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 8·15해방에서 한국전쟁 종전까지 (사진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 1945~194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미 제24사단 사령관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 케이드 제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총독부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으나
조선에 대한 통치권은 존속되다가
오키나와에 있던 미 제8군단(제7사단, 제24사단) 부대가 그해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다음날 서울에 입성해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1945년. 9. 9)
1. 오후 4시,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 (1945. 9. 9)
2. 오후 4시 30분, 미군들의 경례 속에 성조기가 조선총독부 광장에 게양되고 있다.
9월 12일,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임명됨으로써 비로소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일제의 한국 통치 종말을 알리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 1945. 9. 9
좌 -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민들.
우 - 일본군들이 귀국선에 오르기 전에 미군들에게 소지품 검색을 받고 있다.
장갑차를 탄 미군들이 서울로 진입하고 있다. 1945. 9. 8)
붉은광장에서 젊은이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을 연호하고 있다. (평양, 날짜 미상)
좌), 미군들이 개성 부근 38선 초소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1947. 5. 25)
우상),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이 연설하고 있다.
미소 양군 사령부는 모스크바삼상회의(미·영·소) 결정(5년신탁통치)을 실천하기 위해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2년여에 걸쳐 열렸던 매ㅣ소공동위원회는 별다를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1946. 1. 16)
우하),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북한 인민위원회 선거 경축행진을 하고 있다.
(북한도 그때까지는 태극기를 국기로 쓰고 있었다). (1946. 11. 3)
5·10 총선거를 방해한 혐의로 체포된 선거사범들. (1948. 5. 10)
우), 5·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이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전남 광주. (1948. 5. 8)
좌),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1948. 5. 10)
1949년 6월 6 26일 정오 무렵 육군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민족의 스승 백범 김구 선생.
선생의 장례는 열흘 후인 1949년 7월 5일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이 사진은 백범 선생의 운구가 소공동을 지날 때
미 육군정보팀이 촬영하여 본국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울, 1949. 7. 5)
상), 김일성과 박헌영이 소련 제5차 최고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 (1949. 3)
하), 국회가 처음 열리는 날, 서북청년단들이 의사당 앞에서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1948. 5. 31)
좌), 미군사고문단이 국방경비대에서 기관총 교육을 하고 있다.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미군정하 남조선경비대로 출발하여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되었다. (1949. 9. 6)
우), 대구, 교육을 받고 있는 경찰들. (1949. 9
미군 교관이 한국 조종사들에게 미 전투기 F-52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뒷줄 가운데는 김신 중령), (1950. 6. 27)
2. 미군과 유엔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한국에 있어서의 안전보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의 미국 결의안을 찬성 7, 반대 1, 기권 2로 채택하고 있다. (1950. 6. 28)
좌), 한국전쟁 발발 후 최초로 도착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스미스 부대 장병들.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부산으로 공수된 후 열차편으로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1950. 7. 2)
우), 최초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이 전투에 밀려 후퇴하고 있다. (1950. 7)
미군들이 영일만에 상륙하고 있다.
미군 탱크가 마을로 진입하고 있다.
(경북 예천, 1950. 7. 24)
유엔군들이 인민국 패잔병들을 생포하고 있다.
(안양, 1950. 9. 22)
미 군함이 인민군 진지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950. 8. 22)
월미도를 사수하다 섬멸된 인민군 시신.
(인천, 1950. 9. 15)
사람들이 떠난 텅 빈 시가지에 남겨진 한 소녀가 하염없이 울고 있다.
(인천, 1950. 9. 16)
좌), 유엔군들이 생포한 인민군 패잔병들을 수색하고 있다. (1950. 9. 15)
우), 인천상륙작전 후 생포한 인민군 포로들. (1950. 9. 16)
인천에서 생포한 인민군 포로들. (1950. 9. 18)
좌), 깃발이 휘날리는 중앙청 광장. (1950. 9. 29)
우상), 유엔군 탱크가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1950. 9. 29)
우하), 서울 시민들이 "미 해병대 고맙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1950. 10)
좌), 조리 군함이 인민군 진지를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1950. 10. 12)
우상), 유엔군 진입을 환영하는 시민들. (충주, 1950. 9. 28)
우하), 유엔군들이 인민군 부역의 혐의가 짙은 두 사람을 억류하고 있다. (1950. 8. 28)
좌상), 유엔군이 인민군측 부역자들을 호송하고 있다. (충북 영동, 1950. 10)
우), 평산을 향해 진격하는 유엔군. (1950. 11. 1)
좌하), 유엔군이 인민군측 게릴라들을 체포하고 있다. (영흥, 1950. 11. 15)
미 제7사단 제17연대 장병들이 한중 국경 혜산진 압록강 둔치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중국 쪽을 바라보고 있다.
열흘 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곳에서 후퇴하였다. (혜산진, 1950. 11. 21)
강추위 속에 유엔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1950. 11. 20)
유엔군이 원산에 상륙하기 위하여 상륙용 소형 함정으로 옮겨 타고 있다. (1950. 11)
서울시민과 학생들이 참전국에 감사하는 평화 행진을 하고 있다. (1950. 10. 27)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평양 진주 45일 만에 대동강을 건너 총퇴각하고 있다. (1950. 12. 4)
유엔군이 인천항에서 수송선에 장비를 싣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 차량들이 한강 부교를 건너 남하하고 있다. (1950. 12. 12)
좌), 흥남에서 탱크를 싣고 부산에 도착한 수송선. (1950. 12. 26)
우), 철수작전 후 파괴되는 흥남부두. (1950. 12. 24)
압록강까지 북진한 유엔군들이 중공군 참전으로 혹한 속에 후퇴하고 있다. (1950. 12. 9)
일감을 얻고자 미군부대로 몰려든 한국인 노무자들.
(1951. 1. 5)
미군 수송기가 일본으로부터 싣고 온 가솔린통을 투하하고 있다.
(1951. 1. 25)
미해군 전투기가 원산 상공을 초계비행하고 있다. (1951. 7. 15)
좌), 미 수송기가 낙하산을 이용하여 보급품을 공수하고 있다. (1951. 2. 23_우), 미군 폭격기가 북한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1951. 10. 18)
좌), 한강 부근. (1951. 3. 4) / 38선 남쪽 6마일 부근. (1951. 5. 28)
좌상하), 155mm곡사포가 적진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1951. 6. 3)
우), 아이를 업은 노인과 북한강 유역에 전차를 몰고 온 이방인들. (춘천, 1951. 4. 4)
좌), 미군 트럭이 불타고 있다. (조치원, 1951. 7. 10)
우상), L-5 정찰기가 적진을 살피고 있다. (1951. 4. 2)
우하), 미군 탱크가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1951. 5. 26)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뒤에 탄 사람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1952. 12. 4)
국무성 고문(후일 국무장관)이 북한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덜레스(중앙), 왼편 유재흥 장군,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의정부, 1950. 6. 18)
덜레스 고문이 한국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 무초 주한 미 대사.
덜레스가 한국을 떠난 지 사흘 뒤 전쟁이 발발했다. (1950. 6. 18)
개전 초기의 한미 고위층.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 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사령관. (1950. 7. 26)
상),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이 워커 장군. (1950. 7. 26)하), 종군기자들과 회견하는 맥아더 장군. (1950. 2.7)
3. 국방군과 인민군
국군 헌병이 인민군을 생포하고 있다. (1950. 7. 5)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1950. 7. 29
좌상), 국군 병사들이 오침 후 병기를 손질하고 있다. (영덕, 1950. 7. 29)좌하),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행군하는 국군 병사들. (1950. 8. 1)우), 주야간 전투에 지친 국군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50. 7. 29)
좌), 국군 병사들이 박격포 조준 연습을 하고 있다. (1950. 8. 13)
우상), 국군 병사들이 LMG 기관총 손질을 하고 있다. (1950. 8. 13)
우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미연합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운데가 백선엽 장군). (1950. 8. 18)
좌상), 기마대 행렬. (대구, 1950. 8. 19)
좌하), 임시 신병훈련소에서 교관들이 훈련병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치고 있다. (안강, 1950. 8. 30)
우), 국군이 피란민들의 가재도구를 검색하고 있다. (1950. 8. 13)
좌), 시민들이 유엔군과 국군의 서울 탈환을 축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대구, 1950. 9. 28)
우상),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어린이들이 갓길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디전, 1950. 9. 29)
우하),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경인가도의 주민들. (1950. 9. 27)
좌), 부상병을 후송하는 국군. (1950. 7. 29) . 우), M1소총을 들고 경계근무하는 국군 병사. (1950. 8. 10)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국군들이 치열한 고지전투를 벌이고 있다. (1951. 7. 3)
훈련소에서 출소한 신병들이 전방으로 가기 위해 대구역 광장에 집결하고 있다.(대구,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무운장구를 비는 어머니. (대구, 1950. 12. 18)
손수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학생과 엎드려 있는 인민군 병사.(평양, 1951. 10. 21)
국군의 전투복 차림(모자, 전투복, 신발: 국산. 소총, 코트, 탄환: 미제) 1951. 1. 5
국군의 동계 방한 복장. (1950. 11. 25)
정전회담장 부근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은 인민군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1953. 4. 13)
좌), 노무자들이 비행장 활주로를 다지고 있다. (1950. 7. 6)
우), 국군 위생병이 할아버지에게 DDT를 뿌리고 있다. (여주, 1951. 6. 4)
대한민국 이동방송선 'HLKT'를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195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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