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세계사 속에서 인천이 밟아온 명과 암의 역사
박준형
'세계'에 대한 서술,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견문기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것은 1254년경으로, 당시 그의 아버지 니콜로는 숙부 마페오와 함께 이미 동방무역을 위해 베네치아를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마르코 폴로는 태어나서 10여 년을 훌쩍 넘긴 1269년에야 아버지와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동방무역의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동행하게 된다. 『동방견문록』속 흥미로운 이야기들의 소재가 되는
마르코 폴로의 긴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한 아시아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다스리는 원 제국이었다.
당시 원은 쿠빌라이 치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고려 또한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며 오랜 시간 원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에는 환도를 결정하고 삼별초에 의해 끈질긴 항쟁도 제주도에서 평정되었던 시기다.
총명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어 측근으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쿠빌라이의 허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 원의 대도에 도착한 때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294년의 일이었다.
『동방견문록』은 뜻밖에도 마르코 폴로가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다.
그 때문에 책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학자들은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다.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경위르 간략히 말하자면,
마르코 폴로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서 일어난 해전에 참가하게 되는데,
운 나쁘게도 적의 포로가 되어 제노바 감옥에 갇혔다. 이때 피사 출신의 작가인 루스티겔로와 만났고,
그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17.4×11.3cm, 1845(영국), 이탈리아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인 학자들이 원제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동방'에 대한 견문을 기록했다는 뜻인데, 원제의 의미는 그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원제를 직역하면 '세계에 대한 서술'이 된다. 『동방견문록』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이 현재의 아시아에 해당하는 것은 맞지만,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의 어느 문명권에서도 현재의 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포괄할 수 있는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에게 '동방'이란 유럽 밖의 거대한 '세계'였다. 그리고 그 '세계'는 경멸과 우월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이로움과 호기심으로 가특 찬 세상이었다.
마르코 폴로 일가가 대칸의 제국으로 향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나는 모습.
재닛 아부루고드는 마르코 폴로가 그려냈던 13세기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세계가 하나의 교환 체제로 통합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를 가능케 한 존재로서 지목했던 것이 다름 아닌 몽골 제국이다. 거대한 제국의 성립은 무엇보다무역을 위한 안전한 수송로를 확보해주었던 것이다. 다만 이때의 세게는 전체를 총괄하는 중심부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각 시역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독립적인 지위에 있으면서도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14세기 들어 몽골 제국이 분열함에 따라 함께 붕괴되고 말았다. 16세기 이후 이러한 공백 속에 등장햇던 것이 유럽 주도의 근대 세계이며,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하나의 변곡점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동방견문록』을 통해 대서양 저편의 아시아를 꿈꾸었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다.
폴로 형제에게 금을 하사하는 쿠빌라이 칸, 이 금패는 형제가 항해하는 데 큰 방패막이가 되었다고 한다.
교차하는 '세계'
16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이른바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며 그들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가기에 앞서, 이와 정반대 방향의 진출을꾀하는 시도가 있었다. 원 제국 멸망 이후 중원 땅에 한족 국가인 명이 세워졌는데, 명 태종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정화를 지휘관으로하는 대규모 함대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정화 함대의 목적은 해역의 교역 거점인 항시 국가港市國家 들과 주종관계를 확인 함으로써조공무역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항해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동안까지 이르렀으나, 명조는 대양으로의 진출을 확대하기보다는광주廣州, 영파寧波, 천주泉州(훗날 복주福州로 바뀜에서 관에 의한 조공무역만을 허용하는 해금정책을 취했다.
그 사이 유럽에서는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촉발된 신대륙 및 신대양의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의 대외 진출을 이끈 스페인과포르투갈 사이에서 149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위의 가톨릭 국가들은 대서양 한가운데를 남북으로가로지르는 하나의 선을 중심으로 각각 서쪽과 동쪽 지역에서 무역과 포교의 권리를 독점했다. 그중에서도 대서양 동쪽,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 방향을 잡은 포르투갈은 15세기 말에 이미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에 도착했으며, 1511년에는 말레이반도의 향료 무역 중심지인 믈라카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유럽 세력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항시 국가들에 진출했다.기후상의 특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농업 생산보다는 상업활동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중동 지역의 이슬람 상인들은 내륙의 혼란을 피해 바닷길을 주로 이용했는데, 말하자면 아라비아반도를 돌아 홍해나 아프리카 동안으로 나아가거나, 인도양을건너 말레이반도를 거쳐 남중국해 방면을 향하는 식이었다. 동남아시아의 현지 권력자들은 이슬람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큰 이익을 얻자 이들에게 거주와 자치를 허락하고 그들 자신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지역 항시들은 현지 주민과 중국인 이민자들에다 이슬람 상인들까지 더해져 다민족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믈라카 지도, 1620년대 작성.국제적 해양 도시로 발전한 믈라카 지도에서 현지의 궁전은 항구를 굽어보는 요새로 바뀌었다. 중앙에 믈라카 강 위에 놓인 방어시설이 있는 나무다리는 요새와 강너머 원주민 도시를 이어준다. 그 사이 공간은 도시 중심지와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 세력의 등장과 함께 위와 같은 지역의 무역 네트워크는 유럽 중심의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되어갔다.이 과정에서 항시들은 대도시로 발전하거나 식민도시로 재편되었으며, 민족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앞서 언급한 믈라카를 예로 들면, 포르투갈은 현지 권력자의 왕궁이 있던 언덕 위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새로운 거주지를 조성했는데. 이때현지 권력자측을 지원한 이슬람계 주민들은 모두 추방된 데 반해, 중국인들은 상업상에 유리한 강 하안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17세기에 황금시대를 맞은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믈라카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이와 함께 다시 시가와 주민들의 교체가 이뤄졌으나, 중국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파트너로서 초청받았으며, 지배 세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들은 차이나타운의 형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오늘날 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들, 즉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필리핀의 마닐라, 중국의 홍콩, 싱가포르 등도 식민도시의 경험 위에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다.
믈라카의 과거와 현재.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라 안의 작은 나라, 조계와 거류지
유럽 국가들에 의해 형성된 식민도시의 기원은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때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십자군의 물자 수송과 자금 조달에 크게 기여해 그에 대한 댓가로예루살렘 왕국의 항구도시인 안티오키아나 트리폴리 등을 통상 거점으로 부여받았다. 이 도시국가들은 통상 거점에'fundicum' 이라는 상업 시설을 건설하고 'consul'이라 불린 권력자를 파건해 거점 관리와 자국민 재판을 담당하도록 했다.지중해 동안의 레반트 지방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주로 한 사업은 무역과 플랜테이션 경영이었다. 이들 사업에서 베네치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제노바 상인들은 1378년의 해전에서 베네치아에게 크게 패한 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최대 요새가 있던 기니아 지역에서의 사업은 제노바의 레반트 사업을 모델로 한 것이었으며, 이 모델은 포르투갈의 세력 확장과 함께 동남아시아지역까지 이식되었다.
믈라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에 요새를 건설해 그 안에서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있던 유럽인들은 주변의 적대 세력을 평정해감에 따라 요새를 벗어나 식민지적 생활양식을 창출해냈다. 게다가 19세기 들어 아시아 해역의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로는 요새의 성벽도 이제 그 쓸모를 다하게 되었으며, 유럽인들은 프랜테이션 경영이나 광업 개발 쪽에좀 더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동남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까지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게 된다.
1500년 포르투갈의 무장 상선, 이들은 항로를 이용해 세력 범위를 빠르게 확장해나갔다.
그런데 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힌 유럽 열강들은 이전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강한 국가권력과 맞닥뜨려야 했다.이러한 배경에서 기존의 식민도시 유형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공간들이 창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조계'와 '거류지'다.
먼저 중국을 살펴보자.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42년에 난징조약을 체결해 광주廣州, 복주福州, 하문廈門, 영파寧波,상해上海 5개 항구의 개방을 약속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국인의 거주구역이나 그를 정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이 없었던 까닭에개항 초기 중국인과 외국인은 잡거를 했다(화양잡거華陽雜居).
「상해현성상조계전도上海縣城廂祖系全圖」점석재 제작, 1884.상해의 외국 조계를 보여주는 지도로, 각 지역은 색상으로 구분돼 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주황색이 미국, 파란색이 영국(1843), 붉은색이 프랑스 조계다. 프랑스 조계 아래로 상해의 중국인 거주지역이 노란색으로 표시돼 있다.
그러나 상호 간의 관습 차이와 성내의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외국인들은 골머리를 썩였다.그리하여 1845년에 제1차 토지 장정의 공포를 통해 외국인 거주구역인 '조계'를 상해의 황포강黃浦江 서안에 최초로 설치했으나,1853년 소도회小刀會의 봉기로 난민들이 조계 내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화양잡거華陽雜居' 상태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이후 재개된 '화양분거'는 외국인의 자치행정 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첫 번째 잡거와는 성격을 달리했다. 또한 외국인의 자치행정 기구가 점차 조게 내 중국인에 대한 징세권과 재판권 등까지 장악해감에 따라 결과적으로 조계는 외국인에 의한 배타적 지배가 실현되는 '나라 안의 작은 나라'가 되었다.
「나가사키항」가와하라 게이가, 비단에 채색, 57.4×79.8cm, 19세기 전반, 서울대미술관.
한편 일본은1858년에 체결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근거해 하코다테,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가타, 효고 5개 항구와에도, 오사카 2개 도시를 개방했다. 이들 개항장과 개시장 중에는 외국인을 위한 '거류지'가 설치된 곳도 있었는데,중국의 '조계'와 달리 일본 정부는 1894년에 불평등 조약 개정에 성공함으로써 1899년의 개정 조약 발효와 함께거류지 자체를 철폐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불평등 조약 체결로 인해 자국 내에 '조계'와 '거류지'를 설치해야 했던중국과 일본이지만, 이들은 이웃 나라인 한국과 다시금 불평등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불평등이 좀 더 가중된 형태로 그 구조를 한국에 옮겨 심었다.
인천의 '조계' 들일본전관조게, 청국전관조게, 각국 공동 조계
부산에 한국 최초로 조계가 설치된 것은 1877년이다. 그 전 해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에서 부산과 그 외 두 곳을 추후 개방하기로 결정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당시 조선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고,부산에 설치된 조계도 사실 종래의 왜관을 근대적인 형태로 재편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것이 일본인 전관 · 전용의 공간이라 해도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1882년 이후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 외교는 다변화되었다.그와 함께 기존의 조계 형태, 다시 말해 일본에 의한 독점 상황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인천에 조계들이 설치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청구도』중 '인천', 종이에 채색, 37.3×24.0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처음 설치된 조계는 일본의 전관조계였다. 인본전관조계는 부산이 이어 1880년에 개항한 원산에도 설치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앞서 설치된 두 개의 일본전관조계와인천의 조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즉 택지 대부 방식에 있어서 전자가 일본 정부가 일괄 수용한 뒤 개인에게 대부하는방식이라면, 후자는 일본인 개인들이 직접 부지 경매에 참여해 대부를 받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왜관과의 연속성보다는조계의 일반적인 형태를 고려한 결과였다. 그러나 1883년 9월에 체결된 「인천도계조약仁川租界條約」제1조에서 "일본 상민들이먼저 도래한 사실에 대한 보답"으로 조계를 설치하게 되었다고 굳이 그 경위를 밝혔던 것은 다변화된 외교 환경에서도 일본의 기득권을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조계의 성격은 변했지만, 일본인 전관 · 전용이라는 조계의 형식은 인천에도 계승되었다.
『조일수호조규』34.5×22.0cm, 1876,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일본전관조계에 이어 들어선 것이 청국전관조계다.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에 따라 중국인들도 기존의 개항장에서 무역의 권리를 획득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이른바 '덕흥호 사건'이 발생했다. 덕흥호 사건이란 부산의 일본조계 내에서 일본인의 가옥을 빌려 장사를 시작한청국인들을 일본 영사가 붙잡아 심문하고 가게까지 닫도록 조처한 일을 가리키는데, 이 사건의 배경에는 부산 일본조계에 대한 청일 양국 사이의 견해차가 있었다. 즉 청국 측은 위의 무역 장정에서 청국인의 무역활동을 허용한 기존의 개항장으로 간주했으나.일본 측은 이에 대해 이미 왜관 이래로 독점적인 권리를 향유해왔다고 본 것이다. 결국 청국 측은 조선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별도의 조계를 신설하기로 결정했으며, 그에 따라 1884년 4월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이 체결되기에 이른다.청국조계는 인천의 일본조계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당시 청국은 조선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빌미로 종주국으로서의 특별 대우를 강요하고 있었지만, 타국의 권익을 균점하는 데 있어서는 그와 같은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인천항 전경, 부산박물관.
마지막으로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1884년 11월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은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표들이 서명을 했지만, 실제로 이를 작성한 것은 일본 고베에 주재하던 영국 영사 애스턴이었으며,모델이 되었던 것 또한 고베의 외국인 거류지였다. 인천의 각국공동조계는 각국 대표로 구성된 거류지회를 통해 행정이이뤄졌다는 점에서 다른 조계들과는 구분된다. 사실 전관조계의 형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전관조계라하더라도 일반적으로 현지 주민이나 타국인의 거주를 허용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천의 각국공동조계에 이르러서야비로소 전관 · 전용의 조계 형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의 각국공동조계는 1890년대 후반에 자발적으로추가적인 개항이 이뤄질 때 조계 설치를 위한 유일한 모델로 계승되었다. 그 점에서 인천은 개항기의 다각적인 국제관계를 상징하는 기원적 장소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개항 당시의 인천(왼쪽 위)과 현재의 인천(오른쪽 위), 양자를 겹쳐 놓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아래), 조계 설정 당시의 도로 구획이 현재까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조계의 안과 밖"조선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쫒겨났던가"
1883년 11월에 체결된 조영수호통상조약은 이후의 모든 조약이 이를 모델로 삼아 그 내용을 거의 답습해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조약 제4조에서는 '조계' '조계 밖 10리 이내' '내지' 등과 같이 조약상의 공간 분할과 관련된내용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조계'란 개항장 내에 설치된 외국인 전용의 거류구역이었으며, 반대로 '내지'는 외국인거주가 금지된 조선인만의 거주공간이었다. '조계 밖 10리 이내'에서는 외국인이 조선의 지방 행정에 따른다는 조건 하에서조선인과의 잡거를 허용했는데, '조계'와 '내지' 사이에 위치하면서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조약상의 규정으로 인해 조계 안과 밖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었다. 조계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촌락이 아니라외국인의 무역 및 거주를 목적으로 특별하게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따라서 조계에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 시설이 마련되었고,바둑판 모양의 반듯한 도로들이 조계 내 부지를 횡단했다. 또한 도로 양편에는 가로수가 세워졌고, 상하수도와 같은 근대적인설비들도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건물을 세울 때는 도시의 전체적인 미관은 물론 화재를 방비할 수 있는 자재의 선택까지 고려되었다. 따라서 조계 내에 조성된 공원에 오르면 나날이 성장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조계 밖에서는 개발 없는 도시화가 진전되었다.조계 설치로 인해 본래 거주하고 있던 곳엣 반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무역을 통한 이익이나 하역 노동과 같은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조계 밖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이마을의 거주 인구는 항구의 발달과 함께급격히 증가했지만 조계 안과 달리 유입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 도시 설비는 갖춰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당시 신문에서는조계 안과 밖의 상황을 극락과 지옥의 차이에 빗대면서, "조선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이 세상으로부터 지옥에다 가둬놓고 들볶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다른 조계들과 마찬가지로 인천의 조계들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14년, 곧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에서다.일본인 이주 인구는 1900년대 들어, 특히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식민 권력의 비호 속에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조약상 외국인의거주가 허용된 '조계'나 '조계밖 10리 이내' 지역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자본 없이 창업할 수 있고 생활비 또한 저렴한 '내지'에 정착하는 인구가 늘어갔다. 앞서 이야기했드시 '내지'는 기본적으로 조선인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외국인의 내지 잡거는 모두 조약 위반이었지만, 이러한 불법 행위는 식민권력에 의해 곧 합법으로 공인되었으며, 그에 따라 '조계'와 '내지'의 구분도 점차 의미를 잃어갔다.
개항 초기에 조계는 외세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거점 역할을 했으나, 식민화 과정에서는 일원적인 통치의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 권력은 구미인들의 이권이 얽혀 있는 조계를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병합 당시조선총독부는 우선 조계 내 경찰권만 회수했을 뿐 외국인들의 기득권은 이전처럼 모두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조계 철폐에 대비해 지방행정 제도 개편에도 착수했다. 그 작업이 완수되어 새로운 지방행정 제도로서'부제府制'의 실시를 보게 된 것이 바로 1914년이다. 조계 철폐 및 부제 실시와 함께 적어도 공간상에서의 내 · 외국인 차별은 사라졌다. 그러나 부의 경계는 도시와 시골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고, 그 부분은 다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 경향과 겹쳐졌다. 조계는 사라졌지만 조계 안팎의 대조적 현실은 이후에도, 그리고 어쩌면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앞서 신문이 지적한 조계 밖의 지옥과 같은 현실은 조계 안의 극락을 이웃하며 살아야 하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더욱 절감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천이라는 공간에 축적되어 있는 이러한 역사의 지층으로부터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이 질문에 대한 고민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8장>
화려한 도시 원산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삶들
윤대원
영흥만에 위치한 원산은 조선시대 함경도 덕원부 문천군에 속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그 4대조인 목조 때부터터를 잡고 살았던 곳으로 3대 조상 익조 이행리의 무덤인 지릉이 있고 이성계가 공부했다는 안양사가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왕조에서는 작은 고을인데도 이곳을 부府로 삼아 특별 관리해왔다. 그러나 1880년 원산이 개항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됐다.
「덕원부」 『광여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왼쪽 위 '古陵'이 태조 이성계의 3대조 익조의 무덤이고, 그 아래 절은 이성계가 한 때 공부했던 '안양사'이며 아래쪽 '원산평'은 지금의 원산 시내에 해당된다.
조선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1876년 부산항에 이어 1880년 5월 원산과 1883년 1월 인천을 차례로 개항했다.개항은 단순한 무역 통상을 넘어 서구 열강들이 '근대 문명'을 앞세워 약소국가를 침략하던 제국주의 시대와의 만남이었다.그런 까닭에 개항장은 서구의 근대 문물이 유입되는 길목이자 국내의 주요 자원이 빠져나가는 통로였다.
개항장은 동아시아에서 쇄국에서 개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생긴 특수한 형태이 공간이다.서구 열강이 무역 통상을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개항장은 공간적으로는 상품 교역에 필요한 항만, 창고 및 부대 시설 등이 해안을 따라 나란히(일자형) 발달한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개항시킨 부산, 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