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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팔성명기 /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상택지(相宅志) 권제2





 八成名基


전국총론 (全國總論) /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



6)황해도 [海西]


황해도는 경기도와 평안도 사이를 차지하고 있다. 대개 백두산(白頭山)의 남쪽 맥이 함흥부(咸興府) 서북쪽에 이르면

갑자기 낮아져 검문령(劍門嶺)이 된다. 또 남쪽으로 내려가서 노인치(老人峙)가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맥 2개로 나뉜다.

그 중에 하나의 맥이 남쪽으로가서 삼방치(三房峙)를 거쳐 조금 끊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철령(鐵嶺)이 된다.

다른 하나의 맥은 서남쪽으로 가서 곡산(谷山)을 거쳐 학령(鶴齡)이 된다.



백두산(대동여지도)




함흥 · 검문령 일대(대동여지도)




노인치 · 철령 일대(대동여지도)




곡산 · 학령 일대(대동여지도)


학령은 다음과 같이 다시 줄기 3개로 나뉜다.

하나는 토산(兔山)과 금천(金川)을 따라 오관산(五冠山)과 송악산(松岳山)에서 그치는데, 이곳이 곧 고려의 고도(故都)이다.


다른 하나는 신계(新溪)를 다라 평산(平山)의 면악산(綿岳山)이 되는데, 여기서 황해도의 조산(祖山)이 되었다가

서쪽으로 가서는 해주(海州)의 창금산(昌金山)과 수양산(首陽山) 등의 산이 된다. 또 이 맥이 들판으로 내려와

평탄한 구릉이 되었다가 서북쪽으로 돌면서 신천(信川)의 추산(錐山)이 되고, 또 이 맥이 북쪽으로 가서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에서 그치는데, 이곳이 곧 단군의 고도(故都)이다.





토산 · 송악산 일대(대동여지도)




신계 · 구월산 일대(대동여지도)


나머지 하나는 곡산과 수안(遂安)을 따라 큰 산과 험한 고개가 가로로 뻗어 끊어지지 않고 자비령(慈悲嶺)이 되고

절령(岊嶺)이 되었다가, 서쪽으로 뻗어 황주(黃州)의 극성(棘城)에서 그친다. 황주는 절령의 북쪽에 있고,

평안도의 중화(中和)와 경계를 접한다.





곡산 · 극성 일대(대동여지도)




남북직로(대동여지도)


황주에서 남쪽으로 절령을 넘어 봉산(鳳山) · 서흥(瑞興) · 평산 · 금천을 거쳐서 개성(開城)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남북직로(南北直路)이다. 그 동쪽은 수안 · 곡산 · 신계 · 토산 등의 고을이고, 모두 깊은 산속에 있다.

이 지역은 땅이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 도적이 많이 출몰한다.

예로부터 글을  쓰고 학문에 힘쓰거나, 관료로 이름난 사람이 드물었는데, 남북직로가 지나가는 여러 고을 또한 그러하다.





평산 · 금천 일대(대동여지도)


그 중 오직 평산과 금천에만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와 사는 사족(士族)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금천은 강음(江陰)과 우봉(牛峯) 두 현을 합하여 군이 된 곳으로, 예전부터 산람장기(山嵐瘴氣)가 있었고,

요즘 더욱 심해져 살기에 알맞지 않다. 평산에도 산람장기가 있다.


자비령은 옛날 통북대로(通北大路)의 한 구간이었는데, 고려시대부터 자비령을 거치는 길을 폐쇄하고

절령을 거치는 길을 열어 남북의 큰 관문이 되었다. 그러나 고개의 맥은 절령에서 서쪽으로 10리도 지나지 못하고 곧 끊겨서

평탄한 구릉이 된다. 구릉이 끝나고 평원이 되면 이곳이 극성의 들판이다. 이 들판은 동서로 10여 리리고

서쪽으로 남오리강(南五里江)에서 그친다.





자비령 · 남오리강 일대(대동여지도)


절령과 구월산은 동서로 마주하여 하나의 큰 수구가 되고, 남오리강이 들판 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흘러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패강(浿江, 대동강)에 흘러 들어간다. 패강의 동쪽은 황주 · 봉산 · 서흥 · 평산이고,

서쪽은 안악(安岳) · 문화 · 신천 · 재령(載寧)이다. 이 8개 고을은 모두 면악산과 수양산의 북쪽에 있다.


이 지역은 흙이 매우 비옥해서 오곡 · 비단 · 면화 농사에 알맞고, 산에서는 납과 철이 나온다.

남오리강의 동쪽과 서쪽 언덕에는 강물을 끼고 긴 둑을 쌓았고, 안에는 모두 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중국 소주(蘇州)나 호주(湖州)와 견줄 만하다. 여기서 생산되는 맵쌀은 쌀알이 길고 크면서도 차지고 윤기가 돌아

다른 지역에서 나는 쌀은 모두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수양산과 추산에서부터 구월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은 비록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간(大幹)의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 밖으로 바다에 닿아 있는 고을 중에서 해주는 곧 황해도관찰사의 치소로, 수양산의 남쪽에 있다. 해주에는 바닷물이

두 산 사이로 들어와 해주 치소의 앞산 바같쪽에서 모여 하나의 큰 호수가 되니, 토박이들은 이곳을 '소동정(小洞庭)'이라 한다.

결성(潔城)이 실로 그 훌륭한 경치를 차지하고 있어 상당히 바라볼 만한 정취가 있다.


해주의 오른쪽은 강령(康翎) · 옹진(甕津)이고, 서쪽은 장연(長淵)이다. 장연의 북쪽은 송화(松禾) · 은율(殷栗) · 풍천(豊川)에서

시작하여 장련(長連)에서 그치는데, 장련은 평안도 삼화부(三和府)와 작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다.


추산의 한 맥은 장연의 남서쪽을 따라 장산곶(長山串)으로 뻗어나가는데,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줄지어 있어

깊고 험하기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소나무를 길러 궁전과 선박의 용도로 대비했다.


이 산줄기의 북쪽에 금사사(金沙寺)가 있는데 바닷가가 모두 모래다.

그 색이 황금빛가 같아 햇살이 비추면 반짝거리는 모래밭이 20리에 뻗어 있는 모습이다.

모래사장이 바람을 따라 봉우리를 이루어서 오뚝하게 되기도 하고 깎이기도 하는데, 이 봉우리가 아침저녘으로 옮겨다니고

좌우로 빠르게 변화하니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해롱(海龍)이 한 짓이다."라 했다.

모래에서는 해삼(海蔘)이 나는데 모양은 방풍(防風)과 비슷하다.


매년 4~5월에는 고기 잡고 해삼을 채취하기 위해 등주(登州)와 내주(來州)에서 온 배가 매우 많다.

관에서 장졸들을 보내어 그들을 쫓아내지만, 이익이 많아 금할 수 없으니 연해의 백성들에게 끼치는 피해가 상당하다.


이상의 8개 고을은 비록 바다를 끼고 있어 이익이 되지만 흙은 대부분 척박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오직 풍천 · 은율만

흙이 매우 비옥하다. 조산(造山) 벌판에는 논에 쌀 1두를 재배하면 더러는 수 백 두를 거두기도 하고, 수확량이 적어도

100 두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밭도 논과 같다. 이는 삼남 지방에서도 드문 일이다.


장연(長淵) 북쪽 지역은 남쪽으로 장산곶까지 뻗은 산줄기에 막혀서, 오직 북쪽으로 평안도와 통한다.

러므로 곡식과 면화가 매우 흔해서 소작농이나 낮은 신분의 사람들 가운에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들이 모두 사족을 자칭한다.




해주 서쪽과 금사사 일대(대동여지도)


장연(長淵) 남쪽의 큰 바다에는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 두 섬이 있으며, 주위가 상당히 넓다.

예전에 원나라 문종(文宗)이 순제(順帝)를 대청도로 귀양 보낸 적이 있어 지금까지도 궁실터가 남아 있다.




연안 · 배천 일대(대동여지도)


면악산의 한 줄기가 거꾸로 가면서 동쪽으로 뻗어나가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이 되는데, 이 두 고을은 해주의 동쪽,

후서강(後西江)의 서쪽, 보련강(寶輦江) 하류의 북쪽에 있다. 큰 산과 넓은 차천, 큰 들판과 긴 하천이 이곳에서 모인다.

게다가 밀물과 썰물이 통하여 평평하고 넓으며 밝고 수려하기 때문에 중국의 장강(長江) · 회수(淮水) 사이의 풍기와 같다.


이곳은 황해도에서 가장 살기 좋아 또한 한양에서부터 흘러들어와 사는 사족이 많다.

다만 흙이 척박하여 가뭄이 쉽게 들기에 목화 농사에는 알맞지 않다. 그래서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뱃길과 강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판매하는 이익이 있다.

 동쪽으로는 한양 · 개성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충청도 · 전라도와 통하니무역으로 항상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대체로 황해도는 나라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땅은 평안도 · 함경도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풍속으로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기지만 글을 쓰고 학문하는 선비는 드물다.

황해도는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고 납과 철, 목화, 벼와 기장, 물고기와 소금으로 인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부유한 사람이 많아도, 사대부 집안은 적다. 그러나 들 가운데 8개 고을은 흙이 비옥하고,

바닷가 10개 고을은 토지가 명사이 많기 때문에 또한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은  땅은 아니다.


황해도의 지세가 서해로 쑥 들어가 있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동쪽의 한 가장자리만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이 있다.

그러나 북쪽에는 절령이 있고 남쪽에는 여러 강에 막혀 있다. 안팎으로 산과 하천이 있고 도내에는 험준한 성곽이 많으며,

또한 비옥한 들과 평원이 있으니, 진실로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여서 세상을 피해 운준할 만한 곳이 아니다.

《팔역가거지》









7) 평안도


평안도는 압록강(鴨綠江)의 남쪽 · 대동강(大同江)의 북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평안도관찰사의 치소로, 대동강 가에 있다. 이곳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고도(故都)로, 기자(箕子)가 다스렸기 때문에

구이(九夷) 가운데 풍기(風氣)가 가장 먼저 개화하였다. 기조조선이 천 년 동안 이곳에 도읍하였고,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고구려가

팔 백년 동안 도읍하였으며, 지금까지 나라의 요충지가 된 지 또한 천 년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기자정전(箕子井田)의 유지(遺地)가 남아 있다. 평양성(平壤城)은 대동강 가의 석벽(石壁)에 있는데,

이 석벽 위에는 연광정(練光亭) · 부벽루(浮碧樓) 등 여러 명승지가 있다. 저수지와 계곡이 적어 밭농사만 지으며, 대동강 하류의

벽지도(碧只島) 에만 논이 있어 벼를 심지만 역시 많지 않다.




평양부(해동지도)





평양 · 대동강 · 벽지도 일대(대동여지도)


대동강은 백두산(白頭山)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삼 백리를 흘러 영원군(寧遠郡)에 이르러 물길이 커져 강이 되고,

강동현(江東縣)에 이르러 양덕군(陽德郡)과 맹산군(孟山郡)의 물이 합류했다가, 부벽루 앞에 이르러 대동강이 된다.


평양의 동쪽은 성천부(成川府) 인데, 바로 송양왕국(松壤王國)으로, 주몽(朱蒙)에게 병합된 곳이다.

성천부의 치소는 비류강(沸流江) 가에 있다. 비류강가에는 강선루(降仙樓)가 있으며, 이는 팔도(八道)에서 경관이 좋은

누각 가운데 으뜸으로, 앞으로는 흘골산(紇骨山) 12봉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돌의 색이 아취가 있지 않고

강의 수심이 얕으면서 유속이 빠르며, 들판도 비좁아서 평양과 견주어보면 훨씬 못미친다.




영원 · 맹산· 강동 · 양덕 일대를 흐르는 대동강 지류(대동여지도)




평양 성천부 일대(대동여지도)


평양에서 서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안주성(安州城)인데, 청천강(淸川江)에 닿아 있어 백상루(百祥樓)의 경치가 빼어나다.

안주(安州)의 동북족은 영변부(寧邊府)인데, 산을  따라 성을 쌓아서 깎아지른 듯 높아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다.

북쪽에는 검산령(劍山嶺)이 있다. 이는 바로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이 있던 곳으로, 그 유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영변부에서 2개의 큰 고개를 넘으면 강계부(江界府)이다. 강계부의 동쪽에서 백두산까지는 오 백리로,

그 사이는 폐사군(廢四郡)이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하여 깊은 협곡을 이루었기 때문에,

인삼이 많이 생산된다. 봄가을 마다 백성들이 이곳에 들어가 인삼을 채취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일부를 관아에 바쳐

공납(貢納)과 부세(賦稅)로 충당했기 때문에 강계부는 나라의 인삼 생산지로 불린다.





안주성과 영변부 일대(대동여지도)




영변부 북쪽에 위치한 검산령(대동여지도)


강계부 서쪽은 위원군(渭原郡) 등 7개 고을로, 그 가운데 의주(義州)는 압록강 가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자, 북경으로 통하는 길목이 된다.


대체로 청천강 남쪽 지역을 '청남(淸南)'이라 하는데, 이곳은 지형이 동서로 협소하다.

이에 비해 북쪽 지역을 '청북(淸北)'이라 하는데, 이곳은 지형이 동서로 뻗어나간 넓이가 매우 넓다.


평안도는 동쪽으로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가까워 산이 많고 평지가 적다.

게다가 논에 물을 댈 만한 하천과 못이 부족하기 때문에 논이 매우 적고 밭에는 모두 기장이나 조를 심는다.

기씨(箕氏, 기자조선)와 고씨(高氏, 고구려)가 번성하였을 때, 땅은 좁은데 백성은 많아서 완만한 산을 깎아 개간한 곳이 많다.


그러나 여러 차례 중국 한나라 군대의 침입을 받아 쫒겨나서 황폐해진  땅이 많다.

게다가 왕씨(王氏, 왕건)가 남북국을 통일한 후 백성들 가운데 삼남(三南)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아서

지금은 들판은 넓지만 사람이 적고, 드물게나마 산을 일구기도 한다.

바닷가 주변의 여러 고을은 대부분 호수를 막고 간척을 하여 논을 만들었지만

밭에 비해서는 면적이 적기 때문에 쌀값이 삼남 지방보다 항상 비싸다.


민간에서는 뽕나무아 삼 농사를 해서 비단과 베를 짠다. 생선과 소금이 아주 귀해서, 바닷가에 있는 고을이라도

소금을 끓여서 석출하는 곳이 많지 않다. 땅에서는 대나무 ·  감나무 · 모시 · 닥나무가 나지 않는다.




강계부 · 백두산 · 폐사군 일대(대동여지도)




위원군 등 7개 고을, 초산 · 벽동 · 창성 · 삭주 · 구성 · 의주 일대(대동여지도)


청북은 지대가 더욱 높아서 춥고 국경과 가까우며, 또한 꽂과 과실이 없고 물산이 매우 적어

백성들은 대부분 조그만 움집에서 구차하게 산다.

오직 평양 · 안주 · 의주만이 평안도의 큰 도회지로 시장에는 중국의 물산이 풍부하다.

상인들 중에 사신을 따라 중국을 왕래하는 이들은 매번 많은 이익을 얻어 부유한 사람이 많다.


청남은 중심 지역과 가까워 풍속이 글을 쓰고 학문하는 일을 숭상하고, 청북은 풍속이 꾸밈이 없고 순수하며 무예를 숭상한다.

오직 정주(定州)에 명경과(明經科)로 급제한 사람이 많다. 《팔역가거지》








8) 함경도 [關北]


백두대맥(白頭大脈)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하늘을 가를 듯이 뻗어 영(嶺)이 되는데, 영의 동쪽이 곧 함경도로

옛날에는 옥저(沃沮)의  땅이었다. 함경도 북쪽은 3번 주인이 바뀌었다가,

마지막으로 여진(女眞)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함흥(咸興) 북쪽은 산천이 거칠고 험해서 풍속이 거칠고 사나우며, 땅이 차갑고 흙은 척박하며,

곡식으로는 조와 보리만 생산된 뿐, 메벼 · 면화는 생산되지 않는다.

 토박이들은 개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 추위를 막고

천성이 배고픔과 추위를 잘 견디니, 여전히 여진의 풍속이 남아 있다.


산에는 검은 담비와 인삼이 풍부해서 백성들은 이것들로 남쪽 상인들의 면포와 교환한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바다에 닿아 있어 생선과 소금이 풍부하다.

그러나 바닷물이 맑으면서도 거세고, 바닥에 암석이 많아서 생선과 소금의 맛이 서해에서 나는 그것들의 깊은 맛만 못하다.




함흥 일대(대동여지도)


함흥은 함경도관찰사의 치소로, 함흥성(咸興城)이 군자하(君子河)에 닿아 있어 만세교(萬歲橋)와 낙민루(樂民樓)의 경치가 빼어나다.

이곳은 평양의 연광정(練光亭)과 서로 우위를 다투지만 들판이 넓게 펼져지기만 하고 바다와 접하며, 풍기(風氣)가 웅장하면서도

몹시 사나워 평양의 아름답고 고운 풍광에는 미치지 못한다. 들판에는 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시던 옛 사저가 있으니.

본조(本朝), 지금의 조정) 풍패(豊沛)의 느릅나무가 있던 고향이다.


풍패의..... 고향이다 : 풍패(豊沛)의 풍(豊)은 중국의 현(縣) 이름이고 패(沛)는 중국의 군(郡) 이름으로,

한(漢) 나라의 건국 시조 유방이 패군(沛郡) 풍현(風縣) 출신이었기 때문에 제왕의 고향을 지칭하게 되었다.

 분유(粉揄)는 유방이 자신의 고향 땅인 풍현에서 느릅나무두 그루를 심어 토지의 신으로 삼은 데서 온 말이다.


안변부(安邊府)는 철령(鐵嶺) 북쪽에 있다. 안변부 서북쪽은 덕원(德源) 경계로, 바닷가에는 원산촌(元山村)이 있다.

이곳 포구의 백성들이 모여 살면서 고기잡이와 해산물 채취를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바닷길 동북쪽으로는 육진(六鎭)과 통하며,

육진과 바닷가 여러 고을의 상선이 모두 여기에 정박한다. 일반적으로 생선 · 소금 · 해초 · 세마포 · 가벼운 다리[髦]· 담비 · 인삼 등과

관곽(棺槨)에 쓰이는 목재가 모두 이곳에서 거래되기 때문에 상인들이 무리지어 모여들고 상품이 쌓여 큰 도회지가 되니,

백성들 중에 부유한 사람이 많다.




덕원 · 원산포(원산촌) 일대(대동여지도)




육진, 부령 · 회령 · 종성 ·온성 · 경원 · 경흥 일대(대동여지도)


대체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조선 초기부터 이름난 관료가 없었다. 간혹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었지만

관직이 현령(縣令)에 지나지 않았고, 간간이 대각(臺閣에 출입한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역시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나라의 풍속이 문벌(門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대부들은 서북(西北,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과 혼인하지 않고,

서북 사람들도 함부로 사대부들과 동등하게 교제할 수 없어 서북 지역에 결국 사대부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살기에 좋지 않다. 《팔역가거지》



인용서적: 『임원경제지』 「상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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