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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변월룡 I

변월룡(邊月龍), 1916~1990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화예술의 중심지 상트페테르부르크(舊 레닌그라드)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평생 제자를 길러내면서 러시아 미술사에 작은 족적을 남긴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변월룡의

작품에는 두 개의 조국,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모국인 한국에 대한 향수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변월룡의 조부와 부친 세대, 즉 연해주 이주 1 세대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조선인으로서의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나,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1920)  연해주를 강제 점령했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1922),

그 후손들로 구성된 고려인 사회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련 체제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변월룡이 신한촌에서 중등교육을 받던 당시 한글신문, '선봉' 에는 조상숭배, 샤머니즘, 유교, 불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 등 당시 한인들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종교 및 관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반(反)종교운동이나

한자폐지론 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고, 한글문법에 대한 토론과 이에 러시아 입적자들(원호(原戶)과

비입적자들(여호(余戶)) 간에 법률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지위에 차별이 생기게 되면서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던 러시아 한인사회의 정체성이, 혁명 이후 본격화된

사회주의화에 의해 더욱 복잡해졌음을 의미한다.

 

고려인의 소련으로의 동화는, 민족문제를 포함한 체제에 대한 모든 도전과 위협을

폭력과 강제로 억누르던 스탈린의 테러정치 하 대탄압과 한인강제이주(1937)로 인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주 1 세대와 지식인들이 제거된 가운데, 단절과 고립 속에서 소련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 후손들은

철저히 소련 시민으로 성장하게 된다. 강제이주 후 스탈린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 고려인 문학에서 소련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물론, 고향이나 조국에 대한 향수, 고려인의 정체성 등에 대한 고뇌는

찾기 힘든데, 그것은 강요된 침묵과 체화된 망각 속에 살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케 한다.

 

강제이주 불과 몇 개월 전, 신한촌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변월룡은 우랄산맥 부근 최대산업도시이자

시베리아 철도의 서쪽 종착지인 스베르들로프스크(現 예카테린부르크)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덕분에 변월룡 자신은 천운으로 강제이주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다른

교려인들과 함께 시베리아를 지나 황량한 중앙아시아 벌판에 버려졌다. 고려인들은 1953년까지 소련

당국의 민족차별 정책에 따라 거주이전의 자유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변월룡은 한동안 가족의 소식도

접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생애 처음으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게 된다.

 

변월룡이 러시아에서 인정받고 있는 분야는 초상화 장르로, 그는 공식적으로 주문받은 초상화 이외에도

아카데미의 동료교수와 제자, 예술가, 학술원 멤버, 가족과 이웃을 그리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유채뿐 아니라 석판화, 연필과 잉크, 목탄 등 다양한 재료로 그려진 인물들은 대개 전통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인물의 개성과 작업에 따라 때로는 매끄러운 표면에 세밀한 선적 묘사와 견고한 양감으로 그려지고,

때로는 몇 번의 거칠고 생생한 붓질로 완성되었다. 특히 후자는 기술적 완숙 없이는 성취하기 힘든 것으로

대상의 개성과 인상을 잡아내는 뛰어난 직관과 관찰력, 이를 켄버스에 옮기는 대담함과 정확함,

그리고 놀랄 만큼 깊고 풍부한 색채가 돋보인다.

 

운명이란 보통 인간의 의지와는 상반되게 삶을 밀고가는 불가항력적인 힘이다.

그는 조국이 국권을 상실하여 백성을 전혀 보호하지 못할 때 국경 밖에서 태어나, 이주의 땅에서 강제적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강요된 낯선 정체성을 스스로 체화해야 했다. 또 전쟁과 전체주의의 폭력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지만,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에 구속된 냉혹한 정치현실 때문에 조국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러한 그의 인생 여정은 직선이 아니라 굴곡지고 굴절된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술은 그에게

운명에 굴복하지 않을 힘과 휴머니즘의 믿음을 주었다.

 

근대 한국과 러시아의 험난한 질곡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기에 앞서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양심과 열정, 고집을 발견한다.

 

이상은  '변월룡 회고전' <기획 도록> 내용 중에서 발췌 간추린 것이다.

 

 

 

 

 

 

 

 

 

 

좌) <남자의 얼굴> 1943, 종이에 목탄, 37.7×24.4cm

우) <남자의 얼굴> 1944, 종이에 목탄, 39×23.5cm

 

 

좌) <노인> 1942, 종이에 목탄, 26.5×19cm

우) <노인> 1944, 종이에 펜, 먹, 40.6×30.5cm

 

 

변원룡이 레닌그라드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1년 9월, 독일이 레닌그라드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독일군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에 모든 음식과 연료 공급을 차단했다. 1944년 포위망이 무너지기까지 전쟁 전

도시 인구의 1/3인 백만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다. 이 시기에도 아카데미는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수업을 계속했다.

위 네 점의 드로잉은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쟁 중에도 아카데미의 기초 훈련에 성실했음을 보여준다.

 

 

 

<새해 선물> 1942, 종이에 과슈, 템페라, 63.7×87.7cm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봉쇄되었을 때, 변월룡은 레닌그라드를 떠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타슈켄트의 국립출판국에서 많은 포스터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를 달라> 1943, 63.5×87.5cm, 종이에 과슈

 

 

 

<자유를 달라> 1943, 87×63.7cm, 합판, 종이에 과슈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다!> 1945, 134×101.5cm, 종이에 과슈

 

 

 

<젊은이들이여, 지식과 과학을 습특하라!> 1949, 86×57.2, 종이에 템페라

 

 

 

<조선의 모내기> 1955, 115×200cm, 캔버스에 유채

 

 

 

좌) <조선의 모내기를 위한 습작> 1955, 34.5×25cm, 합판에 유채

우) <조선의 모내기를 위한 습작> 1955, 40.5×28.6cm, 종이에 연필

 

 

 

좌) <조선의 모내기를 위한 습작> 1955, 29×40cm, 종이에 목탄

우) <조선의 모내기를 위한 습작> 1955, 28.6×40.5cm, 종이에 연필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 1958, 70×100cm, 캔버스에 유채

 

 

 

좌)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죽어가는 사람) 1958, 78×58.5cm, 캔버스에 유채

우)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 (손) 1958, 60×45.2cm, 캔버스에 유채

 

 

 

좌)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 1958, 63×43cm, 캔버스에 유채

우)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 1958, 84.5×59cm,

 

 

 

<해방>을 그리기 위한 습작(달리는 여인) 1958, 79×59cm, 캔버스에 유채

 

 

 

<극동공장 돌격작업반원 사벨랴 마쉬코브스키의 초상>

1961, 104.5×79.5cm, 캔버스에 유채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S 한슈라의 초상>

1969, 200×115cm, 캔버스에 유채

 

 

 

<국영농장의 공로 트랙터 운전수 V.I 쉬미토브의 초상>

1972, 100×75.3cm, 캔버스에 유채

 

 

 

<철공 A.V. 솔로브요브의 초상>

7973, 70.5×65cm, 캔버스에 유채

 

 

 

<A.S. 세바스티야노브의 초상> 1975, 99.7×100.3cm, 캔버스에 유채

 

 

 

<연해주 건설> 1962, 64.5×44cm, 에칭

 

변월룡은 예술아카데미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래픽과 워크샵에 참여해 에칭과 석판화 동판화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그에게 있어 판화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부차적인 매체가 아니라 흑백톤 속에 무궁한 표현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매체였다. 그의 판화는 동시대 삶의 부조리. 혁명적 투쟁과 승리, 지도자의 영웅담,

아름다운 삶의 전형으로서 노동자 예찬 등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려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선(線)에는 작가의 감정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화면에서 보이는 극적인 구도, 정교하고 세밀한 디테일,

대비와 조화 등 다양한 명암의 효과는 그의 예술적 역량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교대> 1964(1962), 63.6×48.6cm, 에칭

 

 

 

<의사들> 1972, 36.5×89.8cm, 에칭

 

 

 

<레닌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다> 1964, 49.3×9.5cm, 에칭

 

 

 

<우리시대의 사람들> 1969, 53.3×84.3cm, 에칭

 

 

 

<1917년 10월 오로라호> 1977, 43.8×64.7cm, 에칭

 

 

 

<스몰니를 향하여> 1977, 44×58.8cm, 에칭

 

 

 

<한국 전쟁의 비극> 1962, 49×64.5cm, 에칭

 

 

 

<조선분단의 비극> 1962, 44×64.5cm, 에칭

 

 

 

<분노하는 인민> 1961, 49×64.5cm, 에칭

 

 

 

<베트남> 1968, 42.5×64.5cm, 에칭

 

 

 

 

 

 

 

 

 

 

 

 

 

 

 

<자화상> 1963, 75×60cm, 캔버스에 유채

 

수많은 초상화를 남긴 변월룡이지만, 자신의 자화상은 미완의 이 작품이 유일하다.

비록 미완이지만, 몇 번의 붓질만으로 결정적인 윤곽과 표정이 형성되었다.

 

 

 

 

<아내와 아들의 초상> 1951, 60×74.5cm, 캔버스에 유채

 

예술아카데미가 전쟁으로 자고르스크로 피난을 갔을 때 변월룡은 1944년 동급생 제르비조바(1920~2005)와

결혼하여 이듬해 장남 알렉산드르가 태어난다. 초상화 속 장남이 대여섯살 때의 모습이다. 변월룡과 제르비조바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과 딸은 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현재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작업 중이다.

 

 

 

 

<변월룡의 딸 올라의 초상> 1965, 65×58.7cm, 켄버스에 유채

 

 

 

<아내와 딸> 1968, 63×50cm, 종이에 파스텔

 

 

 

<바쿠에서 온 처녀 레이라의 초상>

1973, 70×50cm, 합판, 켄버스에 유채

 

 

 

<토고인 제자 라이몬도 텔라케나의 초상>

1977, 80×70cm, 캔버스에 유채

 

 

 

<예멘인 학생의 초상>

1977, 86×52cm, 캔버스에 유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초상> 1947, 70×144cm, 캔버스에 유채

 

 

 

<시인 미하일 두진의 초상>

1962, 70×56cm, 캔버스에 유채

 

 

 

<화가 알렉산드르 푸쉬닌의 초상>

1962, 80×67cm, 캔버스에 유채

 

 

 

<화가 표트르 벨로소프의 초상>

1965, 80×60cm, 캔버스에 유채

 

 

 

<화가 야로슬라브 니콜라예브의 초상>

1970, 60.5×40.5cm, 캔버스에 유채

 

 

 

<화가 표트르 포민의 초상>

1973, 80×60cm, 캔버스에 유채

 

 

 

<미술사학자 이하일 알파토브의 초상>

1973, 70×60.5cm, 캔버스에 유채

 

 

 

<조각가 보리스 플료킨의 초상> 1977, 160×124cm, 캔버스에 유채

 

 

 

<화가 올레그 예레메예프의 초상> 1983, 80×70cm, 캔버스에 유채

 

 

 

<해군소장 빅토르 코르네르의 초상> 1965, 100.5×90cm, 캔버스에 유채

 

 

 

<국민배우 미하일 예카체리넨스키의 초상>

1969, 100×80cm, 캔버스에 유채

 

 

 

<외과의사 표도르 우글로브의 초상>

1971, 100×90cm, 캔버스에 유채

 

 

 

<안무가 블라딜렌 세묘노프의 초상>

1970-1971, 119.5×72cm, 캔버스에 유채

 

 

 

<발레리나 이리나 콜파코바의 초상>

71, 100×90cm, 캔버스에 유채

 

 

 

<레닌그라드 조선(造船)대학 총장 E. V. 토브스트흐의 초상>

72, 100.5×90.5cm, 캔버스에 유채

 

 

 

<물리학 수학 박사 알렉세이 슈흐친의 초상>

1980, 100×80.5cm, 캔버스에 유채

 

 

 

<원로 당원들의 단체 초상> 1986-87, 111×147cm, 캔버스에 유채

 

 

 

 

<어머니> 1985, 119.5×72cm, 캔버스에 유채

 

변월룡은 소련 사회에 유연하게 동화하면서도 자신의 기원을 잊지 않으려 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그가 70세에 그린 어머니 초상화에서 찾을 수 있다. 4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미화되지도, 기념비화되지도 않고 그저 소박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백발의 노인으로

묘사되었다. 공산주의 건설이라는 위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창조적인 일에 매진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이 늙은 여인은 작가의 어머니이자 갖은 세파를 이겨낸 한 사람의 고려인이다.

어머니 초상에는 심연과도 같이 캄캄한 배경에 투박한 옹기가 놓여있을 뿐이다.

 

 

 

<아내 제르비조바의 초상> 1951, 43×37cm, 석판화

 

 

 

<아들 세르게이의 초상> 1960, 35×30cm, 석판화

 

 

 

좌) <L. 세이플리나의 초상> 1961, 40×35cm, 석판화

우) <한네 키스의 초상> 1971, 60×45cm, 석판화

 

 

 

<갈리나 소코토브의 초상> 1970, 64×53cm, 석판화

 

 

 

<안드레이 레베제브 초상>

 

 

 

<오스모르킨 선생> 1977, 65×49cm, 에칭

 

 

 

좌) <B.K파르잘리스의 초상> 1967, 64×48cm, 종이에 세피아

우) <블라디미르 유킨의 초상> 1668, 65×50cm, 종이에 목탄

 

 

 

<어부 한슈라의 초상> 1968, 64.5×5, 종이에 목탄, 연필

 

 

 

<타슈켄트의 화가 니콜라이 박의 초상> 1969, 63.5×50cm, 종이에 목판

 

 

 

좌) <S.D메르쿠로브의 초상> 1969, 63×49cm, 종이에 세피아

우) <다람쥐와 함께 있는 사람> 1969, 63×48cm, 종이에 세피아

 

 

 

좌) <E.V 브라긴스카야의 초상> 1970, 63.5×47cm, 종이에 목탄

우) <D.B 비스트롤레토프의 초상> 1973, 64×50cm, 종이에 연필

 

 

 

좌) <타슈켄트의 김일> 1974, 65×50cm, 종이에 목탄

우) <진타리에서 휴양하는 부부> 1973, 50×64cm, 종이에 목탄

 

 

 

좌) <콘서트에서, 진타리> 1975, 49×63cm, 종이에 목탄

우) <피아노를 치는 다그달랴노브> 1975, 50×65cm, 종이에 목탄

 

 

 

좌) <담배를 든 사람> 1970, 63.5×50cm, 종이에 목탄

우) <모스크바의 화가 L.J 탄클레브스키의 초상> 1975, 63.5×50cm, 종이에 목탄

 

 

 

좌) <타슈켄트의 로자 아체예바> 1974, 63.5×49cm, 종이에 목탄

우) <O.AQ 락치오노바의 초상> 1975, 63.5×50cm, 종이에 목탄

 

 

 

좌) <검은 턱수염의 사람> 978, 49×63cm, 종이에 목탄

우) <모스크바의 조각가 B. 파블로브의 초상> 1980, 65×50cm, 종이에 목탄

 

 

 

좌) <그림 그리는 아론 부르> 1983, 65×50cm, 종이에 목탄

우) <M.B 세메니힌의 초상> 1984, 64.5×50cm, 종이에 목탄

 

 

 

좌) <나타샤 콘드론의 초상> 1986, 63×49cn, 종이에 목탄

우) <니나의 초상> 1986, 63.5×49.5cm, 종이에 목탄

 

 

 

<누드모델> 1983, 63.5×49.5cm, 종이에 목탄

 

 

 

좌) <누드모델> 1983, 49.5×63.5cm, 종이에 분필

우) <누드모델> 1983, 49.5×63.5cm, 종이에 분필

 

 

 

화가 별월룡(邊月龍), 구체적으로 말하면 러시아 국적 고려인 화가이다.

그는 러시아 이름이 없다. 그냥 변월룡이다. 러시아에서 불리는 '펜 봐를렌'은 변월룡의 러시아식 발음일 뿐이다.

흔히 고려인들이 조상으로부터 성만 물려받고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개명한 것과 달리 변월룡은 조부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을 평생 고수했다. 청계(靑谿) 정종여(1914-84)는 병진년 용띠 해 달밤에 태어나 이름 지어진 월룡

(月龍)의 이름을 빗댄 그림을 그려 변월룡에게 몇 차례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한글과 한자 서명,

때로는 한글 글귀를 새겨 넣어 자신이 한국인임을 드러내곤 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 자신의 묘지 비석에도 한글

이름을 새기게 하여 훗날 가족들은 그의 유언을 따랐다. 현재 그의 묘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세베르노예 클라드비셰

(북부 묘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정작 자신이 사랑한 고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북한 당국의 숙청대상에 오른 것이다. 죄목은 북한 당국의 귀화종용에 대한 거부였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의 그의 행적과 공적은 모두 증발해 버렸다.

 

1990년 5월 22일 변월룡은 뇌졸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74년이란 자신의 삶 중 단 1년 3개월 남짓의 고국 생활을 제외하면, 소련 땅에서 그것도 온전히 냉전시대만을 겪다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은 영원히 밟아보지 못한 채, 더욱이 4개월 후면

한·러 수교가 체결되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로 그는 영면에 들고 말았다.

 

- 전시회 도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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