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엮어낸 『도시로 읽는 조선』을 옮겨 본 것이다.
<3장>
고을을 누빈 관찰사 전주 감영에 깃든 역사
김경숙
「전라도」,『지도,』 채색필사본, 32.3×38.5cm,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전주는 감영이 설치된 도시였다.
감영監營은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으로 조선시대 8도에 파견된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관청이다.
감영 고을은 각도의 중심이 되는 거점 고을 중에서 정했는데, 읍세邑勢뿐만 아니라 서울과의 지리적 위치도 고려했다.
세종대에 경상도 감영을 논의할 때, "왕명을 받든자가 반드시 상주로 먼저 길을 떠나서 뒤에 경주에 이르기 때문에
왕화王化의 흐름은 상주에서 남쪽으로 내려갔지 경주에서 북쪽으로 향한 적은 없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주 또한 전라도의 계수관 고을인 전주, 나주, 광주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고을이라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감영은 관찰사가 정무를 보는 관청일 뿐만 아니라 관찰사가 거처 하면서 생활하는 주거공간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감영은 관찰사의 역할과 업무 방식에 따라 위상과 역할이 달라졌다.
15, 16세기 행영제行營制 하에서는 관찰사가 임기 내내 도내를 순행巡行하다가 잠시 머무는 공간이었다면,
유영제留營制가 정착되고서는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전라도의 감영 도시는 전주는 이러한 조선시대 감영의 역할과 위상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특히 16세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와 19세기 초반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한
서유구의 『완영일록完營日錄』이 전하고 있다. 이들 일기를 중심으로 수백 년 시간의 격차 속에서
관찰사와 감영의 변화상을 추적해본다.
「전주부지도」
관찰사, 일원화된 지방 행정의 실현
관찰사는 고려 말 군현 고을을 안찰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안찰사按察使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안철사는 임기가 6개월 뿐인데다 지위도 낮아 한 도의 책임자 역할과 위상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왕조는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를 지향해 지방 제도 또한 중앙 - 8도 관찰사 - 주부군현 수령으로 연결되는 일원화된 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토호 향리 등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지방관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백성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지방관의 근무를 평가하고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관찰사제를 강화했다.
그 실행 작업은 1388년(창왕 즉위) 위화도 회군 후에 이미 시작 되었다.
안찰사란 명칭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겸兼 감창監倉 · 안집安集 · 전수轉輸 · 권농勸農 · 권학사權學事 · 제조형옥提調刑獄 ·
병마공사兵馬公事'로 명칭이 길었다. 여기에는 관찰사의 임무 범위와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도내 정사를 일절 관찰하여 관내 수령을
출척하고, 겸하여 도내의 창고의 곡식을 총감독하며, 민새의 안정과 유민의 안집, 조세와 공부貢賦의 수송, 농상 수리 등을 권장하며,
인재 양성과 지방 교육을 권장하고, 형옥과 군정은 왕명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제거提擧한다는 것이다.
이후 잠시 안렴사로 돌아갔다가 관찰사로 복원되는 등 몇 차례의 변동을 거친 끝에 태종대에 8도 관찰사제를 확립한다.
전국을 8도로 편성하고 이들 지방에 일괄적으로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함으로써 단일한 지방 행정 조직을 갖추었다.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도관찰출척사에서 관찰사로 명칭을 바꿔 관찰사제를 완비했다.
이후 관찰사는 조선 왕조의 지방 행정의 근간으로 수백 년 역사를 이어오며 1910년 일제가 강제 합병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창선고淸選考』필사본, 33.9×22.8cm, 1906,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시대 관원에 대한 인명사서人名辭書로,
8도의 관찰사의 성명, 자, 급제년, 나이, 과종科種, 도임 연도, 전관前官,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종2품 관직으로, 한 도를 책임지는 일도지주一道之主로서 직임을 감당할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문무 중신文武重臣을 선임하여 파견했다. 주요 업무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외관外官, 즉 목민관인 지방관들을 규찰하는 역할이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관찰사의 고유한 기능이다.
이를 위하여 관찰사는 도내를 순력하며 1년에 두 차례, 6월과 12월에 도내의 모든 지방관의 근무 성적을 평가해 중앙에 보고했다.
둘째는 지방 행정 수반으로서의 역할이다. 관찰사는 도내의 모든 외관의 상급 기관으로 행정, 군사, 사법을 포괄하는
도정道政 전반을 지휘 통제하고, 일정 부분 독자적인 처결을 할 수 있는 직단권直斷權을 보유했다.
이러한 관찰사의 역할은 감영의 형태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15, 16세기에는 안렴사 이래의 고유 기능이 상대적으로 우세했다.
도내의 지방관을 규찰하기 위해서는관찰사가임기중 도내를 순행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감영은 관찰사의순행 행차가 곧 감영이되는
행영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후17세기를 거치면서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며 업무를 처리하는 유영제로 전환되어
조선 후기관찰사는 도내 행정 수장으로서 그 역할을 확대해갔다.
머무는 것은 잠깐
길에서 업무가 이뤄진 노관찰사의 기록
선조대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미암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남긴 일기에 이런 상황이 녹아있다.
"유희춘은16세기 사림계 인물로153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 관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명종대에 을사사화의 연장이었던 양재역良才驛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함경도 종성,충청도 은진을 거치며
19년 동안 유배살이를 했다. 오랜 유배살이 끝에 선조가 즉위한 후 정계에 복귀하고, 1571년 2월4일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7개월의 재임 기간에 그는 도내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하루하루를 기록으로 남겼다.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그가 관찰사로서 했던 생활과 행영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미암집』, 유희춘, 1869, 유희춘의 문집으로 권 5~18에는 미암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일기에 의하면 그는 관찰사에 임명될 당시 해남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감영에서 보낸 영리營吏가 2월 11일 해남으로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서울로 올라온그는 한 달여 뒤인 3월 13일 국왕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고 곧장 부임길에 올랐다.
대궐에서 광화문으로 나와 전임 관찰사 이우민李友閔의 집에 들러 잠시 대화를 나눈 다음 남대문을 통해 한강으로 향했다.
지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한강을 건너 과천에서 하룻밤 묵고 수원, 진위振威(오늘날 평택), 공주, 은진을 거쳐
출발한 지 8일 만인 3월 21일에 전라도의 경계인 여산현廬山縣에 들어섰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도에 들어가는 경계, 즉 도계道界에서 신구임 인수인계를 하고 직무에 돌입했다.
유희춘도 은진에서 출발해 전라도 여산 경계에 당도하니 전라도인이 큰 기를 들고 마중 나왔고, 여산 오리정五里程에는 관원 및
관속 70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여산 관아에 들어가 도내 각 고을 수령, 찰방 및 관속들과 공식적인 상견례를 했다.
여산 관아에서 하루 묵은 그는 이튿날 감영이 있는 전주에 입성했다. 경기전慶基殿에 알현하고 감영에 들어가 업무에 착수해
하루 종일 공사公事를 처리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부첩簿牒, 즉 장부와 보고서가 쏟아질 듯 많았다고 한다.
전날 여산에서도 상견례 후 소지所志와 조장報狀 200~300 장을 퍈결했다고 기록했다. 신구임이 교체되는 동안 적체된 일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전주 도착 직후부터 순행을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제 일행의 짐말이 너무 많아서 감영의 이방 등을 시켜 줄일 것은 줄이고 남겨둘 것은 남겨두게 했다.
전보다 일곱 마리를 줄여 일행의 말이 48필이니 비용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찰방이 변고에 대비하기 위해
예비해둔 말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암일기』, 1571년 3월 25일)
「조경묘경기전도형」종이에 채색, 55.7×46.0cm, 1899년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
어제는 3월 24일로, 그는 전주에 입성한 지 이틀 만에 행차 구성을 점검하고 조정했던 것이다.
최종 확정된 짐말 48필 규모의 행차는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행렬의 선두에는 중요한 문서와 장부를 넣은 가죽상자 및 관찰사가 공식 업무를 할 때 갈아입을 관복을 넣은 사모갑을 앞세웠다.
귀이어 의장 깃발이 따르고, 관찰사의 관인과 군대를 동원하는 병부, 국왕의 교서와 유서, 관찰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용 깃발인
절과 도끼인 부월이 따르며 취라치, 나팔, 태평소 등 악대 행렬도 이어졌다. 그리고 행차의 주인공인 관찰사가 타고 있는 마교를
중심으로 앞에서는 군관 및 종자들이 인도하고 뒤에서는 도사, 찰방, 심약, 검률, 중방 등 감영의 관원과 영리 등의 관속들이 따랐다.
이는 관찰사의 행차 구성으로 유희춘의 순행 행차도 이와 비슷한 구성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 관찰사의 순행 행차 규모는 유희춘에게서 보듯이 말 40~50필 정도였다. 대규모 행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중앙 정부의 권위를 세우고 지방 민심을 진복鎭服 시키기 위해서는 관찰사의 지위에 상응하는
위엄과 의식儀式을 갖춰야 한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
행렬 준비와 함께 감영에서는 순행할 고을에 행로와 체류 일정을 미리 통지하는 선문先文을 발송했다.
언로의 각 고을은 순행 행차의 숙박 및 식사 등을 지원해야 했다. 선문을 받은 고을은 관찰사의 행로와 일정을 공유하고 준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억울한 사정이나 민원이 있는 백성이라면 관찰사에게 호소할 청원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순행 준비를 닷새 만에 마치고 유희춘은 3월 26일 첫 순행길에 올랐다.
전주를 떠나 임실 → 남원 → 옥과 → 담양 → 옥과 → 순천 → 낙안 → 흥양 → 보성 → 장흥 → 강진 → 해남 → 영암 →
나주 → 광주 → 진원 → 장성 → 태인 → 금구를 거쳐 5월 69일에 전주로 돌아왔다. 39박 40일 동안
19개 고을을 섭렵하며 총 1340리 길을 다닌 대장정이었다.
→1차 순행로 → 2차 순행로 → 3차 순행로 → 4차 순행로
행차는 연로의 찰방이 인도했고, 순행 고을에 들어서면 해당 수령이 고을 경계에 나와서 맞이했다.
관아에 오른 후 수령 및 관원, 재향품관, 유생, 관속들과 상견례를 하고 곧바로 공사 처리에 들어갔다.
부세賦稅, 형옥刑獄과 소송訴訟, 권농勸農, 백성 안집安集 등이 주요 점검 대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했다.
40일 동안의 장거리 순행에서 돌아온 그는 감영에서 열흘 남짓 머문 뒤 다시 2차 순행길에 올랐다.
5월 17일에 출발해 48일 동안 고을 열여덟 곳을 경유하고 7월 5일 감영에 돌아왔다. 3차 순행 때는 감영에서 겨우 사흘 머물 뿐이었다.
나를 만인 7월 9일 순행길에 올라 56일 동안 26개 고을을 돌았다. 4차 순행 때는 감영에서 열흘 정도 머물고 9월 16일에 다시
길에 올라 무안, 함평, 영광, 등 서해안 고을을 살폈다. 10월 14일 무장에 이르러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순행을 멈출 때까지 그는 29일 동안 열 두 곳을 돌고 있었다.
유희춘은 7개월의 재임 기간에 네 차례의 순행으로 총 173일 동안 4370리를 순행하며 고을 일흔다섯 곳을 경유했다.
전라도의 57개 고을 중에서 약 열 곳을 제외한 44개를 섭렵했다. 나주와 광주는 네 차례 경유했고, 두 번 이상 경유한 곳도
스물다섯 군데에 달했다. 순행길은 정해진 일정이 있고 선문을 보내 해당 고을에 이미 통지한 상태였으므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었다.
한 곳에 지체하면 고을의 비용 부담이 느는 탓에 힘들다고 마냥 한 고을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순행길은 정해진 일정에 따라 계속 진행되었고
장맛비와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폭우에 다리가 끊겨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무더위를 피해 꼭두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그는 결국 피로가 누적되어 3차 순행에서는 건강이 악화되고 순행 도중에 일정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에도 처했다.
유희춘에게서 보듯이 조선 전기에 관찰사는 재임 기간을 길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무는 대개 순행 행차 즉 행영에서 이뤄졌고, 전주 감영은 늘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찰사의 업무는 연로한 대신이 감당하기에는 녹록치 않았음을 유희춘이 보여준다.
감영에서 각종 사건과 문서 처리를 하다
『완영일기』를 통해 본 관찰사 역할의 변화
순행 중심의 관찰사는 그 자체로 몇 가지 난제를 안고 있었다.
안정적인 업무 수행을 하려면 임기가 충분해야 했는데, 1년 가지고는 부족했다.
한편 가족과 떨어져 홀로 부임해 임기 내내 순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임기를 늘리면 연로한 중신이 감당하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졌다.
게다가 관찰사는 늘 순행 중이었으므로 감영 소재 고을의 업무는 판관에게 위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순행을 바라보는 시선도 엇갈렸다.
한편에서는 감사가 순찰巡察을 게을리하면 민간의 병폐를 두루 살피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수령이 민간을 토색질하여 감사를 접대한다는 순행의 폐단을 지적했다.
「서유구의 초상」종이에 채색, 76.0×38cm, 개인 소장.
조선 초기부터 관찰사의 운영 방식을 두고 여러 방안이 모색되면서, 주요 논제는 관찰사가 감영 고을의 읍관을
겸임하는 문제兼牧(겸목), 가족을 동반하는 문제 率眷(솔권), 임기를 2년으로 늘리는 문제(久任)로 집중되었다.
결국 18세기 전반까지도 겸목, 솔권, 구임은 치폐를 반복한 끝에 현종대에 솔권, 구임 부임이 확립되고
영조대 『속대전』에 겸목제가 규정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