골격과 자세, 의상과 소품의

특징을 생기있게 표현 하였다. 인물 묘사에 사용된 선이 배경에도 사용되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한글을 사용 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북한을 소재로 한 에칭에 직접 한글 제목을 새겨 넣었다.

 

 

 

 

<북조선 농민> 1958, 18.4×10.4cm, 에칭

 

 

 

 

<지팡이를 짚은 농부> 1958, 20.2×14.8cm, 에칭

 

 

 

 

<북조선 어부> 1958, 36×48cm, 에칭

 

 

 

 

<평양 근교> 1959, 37×64.5cm, 에칭

 

 

 

 

<북조선의 제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1960, 34.5×64cm, 에칭

 

 

 

 

좌) <수업중인 최승희> 1954, 20×28.8cm, 종이에 먹, 펜

우) <과제를 검사하는 최승희> 1954, 20×28.8cm, 종이에 연필

 

 

 

좌) <금강산 길> 1953, 28.5×28cm, 종이에 연필

우) <개성 박연폭포> 1953, 40.5×29cm, 종이에 연필

 

 

 

 

'....'

사실적 표현의 구상미술 기초는 무엇보다도 '데생의 중요성' 에서 비롯된다.

변월룡은 <데생 학습 교재>에서 "오랜 연습 후의 기억에 의존한 데생" 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모델 없이 기억에 의거하여 자유로이 데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라며 그 실천

방법으로 "실물(모델)을 두고 오랜 시간에 걸쳐 연습을 행한 후에 실물 없이 기억만으로 데생을 하는 것"

을 들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치되 교육 과정 초기 즉 1·2학년 과정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그는 평소 제자나 주위 사람들에게 작품의 원천은 데생임을 늘 강조해왔다. 한편 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사진에 의존한 그림은 사진 카피일 뿐만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카메라는 렌즈가 하나이고 인간의 렌즈는 둘" 이라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진 찍을 시간에 차라리 몇 장의 데생을 더 그려 눈과 손과 머리를 발달시키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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