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힘, 신화의 땅 제주
유요한
신화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으면 풍요와 안전이 위협받을 것
신화를 설명하는 다양한 진술이 있지만, 종교학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 중요한 의미를 공유하며
성스럽게 여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성스러운 이야기'는 꾸며낸 거짓 이야기와 구별되는 '참된 이야기'다.
물론 모든 신화가 성스럽고 참된 이야기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현실 속에 있을 법하지 않은 내용조차 참으로 받아들여졌던 성스러운 이야기들이 사회와 문화가 바뀌면서
진실로서의 힘을 잃곤 한다. 이런 신홛르은 생명력을 잃은 "과거의 신화"가 되어버린다.
특히 특정 지역의 토착 신앙 및 의례와 관련된 신화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유입되면
미신으로 치부되어 주민들의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토착 종교의 신화들을 '참'으로 믿고 이를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기반으로 삼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
이 신화들은 마을 공동체 및 가정 단위의 의례와 연결되어 주민들의 종교적 삶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신화'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힘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신화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
「영주산대총도」104.5×59.5cnm 18세기, 국립고궁박물관.
독립된 제주 지도로, 제주의 3읍과 9개 진성, 10개의 목마장, 주요 마을과 도로, 주변 섬들이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제주 신화는 이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주민들에게 신관, 자연관, 인간관, 영혼관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마을 밎 가정 단위 의레를 집전하는 제주 무속인 '심방'들에게 특정한 종교 행위를 물어보면 종종 신화를 구송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의례에 참여하는 주민들 역시 신화는 공식적인 의례의 근거와 방법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모든 인간 행위의
모델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탐라지초본」이원조, 30.2×18.3cm, 조선시대, 한국국학진흥원.
이원조가 제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에 집필한 읍지 초본이다. 『고려사』와 『고기古記』에 나온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탐라의 개벽 설화를 시작으로 세 신인과 세 처녀의 결혼 및 정착생활, 농경사회의 형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중요한 의미를 공유하며 진실로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제주 신화라고 한다면,
흔히 '전설'로 분류되어온 이야기 중에서도 신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적지 않다. 제주도의 신화와 의레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현용준은
제주 신화를 도민들이 "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신성한 이야기라고 관념"하는 것이라 말하고, 덧붙여 제주 신화는 "심방이
굿을 할때 노랫조로 부르는 것"이라며 그 범위를 제한했다. 반면 "특이한 자연이나 역사적인 특수한 인물 및 사건, 신앙 · 관습 등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도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사실이라고 믿어 이야기하고 또한 듣는 이도 그렇게 믿어서 듣는"다고 하더라도
의례의 장에서 구송되었던 많은 종교적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의례의 맥락과 분리되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의례에 채용되기도
하는 점을 고려하면, 의례와 연관지어 신화와 전설을 구분하는 것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제주시 용담동에 있었던 신당인 내왓당의 무신도로 왼쪽은 상사대왕, 오른쪽은 제석천왕마노라,
지본채색, 62.0×38.0cm, 중요민속자료 제240호, 조선시대, 국립제주박물관.
게다가 대부분의 학자가 기원 신화나 영웅 신화와 같은 신화의 하위 범부에 포함시킬 이야기를 전설로 분류하면
범주상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주 주민들이 성스럽게 여겨 사실로 믿는 이야기는
모두 신화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토착 무속 신화에서 두드러지는 불교적 요소
외부 신들이 건너와 이야기로 탄생하다.
제주 토착 종교 의례 때 심방이 구송하는 신화를 '본풀이'라고 하는데,
대개 신화의 주인공인 신이 모셔진 내력을 풀어낸 이야기다. 옥황상제에 해당되는 천지왕, 산육신産育神 삼승할망,
무신巫祖神 초공 잿부기 삼형제, 아전 출신 저승 차사 강님, 마을 일 전반을 담당하며 특히 호적과 장적帳籍을 맡은 본향당신,
문이나 부엌, 변소 등 집의 주요 장소에 좌정한 가신家神, 변덕스런 도깨비 등 수많은 신이 각 본풀이의 주인공이다.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심방은 천지창조 신화부터 시작해 의례의 장소 및 목적과 관련된 신화까지 여러 본풀이를 구송하는데,
이들 이야기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주요 자연현상 및 인문 현상을 나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다. 그런 까닭에
제주도의 신화는 우리나라 다른 어떤 지역의 신화보다 더 탄탄한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신칼, 길이 22.0cm, 20세기,
제의에서 점구 혹은 춤을 추는 도구로 사용되며 무당과 제신들의 위엄을 나타낸다.
본풀이는 제주 토착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제주 사람들에 의해, 제주 사람들을 위해, 제주에서 사용되는 말로 전해진 신화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심방이 굿ㅇ하는 본풀이를 알아듣기 힘들다. 1만 8000이나 된다고 하는 수많은 신이 낮설뿐더러 별도로
공부하지 않고는 제주 방언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아래 아'와 '순경음 비읍'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는 상실된 발음도 여전히 쓰인다.
처음 본풀이 구송을 듣는 사람이라면 '동해 와당'을 '동해 바다'라고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천자또, 백주또, 궤노깃또,
개로육서또, 바람웃또, 하로산또 등 신들의 이름에 'ㅡ또' (혹은 'ㅡ도')가 붙은 것도 웬지 어색하고, '심방'이라는 단어가
'신의 형방刑房'에서 왔고 명부 사자 명관冥官이 '멩감'이 되었다는 것도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큰 관점에서 보면 제주 주민들의 신화는 곧 인간이 일반적으로 공유해온 신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신들이 제주 본풀이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부각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결국 신들을 통해 우 주가 생성된 과정,
삶과 죽음의 문제, 세상과 인간의 속성 등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질문하고 답변해온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인간은 문화의 장벽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유대와 생각을 간직해왔고 이것이 여러 신화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여러 문화에서 제주 신화에 담긴 인간읠 근본적인 물음 및 답변과 유사한 형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제주 신화는 한국의 신화이기도 하다. 많은 학자는 제주 신화에는 한반도 육지에서 온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전 지역의 무속은 같은 뿌리에서 유래했으며, 제주 신화와 의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사람들의 종교생활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육지에 비해, 제주도는 문화 변동이 적어서 예부터 전해온 무속 신화와
의례의 형태가 큰 변화 없이 오히려 더 잘 유지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주도에 파견된 첫 한국인 가톨릭 신부 김원영은 가톨릭의
우월성을 나타낼 목적으로 1900년에 『수신영약修身靈藥』을 집필했는데, 이 책에 쓰인 약 120년 전의 토착 종교 신앙과 행위의 모습이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재주도 토착 신화와 의례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그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김영철 심방 자택에 있는 당주, 신칼, 요령, 산판으로 구성된 삼멩두가 신의 위치에자리하고 있다.
멩두가 무구巫具로 사용되는 동시에 신 자신으로 모셔지는 근거는 무조신 신화인 『초공본풀이』에서 찾을 수 있다.
(…)
제주 신화의 중요한 일부가 된 외부 요소들 중에서 불교에서 유입된 내용이 가장 두드러진다.
불교는 아주 아래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토착적인 사고 및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기 때문에 나라 전역의 토착 무속 신화들에
불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초공본풀이」 「칠성본풀이」 「한동본향당신본풀이」 등 몇몇 제주 신화의 주인공 신의
조상은 부처님이다. 그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초공본풀이」에 포함된 초공의 계보로, 초공의 할아버지는 석가여래, 할머니는 석가모니
라고 소개된다. 동일한 존재의 다른 두 이름이 구별된 남녀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보아, 불교적 요소는 제주 신화의 형성 과정에서
부리콜라주의 재료처럼 목적에 따라 편리하게 수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외부에서 유입된 성스러운 존재인 부처님이
토착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고자 토착신의 조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건축 의례인 성주풀이를 위해 새로 건축된 집 방 안에 차려진 제물.
(…)
제주 신화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이야기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천지왕본풀이」에서 대별왕이 이승에 내려와 두 개씩 떠 있던 해와 달에 화살을 날려 이들이 하나씩만 뜨도록 한 이야기는
중국 신화에서 하늘의 궁수 예羿가 천제의 철없는 열 아들인 태양이 한꺼번에 뜬 것을 화살로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차사본풀이」와「성주풀이」에는 '서목시'라는 별명을 지닌 강태공이 등장한다.
(…)
제주도에 유교 사상과 의례가 퍼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로, 신화에 유교이 영향이 아주 많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
「송당본풀이」계열로 분류되는 여러 당본풀이에는 제주 당에서 솟아난 신이 바다 건너 타지에서 들어온 여신과 결혼하는 이야기가
줄거리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모티프는 고 · 양 · 부 3성姓의 시조 신화로 알려진 「삼을나신화」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세 개의 구멍, 즉 삼성혈三姓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는데, 이들에게 배필이 없던 터에 다른 나라 왕의 세 딸이 석함을 타고 오곡의
씨앗을 가져와 이들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다.
「제주도」35.7×42.0cm, 조선시대, 국립제주박물관.
민화풍의 제주지도로 1702년에 건립된 삼성묘가 동문 안쪽에 있고 삼사석의 위치도 확인된다.
신이 땅에서 솟아나는 이야기나 외부의 신이 상자나 배를 타고 들어오는 이야기가 한반도 육지와 북방 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오키나와, 타이완, 베트남, 필리핀, 대마도 등에서 종종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제주 신화는 남방의 해양 문화권 영향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와흘본향당 신목.
본풀이에 따르면 와흘 본향당시 백조도령은 송당 본향신 부부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종류
제주 토착 종교 제의 과정에서 구송되는 본풀이는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자 내용으로,
오랜 세월 제주에서 '참'으로 여겨져 온 이야기들이다.
본풀이에 등장하는 신의 속성과 신봉되는 범위를 기준으로 대개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먼저 '일반신본풀이'는 모든 인간과 자연 현상을 주재하는 신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제주 전역의 의례 절차에서 구송된다.
(…)
(…)
칠머리당 영등굿 중 영감놀이.
선왕船王 도깨비를 대접하여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 …)
『남사일록』에 실린 '한라산제문' 이증, 영인본, 조선시대, 국립제주박물관.
삼가 탐라 지역은 상서로운 기운이 모여들고 신기함이 쌓이며 신령이 축적되는 곳으로,
신명께 경배하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사 비는 내용이다.
「제주도도」중 '산방山房', 61.0×40.5cm,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대정현 동쪽 10리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산방은 전설상 옛날 사냥꾼이 한라산에 올라가
활을 쏘아 하늘의 배 가까이에 이르자 상제가 노하여 주봉柱峯을 꺾어 여기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영웅의 신화
신화학자들은 세계 각지의 신화들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주제나 내용에 따라 몇몇 신화의 범주를 설정해왔다.
그중에서도 '천지창조 신화' '기원 신화' '영웅 신화' 등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제주 신화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천지왕본풀이」에는 우주 만물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천지창조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
「천지왕본풀이」의 맨 앞 부분을 살펴보자.
태초에 천지는 혼돈으로 있었다. 하늘과 당이 금이 없이 서로 맞붙고, 암흑과 혼합으로 휩싸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으로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축방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금이 생겨났다. (…) 이 금이 점점 벌어지면서 땅덩어리에 산이 솟아 오르고 물이 흘러내리곤 해서
하늘과 땅의 경계는 점점 분명해져갔다. 이때 하늘에서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되어 음양상통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생겨난 것은 별이었다.
(…)
신화를 삶으로 살기
서두에서 밝혔듯이, 제주도가 살아 있는 신화의 땅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주 사람들이 신화를 삶으로 살아내기 때문이다.
제주 주민들은 신화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상기하며, 삶의 과정마다 반복하면서 삶으로 재현한다.
모든 시간, 장소, 환경에서 신화와 관련된 삶을 영위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주민들은 한 해 내내 신들과 교류하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새해를 맞이할 때, 어업 · 농업 · 수렵 · 목축 등 모든 생업의 풍요를 기원할 때, 장마가 이어질 때, 추수를 마쳤을 때 등
특정한 시기를 정해 정기적으로 신에게 문안드리고 기원한다. 또한 개인, 가정, 마을 공동체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에는
언제고 신을 찾아간다. 제주 본풀이는 줌니들이 신과 교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신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신과 관계를 맺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신화는 사람들이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근거와 방법을 담은 지침인 셈이다.
삼사석비, 높이 149.0cm, 1735, 제주도기념룰 제4호.
탐라의 시조가 배필을 맞아 살 곳을 정하고자 화살을 쐈다는 전설이 깃든 비다.
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하며, 1735녀 제주 사람 양종창이 세웠다.
* * *
제주 사람들은 놀라거나 사고를 당하면 넋의 일부가 빠져나간다고 믿고,
빠져나간 넋을 다시 불러들이는'넋들임' 의례를 치른다.
사진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굿당에 넋들임을 위해 차려진 제물이다.
최근에는 제주도 열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제주를 찾고 있으며,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제주에 정착한다. 이들은 제주의 신화와 의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주 토착 주민들 중에서도 신화를 삶의 원리이자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이의 비붇은 점점 줄고 있다. 제주도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 있는 신화의 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섣불리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에 근거한 사고와 행위 방식들이 약화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공동체 차원의 신화와 의례는 어떤 형태로든 당분간 보존될 테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전해내려온 신화의 생명력은 더 급속히 사라져갈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 신화에는 인간과 자연, 영혼과 죽음,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제주 주민들의 관점이 생생히 담겨 있으며,
나아가 지금은 소실된 우리나라 다른 지역 사람들의 관점도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살아 있는' 제주 신화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것이다.
<6장>
평양이란 도시에서 감사는 어떻게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되었나
이은주
(…)
호화찬란하고 황홀한 평양
평안감사가 나오는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평안감사의 도임이다.
도임 장면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는 성대한 행렬과 아름다운 산수, 행렬을 맞는 풍악, 미색으로 유명한 평양 기생이다.
이날 청명 삼토 끝에 발행하여 경성을 떠날 적에 기구도 찬란하고 위엄도 엄숙하다
얼른 걷는 백마 등에 쌍교 독교 별련이며 좌우 청총마 썩 떠들며 호기 있게 내려갈 제, 전배 수배 책방 비장 맵시 있게 치장하고,
차례로 늘어서서 장식한 백마 등에 호피 도듬 높이 타고 소상반죽 쇄금선으로 햇빛을 가리고 평양으로 내려갈 제, 어지 아니 좋을런고.
(…) 각기 대오를 만들어 초관들이 먼저 나오고, 전배 비장, 후배 비장, 초관, 집사, 여러 장관이 행렬을 지어 가지런히 서고,
천파총이 군문에 늘어서서 옹위하고 들어갈 제, 대장 청도기 각 한 쌍, 피리 한 쌍, 길나장 늘어서서 동서남북으로 황백청홍기를
찬란하게 벌여 세우고, 금산 형방 알현할 제, 삼현육각 악기 소리는 산천이 뒤눕는 듯 권마성 벽제 소리 육각성이 자욱하고 취타성이
진동한다. 어여쁜 미색들은 단장하고 전후좌우 갈라서서 '지화자, 지화자' 좋은 소리 반공에 높이 떳다. 전배 비장 거동 보소.
훨훨 걷는 백마 등에 등을 기울여 타고 앉아 홍주, 영주, 사마치를 휘휘 칭칭 감고, 발길사, 홍당의를 집어 매고 맵시 있게 들어간다.
숲속을 들이달아 대동강변 다다르니, 녹수청강 죽려수는 적벽강 큰 싸움에 방통의 연환계, 육지같이 모여든다. 나는듯이 건너서서
대동문 들어설제, 탓던 말을 재촉하여 선화당에 좌정하고 대포수 불러들여 방포 삼성 놓은 후에 각방 관속 대솔 군관
차례로 현신할 제 차담상 먹은 후에 백여 명 기생들을 각기 점고 끝에……. (『이춘풍전』)
「담와평생도」중 '평안감사부임' 傳 김홍도, 비단에 채색, 76.7×37.9cm, 국립중앙박물관.
영조대 재상인 홍계희洪啓禧(1703~1771)의 일생 중 여섯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그중 '평안감사부임'에서는 영제교를 건너
십리 장림長林을 통과한 뒤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으로 향하는 평안감사의 모습을 묘사했다. 평안감사가 타고 있는 배는
위에 있는 대루선大樓船으로 중국 사신 호의맹吳希孟이 쓴 '승벽정乘碧亭'과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쓴
'벽한부사碧漢浮槎'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평안감사는 도임 행렬도 화려하고 성대하지만 감영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더 본격적으로 평양의 온갖 풍류를 맛볼 수 있었다.
연광정과 부벽루로 대표되는 화려한 누각, 기생을 옆에 두고 밤낮없이 열리는 흥겨운 잔치, 풍악이 울리는 사이로
아름다운 산수자연을 보며 흥취에 젖는 대동강 뱃놀이는 '평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런 유락지遊樂地로서의 성격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의주에서 한양 도성에 이르는
의주대로가 사행로였으므로, 경유지 도처에서 사신들을 접대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감영 소재지인 평양에서 사신들은
좀더 오래 머무르면서 쉬었는데, 중국 사신들이 오기라도 하면 성대한 환영이 준비되어 있었다. 1499년에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예겸例兼이 평양에 왔을 때 환영하는 모습도 앞서 언급한 평안감사 도임 행렬처럼 성대했는데,
길 따라 온갖 놀이와 재주가 펼쳐졌다는 점에서 더 화려했다고 할 수 있다.
관찰사는 사신을 위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부벽루에서 잔치를 여는 방식으로 접대했다.
특히 명나라 사신들은 '기자箕子'가 다스렸다는 평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러는 가운데 열흘 정도 평양에 체류하면서
대략 20景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