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와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고구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데는 웅혼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선진 문화를 일구었기에 가능했을 터. 고구려가 지녔던 진취성과 창의성은 놀라울 정도. 우리 민족문화의 형성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더불어 미술 문화의 발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각종 미술문화재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미술이나 문화에서 간취(看取)되는중요한 현상은 국제성이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는 중국은 물론
서역과도 교류하여 필요한 것을 취해서 문화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한(漢)나라와 동진(東晉)의 영향을, 그 후에는 육조(六朝)의 영향을 섭렵하였고, 고분의 말각조정(抹角藻井) 천장이나
각종 문양, 일부 복식과 악기의 그림 등에서는 서역 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을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이러한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가장 적나라하게전해주는 것이 바로 고분의 내부 벽면에 그려진 벽화다. 만일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의 내용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이해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직 단편적인 기록들에 의거하여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짐작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결국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유산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하겠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벽화이기에 우리나라 회화의 시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둘째로 복합적인 내용과 성격을 지녀, 고구려 문화의 여러 측면을 파악하는 데 큰 참고가 된다. 조형과 창의성, 양식적 특징,
풍속과 습관, 복식과 기물, 건축과 실내장식, 종교와 우주관 등 많은 문화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로 다른 문화와의 교류 관계를
알아볼 수 있다. 외래문화의 수용과 소화, 그것을 토대로 한 새로운 발전, 그리고 주변국에 미친 영향 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회화 자료일 뿐 아니라 우리 고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묘주 초상> 안악3호분 서쪽 곁방 서벽, 357년
고구려 초기 고분에 그려진 초상화들은 비록 조선시대의 초상화처럼 인물의 개성을 충분히 드런재지 못할지라도 무덤 주인공의
대체적인 모습과 차림새를 표현하고 있어서 당시의 문화적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현재까지 묵서명에 의해 절대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고분인 안악 3호분(357년)의 주인공 초상화를 살펴 보자.
무덤 주인은 장막을 덛어올린 탑개(榻蓋) 안에 정면을 향하고 앉아있는데, 어깨선이 가파르게 흘러내려 넓은 무릎 폭과 함께 정삼각형을 이루는 고대 인물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얼굴은 장년의 모습이며 턱에 고양이 수염이 나 있어서 중국 한나라 이후 인물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얼굴은 개성을 충분히 드 러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눈과 코를 고쳐 그린 흔적이 엿보여 4세기 중엽에는 아직 인물화가 초보적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붉은색의 포(袍)를 입고 설법을 하는 듯한 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신상(神像)을 연상시킨다. 즉 주인공을 신격화하였다. 검은 모자 위에 겹쳐 쓴 백라관(白羅冠)은 왕만 쓸 수 있는 관으로, 오른쪽에 세워진 3단의 정절(旌節)과 함께 묘주가 고구려의 왕임을 알려준다. 이 점은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 보이는 '성상번(聖上幡)'이라 씌어진 깃발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주인공 좌우의 인물들은 주인공을 향하여 측면으로 서 있는데, 주인공에 가까울수록 크고 멀수록 작다. 이는 계급에 따라 크기를 달리 그렸음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는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어서 역시 고대 인물화의 특성을 보여 준다.
左, <연꽃무늬> 안악3호분 널방 천장석.右上, <연꽃 봉오리> 안악3호분 <묘주 초상> 중 탑개 장식.
右下, <연화문수막새> 광개토대왕릉 출토, 420`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탑개는 연꽃으로 장식되었는데, 특히 모서리 위에 있는 연봉은 꽃 안에 Y자 모양의 선을 그리고 그 좌우에 한 개씩 마치 눈 모양으로 점 두 개를 찍어 넣었다. 이는 광개토대왕의 능에서 수습된 와당의 무늬와도 일치하며, 중기의 벽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연꽃무늬는 4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되었으며, 특히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372년보다 15년 앞서 357년에 이미 부분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이렇듯 고구려 고분벽화는 기록성과 사료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진실성과 신빙성에 있어 종종 거짓이 끼어드는 문헌기록보다도 오히려 벽화가 더 믿을 만한 자료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안악3호분에는 농려풍비(濃麗豊肥, 살이 찌고 아름다운 모습)한 모습의 부인상도 그려져 있는데, 주인공의 초상화 솜씨와 다름을 볼 수 있다.이는 한 고분의 벽화를 최소한 두 명 이상의 화가들이 분담하여 공동으로 작업하여 완성했음이 분명하다.
<배송도> 수산리 고분 널방 동벽, 5세기.
고분벽화의 주된 제작 이유는 현세의 부귀영화가 내세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이른바 '계세사상'의 바탕에 깔려 있을 터이다.
고대국가들 중에서 계세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인 것이다. 천상의 세계로 떠나려는 아버지를 아들이 무릎을 꿇고
읍하는 자세로 배송하는 모습인데, 이와 유사한 장면이 중국 요녕성에 있는 후한시대의 고분벽화에서도 확인되어 그 보편성을 알 수 있다.
左, <승려> 쌍영총 널방 동벽 <공양행렬도> 부분, 5세기右, <승려> 무용총 널방 북벽 <접객도> 부분, 5세기
上, <예불도> 장천1호분 앞방 북벽 윗부분, 5세기
下左, <보살상> 장천1호분 앞방 서벽 윗부분, 5세기
下右, <연화화생도> 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 5세기
<일상 · 월상 · 북두칠성> 장천1호분 널방 천장석, 5세기
左, <승학선인도> 무용총 널방 천정부, 5세기
右, <승학선인도> 5회분 4호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전반
<황룡> 5회분 4호묘 널방 천장, 7세기 전반
左, <수박도> 안악3호분 앞방 동쪽 곁방, 357년
右, <씨름도> (부분) 각저총 널방 동벽, 5세기
이 두 그림에서 한 사람은 고구려인인데 겨루는 상대는 큰 눈과 높은 메부리코를 지녀 서역인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미루어 보면 고구려는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천마>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북벽 천정부, 408
중국에서도 서역에서 기원한 천마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나 고구려에서는 이미 408년의 덕흥리 벽화고분 천정에 나타난다.
말 머리 부근에 '천마지상(天馬之像)' 이라고 씌여있어 이 말이 천마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수평을 이루며 날리는 갈기와 꼬리의 털이
달리는 천마의 속도감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날개가 없는, 현실적인 모습의 천마를 보여준다
<천마> 안악1호분 널방 천정부, 5세기. 날개가 있는 천마상이다.
<천마도> 경주 천마총 출토, 신라, 5~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의 천마사상은 5세기 말, 6세기 초에 신라에서도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인동당초문> 강서대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초
<팔메트> 5회분 4호묘 널방 북벽, 7세기 전반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당초문이나 팔메트 무늬 등도 서역과 고구려 사이의 관계를 말해 준다.
서역과의 관계는 이 밖에 카프탄(터키 사람들이 입는 기다란 상의)을 위시한 복식과 요고(腰鼓, 허리에 차는 북)
5현 비파 등 악기의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수렵도> 무용총 널방 서벽, 5세기
무용총의 벽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로 고구려다운 힘찬 기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그림으로 널방 서벽에 그려져 있다.큰 나무가 우람하게 서있는 뒤편으로 여기저기 산이 늘어서고 사이사이 넓은 대지 위로 무사들이 말을 달려 사냥을 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급박한 분위기가 팽팽하다. 힘과 동세를 중시하는 고구려 미술의 특성이 유감없이 표출되어 있다. 뒤편 중앙에 가장 크게 그려진 백마를 탄 인물이 무덤의 주인공일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모습과 동작이 대단히 능숙하게 그려져 있다. <무용도>에 비하면 회화 기법이 월등히 뛰어나 서로 다른 화가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산들의 색깔이 근경으로 부터 원경으로 갈수록 '흰색→ 빨간색→노란색'으로 되어 있어서 거리에 따라 백 · 적 · 황으로 채색하는 중국의 설채(設彩) 원리가 수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수렵문> 금착수렵문동통 표면, 후한시대
고대의 수렵 장면은 한대(漢代)의 '금착수렵문동통', 무용총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매산리 사신총과 삼실총, 흥륭사지에서 발견된통일신라시대 수렵문전(狩獵文塼) 등에도 나타나 있지만, 어느 것도 힘차고 율동적이고 기운생동하는 무용총의 <수렵도>를 따르지 못한다.
<수목 · 현무도> 진파리1호분 널방 북벽, 7세기 전반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부여 능산리 고분, 백제, 7세기
<현무도> 통구사신총 널방 북벽, 77세기 전반
<맞새김 용봉문 금동관형장식> 진파리7호분 출토, 7세기
<기마무사상> 쌍영총 널길 서벽, 5세기
左, <여인상> 쌍영총 널길 동벽 <거마행렬도> 부분, 5세기
中, <여인상> 수산리 고분 널방 서벽 <곡예감상도> 중 묘주 부인, 5세기
右, <여인군상> 일본 아스카 다카마쓰 고분 널방 서벽, 7~8세기
<애교머리를 한 여인> 삼실총 제1실 남벽, 5세기
<장하독과 묵서명> 안악3호분 서쪽 곁방 입구, 357년
안악3호분은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가 있는 고분 가운데 절대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원으로 주목받는다.
현무암과 석회암 판석으로 구축된 석실봉토분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난 널길, 널길방, 앞방과 그 동 · 서편의 곁방, 그리고 널방으로 구성돼있는 다실묘이다. 널길의 벽에 <무악의장도(舞樂倚仗圖)>, 널방의 동벽과 서벽에 <무악도(舞樂圖)>, 널방의 동쪽과 북쪽이 회랑에는 긴 <행렬도>가 있다. 서쪽 곁방 입구 좌우에 시종무관 혹은 수문장에 해당하는 장하독(帳下督)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 장하독의 머리 위에
"영화(永和) 13년(357) 20월, 무자삭(戊子朔) 26일 계축(癸丑),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慰)이고 낙라상(樂浪相) 창려현토(昌黎玄莵) 대방태수(帶方太守)이자 도향후(都鄕候)이며 유주(幽州)의 요동군(遼東郡)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 사람인 동수(冬壽)는 자가 □안(□安)으로 벼슬을 하다가 69세에 죽었다" 는 내용의 글이 씌어있어 묘주의 국적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즉 묵서명에 등장하는 대로 중국 전연(前燕)의 장군이었다가 고구려에 투항한 동수의 무덤이라는 중국의 주장과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이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331~371)의 능이라는 북한 학자들의 설이 대립해왔다. 그러나 묵서명이 장하독의 머리 위에 옹색하게 씌여있고, 묘주가 왕만 쓸 수 있는 백라관을 썼으며, 왕을 상징하는 3단 정절이 초상화 옆에 그려져 있고, <행렬도>에는 주인공 앞쪽에 '성상번(聖上幡)'이라고 붉은 글씨로 쓴 검은 깃발이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묘주는 왕의 신분임이 분명하다. 묵서명에 언급된 동수는 묘주가 아니라 장하독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이 묵서명으로 인해 안악3호분의 축조 연대와 함께 고구려에서 늦어도 4세기경에는 이미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묘주와 성상번 깃발> 안악3호분 널방 동벽 <행렬도> 부분, 357년
이 고분의 벽화에서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권세와 영화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250여 명이 등장하는 대규모의 <행렬도>다 길이 10미터,
높이 2 미터의 회랑에 그려진 이 <행렬도>는 마차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주인공과 그를 호위하고 행진하는 문무백관 ·
의장병 · 기마병 · 무사 · 악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군장을 갖추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무사들은
그대로 고구려군의 위용을 잘 드러낸다. 많은 인원을 거리감, 공간감, 크기 등을 능숙하게 살려서 잘 표현하고 있어 놀랍기만 하다.
개인별 개성은 충분히 살리지 못했을지라도 전반적인 구성이나 비율에 있어서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회화 수준임을 알 수 있겠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벽화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이다. 널방 천정에 그려진 만개한 연꽃, 묘주와 부인 초상화에 그려진 탑개의 연꽃
장식등이 그 예들이다. 탑개의 귀퉁이에 보이는 연꽃 봉오리의 특이한 모습은 고구려인들이 즐겨서 표현한 문양으로 이와 똑 같은 것이
고구려의 다른 고분들은 물론 일본 호류지에 조장되어 있는 옥충주자의 받침 안쪽에서 발견된어 7세기 초의 작품인 옥충주자도
고구려계의 작품임이 우에하라 가즈 교수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부인 초상> 안악3호분 서쪽 곁방 남벽, 357년
부인의 초상화는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와는 솜씨가 완전히 달라 다른 화가가 그렸을 것이다. 이 역시 개성을 살리지 못한 점도 마찬가지다.
부인과 그 앞뒤의 여인들은 두터운 볼,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등 모두 똑같은 얼굴이다. 서벽의 묘주를 향해 앉은 자세라
얼굴 측면이 드러난 부인은 농려풍비(濃麗豊肥)한 자태에 무늬가 있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신분에 따라 여인들의 머리 모양에 차이가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생활도> (왼쪽 위부터) 우물 · 부엌 · 외양간 · 마굿간, 안악3호분 동족 곁방 동벽과 서벽, 357년
주인공을 비롯한 상류층 인물들의 풍족한 생활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 벽화고분, 5세기의 약수리(藥水里) 벽화고분을 위시한
초기의 벽화들에 나타나는 묘주의 초상화, 행렬도, 수렵도를 비롯한 많은 요소들이 안악3호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행렬도> (모사도) 안악3호분 널방 동쪽 회랑, 357년 (《2004년 남북공동기획 고구려문화전》)
<묘주와 13군 태수>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북벽(묘주)과 동벽(13군 태수), 408년
앞방 북쪽 벽(앞방과 널방을 잇는 통로 위쪽)에 열네 줄에 달하는 긴 묵서명이 있다.
□□군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감리의 사람으로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 진(鎭)이 지낸 관직은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요동태수(邀東太守), 사지절동이교위(使持節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다.
진은 77세에 죽었다. (묘는) 영락 18년인 무신년(戊申年) 12월 신유삭(辛酉朔) 25일 을유(乙酉)에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묘자리를 고르고 공자(孔子)가 날짜를 택하였으니, 장례를 치른 후에 부(富)가 7대에 이르고, 자손은 번창하여 관직이 날로 높아져서
지위는 후왕(侯王)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묘를 쓰는 데는 1만 명의 공력이 들고, 날마다 소나 양을 잡았으며, 술과 고기, 쌀이 다함이 없었다.
또한 식염 자반 등 먹을 것이 창고 하나 분이었다. 적어서 후세에 전하노니 묘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을지어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그림 중에서 가장 먼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묘주의 초상화로, 앞방의 북벽과 널방의 북벽 두 군데에
그려져 있다. 앞방 북벽에는 보고를 하거나 인사를 드리는 13군 태수를 거느리고 앉아있는 위풍당당한 관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대신급이 쓰는 청라관(靑羅冠)을 쓰고 오른손에 부채 모양의 지물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설법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안악3호분의 주인공 초상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본다. 오직 세부적인 것들에서만 시대적 차이가 엿보인다.
묘주를 알현하고 있는 13군 태수들은 모두 얼굴과 차림새가 같아서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한결같이 큰 눈에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어서 마치 열세 명의 쌍둥이 형제를 보는 듯하다.
上) <견우직녀도>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천정부, 408년
下左) <일상과 양수지조>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천정부, 408년
下右) <길리(위)와 부귀(아래)>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천정부, 408년
덕흥리 벽화고분의 천정에는 안악3호분의 경우보다 훨씬 다양한 요소와 주제들이 표현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천정의 그림들 중에서 동쪽의 양수지조는 신라시대 무덤인 기미년명(己未年名)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의 동쪽에 그려져 있는 태양을
상징하는새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남쪽 천정의 <견우직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고 남아있는 유일한 예이자
중국 전설의 한국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북쪽 천정의 천마는 무용총의 천마와 신라 천마총 출도 <천마도>의 시원형이라는 사실에서
괄목할 만하다. 남쪽 천정에 그려져 있는 직녀와 시녀들은 색동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데 이러한 치마는 뒤에 수산리 고분의 부인상,
일본 나라 아스카에서 발견된 고구려계의 고분인 다카마쓰 고분 벽화 중의 여인군상에소 나타나고 있어서 크게 주목된다.
이 점은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볼 수 있는 5세기 초의 고구려 복식이 후대의 고구려는 물론 7세기 말, 8세기 초의
일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부부상> 각저총 널방 북벽, 5세기
각저총의 벽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널방의 북벽에 그려져 있는 주인공 부부의 초상화다.
장막을 걷어 올린 널찍한 장방(帳房) 안에 주인공이 정면을 향해 좌정해 있고 그 좌측(그림을 향하여 우측)에 정부인과 부부인이 남편을
바라보는 측면관을 이루며 앉아있다. 주인공이 갑옷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으며, 그의 뒤쪽에 보이는 탁자 위에 활과 화살이 놓여있는
점과 부인들의 숙연한 자세와 분위기로 보아 아마도 주인공이 출전을 앞두고 있지 않나 추측된다. 이처럼 각저총의 부부초상화는
그 이전의 초상화들과는 달리 단순한 초상화이기보다는 설명적이고 서사적이며 기록적인 성격이 강하다.
<씨름도 > (전체) 각저총 널방 동벽, 5세기
기에 넘치는 부릅뜬 눈, 굵은 장딴지, 힘찬 동작, 가늘고 날카로운 필선등이 돋보인다.
이는 각저총의 인물화가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고분의 경우보다 훨씬 발전된 것임을 말해준다.
지팡이를 쥐고 심판을 보는 노인의 모습, 나무 밑에서 주인공이 서역인으로 여겨지는 상대와 맞붙은 장면이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 씨름의 기원을 (沒骨法)으로 묘사된 나무 등도 눈길을 끈다. 특히 나무는 벽면을 이등분하면서
씨름 장면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각저총의 벽화에서 주인공 부부초상화에 이어 주목을 끄는 그림은 이 무덤의 작명에 근거가 된 <씨름도>다.
널방의 동벽에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커다란 .
<접객도> 무용총 널방 북벽, 5세기
무용총의 벽화 중에서 제일 주목해야 하는 것은 널방 북벽에 그려진 <접객도>다.
이전 같으면 주인공의 초상화가 그려졌어야 마땅할 이 벽면에 초상화 대신에 주인공이 스님들을 맞이하여 진지하게 설법을 듣는
장면을 그렸다. 이제 정면을 향해 정좌한 초상화가 사라지고, 묘주는 그가 겪었던 사건 속의 주인공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장방의 우측에, 그의 손님인 스님들은 좌측에 의자에 앉은 측면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인공이 가장 크게 그려졌고,
다음으로 첫째 승려가 그보다 약간 작게 묘사되어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철저하게 신분과 중요성에 따라
크기가 조절되어 있음을 본다. 음식의 양과 탁자의 크기도 마찬가지다.
<무용도>(부분) 무용총 널방 동벽, 5세기<무용도> 장천1호분 앞방 서벽, 5세기
주인공과 시종들은 모두 춤이 긴 저고리를 왼쪽으로 여며 입고 허리띠를 매었으며 점무늬가 있는 바지를 입고 있다.주인공은 '광고(廣袴)'를 입고 있으나 그에게 무릎을 꿇고 음식을 바치는 시종은 통이 좁은 '협고(狹袴)'를 입고 있어서 신분에 바지의폭도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무용수들이 한결 같이 둔부가 크고 얼굴이 예쁘며 수염이 없어서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무용단의 공연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남장을 한 무용수 중에 귀걸이를 한 인물도 있어서 그러한 추측을 더욱 신빙성 있게 한다. 그리고 무용수들이 모두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데, 예외 없이 두 팔이 한쪽 겨드랑이에 붙어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몸에 비하여 머리는 유난히 작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특이한 모습은 역시 지안에 있는 장천1호분에도 나타난다.
<수렵야유회도> 장천1호분 앞방 서벽, 5세기
장천1호분의 <수렵도>는 무용총의 <수렵도>와 달리 한 벽면에 수렵 장면과 야유회 장면을 함께 묘사했다.
이 장면은 5세기 고구려에서 남자들이 사냥을 할 때 여성이나 어린이, 시종들은 야유회를 가졌음을 알려준다.동작이 힘차고 동적이며 활력이 넘쳐 무용총 <수렵도>에 버금가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활엽, 침엽, 열매가 함께 난 신비한 나무가 보여 흥미롭다.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나무지만 무용총 <수렵도>의 나무보다 훨씬 나무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나무 표현이 좀 더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상> 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 5세기
통구에 축조된 고구려 중기의 벽화고분들 중에서 주목을 끄는 또 다른 무덤으로 장천1호분과 삼실총이 있다.두 고분 모두 말각조정으로 된 천정의 삼각형 천장고임 앞면에 반쯤 두 손을 들어 천정을 받치고 있는 역사상을 그렸다.엉거주춤하게 앉은 채로 두 손으로 천정을 받쳐든 모습의 역사들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삼실총과 통구사신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장천1호분은 앞방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2실묘로 벽화가 강렬한 불교적 색채인데 반해,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삼실총은 온통 역사상으로 채워져있다. 아마도 삼실총은 장군의 무덤인 듯하다.
<예불도> 장천1호분 앞방 북벽 윗부분, 5세기
대좌 위에 앉은 부처의 모습은 5세기 고구려 불상을 이해 하는데 크게 참고가 된다.좁고 가파른 어깨, 삼각형을 이룬 앉음새, 둥근 깃이 달린 옷, 배 앞에 모아쥔 수인의 모습이 4세기 중국의 불상이나 서울 뚝섬에서 발견된삼국시대 초기의 불상과 대단히 유사하다. 6세기 이전의 고구려 불상이 남아있지 않고 더구나 절의 금당에 봉안되었던 대형의 고구려 불상이전해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이 <예불도>는 고구려의 5세기 불상 이해에 큰 참고가 된다. 상단과 하단이 상하 대조를 이룬 대좌, 대좌 좌우에 혀를 빼고 앉아있는 삽살개 모양의 사자, 머리를 땅에 박을 듯이 예를 표하는 여인의 모습 등이 주목된다.
<매사냥> 삼실총 제1실 남벽, 5세기<문루와 무사> 삼실총 제1실 북벽, 5세기
묘실이 셋인 삼실총의 제1실 남벽 상단에는 주인공 부부와 시종 · 시녀가, 하단에는 말을 탄 채 왼팔에 매를 올려놓은 남자의 모습이그려져 있다. 주인공 남자는 무용총의 묘주에 비해 훨씬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으며 그 뒤를 성장(盛壯)한 부인이 따르고 있다.주인공 부부의 모습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점이 무용총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1실의 북벽에는 성곽과 무사들의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다. 지그재그 식으로 돼있는 성곽에는 성문과 문루가 보이며 전투에 임하는 무사들은 완전 군장을 하고 있다. 쌍영총의 무사도와 비교되나 그림 솜씨는 훨씬 뒤지는 편이다. 삼실총에는 이 밖에 연화화생 장면,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 사신, 일각수를 비롯한 산수, 서조 등 비교적 다양한 소재들이 표현돼 있다.
<역사상> 삼실총, 5세기
삼실총의 벽화 중에서 가장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역사상이다.
역사들은 묘실의 입구를 지키는 역할로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모습, 뱀을 목에 걸어 늘어뜨린 모습 등 다양하다.
삼각형 천장받침 표면에 그려진 역사상들은 장천1호분처럼 무릎을 굽히고 앉아 두 손으로 천정을 받쳐든 형태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넓은 어깨, 가는 허리, 굵은 팔목과 발목, 기에 넘치는 부릅뜬 눈을 지녔다. 또한 중근 깃이 달린 옷, 곡령의(曲領衣)를
입고 있어 일반적인 옷과 차이가 있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힘과 능력을 지닌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선이 힘차고 날카로워 눈길을 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6~7세기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었다.
첫째, 무덤의 구조가 널길이 딸린 널방만 있는 구자형(口子型)의 단실묘로 단일화 되었다.
둘째, 묘실은 큰 판석을 짜 맞추어 축조하고 돌 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다.
셋째, 벽화의 주제와 내용도 변화를 겪는다. 네 벽을 사신으로 채운 것이다. 도가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이다.
넷째, 벽화의 솜씨와 수준이 훨씬 발전했다. 대상의 표현이 세련되었음이 한 눈에 읽혀진다.
다섯째,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 미술의 특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여섯째, 색채가 후기에 이르러 더욱 선명해졌다. 선명하고 변하지 않는 안료 발달을 들 수 있겠다.
위) <용문대> 5회분 4호묘 널방 석대, 7세기 전반
아래) <팔메트와 목엽문> 5회분 4호묘 널방 동벽(<청룡도>)의 벽면 구성, 7세기 전반
벽면에 수많은 망상문(網狀紋) 혹은 나뭇잎 문양으로 구성하고 그 안에 각각 인물, 인동문, 팔메트(palmette)문,
화염문(火焰紋) 등을 그려 넣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치밀한 그물 무늬를 보는 듯 복잡하면서도 장식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또한 뒤틀리고 꼬인 용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하여 고구려인의 용 신앙을 엿볼 수 있는데 천정의 중앙에는 황룡이 용틀임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삼족오(三足烏)로 상징되는 일상을 머리에 받쳐 든 인면사신(人面蛇身)의 남성인 복희(伏羲)와 섬여로 표상되는
월상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성인 여와와 함께, 인류 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전설적인 인물들의 모습이 왜 통구 지역의
이 고구려 후기 고분들에 등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는 대단히 획기적인 벽화로
고구려인의 세계관이나 과학기술을 존중하던 문명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농신과 수신> 5회분 4호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전반<승학선인도> 통구사신총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전반
농신과 수신에 나오는 나무 그림 기법이 전에 비하여 사실성 있는 형태로 구현되었으나 초기나 중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몰골법(沒骨法, 윤곽선 없이 채색하는 회화 기법)이라는 점이다. 학이나 용을 타고 나는 신선의 모습도 인물화의 발달 정도를가늠하는데 큰 참고가 된다. 특히 통구사신총 천정에 그려진 학을 탄 신선 그림은 서역에서 전래된 튜닉을 입고 있는 모습이어서중국적인 신선사상과 어우러져 특이한 양상을 보여 준다.
上) <산악도> 강서대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초中) <산악도> 내리1호분 널방, 7세기下) <석각산수인물도> 중국, 육조시대, 미국 캔사스시 넬슨갤러리 소장
고구려의 회화는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고구려의 화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계의 화공들과 실력을 겨루며활동하였던 것도 이 시기다. 고구려 회화의 발달상은 후기의 고분벽화에서 잘 나타난다. 단실묘가 주를 이루는 이 시대 토총 내부의 벽화들은대체로 전대에 비하여 구성은 더 논리적으로, 표현 효과는 더 힘차고 '리드믹' 해졌다. 색채도 훨씬 선명해졌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장 괄목할 만한 사실은 중기에 비하여 산수화가 더욱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후기의 고분벽화 중에서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 예로는평안남도 강서군 우현리의 강서대묘, 평남 중화군의 진파리1호분 그리고 평양시의 내리1호분 등이 있는데, 중기의 무용총 <수렵도>에 그려진 산이나 나무들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널방 천장 받침 1층에 그려진 산은 가운데 높이 솟은 주산을 중심으로 좌우에 객산들이 보좌하는 듯한 모습의 삼산(三山) 형식을 갖추고 있다.이 산들은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후퇴하면서 겹쳐져 있고, 등성이도 밋밋하여 매우 사실적이다. 또한 산다운 맛이 십분 나타나있다. 그리고 삼각형에 가까운 흙산과 그 주위에 솟아난 돌산의 모습이 구분되고 있으며, 흙산 표면에는 산의 주름이나 계곡의 물줄기를 나타내기 위한 꼬불꼬불한 선들이 엿보인다. 흙산 꼭대기에 자라난 나무들도 비교적 나무다운, 사실적인 자태를 보여준다.
내리1호분의 산도 강서대묘의 산과 비슷한 삼산형이다. 역시 주봉과 객산의 모습이 보이고 그 주변에는 머리에 봇짐을 이고 있는 모양의 구부러진 나무들이 흩어져 서있다. 어느 고구려 고분벽화보다도 산다운 분위기다. 이 그림을 통해서 고구려 후기의 산수화 발달 정도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묘주 초상과 묵서명>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북벽, 408년
주인공 진과 13군 태수가 그려져있는 앞방에서 보듯이 내부에 목조건출물이 재현되어 있다.
방의 네 귀퉁이에는 두공(枓栱 , 기둥과 지붕을 잇는 부분)과 도리를 그려 넣어 실제 건물처럼 표현했다.
<묘주 초상> 감신총 앞방 서감, 5세기
앞방의 좌우(동서)에 감이 달려 있는 소위 '유감2실묘(有龕二室墓)' 로 5세기경의 무덤으로 생각되는데 동감과 서감에 각각 주인공
단독상이 그려져 있다. 이 중 서감에 그려져 있는 주인공상이 주목된다. 주인공은 평상 위에 앉아 있는데 줄무늬가 있는 붉은 옷을 입고
허리에는 흰 띠를 맸다. 두 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려 마치 설법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평상 밑에는 연화대좌가 받쳐져 있는 모습
으로 그려졌다. 이는 안악3호분과 마찬가지로 '재세불자(在世佛者)' 로서 유마거사의 모습을 따랐다고 풀이할 수 있다. 주인공의 얼굴은
박락되어 알 수 없으나 이 고분의 앞방 동감에 그려져 있는 같은 주제의 주인공상은 백라관을 쓰고 있고 얼굴이 약간 길고 넓은 편이며
가늘고 긴 눈매와 긴 콧등, 잘 다스려진 팔자수염을 하고 있음을 보아,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고분의 주인공상과 엇비슷했을 것이다.
주인공 뒤편에 '왕(王)' 자가 종횡으로 반복하여 들어 있는 장막을 치고 있어서 그가 왕의 신분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부부상> 약수리 벽화고분 널방 북벽, 5세기
주인공의 모습이 4세기경 어느 시기부터인가 부인과 함께 앉아있는 부부초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에 따라 단독상에서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지던 전형적인 삼각구도도 불가피하게 변화를 겪게 되고 점차로 더 큰 공간에 묘사하게 되었다.
부부병좌상이 그려진 고구려의 고분들 중에서 상대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무덤으로 좌우에 감이 있는 앞방과, 짧은 통로를 통하여 연결된
널방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유감2심묘'로서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좌정한 부부의 초상과 현무를 그렸는데 이들 좌우에
작은 크기로 각각 두 명씩 시종이 보좌하고 있다. 회화 기법상 매우 옹색하고 치졸한 단계라고 보면 되겠다.
<부부상> 매산리 사신총(수렵총) 널방 북벽, 5세기
가느다란 기둥을 세우고 장막을 친 간이 건물 안에 평상을 놓고 주인공은 맨 오른쪽에, 그 왼편으로 첫째 부인, 이어서 둘째, 셋째 부인순으로 앉은 모습인데 이는 전통적인 동양화 전개 방향이다. 평상도 주인공의 것이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첫째 부인의 것이, 둘째와 셋째부인은 같은 평상에 함께 앉아있고 평상의 높이가 가장 낮아 신분에 차등이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부부가 앉아있는 축조물 오른편으로황색의 저고리와 황색의 치마 속에 바지를 받텨 입은 인물이 검은 말을 끌고 온다. 전잔적으로 매산리 사신총의 이 부부상은 앞에서의약수리 벽화고분의 부부상보다는 진일보한 편이나 표현에 있어 아직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내용이다.
<부부상> 쌍영총 널방 북벽, 5세기
묘주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면서도 매산리 사신총 부부 초상화보다 훨씬 세련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쌍영총 부부상이다.
공수 수인과 의상 등 어딘지 불교적 분위기가 풍긴다. 이전의 묘주 초상화에 비해 개인의 특성이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초상화에 가까워진 것으로 인물화의 발달 과정상의 큰 진전으로 평가된다.
쌍영총 내부 투시도 (널방에서 앞방 방향)
<2004 남북공동기획 고구려문화전>
장방을 품고 있는 벽면 양쪽 끝 모퉁이에는 기둥과 두공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가로로 긴 도리가 표현되어 있어 큼직한 목조 건축물을 재현하고 있다.
<행렬도>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동벽, 408년
안악3호분의 웅장한 행렬 장면과 비교될 만한 <행렬도>가 그보다 반세기 뒤의 고분인 덕흥리 벽화고분의 앞방 동벽에 그려져 있다.
벽면의 상단과 하단에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탄 무사들이 각기 열을 지어 주인공의 행렬을 호위하고 있으며, 중앙에는 말 탄 문관과
의장병의 호위를 받으며 두 대의 마차가 달리고 있다. 4열로 구성된 행렬로 중앙 열에는 마차가 두 대 보이는데 앞의 것은 말이,
뒤의 것은 소가 끌고 있다. 두 대 모두 산개(傘蓋)가 세워졌을 뿐 앞쪽과 어깨 위로는 모두 트여 있다. 앞의 마차는 주인공이,
뒤의 우차는 주인공의 부인이 탔을 것으로 생각된다. 등장 인물들의 포치가 종횡으로 잘 짜여져 있다.
이 <행렬도>는 묘주 진이 유주사사로 있을 때의 모습을 재현한 듯하다.
上) <행렬도> 약수리 벽화고분 앞방 동벽 부분, 5세기
下) <행렬도> 모사도(2004 남북공동기획 고구려문화전)
약수리 벽화고분에도 앞방 남벽 우측 상반부, 동벽 상반부, 북벽 우측 상반부에 걸쳐 길게 뻗어있는 <행렬도>가 있다.
비교적 완만한 동세, 인물들의 비슷비슷한 형태, 작고 테가 굵은 바퀴와 굽어진 덮게가 씌워진 고식의 우교차 등은 여전히 고졸하다.
마차가 아닌, 소가 끄는 우교차를 타고 있는 것은 그가 열로했음을 확보하고 있으며, 묘사가 질서 정연하고
제법 동세가 나타나므로 고구려적 특성이 어느 정도 구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수렵도>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동벽 천정부, 408년
말을 탄 여덟 명의 사수들이 호랑이 · 멧돼지 · 사슴 · 노루 · 꿩 등을 사냥하고 있다. 달리는 말과 동물에서 약간의 속도감이
느껴지지만 무용총의 <수렵도>와 비교하면 아직 많이 미숙하다. 앞방의 동측 천정에 양수지조가 그려져 있는 것은
해가 뜨는 동쪽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날개를 펴고 선 이 새는 태양을 상징하는데,
후에는 다리가 셋 달린 검은 까마귀 '삼족오'로 대체된다.
<수렵도> 약수리 벽화고분 앞방 서벽, 5세기
이 <수렵도>의 사수들은 검은 말, 갈색 말, 갈색 말, 황색 말을 타고 각종 동물들을 사냥하고 있는데,
덕흥리 벽화고분보다 동세와 동감이 좀 더 두드러진다. 산들이 앞쪽에 늘어서 있는 덕흥리 벽화고분과는 달리
약수리 벽화고분의 <수렵도>에서는 산이 뒤편에 몰려 있으며 형태도 많이 달라졌다.
<우교차를 탄 부인> 덕흥리 벽화고분 통로 동벽, 408년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행렬도와 수렵도 외에도 주인공과 부인의 생활상을 표현한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다.
이러한 그림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다양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물 표현에 있어서도 어떤 형식이나 틀에 덜 매여있어
당시의 화풍과 특성 및 실력을 가늠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특별히 주목을 요하거나
인물화의 발달 정도를 엿보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간추려 본다.
한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에 묘주의 부인이 타고 그 뒤를 두 명의 시녀, 크고 검은 일산(日傘)을 받쳐든 남자, 그리고 기마 인물들이
차례로 따르고 있다. 소의 옆과 뒤에는 어린 소년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걷고 있는데 앞의 사람이 고삐를 쥐고 있다.
수레 속에는 부인이 타고 잇는 듯하나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공양행렬도> 쌍영총 널방 동벽, 5세기
여주인공이 불공을 드리러 가는 그림은 주인공 부부의 불교 신앙이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뜻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인물들의
차림새와 인물화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된다. 연기가 나는 향로를 머리에 인 여인, 석장을 집고 가사를 입은 승려,
시녀, 묘주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 등이 일려로 걸어가고 있어 이들이 불공을 드리러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인물들의 의상이
고도로 세련됐으며 그 표현도 대단히 숙달된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승려의 가사에도 파상의 붉은색 띠무늬가 두드러져
불교와 붉은색의 관계를 엿보게 한다.
<거마행렬도> 쌍영총 널길 동벽, 5세기
주인공인 남편과 세 부인을 표현한 것으로 믿어진다.세 여인들은 남자와의 거리에 따라 차등적으로 그려져 있다.
첫째 부인을 우대하여 거리에서도 차별을 둔 것으로 보인다. 여인들 양 볼에에는 한결같이 붉은색 둥근 연지를 찍은 모습이다.
세 여인의 자세와 차림새는 비슷하지만 얼굴은 개인별 생김새와 표정의 차이가 드러나 있어서
이전보다 발달된 인물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무용도>(전체) 무용총 널방 동벽, 5세기
<곡예감상도> 수산리 벽화고분 널방 서벽, 5세기
쌍영총과 연대 및 여러가지 양상이 매우 엇비슷한 무덤이 1971년에 발견된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수산리 소재의 수산리 벽화고분이다.
판석으로 된 단실묘로 남쪽에 널길이 나있으며 방대형 분구(方臺形墳丘)를 지었다. 다실묘나 2실묘가 아닌 단실묘이기 때문에 인물풍속화를
그려넣을 공간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벽면에 문양띠를 그려 상하 양분,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다.
<곡예감상도> 모사도<2004 남북공동기획 고구려문화전>
이 수산리 벽화고분은 북벽에 부부 초상이 그려져 있어 약수리 고분 및 쌍영총과 비교되고, 동벽 하부에는 주인공의 <행렬도>가 묘사돼 있어
안악3호분 · 덕흥리 벽화고분 · 대안리 1호분 · 팔청리 벽화고분 · 약수리 벽화고분 · 대안리 1호분 · 팔청리 벼고하고분과 비교된다. 또한 여인
들의 옷차림은 쌍영총 · 무용총 · 안악3호분과 비교되며, 서벽 상부에 표현된 곡예 장면은 약수리 벽화고분 및 팔청리 벽화고분과 비교된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수산리 고분의 연대는 대체로 5세기 초로 판단된다.
수산리 벽화고분은 쌍영총과 함께 5세기 초 고구려의 활달하고 당당하며 세련된 인물화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 이전의 약간 어설픈 듯한 표현과는 달리 매우 숙달되어서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회화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수박도> 무용총 널방 북벽 천장고임, 5세기
인물 묘사는 약간 미숙하지만 힘과 긴장감의 표현은 성공적이다. 약간의 담채가 곁들여졌지만
마치 백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씨름도> 장천1호분 <수렵야유회도> 왼쪽 윗부분, 5세기
투기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은 힘과 무예를 중시하던 고구려인의 기질과 고구려 회화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각저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투기도들은 대부분 솜씨가 떨어지는 화가에 의해 제작되었거나
주요 벽면을 벗어난 화면에 그려져 있어 그 특성이 충실히 부각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투기에 임하는 두 인물들 중에서 한 사람은 코와 눈이 커 서역 인물로 간주되는 점도 주목된다.
위) <야철신> 5회분 4호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전반
아래) <제륜신> 5회분 4호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전반
야철신은 나무 밑에서 무엇엔가 걸터앉아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모루 위에 놓인 벌겋게 달궈진 쇠를 두드리며
일을 하고 있는데 작업에 편리하도록 소매가 짧은 저고리와 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바지를 입고 있다.
제륜신은 두 그루 나무 사이에서 바퀴를 굴리며 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노란 깃이 달린 담흑색 포를 입었는데
소맷자락과 옷자락이 갈라져서, 뛰는 동작에 따라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인물의 빠른 동작과 동세 등이
자연스럽고 능란한 솜씨로 묘사되어 화가의 기량과 회화의 발달을 느끼게 한다.
<복희와 여와> 5회분 4호묘 널방 천장고임, 7세기 전반
섬여가 든 둥근 월상을 이고 있는데, 상체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체는 뱀의 몸을 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물의 모습은 아니지만 얼굴과 상체의 표현은 고구려 후기 인물화의 수준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붉은색 저고리에 흰 깃이 달려있으며 소맷자락은 갈라진 채 나부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개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얼굴이 약간 길고 희며 미인이다.
마치 살아있는 고구려 미인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구려 후기의 인물화가 이전과 달리 궤도에 올랐음을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제까지 인물화를 중심으로 대강 살펴보았듯이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 내용이나 화풍 면에서 대단히 풍부하고 괄목할 만한 것이다.
또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양상이 계속 변화하였고 화풍 면에서는 발달을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양상들은 당시 고구려의 일반회화에도 대부분 투영되었을 것이고, 또 다른 문화적 요소들과 함께 백제, 신라, 일본 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다만 벽화가 아닌 고구려 회화 작품이나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던 나라의 작품이
드물어 구체적인 양상의 규명이 어려울 따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 주구지 소장의 <천수국만다라수장>,
호류지 소장의 옥충주자의 그림들은 그러한 고구려 영향의 시례로 매우 귀중하다.
인용서적 : 안휘준 著 『고구려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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