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회화의 대對 일본 영향
우리나라의 미술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이며 그러한 흐름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가 일본의 아스카 조정에 회화 · 서예 · 조각 · 각종 공예 · 건축 등 다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미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회화가 미친 영향이 특히 컸다. 고구려 출신의 화가로 제일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너무나 잘 알려진 담징(曇徵)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는 610년 3월에 승려 법정(法定)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오경(五經)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지묵을 능히 만들었으며, 일본에 맷돌 만드는 법을 전했다고 한다.
<천수국만다라수장> 일본 나라현 주구지(中宮寺) 소장, 비단에 자수, 잔편 액자
현재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계 작품 가운데 제작 연대나 화가 등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천수국만다라수장>이다.622년 2월 22일 사망한 교토쿠 태자를 추모하고 그의 극락왕생을 염원하여 그의 비인 다치바나 다이노로가 스이코 여왕의허락을 얻어 채녀(綵女)들로 하여금 제작케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이 그린 밑그림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명문에 의해 세 사람 중 한 명 고려가서일은 고구려 출신임이 확인된다. 나머지 두 사람 야마토노 아야노 마켄과 아야노 누노 가고리도가야계의 인물이었고 하타쿠마는 신라계 사람이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고대 회화의 영향이 미쳤음은 관계자들의 이름 뿐 아니라 뒤에 살펴보듯이 수장(繡帳)에 나타난 회화적 요소와 양식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고구려 회화의 영향이 현저하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아미타정토설이 가장 유력시 된다.전체 내용이 본래 어떠했는지 현존 수장을 통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다만 고수장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구체적으로 관찰한 조엔(定圓)이라는사람이 쓴 《태자만다라강식(太子曼茶羅講式)》이나 《성덕태자전기(性德太子傳記)》의 기록을 통하여 대체적인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먼저 《태자만다라강식》에 의하면 "사중궁전(四重宮殿)이 층을 이루어 서 있고, 남녀와 금수의 격이 없으며, 일월(日月)의 이륜(二輪)이있고, 양쪽 모서리에는 종경(鐘磬)이 있다" 고 되어 있다. 《성덕태자전기》에는 "보탑 궁전이 겹쳐있고, 금궐누대(金闕樓臺)가 역력하며,마노(瑪瑙)와 호박(琥珀)이 색을 더하고, 성중집회(聖衆集會)에서는 이타(利他)의 일을 얘기하며, 계절의 변화가 없어 추위도 더위도 없는그야말로 완연한 극락을 이루고 있다" 고 전한다. 또한 "그 땅의 중앙에는 사중의 궁전이 있고, 좌우에는 종경이 있어 오쇠(五衰, 천인이죽을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징조)의 꿈을 일깨운다" 고도 했다.
두 장의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내용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연결되고 하부에는 쇼토쿠 태자가 현세에서 공덕을 쌓으며 불심으로 생활 하던 모습이, 상부에는 일월 · 산수 · 서조 · 영초 · 비운 · 연화 등이 있는 아름다운 천상의 정토에서 극락왕생 또는 연화화생하는 장면이 묘사돼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야겠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주구지 소장의 액자에 들어있는 작품은 원형을 그대도 재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되도록 본래의 구성에 근접하도록 배려하여 배치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의 양식을 하나씩 살펴보자. 설명의 편의를 위해 주구지 소장의 액자를 위 그림처럼 '가'~ '바' 의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여 보기로 한다.우선 오른쪽 맨 아래 '' 부분부터 살펴보면, 자릉 바탕의 종루와 백평견 바탕의 길 떠나는 속인의 모습이다. 바탕 깁이 다른 데서알 수 있듯, 종루와 길 떠나는 속인들은 본래는 현재처럼 붙어있지 않았다. 이 점은 길 떠나는 인물들의 아래에 종루에는 없는 연주문대가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종루 안에서 승려가 종을 치고 있다. 승려는 주름치마 위에 가사를 입고 있어 무용총 널방 북벽 <접객도>나 쌍영총 널방 동벽<공양행렬도> 중의 스님의 모습과 유사함을 보여준다. 즉 이 승려는 고구려식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에 보이는 여인들이 한결같이 주름치마를 비롯한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 수장이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것이 남아있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워도 종의 형태도 고구려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수문전> 잔편 백제, 부여군 규암면 외리 출토, 26.9×28.8cm, 7세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종루는 팔작집인데 지붕은 횡으로 겹치듯 꺾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 단을 이루며 포개져 있는 소위 철용(鐵茸), 시코로부키)임을알 수 있다. 이러한 시코로부키, 즉 겹지붕은 부여 규암면 출토의 산수문전(山水紋塼) 가운데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뒤에 살펴볼옥충주자 궁전부의 지붕과 상통한다. 중국의 남조와 백제계 건축양식으로 믿어지고 있는 이 시코로부키의 지붕 형태로 본다면백제계 건축양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종루의 오른편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서있으나 형태가 명확하지 않아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나무들과 비교하기 어렵다.종루 왼편에 보이는 길 떠나는 인물들도 어렴풋이 그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인물들은 등에 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었으며여행에 간편하도록 바짓가랑이를 무릎 아래쪽에서 질끈 동여매었다. 최소한 세 사람의 모습이 확인된다. 이들과 종루 사이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식물이 서 있어 길 주변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한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수장이불교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아 구도(求道) 또는 구법(求法)을 위해 떠나는 장면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나' 부분은 백평견 위에 수를 놓은 것으로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에 제작된 신수장의 잔편으로 보인다.여기에는 두 채의 건물과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건물들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태자만다라강식》에 언급된 사중궁전이나 《성덕태자전기》에서 말하는 금궐누대로 생각된다. 오른편의 제일 높은 건물 안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과 그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승려가 보인다. 그 앞에는 고승이 설법을 하고 잇거나 지체 높은 인물이 무엇인가 얘기를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나 박락이 심하여 확인할 수 없다.혹은 불상이 있엇을지도 모르겠다.
왼편의 좀 더 낮은 건물 안에는 연꽃처럼 보이는 꽃을 받쳐 들고 반쯤 무릎을 꿇은 여인이 중앙에 보이고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앉아있는 승려와 서 있는 승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여인은 높은 신분인 듯, 앞의 승려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후기 고구려식 합임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입었다. 이 부인을 따라온 뒤쪽의 인물들도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다. 또한 이 부분의 승려나 옆 건물 안에 서 있는 세 명의 승려가 모두 평양 지역에서 유행하던 우임의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의 인물이 모두 우임이나 합임의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평양 지역 복식 문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밖에 인물을 측면관으로 표현한 점도 물론 고대 회화의 보편적인 특성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인물화의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부분의 위편에는 연주문대가 보이는데 이 연주문대는 아마도 위에서 지적하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