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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조선시대 연회도 1

 

사연도 · 친림연회도

 

 

 

중묘조서연관사연도첩(中廟朝書筵官賜宴圖帖) 표지

1535년경, 지본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

 

1535(중종30)년 중종(中宗)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서연관(書筵官)들에게 내려준 연회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중종은 왕세자가 강학(講學)에서 『춘추(春秋)』를 마치게 되자, 서연관들의 노고를 치하하여 연회를 내려주었다. 연회는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앞뜰에서 베풀어졌는데, 왕이 내려준 주호(酒壺)가 등장하고 서연관들이 열을 맞추어 앉아 한 사람씩 어사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무용과 음악이 연주되고, 과음(過飮)한 관원들이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보아 서연관들끼리의 자유롭고

흥겨운 연회였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구성은 궁중행사도에서 취해진 좌우대칭형의 구도와 달리 연회의 장면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또한 화면 좌우로 밀착된 회랑(回廊_과 근정전의 표현에는 서로 다른 두 시점(視点)이 부여되어, 투시법이 합리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ㅣ. 이 사연인 표현, 그리고 원산(遠山)에 구사된 단선점준(短線點皴) 등 16세기의 화풍이 강하게 나타나 있어

현존하는 4점의 <중묘조서연관사연도> 가운데 가장 앞 시기에 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1535년경, 지본채색, 42.7×57.5cm, 홍익대학교박물관

 

 

 

 

<세부도> 음악과 춤

 

여기(女妓) 2명이 서로 마주보고 춤추고 있다. 앉아있는 6명의 여기는 대기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는 머리를 높게 올리고 아래로 어깨부분까지 늘어뜨렸으며, 저고리 위에 노란색 배자를 착용하고 허리에 대을 띠었다.

춤추는 모습이 율동적으로 표혀되어 있다. 뒤로 악공(樂工) 5명이 있는데, 대금류의 횡적(橫笛), 해금 혹은 비파류의 현악기 2,

오른쪽 끝에는 횡적을 부는 인물과 나머지 4명의 모자가 다르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좌목(座目)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18세기 모사(模寫), 권(卷), 지본채색, 44×61cm, 고려대학교박물관

 

의령남씨(宜寧南氏) 집안에 가전(家傳)되어 온 《남씨전가경완(南氏傳家敬翫)》권(卷)에는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와

함께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帝慶壽宴圖)>의 세 그림이 두루마치형식으로 장황되어 있다.

이 사연도가 의령남씨가전품(家傳品)이라는 것음 좌목(座目)에 나온 우부승지(右部承旨) 남세건(南世建1484~1552)을 통해 확인된다. 북쪽

회랑 너머의 원산(遠山)의 묘사에는 홍익대 소장본과는 달리 단선점준이 나타나지 않고, 급하게 마무리한 듯한 필치가 역력하다. 또한 건물과

인물에 가해진 부분적인 짙은 채색과 청록산수가 배경으로 등장한 점으로 보아 18세기에 이모(移模)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익대박물관 소장본

과 비교해보면, 거듭 이모(移模)된 그림이라 하더라도 원화(原畵)가 지닌 기본 구도에는 변형이 가해지지 않았고, 다만 화풍만이 다르게 변화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경이물훼첩(敬而勿毁帖) 표지

19세기 모사(模寫), 지본채색, 48.2×33.3cm, 문화재연구소

 

 

 


경이물훼첩(敬而勿毁帖)  내지(內紙)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19세기 모사, 지본채색, 48.2×33.3cm, 문화재연구소

 

경이물훼(敬而勿毁)》첩(帖)은 《의령남씨전가경완》 권(卷)과 같은 의령남씨 집안의 가전화첩(家傳畵帖)이다.

화첩의 체제는 그림 한 점과 좌목(座目) 두 점으로 되어 있다. 근정전 앞으로 이르는 길과 차일(遮日)에 사용된 음영법, 짙은 채색, 그리고

약간 확대된 점경인물(點景人物)의 표현은 19세기 풍속와에 나타난 인물묘사와 유관한 점이 많아 19세기 잏루의 작으로 짐작된다. 모본을

토대로 그린 것이지만, 연회장소의 차일이 19세기 궁중행사도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 대체된 점이 흥미롭다. 모사작에는 그 모사가

이루어진 시기의 화품이 반영되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사례이다. 《경이물훼》에는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와 함께

<태조조충경공남재등연도(太祖朝忠景公南在登筵圖), <공헌대왕친림서총대시문무신도(恭憲大王親臨瑞葱臺試文武臣圖), <선묘조제개경

수연도>, <근정전구기진작도(勤政殿舊基進爵圖) 등의 5점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세부도> 춤 · 삼현육각

 

여기(女妓)는 홍익대학교박물관본, 고려대학교박물관본에서와 같이 8명으로, 2명은 춤을 추고 6명은 앉아 있는데,

옷 색깔에 있어서 홍대본 및 고대본과는 조금 다르다. 악공은 홍대본, 고대본보다 1명 많은데, 오른쪽으로부터 북 1, 피리 2,

대금 1, 해금 1명의 구성으로 현행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과 같다. 삼현육각은 무용반주 등에서 주로 쓰이는 편성이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좌목(座目)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좌목(座目)

 

 

 

 


사궤장연겸기로회도(賜几杖宴兼耆老會圖)

1623년, 첩(帖), 지본채색, 51.1×32.7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1623(인조1)년 이원익(李元翼1547~1634)에게 하사된 궤장하사연(几杖下賜宴) 장면을 그린 것이다. 궤장하사연은 원로대신에

대한 우대책(優待策)의 일환으로 70세 이상의 중요 인물에게만 내려진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화면 가운데에 묘사된 좌우대칭형의 연회

장면에는 궁중행사도에서 보이는 도식화된 요소가 간취되며, 연회장면 주변의 경관을 많이 포함시킨 것은 실경(實景)을 그리고자 한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17세기 전반의 궤장하사연도로는 유일한 작품으로 전한다. 이 연회의 참석자는 박충경(朴忠敬), 이홍주(利弘胄1562~

1638), 이계(李烓1603~1642), 이원익(李元翼1547~1634), 정창연(鄭昌衍1552~1636), 윤방(尹昉), 신흠(申欽), 이호민(李好閔1553~1634),

이광정(李光庭1552~1627), 유근(柳根), 이정구(李廷龜1564~1635), 한준(韓浚), 이준(李準1545~1624), 이귀(李貴1557~1632), 이덕형(

李德泂), 이시언(李時彦), 이경립(李景立), 이서(李曙1580~1637), 이시발(李時發1569~1626), 오윤겸(吳允謙1559~1636), 민인백(閔仁伯

1552~1626), 오백령(吳百齡1560~1633), 이덕함(李德涵1553~1627), 이성구(李聖求1584~1644), 이준(李埈) 등 25명이다. 그림 뒷면에는

왕이 내린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와 감축시문(感祝詩文)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세부도> 음악과 춤(처용무)

 

천막 아래 궤장이 놓여 있고 기로신(耆老臣)들이 상을 박고 좌정하고 있다. 중앙에는 오방색(五方色), 즉 청(靑) · 홍(紅) · 황(黃)  · 흑(黑)

 · 백(白) 색 옷을 입은 5인의 처용무가 있다. 왼편에는 여기(女妓)들이 앉아 있다. 녹포(綠袍)에 흑화를 착용하고 박(拍)을 치는 집박악사

(執拍樂師) 1명과 홍포를 입은 악공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상원하방형(上圓下方形)이 철판이 달린 방향과 같은 악기 2, 대금적, 피리 혹은

퉁소와 같은 종적, 당비파, 거문고와 비슷한 현악기, 장구 등이 확인된다.

 

 

 

 

 

사궤장연겸기로회도(賜几杖宴兼耆老會圖)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

 

 

 

 

사궤장연겸기로회도(賜几杖宴兼耆老會圖)  시문(詩文)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

1668, 지본채색, 55.5×37cm, 보물 930호, 경기도박물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1668년(현종9)년 궤장을 하사 받을 때의 절차와 연회장면을 그린 것이다.

궤장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왕의 교서가 낭독되고 궤장이 하사되는 절차를 그린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 그리고 도승지가 어사주(御賜酒)

일배(一杯)를 올리며 연회가 시작되는 장면인 <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의 세 장면으로 되어 있다. 이 장면들은 궤장하사와 연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절차들이므로 동일한 배경을 바탕으로 순서에 따라 해당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세 번째 면에 포함된 기영회(耆英會)장면은

단독으로 시행된 기영회와는 전혀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배경에 포함된 기영회(耆英會) 장면은 단독으로 시행된 기영회와는 전혀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배경 경관은 사실적인 묘사다 돋보인다. 원경과 중경의 사이네는 안개를 표현하여 원근(遠近)의 경계를 합리적으로 구분지었다.

밝은 색감과 섬세하고 장식적인 필치 등 17세기기록화의 수준을 잘 대변해주는 사례이다.

 

 

 

 

 

<세부도> 악대

 

첫 장면인 <지영궤장도>에서 박(拍)을 잡은 악사는 녹포를 입고, 뒤를 따르는 악공들은 홍포를 입었다.

악기에는 대금류의 횡적(橫笛), 피리 혹은 퉁소류의 종적(縱笛), 당비파, 장구, 북, 방향 등이 있다. 둘째 장면인 <선독교서도>에는

악대(樂隊) 앞에 5명의 여기가 앉아 있다. 악대 앞줄에는 박(拍)을 잡은 집박악사를 중심으로 방향과 관악기가 좌우대칭으로 앉아 있고,

뒷줄에는 장구를 중심으로 당비파, 북 대금으로 보이는 힝적과 거문고와 비슷한 현악기가 배치되어 있다. 세째 장면인 <내외선온도>에는

가운데 황(黃)을 중심으로 청 · 홍 · 흑 · 백색 옷을 입은 5명의 처용무가 있고, 오른쪽에 악대가 위치해 있다. 여기(女妓)와 악대는

둘째 장면에서와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악기는 둘째 장면에서의 당비파와 대금이 각각 대금과 장구로 대치되었다.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내외선온도(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

 

 

 

 

 

 

<세부도> 처용무 · 악대 · 여기(女妓)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표지1668년, 견본채색, 565.6×36.7cm, 고려대학교박물관

 





사궤장연회도((賜几杖宴會圖) 1

 

 

 

 

 

<세부도> 악대

 

 

 

 

 

사궤장연회도((賜几杖宴會圖) 2

 

 

 

 

 

 

 

 

 

 

 

 

 

 

 

 

 

 

 

 

 

 

 

 

<세부도> 악대 · 여기(女妓)

 

 

 

 

 

사궤장연회도((賜几杖宴會圖) 3

1668년, 견본채색, 55.6×36.7cm, 고려대학교박물관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왕이 내린 궤장을 하사받을 때의 연회장면을 그린 것이다.

도첩의 내용은 궤장을 가져오는 도승지 일행을 맞이하는 장면, 왕의 교서가 낭독되고 궤장이 하사되는 절차를 그린 장면, 그리고 도승지가

어사주 일배를 올리며 연회가 시작되는 모습ㅇ르 도해한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영회 장면은 세 번째 면에 이경석이 어사주를 받는

장면과 함께 그려져 있다. 경기도박물관에 같은 도상(圖像)을 한, 다른 한 점이 소장되어 있어 개인의 궤장하사 장면을 그린 것인데도 여러

점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서문과 시문을 쓴 사람들은 이경석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 · 정태화(鄭太和) · 정치화(鄭致和) ·

김좌명(金佐明) · 조형(造珩) · 박장원(朴長遠) · 조복양(趙復陽) · 민정중(閔鼎重) · 남용익(南龍翼) 등이다.

 

악대의 모습을 경기도박물관본과 비교하면, 셋째 장면에서 경기도박물관본의 뒷줄 악대의 당비파가

고려대학교박물관본에서는 장구로 대치되어 장구가 2대인 점이 다르다.

 

 

 

 

 

 

<세부도> 처용무 · 악대 · 여기(女妓)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좌목(座目)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이경석(李景奭)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정태화(鄭太和) · 정치화(鄭致和)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송시열(宋時烈)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김좌명(金佐明)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조형(趙珩) · 박장원(朴長遠)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서(序) · 시문(詩文)  조복양(趙復陽)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민정중(閔鼎重) · 서필원(徐必遠)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시문(詩文)  남용익(南龍翼) · 송광연(宋光淵)

 

 

 

 

 

종친부사연도(宗親府賜宴圖)

1744년, 견본채색, 134.5×64cm, 서울대학교박물관

 

1744(영조20)년 9월 영조의 기로소(耆老所) 입사(入社)를 기념한 진연(進宴)을 마치고, 영조가 종친(宗親)들에게 특별히 술과 음식을

내려준 사연(賜宴) 장면을 그린 것이다. 상단에는 '종친부사연도(宗親府賜宴圖)' 라는 해서체의 표제와 아래에 영조의 전교(傳敎)를

적어 놓았다. 그 아래에는 종친부 건물 내에서의 연회장면을 그렸으며, 하단에는 종친 38인의 명단이 적혀 있다. 사연이 베풀어지는

종친부 건물 내에서의 연회장면을 그렸으며, 하단에는 종친 38인의 명단이 적혀 있다. 건물내부에는 어찬안(魚饌案)과 주탁(酒卓)을

중심으로 종친들이 좌 · 우를 향하여 앉아 있다. 연회장면은 부감시법(俯瞰視法)이 적용되었고, 참석ㅈ들을 모두 그리기 위해 건물의

기둥을 높게 뽑아 올린 것처럼 묘사하여 실내의 공간을 넓게 설정하였다. 건물이나 수목(樹木)의 묘사에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 종친부에서는 이 날의 진연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계병(契屛)과 함께 족자를 제작하였는데, 이때 계병등록(契屛謄錄)이라는

기록을 남겨두었다. 여기에는 계병과 함께 36개의 족자가 만들어졌다.

 

『계병등록』에 의하면 "음악을 하사하되 단지 풍악만을 사용하라"고 되어있다. 여기(女妓) 두 명이 마주 보고 춤추고 있고, 여기 4 명이

일렬도 서 있다. 그 뒤에는 녹포를 입고 박(拍)을 잡은 집박(執拍)이 있고 집박 뒤로 홍포를 입은 악공 11명이 있는데, 비파, 북, 해금,

대금류의 횡적, 피리 혹은 통소류의 종적이 보인다.

 

 

 

 

 

 

<세부도> 악대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1710년, 지본채색, 180×142cm, 국립중앙박물관

 

숙종이 앓던 천연두가 완쾌되고 성수(聖壽)가 50세 됨을 경하하여 1710년(숙종36) 4월 25일에 경희궁(慶熙宮)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진연(進宴)이 시행되었다. 그때의 연회장면을 그린 이 <숭정전진연도>는 계회도의 축형식(軸形式)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대규모의

연회장면을 화첩(畵帖)이나 작은 화면에는 그릴 수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상단의 그림과 하단의 좌목(座目)으로 된 상하 2단구성을

하였고, 좌목의 첫 부분에 숙종 36년(1710) 4월 25일에 치른 진연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좌목에는 동반(東班) 51인, 서반(西班)

128인으로 도합 179인이 참석하였다. 진연도에는 숭정문 좌우의 회랑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공간 안에 행사가 진행중인 장면을 그렸다.

숭정전의 내부에는 어좌(御座)와 왕세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병풍과 찬안(饌案) 등이 전례(典禮)에 따라 갖추어져 있다. 왕과 왕세자

가 참여하는 국가적인 경사(慶事)이자 큰 행사였기에, 그림은 엄정한 좌우대칭형의 구도와 정면부감(正面俯瞰)의 시점(視点)으로 장중한

경관을 연출하였다. 이  진연도는 본격적인 궁중연향도(宮中宴享圖)로서의 전형(典型)을 제시해주는 이른 시기의 사례에 속한다.

 

명확하지 않지만 그림 중앙에는 무동 2명이 향발무(響鈸舞)가 있고, 전상(殿上) 박(拍)을 치는 집박(執拍)을 중심으로 무동이 일렬도 서 있다.

북, 장구 2, 해금이 보인다. 다음 줄에는 안쪽부터 종적, 당비파, 횡적이 좌우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건고를 중심으로 편종과 편경이 좌우에

위치하고 맨 뒷줄에는 헌가집박(軒架執拍)을 중심으로 장구, 대금류의 횡적 등이 보인다. 왼쪽 하단에는 처용 5인이 서 있다.

 

 

 

 

 

<세부도>  악대 · 무동

 

 

 

 

<세부도> 처용 5인

 

 


 

 

 

기영회도 · 기로회도

 

 

 

 

기영회도(耆英會圖)

1584년, 지본채색, 163×128.5cm, 보물 1328호, 국립중앙박물관   

 

비교적 대작인 이 <기영회도>는 우의정(右議政) 홍섬(洪暹1504~1585)을 비롯한 7인이 참여한 이영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제작시기는 1584(선조14)년으로 추정된다. 좌목에 기재된 참석자들의 졸년(卒年)과 관직 이동시기를 살펴본 결과, 최종적으로

 박대립(朴大立1512~1584)이 타계한 시점이 1584(선조17)년 9월이고, 노수신과 정유길이 70세 되던 해가 1584년이므로 이 기영회도의

제작시기는 1584년 전반기로 추정된다. 위로부터 표제와 그림, 그리고 좌목 및 시문을 갖춘 전형적인 계회도(契會圖)의 3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방형의 화면으로 인해 연회가 이루어지는 전각의 주변 경물들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어 더욱 큰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다.

7인의 기로(耆老)는 물론 시녀와 무용수, 그리고 수행원들과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동세와 미묘한 표정 등이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참석자는 홍섬(洪暹1504~1585), 노수신(盧守愼1515~1590), 정유길(鄭惟吉1515~1588),

원혼(元混1505~1588), 정종영(鄭宗榮1513~1589), 박대립(朴大立1512~1584), 임설(任說1510~1591) 등 7인이다.

 

 

 

 

 

<세부도>

 

참가 기로인사들과 춤추는 여기(女妓) 2명을 포함한 5명의 여기가 있는 공간과 그 밖의 여기와 악공들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중앙에 여기 2명은 서로 마주보고 춤추고 있고, 3명은 연회의 진행을 돕는 것으로 보인다. 탁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앉아 있는 여기

가운데 왼쪽에 있는 여자들은 다른 여기와 머리 장식과 의상에 차이가 있어서 역할도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악기편성은

중앙에 박 1명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북 1, 해금1, 장구1, 왼쪽에 당비파 1, 대금1 등 악공 9명이 보인다. 현행과 달리

박도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앉아서 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

1585년, 지본채색, 40.4×59.2cm, 서울대학교박물관

 

1585(선조18)년에 있었던 만70세 이상, 이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원로 기신(耆臣) 7인의 기영회 장면이다.

상단의 표제는 잘려나간 상태이며, 원래의 형식은 족자였으나 후대에 첩으로 개장된 것이다. 그림 촤측에 '만력을유맹추(萬曆乙酉孟秋)'라

적혀 있어 1585년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연회가 열리는 전각은 정면 5칸의 건물로서, 가운데 3칸만을 확대하여 그린 것이다. 2개의 기둥이

연회의 공간을 3등분핝 가운데 기신(耆臣)들이 각기 품계에 따라 앉아 있다. 좌우대칭의 정면관(正面觀)의 시점이 적용되었고, 악사(樂士)를

제외한 인물들의 모습이 획일적으로 그려져 있어, 다소 형식화가 진행된 도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연회장면의 묘사에 비중이 주어져 있어,

16세기 전반기의 산수배경이 강조된 계회도와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도와 공간설정은 1550년경 작인 <호조랑관계회도(戶曹郞官

契會圖)>류의 도상을 계승한 형식으로 보인다. 그림에 이어 좌목과 참가자들의 시문이 함께 수록되어 참석자는 노수신, 정유길, 원혼, 정종영,

심수경, 강섬, 임설 등 7인이다 이 기영회도와 동시에 제작되었거나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개인 소장본 등 2점이 더 전하고 있다. 

 

 

 

 

 

<세부도> 여기(女妓)의 춤
7인의 인사가 각자 상을 받고 앉았는데 악공의 연주에 맞춰 2명의 여기가 춤추고 있다. 대청 안에 있는 여기는 모두 같은 복식을 하고있으며 16명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2명은 중앙에서 춤을 추고, 2명은 행사를 도우며, 나머지 12명은 대청 밖에 있으며, 악기편성은왼쪽부터 초적1, 대금1, 북1, 당비파1, 해금1, 박1, 피리 혹은 퉁소류의 종적1, 거묹고1, 장구2, 피리 혹근 퉁소류의 정적 1명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서 박을 치는 집박(執拍)의 모자가 다른 악공과 다르다.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  좌목(座目)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  시문(詩文)

 

 

 

 

 

 

기석설연지도(耆碩設宴之圖)

1621년, 축(軸), 지본채색, 168×57.5cm, 규장각

 

1621(광해군13)년에 있었던 정창연(鄭昌衍1552~1636) 등을 비롯한 70세 이상의 연로대신 9명의 기로연(耆老宴) 장면이다.

좌정한 참석자들이 그려져 있을 그림의 절반 이상이 훼손되어 전체적인 현상을 언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림 하단에 있는 심회수의

찬문(撰文)과 그의 문집인 『일송집(一宋集)』에 수록된 「기영회시병서(耆英會詩幷序)」에 의해 1621년 작으로 확인되었고, 이 기록을

통해 기로연의 참석자들이 심희수를 비롯한 13명이었으나, 결국 9명만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칸수가 단칸의 구조를 취한 점도

대단히 흥미롭다. 두 기로(耆老)의 모습에 나타난 형식화된 묘사와와는 극히 대조적이다. 이 <기석설여지도>는 16세기 후반기의

기영회도(耆英會圖)를 계승한 17세기 기로연도의 형식을 예시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이다.

 

 

 

 

 

<세부도>

 

대청 안에서 춤을 추는 여기(女妓) 2명의 치마자락이 보인다. 여기 8명이 음식을 나르거나 앉아 있고, 대청 밖 화로 옆에 여인 2명이

앉아 있다. 악공들은 대청 밖에 모두 앉아서 연주하는데 박1, 장구1, 북2, 대금류의 횡적2, 퉁소와 비슷한 종적 1, 거문고3,

해금 1명으로 구성되었다. 박은 박판(拍板)을 묶은 끈이 휘날리는 것처럼 표현되었고, 거문고의 괘가 매우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세부도>  악대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표지

1730년, 지본채색, 37×25cm, 규장각

 

1730(영조6)년 4월 13일 이원(梨園), 즉 조선시대 궁중음악을 관장한 장악원(掌樂院)에서의 기로연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이다.

기로(耆老) 21인이 참석하였는데, 참가자들이 대부분 숙종에서 영조년간의 관리를 지낸 인물들이다. 이 첩에 수록된 서문(序文)에

의하면,장악원 첨정 김홍권(金弘權1657~?)의 제안으로 동료들과 함께 사우(師友) 가운데 고령인자들을 초청하여

기로연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원기로회도(梨園耆老會圖)

 

정면 좌우대칭의 구도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관계로 전각(殿閣)이 화면에 꽉 차게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연회 장면이 중심이 되는

형식은 앞 시대의 전통적인 도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좌정한 기로들의 모습은 획일적인 이목구비의 묘사, 간략하고 동일하게

반복된 의습선 등에서 이전시대의 기로연도보다 현격한 형식화가 진행되었음을 엿 볼 수 있다. 도상의 정형화(定型化)가 가속화되고 있는

18세기 이후 기로연도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기로연에는 65세에서 89세까지의 기로들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사마시 출신의 중견 관리들이었다.

서문에 의하면 첨정 김홍권이 경술년에 장악원 관리, 즉 악관이 되어 연회에 알맞은 자연적 환경을 갖추고 있는 장악원에서 기로연을 베풀게

되었다. 『영조실록』, 영조 29년 9월 3일 조와 30년 6월 28일 조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는 이원(梨園)을 당나라 때의 바르지 못한 이름으로

보고 장악원에서 이원이라는 고호(古號)를 이어 쓰지 못하도록 명한 바 있다.

 

그림을 보면, 실내에 좌목의 내용과 동일하게 21명의 기로가 상을 받고 좌정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처용무가 공연되고 있는데, 매우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女妓) 하나가 포구락(抛毬樂)을 추는 듯 포구문에

채구(彩球)를 넣는 동작을 하고 있다. 좌우에 각각 역기 두 명이 앉아서 현악기를 타고 있다. 대뜰 아래에는 오른쪽에 박을 잡은 악사와,

해금1, 대금1, 장구1, 피리2, 북1명의 삼현육각이 있다. 이 기로연에서는 연주자들이 모두 갓을 쓰고 있으며, 집박의 옷에는

약간 붉은색으로 채색한 듯 하고, 악공의 옷은 푸른색과 흰색으로 그려져 있다.

 

 

 

 

 

<세부도> 음악과 춤(처용무 · 포구락>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좌목(座目)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좌목(座目) · 시문(詩文)  홍용경(洪龍卿)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문(詩文) · 시서(詩序)   최경천(崔擎天) · 홍용경(洪龍卿)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서(詩序)  최경천(崔擎天)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서(詩序)  최경천(崔擎天)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서(詩序)  최경천(崔擎天)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문(詩文)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문(詩文)  · 서(序)  김자형(金子亨) · 엄명세(嚴命世)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서(序) · 시문(詩文)  엄명세(嚴命世)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문(詩文) · 서(序)  이중고(李仲高) · 김여평(金汝平) · 이래중(李來仲)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서(序)  이래중(李來仲)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문(詩)  · 서(序)    이래중(李來仲)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서(序) · 시문(詩文)  정여일(鄭汝一) · 강숙통(姜淑通 · 이성좌(李聖佐)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시문(詩文)  · 서(序)  이성좌(李聖佐) 박사도(朴士度)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서(序) · 시문(詩文)  황필명(黃弼明) · 조군보(趙君保)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서(序)  조위숙(趙衛淑)

 

 

 

 

이원기로계첩(梨園耆老禊帖) 서(序) · 시문(詩文)  조위숙(趙衛淑) · 조의중(趙毅仲)

 

 

인용서적 / 국립국악원 『조선시대 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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