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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격동의 조선 '도시'에 녹아들다 4

<7장>


세계사 속에서 인천이 밟아온 명과 암의 역사


박준형


'세계'에 대한 서술,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견문기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것은 1254년경으로, 당시 그의 아버지 니콜로는 숙부 마페오와 함께 이미 동방무역을 위해 베네치아를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마르코 폴로는 태어나서 10여 년을 훌쩍 넘긴 1269년에야 아버지와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동방무역의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동행하게 된다. 『동방견문록』속 흥미로운 이야기들의 소재가 되는

마르코 폴로의 긴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한 아시아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다스리는 원 제국이었다.

당시 원은 쿠빌라이 치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고려 또한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며 오랜 시간 원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에는 환도를 결정하고 삼별초에 의해 끈질긴 항쟁도 제주도에서 평정되었던 시기다.

총명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어 측근으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쿠빌라이의 허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 원의 대도에 도착한 때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294년의 일이었다.


『동방견문록』은 뜻밖에도 마르코 폴로가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다.

그 때문에 책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학자들은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다.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경위르 간략히 말하자면,

마르코 폴로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서 일어난 해전에 참가하게 되는데,

운 나쁘게도 적의 포로가 되어 제노바 감옥에 갇혔다. 이때 피사 출신의 작가인 루스티겔로와 만났고,

그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17.4×11.3cm, 1845(영국), 이탈리아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인 학자들이 원제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동방'에 대한 견문을 기록했다는 뜻인데, 원제의 의미는 그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원제를 직역하면 '세계에 대한 서술'이 된다. 『동방견문록』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이 현재의 아시아에 해당하는 것은 맞지만,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의 어느 문명권에서도 현재의 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포괄할 수 있는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에게 '동방'이란 유럽 밖의 거대한 '세계'였다. 그리고 그 '세계'는 경멸과 우월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이로움과 호기심으로 가특 찬 세상이었다.




마르코 폴로 일가가 대칸의 제국으로 향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나는 모습.



재닛 아부루고드는 마르코 폴로가 그려냈던 13세기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세계가 하나의 교환 체제로 통합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를 가능케 한 존재로서 지목했던 것이 다름 아닌 몽골 제국이다. 거대한 제국의 성립은 무엇보다

무역을 위한 안전한 수송로를 확보해주었던 것이다. 다만 이때의 세게는 전체를 총괄하는 중심부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각 시역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독립적인 지위에 있으면서도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14세기 들어 몽골

제국이 분열함에 따라 함께 붕괴되고 말았다. 16세기 이후 이러한 공백 속에 등장햇던 것이 유럽 주도의 근대 세계이며,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하나의 변곡점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동방견문록』을 통해

대서양 저편의 아시아를  꿈꾸었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다.




폴로 형제에게 금을 하사하는 쿠빌라이 칸, 이 금패는 형제가 항해하는 데 큰 방패막이가 되었다고 한다.




교차하는 '세계'


16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이른바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며 그들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가기에 앞서, 이와 정반대 방향의 진출을

꾀하는 시도가 있었다. 원 제국 멸망 이후 중원 땅에 한족 국가인 명이 세워졌는데, 명 태종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정화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함대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정화 함대의 목적은 해역의 교역 거점인 항시 국가港市國家 들과 주종관계를 확인 함으로써

조공무역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항해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동안까지 이르렀으나, 명조는 대양으로의 진출을 확대하기보다는

광주廣州, 영파寧波, 천주泉州(훗날 복주福州로 바뀜에서 관에 의한 조공무역만을 허용하는 해금정책을 취했다.


그 사이 유럽에서는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촉발된 신대륙 및 신대양의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의 대외 진출을 이끈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149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위의 가톨릭 국가들은 대서양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하나의 선을 중심으로 각각 서쪽과 동쪽 지역에서 무역과 포교의 권리를 독점했다. 그중에서도 대서양 동쪽,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 방향을 잡은 포르투갈은 15세기 말에 이미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에 도착했으며,

1511년에는 말레이반도의 향료 무역 중심지인 믈라카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유럽 세력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항시 국가들에 진출했다.

기후상의 특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농업 생산보다는 상업활동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중동 지역의 이슬람 상인들은

내륙의 혼란을 피해 바닷길을 주로 이용했는데, 말하자면 아라비아반도를 돌아 홍해나 아프리카 동안으로 나아가거나, 인도양을

건너 말레이반도를 거쳐 남중국해 방면을 향하는 식이었다. 동남아시아의 현지 권력자들은 이슬람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자 이들에게 거주와 자치를 허락하고 그들 자신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지역 항시들은

현지 주민과 중국인 이민자들에다 이슬람 상인들까지 더해져 다민족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믈라카 지도, 1620년대 작성.

국제적 해양 도시로 발전한 믈라카 지도에서 현지의 궁전은 항구를 굽어보는 요새로 바뀌었다.

중앙에 믈라카 강 위에 놓인 방어시설이 있는 나무다리는 요새와 강너머 원주민 도시를 이어준다.

그 사이 공간은 도시 중심지와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 세력의 등장과 함께 위와 같은 지역의 무역 네트워크는 유럽 중심의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항시들은 대도시로 발전하거나 식민도시로 재편되었으며, 민족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앞서 언급한 믈라카를

예로 들면, 포르투갈은 현지 권력자의 왕궁이 있던 언덕 위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새로운 거주지를 조성했는데.

이때현지 권력자측을 지원한 이슬람계 주민들은 모두 추방된 데 반해, 중국인들은 상업상에 유리한 강 하안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17세기에 황금시대를 맞은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믈라카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함께 다시 시가와 주민들의 교체가 이뤄졌으나, 중국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파트너로서 초청받았으며,

지배 세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들은 차이나타운의 형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오늘날 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들,

즉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필리핀의 마닐라, 중국의 홍콩, 싱가포르 등도 식민도시의 경험 위에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다.





믈라카의 과거와 현재.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라 안의 작은 나라, 조계와 거류지


유럽 국가들에 의해 형성된 식민도시의 기원은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십자군의 물자 수송과 자금 조달에 크게 기여해 그에 대한 댓가로

예루살렘 왕국의 항구도시인 안티오키아나 트리폴리 등을 통상 거점으로 부여받았다. 이 도시국가들은 통상 거점에

'fundicum' 이라는 상업 시설을 건설하고 'consul'이라 불린 권력자를 파건해 거점 관리와 자국민 재판을 담당하도록 했다.

지중해 동안의 레반트 지방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주로 한 사업은 무역과 플랜테이션 경영이었다. 이들 사업에서

 베네치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제노바 상인들은 1378년의 해전에서 베네치아에게 크게 패한 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최대 요새가 있던 기니아 지역에서의 사업은 제노바의 레반트 사업을 모델로 한 것이었으며,

 이 모델은 포르투갈의 세력 확장과 함께  동남아시아지역까지 이식되었다.


믈라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에 요새를 건설해 그 안에서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있던 유럽인들은

주변의 적대 세력을 평정해감에 따라 요새를 벗어나 식민지적 생활양식을 창출해냈다. 게다가 19세기 들어 아시아 해역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로는 요새의 성벽도 이제 그 쓸모를 다하게 되었으며, 유럽인들은 프랜테이션 경영이나 광업 개발 쪽에

좀 더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동남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까지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게 된다.




1500년 포르투갈의 무장 상선, 이들은 항로를 이용해 세력 범위를 빠르게 확장해나갔다.



그런데 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힌 유럽 열강들은 이전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강한 국가권력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존의 식민도시 유형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공간들이 창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조계'와 '거류지'다.


먼저 중국을 살펴보자.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42년에 난징조약을 체결해 광주廣州, 복주福州, 하문廈門, 영파寧波,

상해上海 5개 항구의 개방을 약속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국인의 거주구역이나 그를 정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이 없었던 까닭에

개항 초기 중국인과 외국인은 잡거를 했다(화양잡거華陽雜居).



「상해현성상조계전도上海縣城廂祖系全圖」점석재 제작, 1884.

상해의 외국 조계를 보여주는 지도로, 각 지역은 색상으로 구분돼 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주황색이 미국,

 파란색이 영국(1843), 붉은색이 프랑스 조계다. 프랑스 조계 아래로 상해의 중국인 거주지역이 노란색으로 표시돼 있다.



그러나 상호 간의 관습 차이와 성내의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외국인들은 골머리를 썩였다.

그리하여 1845년에 제1차 토지 장정의 공포를 통해 외국인 거주구역인 '조계'를 상해의 황포강黃浦江 서안에 최초로 설치했으나,

1853년 소도회小刀會의 봉기로 난민들이 조계 내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화양잡거華陽雜居' 상태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재개된 '화양분거'는 외국인의 자치행정 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첫 번째 잡거와는 성격을 달리했다.

또한 외국인의 자치행정 기구가 점차 조게 내 중국인에 대한 징세권과 재판권 등까지 장악해감에 따라

 결과적으로 조계는 외국인에 의한 배타적 지배가 실현되는 '나라 안의 작은 나라'가 되었다.




「나가사키항」가와하라 게이가, 비단에 채색, 57.4×79.8cm, 19세기 전반, 서울대미술관.



한편 일본은1858년에 체결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근거해 하코다테,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가타, 효고 5개 항구와

에도, 오사카 2개 도시를 개방했다. 이들 개항장과 개시장 중에는 외국인을 위한 '거류지'가 설치된 곳도 있었는데,

중국의 '조계'와 달리 일본 정부는 1894년에 불평등 조약 개정에 성공함으로써 1899년의 개정 조약 발효와 함께

거류지 자체를 철폐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불평등 조약 체결로 인해 자국 내에 '조계'와 '거류지'를 설치해야 했던

중국과 일본이지만, 이들은 이웃 나라인 한국과 다시금 불평등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불평등이 좀 더 가중된 형태로 그 구조를 한국에 옮겨 심었다.




인천의 '조계' 들

일본전관조게, 청국전관조게, 각국 공동 조계


부산에 한국 최초로 조계가 설치된 것은 1877년이다. 그 전 해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에서

부산과 그 외 두 곳을 추후 개방하기로 결정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당시 조선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고,

부산에 설치된 조계도 사실 종래의 왜관을 근대적인 형태로 재편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것이 일본인 전관 · 전용의 공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1882년 이후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 외교는 다변화되었다.

그와 함께 기존의 조계 형태, 다시 말해 일본에 의한 독점 상황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인천에 조계들이 설치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청구도』중 '인천', 종이에 채색, 37.3×24.0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처음 설치된 조계는 일본의 전관조계였다.

인본전관조계는 부산이 이어 1880년에 개항한 원산에도 설치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앞서 설치된 두 개의 일본전관조계와

인천의 조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즉 택지 대부 방식에 있어서 전자가 일본 정부가 일괄 수용한 뒤 개인에게 대부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일본인 개인들이 직접 부지 경매에 참여해 대부를 받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왜관과의 연속성보다는

조계의 일반적인 형태를 고려한 결과였다. 그러나 1883년 9월에 체결된 「인천도계조약仁川租界條約」제1조에서 "일본 상민들이

먼저 도래한 사실에 대한 보답"으로 조계를 설치하게 되었다고 굳이 그 경위를 밝혔던 것은 다변화된 외교 환경에서도 일본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조계의 성격은 변했지만, 일본인 전관 · 전용이라는 조계의 형식은 인천에도 계승되었다.




『조일수호조규』34.5×22.0cm, 1876,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일본전관조계에 이어 들어선 것이 청국전관조계다.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에 따라 중국인들도 기존의 개항장에서 무역의 권리를 획득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이른바 '덕흥호 사건'이 발생했다. 덕흥호 사건이란 부산의 일본조계 내에서 일본인의 가옥을 빌려 장사를 시작한

청국인들을 일본 영사가 붙잡아 심문하고 가게까지 닫도록 조처한 일을 가리키는데, 이 사건의 배경에는 부산 일본조계에 대한

청일 양국 사이의 견해차가 있었다. 즉 청국 측은 위의 무역 장정에서 청국인의 무역활동을 허용한 기존의 개항장으로 간주했으나.

일본 측은 이에 대해 이미 왜관 이래로 독점적인 권리를 향유해왔다고 본 것이다. 결국 청국 측은 조선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별도의 조계를 신설하기로 결정했으며, 그에 따라 1884년 4월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청국조계는 인천의 일본조계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당시 청국은 조선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빌미로 종주국으로서의

특별 대우를 강요하고 있었지만, 타국의 권익을 균점하는 데 있어서는 그와 같은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인천항 전경, 부산박물관.



마지막으로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1884년 11월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표들이 서명을 했지만, 실제로 이를 작성한 것은 일본 고베에 주재하던 영국 영사 애스턴이었으며,

모델이 되었던 것 또한 고베의 외국인 거류지였다. 인천의 각국공동조계는 각국 대표로 구성된 거류지회를 통해 행정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다른 조계들과는 구분된다. 사실 전관조계의 형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전관조계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현지 주민이나 타국인의 거주를 허용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천의 각국공동조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관 · 전용의 조계 형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의 각국공동조계는 1890년대 후반에 자발적으로

추가적인 개항이 이뤄질 때 조계 설치를 위한 유일한 모델로 계승되었다. 그 점에서 인천은

개항기의 다각적인 국제관계를 상징하는 기원적 장소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개항 당시의 인천(왼쪽 위)과 현재의 인천(오른쪽 위),

양자를 겹쳐 놓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아래), 조계 설정 당시의 도로 구획이 현재까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조계의 안과 밖

"조선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쫒겨났던가"


1883년 11월에 체결된 조영수호통상조약은 이후의 모든 조약이 이를 모델로 삼아 그 내용을 거의 답습해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조약 제4조에서는 '조계' '조계 밖 10리 이내' '내지' 등과 같이 조약상의 공간 분할과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조계'란 개항장 내에 설치된 외국인 전용의 거류구역이었으며, 반대로 '내지'는 외국인

거주가 금지된 조선인만의 거주공간이었다. '조계 밖 10리 이내'에서는 외국인이 조선의 지방 행정에 따른다는 조건 하에서

조선인과의 잡거를 허용했는데, '조계'와 '내지' 사이에 위치하면서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조약상의 규정으로 인해 조계 안과 밖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었다. 조계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촌락이 아니라

외국인의 무역 및 거주를 목적으로 특별하게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따라서 조계에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 시설이 마련되었고,

바둑판 모양의 반듯한 도로들이 조계 내 부지를 횡단했다. 또한 도로 양편에는 가로수가 세워졌고, 상하수도와 같은 근대적인

설비들도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건물을 세울 때는 도시의 전체적인 미관은 물론 화재를 방비할 수 있는 자재의 선택까지 고려

되었다. 따라서 조계 내에 조성된 공원에 오르면 나날이 성장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조계 밖에서는 개발 없는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조계 설치로 인해 본래 거주하고 있던 곳엣 반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무역을 통한 이익이나 하역 노동과 같은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조계 밖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이마을의 거주 인구는 항구의 발달과 함께

급격히 증가했지만 조계 안과 달리 유입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 도시 설비는 갖춰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당시 신문에서는

조계 안과 밖의 상황을 극락과 지옥의 차이에 빗대면서, "조선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이 세상으로부터 지옥에다 가둬놓고 들볶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다른 조계들과 마찬가지로 인천의 조계들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14년, 곧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에서다.

일본인 이주 인구는 1900년대 들어, 특히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식민 권력의 비호 속에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조약상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된 '조계'나 '조계밖 10리 이내' 지역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자본 없이 창업할 수 있고 생활비 또한

 저렴한 '내지'에 정착하는 인구가 늘어갔다. 앞서 이야기했드시 '내지'는 기본적으로 조선인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외국인의 내지 잡거는 모두 조약 위반이었지만, 이러한 불법 행위는 식민권력에 의해 곧 합법으로 공인되었으며,

그에 따라 '조계'와 '내지'의 구분도 점차 의미를 잃어갔다.


개항 초기에 조계는 외세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거점 역할을 했으나, 식민화 과정에서는 일원적인 통치의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 권력은 구미인들의 이권이 얽혀 있는 조계를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병합 당시조선총독부는

우선 조계 내 경찰권만 회수했을 뿐 외국인들의 기득권은 이전처럼 모두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조계 철폐에 대비해 지방행정 제도

 개편에도 착수했다. 그 작업이 완수되어 새로운 지방행정 제도로서'부제府制'의 실시를 보게 된 것이 바로 1914년이다. 조계 철폐 및

부제 실시와 함께 적어도 공간상에서의 내 · 외국인 차별은 사라졌다. 그러나 부의 경계는 도시와 시골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고, 그 부분은

다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 경향과 겹쳐졌다. 조계는 사라졌지만 조계 안팎의 대조적 현실은 이후에도, 그리고 어쩌면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앞서 신문이 지적한 조계 밖의 지옥과 같은 현실은 조계 안의 극락을 이웃하며 살아야 하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더욱 절감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천이라는 공간에 축적되어 있는 이러한 역사의 지층으로부터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8장>


화려한 도시 원산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삶들


윤대원


영흥만에 위치한 원산은 조선시대 함경도 덕원부 문천군에 속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그 4대조인 목조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곳으로 3대 조상 익조 이행리의 무덤인 지릉이 있고 이성계가 공부했다는 안양사가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왕조에서는 작은 고을인데도 이곳을 부府로 삼아 특별 관리해왔다.

그러나 1880년 원산이 개항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됐다.



「덕원부」 『광여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왼쪽 위 '古陵'이 태조 이성계의 3대조 익조의 무덤이고, 그 아래 절은

이성계가 한 때 공부했던 '안양사'이며 아래쪽 '원산평'은 지금의 원산 시내에 해당된다.



조선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1876년 부산항에 이어 1880년 5월 원산과 1883년 1월 인천을 차례로 개항했다.

개항은 단순한 무역 통상을 넘어 서구 열강들이 '근대 문명'을 앞세워 약소국가를 침략하던 제국주의 시대와의 만남이었다.

그런 까닭에 개항장은 서구의 근대 문물이 유입되는 길목이자 국내의 주요 자원이 빠져나가는 통로였다.


개항장은 동아시아에서 쇄국에서 개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생긴 특수한 형태이 공간이다.

서구 열강이 무역 통상을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개항장은 공간적으로는 상품 교역에 필요한 항만,

창고 및 부대 시설 등이 해안을 따라 나란히(일자형) 발달한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개항시킨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장은 일자형이 아니라 일본 이민자의 주거지 형성을 위한 '격자형 도시 형태'였다.

일본이 서구 열강이 개척한 개항장과 달리 '격자형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은 상품 거래만이 아니라

정치 · 군사적 목적이 처음부터 관철된 개항장이었다.




「원산부평면도」세부




"군사적 준비에 이해가 걸려 있으니 반드시 개항할 것"


일본은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할 때 부산에 이어 제2의 개항지로 영흥만 부근을 요구했다.

조선은 이곳에 왕릉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어 1877년 12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에서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소를" 개항한다는 조약에 따라 열린 개항장 선정 제1차 협상에서 일본은 다시 영흥만 북쪽에 있는

 문천군 송전리를 개항지로 요구했다. 조선은 이곳 역시 왕릉에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일본의 강압적 요구에 못 이겨 결국 원산진을 제2개항장으로 허용했다.


조선이 계속 반대하는데도 일본이 영흥만 일대를 개항지로 고집한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 해군은 1878년 5월 영흥만 일대를 상세히 측량하고 원산진을 문천에 버금가는 개항지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곳이 "무역에 긴요할 뿐만 아니라 근린국의 군사적 준비에 양국의 이해가 걸려 있다" 고 하며

협상단에게 원산을 반드시 개항시키라고 지시했다. '근린국의 군사적 준비'란 곧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뜻했다.

이처럼 일본이 원산을 개항지로 고집한 것은 가상의 적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 ·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원산진개항예약부도 기2.

해안을 끼고 삼각형의 경계선 안이 일본인 거류지이고 그 주변에 표기된 사각형은 원래 이곳에 있던 민가다. 일본영사는

일본인 거류지 및 주변에 조선인 민가가 35호이고 이중 23호가 거류지 내에 포함됐다고 했다. 그러나 위 지도를 보면 거류지

경계선 안의 민가는 20호이고 그 바깥에 23호가 있어 모두 43호로 일본영사의 보고와는 차이가 있다. 양상호(1994)에서 재인용.



이리하여 1879년 7월 조선과 일본은 원산항 개항을 확정했다. 그해 10월 덕원부사 김기수와 일본 하나부사 요시모토 대리공사,

일본 상인 등이 원산진을 방문해 일본인 거류지의 구획과 도로, 부두 등의 기본 시설 게획 등을 확정했다. 갈대와 습지가 넓게

퍼진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한적한 촌락인 원산진에는 43호의 민가가 있었다. 이 가운데 23호가 일본인 거류지 안에 포함됐다.

개항장의 시가지가 될 일본인 거류지는 격자형의 계획도시로 설계하고 조선 중부가 건설하기로 한 부두는

 일본인 건설업자가 맡아 착공했다.




원산진개항예약부도 기3, 양상호(1994)에서 재인용.



부두는 수면 아래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축을 쌓는 방식이었다.

이외에도 일본영사관, 일본인 상점 등이 설치될 계획이었다. 특히 일본은 원산과 서울의 거리가 50여 리로 부산보다 가까워

서울 상인의 왕래도 많은 것이라 판단하고 조선에 잘 팔린 상품을 골라 개항장에 전시하는 물산진열소를 설치했다.

시가지 토지는 일본 상인 36명에게 대부될 예정이었다. 개항장에는 이런 일본인 시설 외에도

개항지를 관리할 조선 관청으로서 수출입 업무를 담당할 세관, 감리서가 세워졌다.




'격자형' 개항 도시로 발전하다


원산항 시가지 건설은 1880년 5월 20일, 일본영사관 직원과 상인 등 200여 명이 원산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했다.

일본은 조선인 가옥을 빌려 임시 일본영사관을 열고 영사 업무를 시작했다. 일본인 거류지는 전체적으로 3개 구로 설계했다.

일본영사관 등 공공 시설이 집중된 북쪽 지역을 제1구로, 동쪽 해안지역을 제2관구로, 낮은 지대이지만 거주 조건이 양호한

남쪽 지역을 제3구로 나누고, 제1, 3구를 먼저 건설했다. 이후 일본인 인구가 늘어나자 1890년 12월 일본영사관에서

조선인 마을인 원산진으로 가는 중앙통인 제3구를 좌우로 나눠 동쪽을 제3구, 서쪽을 제4구로 삼았다.


1884년 원산항 일본 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개항 초기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부에는 50~60호의 집이

있을 뿐이고, 동쪽 해안지역에는 2, 3호의 집 및 헌병분대와 병영이 있고 전체적으로 빈 곳이 많다고 할 정도로

시가지 개잘은 중앙통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1906년 이후 통감부가 직접 부두 등 항만을 확장하고

이후 대형 선박이 출입하면서 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편 원산은 조선과 일본의 조약으로 개항되어 초기에는 다른 외국인은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1884년 조선이 영국과 체결한 통상 조약의 "최혜국 조항'에 따라 각국의 외국인이 개항장에 거류할 수 있게 되면서

청나라도 그해 5월 원산에 청국영사관을 설치했다. 청국인은 1888년 4월 청국인 거류지가 따로 마련될 때까지 일본인

거류이에 함께 거주했다. 그 외에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 또한 1884년 이후 원산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펼쳤다.




원산 상점가 중정거리. 부산박물관.




원산 전경. 부산대박물관.



원산이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점차 개항 도시의 모습을 갖추면서 조선인 마을도 함께 발달했다.

원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적전천의 아래쪽에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개항 초기 이곳에 시장이 발달하면서 조선 상인이

모여들고, 항만 · 도로 · 건물 등 개항장 건설에 동원되는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인구도 늘어났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자연히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업, 음식업, 숙박업도 발전했다. 이곳에 몰려드는 이의 대부분은 인근 함경도 출신의 단신 노동자였다.

함경도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던 터라 다른 지역에 비해 소작제도가 발달하지 않아 토지에서 쫒겨난 농민이 상대적으로 적어

가족 단위 이주가 아닌 단신 노동자가 많았다. 당시 건설 노동자는 '십장'이, 화물을 내리고 옮기는 부두 노동자는 '도장'이

노동자를 모집해 건축주나 화물 주인과 교섭하여 고용하는 형태였다. 그런 까닭에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은 자연히

이들 십장, 도장의 출신지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뤄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강한 연대감을 형성했다.




대흥교와 적전천교. 부산박물관.



이처럼 개항장 원산은 공간적으로 적전천을 사이에 두고 위쪽은 일본인 거류지로, 아래쪽은 조선인 마을로 정착되어

공간의 민족적 분리가 이루어졌다. 또한 원산항이 발달할수록 조선인 마을은 일본인 거류지에 경제적으로 더욱 종속되어갔다.




식민지 무역 체계를 형성한 개항장 원산


원산이 개항장의 모습을 갖추면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다 유입 인구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원산의 개항 목적은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치 · 군사적 이유도 강했기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곳도 부침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개항 첫해인 1880년 말 일본인 거류민 수는 총 235명으로

남자 210명, 여자 25명이었다. 이 가운데 일본영사관 직원 및 부속 인원이 75명(남 55, 여 20/직원5, 경찰관 32)이고,

일반인으로서 직공이 100명, 상인이 60명이었다. 영사관 직원 가운데 경찰관이 많은 것은 치안 목적 때문이었다.

개항 당시 일본인이 개항장에서 벗어나 행상을 할 수 있는 공간, 즉 간행리정間行里程은 사방 10리 였다.


일본은 이들 지역에서 조선인의 반일 행위를 경계해 당시 상거래의 중심지인 원산진 시장에

일본 경찰을 상주시키는 한편 이곳에 일본인이 출입할 때 항상 일본 경찰 2~3명이 함께 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경찰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개항장에 상인보다 직공이 많은 것은 개항 초기 상업활동보다

시가지 및 부두 건설 등에  투입할 인력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원산 잔교, 부산박물관.



그런데 1880년에서 1910년까지 연도별로 일본인 인구수를 보면, 전체적으로 일본인 수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1884년 그리고 1904년을 전후해서는 인구 변동이 상대적으로 심했다. 1984년 일본인 수를 보면 1883년 199명에서

173명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1884년 인천이 개항되고 서울에서도 외국인의 상업활동이 가능해지면서 원산의

일본 상인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었다. 반면에 1894년 및 1904년 후 1~2년

903명으로, 그리고 1895년에는 1362명으로 무려 459명이 늘었다. 또한 1904년에는 1895명에서 1905년에는

무려 1255명이 늘어난 3150명이었다. 여기에는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의 정치 군사적 발언권이 강화되고 거류 환경이 안정되자

일본인 상인은 경제적 이익 확대에 큰 기대를 걸고 원산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후 늘어나던 일본인 수가

1907년 이후 다시 감소한 것은 바로 위의 청진항이 개항되면서 이곳으로 인구 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원산부 함흥시가 전도『조선도별현세지도』서울시립대박물관.

각종 통계 그래프 및 표가 있어 현세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색깔을 달리하여 철도 및 도로 개통 상황,

군청과 경찰서 등의 시설, 각 지역의 특산물들도 표기되어 있다.



한편 아래 도표는 1887년, 1899년, 1900년 3개 년도의 매년 말 현재 일본인의 직업별 분포를 조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상품 거래를 하는 중개상, 무역상과 함께 짐꾼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개항 후 원산이 통상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짐꾼은 주로 수출입에 따른 화물의 이동, 보관 등을 담당한 일본인 부두 노동자들이다.

목수, 미장공은 개항 이후 시가지, 항만 건설에 종사하는 일본인 노동자들이다.




원산항부두, 부산박물관.



(…)

1884년 개항장 사방 100리로 외국 상인의 활동이 허용된 뒤 일본 상인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속에서도 조선 상인, 청국 상인,

일본 상인 사이에 일정한 경쟁 체제가 가능했다. 일본 상인과 경쟁하던 청국 상인은 일본 상인을 배척하는 조선인의 반일

감정 때문에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청국 상권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일본 상인이 대신했다. 더구나 전쟁 기간에 원산에 파견되어 주둔한 일본군 2개 연대 병력은 일본 상인의

안정적인 활동을 뒷받침했다. 이에 따라 원산항 역시 다른 개항장과 마찬가지로 곡물과 광물 등 원료를 수출하고

일본의 공장제 상품을 수입하는 식민지형 무역 구조로 재편되어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원산지점




식산은행 원산지점.





식민지 도시 원산의 화려함에 기생했던 이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원산은 개항 도시의 역할을 끝내고 새롭게 식민지 도시로 변모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장해나갔다. 특히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식민지 교통운수 체계를 구축하면서 원산은

한반도 동북부 일대의 경제와 일본 경제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만주 · 시베리아를 향한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병합 직전인 1906년 이후 통감부는 대형 선박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원산항의 항만 확장 공사를 추진했다.

그 결과 대형 선박으로 원산과 일본을 잇는 정기 항로를 속속 개설하면서 이전에 부산을 매개로 이뤄지던

본국과의 연결이  직접 가능해졌고 이로써 원산항은 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아가 1918년에

동해 횡단 항로를 개설한 이후 1902년 개설한 오오스카 정기선 외에 본국과 연결한 많은 대형 정기선이 생기고

심지어 불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는 정기선도 개설함으로써 원산항은 한반도 동북부 일대를

일본의 시장에 종속시키는 식민지 항구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




원산항 부두 해륙 연결, 부산박물관.



(…)

한편 원산은 여느 무역항과는 달리 훌륭한 지형과 기후 조건으로 인해 개항 이후 국내 최대의 휴양도시로 성장했다.

원산은 마식령산맥의 지맥들이 영흥만 쪽으로 점차 낮아지면서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시루봉, 장덕산, 여왕봉 등의

낮은 산과 적전천이 있고, 남쪽으로는 안변평야로 이어진다. 영흥만 안팎으로 신도, 송도, 웅도, 여도, 장덕도 등

크고 작은 섬 20여 개가 갈마반도와 더불어 자연적인 방파제 구실을 한다. 이런 천혜의 자연 조건 때문에

영흥만 안의 물결은 잔잔하고 수심이 8~13미터에 불과하며 조수간만의 차가 1미터 이하여서

당시 동양에서도 손꼽히는 항구이자 휴양지로 유명했다.




원산해수욕장




우리나라 스키의 발상지인 신풍리 스키장.



(…)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개항 도시에서 식민지 도시로 성격을 변모시킨 무역항이자 관북 교통 물류의 요충지로 성장한 원산은

1930년대 이후 인구와 경제력 면에서 식민지 조선의 6대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6대 도시'라는 원산의

화려한 발전은 일제와 이에 기생하던 친일파들에게만 그 몫이 돌아갔다. 그 이면에는 일상적으로 민족적 멸시와 경제력

착취에 시달리는 식민지 조선 민중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조선인 촌은 기분이 답답한 오막살이 초가집"

주변부로 밀려난 삶들


1926년 7월 9일자 『조선일보』에서는 번창하는 원산의 일본인 거류지와

 '날로 쭈그러들고 달로 퇴보하는' 조선인 거주지를 비교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북과 서남에 대립하여 있는 인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촌의 정상이야말로 실로 세불양립勢不兩立의 구차한 상태를 이루어

일본인 거류지는 즐비한 가옥이며 찬란한 점포가 일견 호사르 극한 항구에 조금도 손색이 없고, 반면 조서인 촌은

보기에도 기분이 답답한 오막살이 초가집이 옹기종기 붙어 있으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랴.


(…)

이런 사정을 반영하듯 원산항에는 국내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간도나 연해주로 이민하려는 사람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었다.

1927년 3월 28일자 『동아일보』에서는 "나날이 증가되는 간도 방면으로 유리하는 농민으로 원산역과 연락선이 대혼잡을

이루는 중 지난 23일에 연락선으로 향한 수가 800여 명이요, 25일에 900여 명이 단체로 북행했다고 하며 연일 계속하여

모여드는 중이라드라"라며 온 가족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낮선 이국땅으로 떠나는 슬픈 광경을 연일 보도했다.


이렇듯 원산은 개항 이후 수십 년이 지나 식민지 도시로 화려하게 성장했지만,

이는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한 발전이었을 뿐이다.

반면 조선인은 민족적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및 가난 속에서 식민지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런 차별과 불평등은 당연히 식민 당국은 물론, 이를 등에 업고 차별과 수탈을 일삼은 일본인을 상대로

민족적 · 계급적 갈등을 불러일으켜 원산 지역 항일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9장>


모순과 갈등의 씨앗을 품은 도시, 경성


김미지


21세기 '경성 붐'과 경성의 재발견


'경성京城'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의 500년 도읍지 한양(한성)을 대체하여 불린 이름이다.

광복 1년 뒤인 1946년 8월 15일에 발표된 서울시 헌장 제1장 제1조에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라 공표함으로써 우리 수도는 신라시대 이래의 유서 깊은 고유어인

'서울'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이로써 '경성'이라는 명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하고 번잡한 서울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20세기 초라는 점 때문에 현재의 서울을 이야기할 때 20세기 전반을 특징짓는

 '경성'의 시기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와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 걸까.

일제강점기라는 하나의 축과 근대화와 현대성의 진전이라는 또 하나의 축이 맞물리면서

 이는 간단치 않은 과제가 되어왔다. '경성'을 해부하고 재발견하려는

학술 · 문화적 시도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경성시가의 모습, 부산박물관.



흥미롭게도 21세기에 접어들어 그 시절 경성을 배경으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소설 『경성애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경성스캔들」(2007)을 비롯해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2008), 「원스 어폰 어 타임」(2008), 「라듸오 데이즈(2008)」등이 2000년대 말 경 줄줄이

선보였다.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이 작품들은 1930~1940년대, 즉 먼 듯 가까운 경성 시대를 무대로 펼쳐지는 '스캔들', 로맨스와

풍속을 그리고 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 속에는 독립운동가, 친일파, 신여성, 모던걸과 모던보이, 일본인 순사와 관료, 신문화의

선구자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군이 총출동하며,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추격전, 사랑과 갈등, 음모와 복수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2007년에 방영괸 드라마 『경성스캔들』



최근에도 경성 시절, 즉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공포영화 「경성학교」(2015), 미스터리 치정극「아가씨」(2016),

마지막 기생의 이야기인 「헤어화」(2016), 1930년대 소설가의 환생을 담은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2017) 등

시대물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은 1970~1980년대에 쓰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나타난

'경성'과 닮았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무대를 보여준다. 즉 그 시대를 실제 경험하거나 목격했던 이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보다는 이국적이고 이색적인 시공간으로 선사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일제강점기는 독립된 나라로서의 자주권을 빼앗기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 일제의 폭압에

저항 또는 협력하는 양단 간의 선택을 강요받던 시대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니 1980~1990

년대부터 그러한 이해가 놓치고 지나간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폭압적 체제,

강제로 이식된 제도, 저항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와 같은 거시적인 틀을 당시 삶을 결정짓는 핵심으로 사고할 경우,

당대인들의 주체적인 활동과 일상의 소소한 삶의 가치 및 생명력과 같은 것을 들여다볼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다양한 모습을 띠며 스스로의 삶과 존엄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왔다는 점이 재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시 사람들의 일상, 풍속, 인정세태 또는 급격히 변화한 외양, 패션, 유행에 대한 관심은 나름 타당하지만,

한편 그 시대가 빚어낸 절체절명의 위기, 폭력과 갈등들을 도외시할 우려도 있다. 경성은 분명 한반도의 역사에서 유래가 없던

근대 도시이며 화려한 대도시의 모습을 갖춰갔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외양과 삶의 양태도 변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저항

그리고 상존하는 위험만이 그 시대 및 공간을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모던함'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도 분명하다.


실존한 독립운동가들을 모델로 하되 저항이냐 협력(반민족적 배반)이냐라는 고정된 틀로 이를 조명하기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행동과 선택, 내적 갈등, 자기 책임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암살」(2015), 「밀정」(2016)이

등장한 것은 어쩌면 유행처럼 번졌던 '모던 경성' 붐에 대한 일종의 반성 또는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경성시가도」1:7500, 99.0×98.4cm, 1933, 서울역사박물관.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강북 중심지역을 그린 지도로 1927년의 것과 비교해보면 상공장려관, 미쓰코시백화점 등이 눈에 띈다.

남대문 주변 일대 등 경성이 비즈니스타운으로 변모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마천루와 빈민촌이 나란히 붙어 있는 도시 공간, 생산보다는 집중된 인구의 소비와 배설이 주요 기능인 도시는 그 탄생부터

모순과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화와 상업화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 도시, 더구나 식민지가 된 도시는 그만큼

복합적이며 모순적이다. 경성은 곧 개항 이후 서구화, 자본주의화되는 거대한 소비 도시로서의 모습과 일제강점 하의 식민지

수도라는 특징 그리고 600년 조선 왕조의 도읍지였던 유서 깊은 역사도시로서의 모습이 겹쳐져 있는 장소인 것이다.

즉 경성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특징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다. 이 글은 이러한 경성의 공간적 특징을

염두에 두고, 당대의 신문 잡지와 문학 작품들을 밑그림으로 삼아 경성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려 한다.




수탈과 근대화라는 이중주와 불협화음


신민 지배 권력이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에서 행한 통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공통분모가 있는 한편

개별적인 차이들도 있다. 즉 영국, 프랑스가 각각의 식민지인 인도, 베트남 등을 경영한 방식에 차이가 있듯이 일본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 체제에 대해 흔히 전제하듯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종일관 계획적

이고 치밀하게 지배를 공고히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후발 근대 주자이자 후발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일본은 서구 열강을

부지런히 흉내 내거나  따라잡으려는 한편 '대동아'의 맹주가 되기 위한 기획과 사업에 골몰했다. 물론1910년 한인병합이라는

사건이 있기 전부터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고자 꾸준한 노력과 준비의 시간을 거쳤지만,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기왕에

안정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체제를 조선 땅에 그대로 옮겨 심거나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실험'에 가까운 면도 많았다.

그리고 '실험'의 특성상 시행착오와 비일관성, 실패와 교정이 뒤따른다.


물론 교육 정책이나 출판 정책이 무시로 바뀌고 도시계획이 진통을 겪는 것은 그리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특히 관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통치 권력이 행사되고 있다면 시대와 환경에 맞춰 수정되기 마련이다.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조선교육령'만 봐도 교육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일본인과 똑같이 가르칠 것인가 차별화할 것인가, 일본어와 영어 교육의

비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가 이슈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일본의 지배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강제

되는 과정에도, 식민지 주민과의 갈등 및 권력을 행사하는 데 따르는 진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그만큼 당시는

일방적인 수탈로 점철된 시기인가,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개발이 가능했던 시기인가로 단순화하기에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때를 특징짓는 가장중요한 문제로 이야기되곤 하는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화의 진행 과정과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주자 분포도」38.6×53.5cm, 1920년대 후반, 서울시립대박물관.

1911년부터 1927년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실시한 농민의 이주 분포도를 나타낸 것으로

조선에 일본인들을 이주시켜서 빠른 정착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 입장에서 식민지의 효용은 크게 식민지의 물적 · 인적 자원을 수탈하는 것

리고 자신들의 안정적인 상품 시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즉 식민화의 일차적인 목적은 경제적 이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원할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토대가 이 땅에 물적인 인프라를 건설하고 확충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기찻길을 놓곧 도로를 뚫으며 통신과 물류망을 갖추고 공간을 재배치할 뿐 아니라 건축물을 축조하는 일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또한 이 땅에 관료나 상인, 기술자로서 이주한 일본인들이 자신의 삶과 일을 잘 영위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반을 만드는 것

역시 그에 포함된다. 어찌 보면 우리가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근대화'라고 부르는 이 모든 과정은 수탈과 생산의 기반,

나아가 재생산의 기반이 한데 뒤섞인 복합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경성을 필두로 한 우리의 근대 도시 역시 그렇게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

도시란 인위적 계획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의 삶의 터전인 까닭이다. 그래서 1930년대 소설가 박태원은

경성 종로 일대를 무대로 한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빈약한 옛 궁전" "구차한 내 나라"에 온통 "우울하며 고달픈

사람들" 뿐이지만 그 속에서 "약동하는 무리들"을 찾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그 속에 인생이 있으리라, "서울의 호흡과 감정"

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던 것이다. 수탈과 유린의 불행한 시대, 사복 순사의 일상적인 감시의 눈길과 돈과 황금에 눈을

빼앗긴 황금광들과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기만 한 이 땅의 주민들 속에서 우울과 고독, 공허와 애달픔을 느끼면서도 소설가 구보는

'조그만 기쁨과 행복'을 찾아 온종일 종로 거리를 헤맨다. 급변하고 척박한 도시 또는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를

그 시대의 주민들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내어야 했으므로.




종로 2정목 거리, 부산박물관.



오전 두 시의 종로 네거리-가는 비 내리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곳에 끊임없다.

그들은 그렇게도 밤을 사랑하여 마지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도 용이하게 이 밤에 즐거움을 구하여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일순, 자기가 가장 행복된 것같이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그들의 걸음걸이에 역시 피로가 있었다.

그들은 결코 위안받지 못한 슬픔을, 고달픔을 그대로 지닌 채,

그들이 잠시 잊었던 혹은 잊으려 노력했던 그들의 집으로

그들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이중 도시, 잡거 도시, 혼종의 도시


오늘날에도 서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적 구성을 보여준다.

대도시이자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전국 팔도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전 세계의 다양한 국가, 인종이 모인

국제화된 도시이기도 하다. 즉 서울은 단순히 토박이들이 거주하는 땅에 지방민들이 들어와 사는 곳이 아니라,

세계의 여느 대도시들 처럼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공존하며 사는 잡거의 도시가 되었다.


2017년 말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40만 명 이상으로, 서울 인구 1000만 가운데 4퍼센트에 달한다.

 유서 깊은 옛 도읍지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하던 201세기 초의 경성 역시 인구 재편이 빠르게 이뤄졌다.

20세기 초 조선 인구 2000만 가운데 경서의 인구는 1910년대 27만 명에서 1930년대 중반에는 37만 명으로 급증했다.

1920년대 30만 명에서 1930년대 60만 명으로 두 배나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아직 농촌 인구가

 절대다수였던 시절이지만 인구의 도시 유입이 급속히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반적인 근대 도시처럼 농촌 인구의 유입, 국제 도시로의 변화와 같은 사실과 더불어

경성이 식민지의 수도라는 점은 이 도시의 또 다른 특징을 만들어냈다. 즉 일본의 통치 기구가 들어와 자원과 시스템을

장악하면서 일본인 이주자가 급증했고, 이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형성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아는 북촌, 남촌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해방 후 북촌은 한옥마을로 특색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청게천 이남의 남촌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는 일본인 거주지 '남촌'이 없어진 대신 용산, 이태원이 미군기지와 해방촌 그리고 외국인들의

집결지로 재탄생하면서 새로운 외국인 거주지역 또는 점유지로 변했다.




「경성부관내도」 『경성부부세일반京城府府勢一般』1:16000, 78.4×54.3cm, 1917, 서울역사박물관.

도로가 1~3등급과 등외도로로 구분되어 표시되어 있는 지도인데, 일본인 집단 거주지인 남촌과 달리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세종로와 종로, 종로-혜화문 구간에만 등급 도로가 나 있고 나머지는 모두 등외도로인 점이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 이주 인구는 전국적으로 합병 이후 20만 명에서 1931년 경 50만 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서양인의 수 역시 1910년 750여 명에서 1938년 1500명 정도로 늘었지만(조선총독부 통계 자료),

 일본인 이주자의 급증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수치였던 것이다.



인용서적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시로 읽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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