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소록도와 인연을 맺어오신
이 시대의 성자 백진앙 선생님 (사단법인 한벗 장애인 재단 이사장)께서 엮어내신
『전 국립소록도병원장 신정식』을 선물 받고 득달같이 읽어 내렸습니다.
모든 내용이 가슴 뭉클한 감동의 연속이었는지라
그중 일부 몇 대목을 알림과 공유 차원에서 이 자리에 옮겨본 것.
아울러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아왔던 부분들이 말끔히 해소된 느낌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거룩하신 행보와 웅혼한 필력 앞에
하찮은 소인배에 불과한 저로선 그저 내내 엎드려 조아릴 뿐.
공경함으로 감사드립니다.
책머리에
신정식 원장을 그리며
이 책은 작고한 신정식 원장을 그리는 흠모의 정으로 엮은 기록이다.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연구서나 평전이 아니다. 한 사람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그를 훼손하고 토막 내는 짓이다. 더구나 나의 비좁은 시계(視界)에 비해
이분은 어림없는 크기인데다 글마저 짧다. 미망(迷妄)과 훼손의 우(愚)가 두렵고 송구하다.
신정식은 40여 년 전의 소록도병원장이다.
'소록도가 어디 쯤 있지요?' 70년대의 소록도는 누구나 이름 듣기조차 언짢은 섬이었다.
쓰레기를 집밖에 내놓듯, 육지의 한센인을 바다 건너 버린 곳, 이곳에서 6년은 의사로, 12년 동안
원장으로 있었다. 그는 왜 모두가 고개 돌리는 '문둥이' 섬으로 갔는가?
어느 의학도처럼 의대교수가 되기 바란 젊은이였다. 6 · 25 전쟁으로 육군병원에 소집되어 근무하던 중
다리 좀 전다고 장교계급장을 박탈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이때 소록도 김상태 원장 권유로
6개월 만 머물기로 하고처음 소록도에 들어간다. 당시 소록도는 의사조차 먹는 일이 궁해,
배급쌀로는 열흘을 못 넘겨 노상 죽으로 때웠다.
부인이 고흥 시댁에서 쌀을 얻어 오려하자,
"환자도 못 먹는데 나만 배불리 먹을 수 있겠는가." 라며 빈궁을 견딘다.
이후 5년이나 더 머물다 소록도에서 나와 광주의 홍 안과의원에서 의사로 근무한다.
하루는 한센환자와 같이 사는 최홍종 목사가 약을 얻으러 온다.
"자네 소록도에서 5년이나 있었다는데, 나하고 문둥이 일 하세."
순간, 소록도의 영감(靈感)이 천둥처럼 울렸다. 심장이 사명으로 맥동치기 시작했다.
1974년, 높은 분들이 하나같이 소록도원장 맡기를 피하자,
자신의 안과의원을 미련 없이 처분하고 다시 소록도로 들어간다.
50년 환자 박순암이 그를 붙들고 울먹였다.
"같이 소록도에서 죽읍시다."
그는 죽지 못하고 12년 후 정념퇴임 한다. 그리고 기뻐했다.
"소록도에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의 출구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