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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고려시대를 가다 1편

고려시대를 가다

(1편)

















오대산사 길상탑지 五臺山寺吉祥塔誌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했던 텁지 4매 중 하나이다. 원래 오대산사의 길상탑을 위한 것이었으나 어떤 연유로 인해

해인사 묘길상탑에 함께 봉안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인 진성여왕 대에 전쟁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모습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도

승군을 애도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오대산사는 강원도 지역이 아닌 해인사 부근의 사찰로 추정된다.







「오대산사 길상탑지」에 기록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상


기유년(진성여왕 3년, 889)에서 을묘년(진성여왕 9년, 895)까지 7년 동안,

천지가 온통 난리로 어지럽고 들판은 전쟁터가 되니,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행동이 짐승과 같았으며,

나라는 기울어질 듯하고 재앙이 절에까지 이르렀다. 나라와 삼보를 지키려는 바람은 승속이 같은데

칼날이 숲 속에 난무하고 몸은 바윗등에서 잃었구나.









"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


후백제 견훤왕 9년(900) 경 전주 동고산성 출토, 지름, 15.3cm,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승탑에 새겨진 후백제의 연호, 정개


남원 실상사에 소재한 편운화상부도의 명문을 탁본한 것으로, "정개 10년 경오년(910)에 (부도를) 세운다"라는 내용이다.

"정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견훤 때의 연호로 보인다. 명문에 따르면 편운화상은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의 개조 홍척의 제자라고 한다.

















천자로 불린 고려 왕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몽골이 일어난 13세기까지의 동북아시아는 고려와 정통 중국 왕조인 송, 그리고 북방 민족이 세운 거란과 금

등이 다원적인 세력 관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천자로 불렀고 그에 맞는 천자국의 체제도 운영하였다.

 왕을 천자 · 황제 등으로, 왕실을 황가로, 왕성을 황성으로 부르고, 왕의 명령을 제制, 또는 칙勅이라 한 것등은 그 좋은 예이다.


물론 천자국으로서의 제도 중에는 다분히 형식적인 것들도 있고, 송과 거란 · 금 등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조공 - 책봉의 관계는

당시의 다원적 국제 질서 속에서 형식적인 외교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송이나 거란 · 금 등의 사신이 왔을 때의 의전에서

고려 왕이 일방적으로 군신의 예만 따르지 않은 것도 주목된다.


고려가 천자의 나라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했다는 높은 자긍심과 더불어, 고려 스스로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17대 왕 인종(재위 1122~1146)의 시호와 생전의 업적 등을 새긴

시책(왕이나 왕비 사후에 시호를 새겨 무덤에 넣은 것)이다.









인종의 무덤에 넣은 함


마름꽃 모양의 내함과 마름모 모양의 외함이 한 조를 이룬다. 내함은 청동으로 만들고 주석을 도금하였으며,

 이암으로 만든 외함은 표면에 진사 등의 성분이 확인 되고 있어, 원래 무늬를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의 무덤에 넣은 청동인靑銅印


불법 수호의 상징적 동물인 사자 두 마리가 앞발로 보주를 받치고 서 있는 모양의 도장이다.





인종의 무덤에 넣은 은수저


숟가락은 구리가 소량 함유된 은으로 만들었는데, 자루의 단면이 납작하고 길게 휘어진 곡선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젓가락 역시 은으로 만들었으며 단면이 둥글고 끝마디에 음각의 홈이 장식되었다.




 인종의 무덤에 넣은 청자함




인종의 무덤에 넣은 청자 뚜껑 있는 잔




인종의 무덤에 넣은 청자 받침대


용도가 밝혀지지 않은 받침대이다. 단이 있어 포갤 수 있고 윗면이 오목하여 내용물을

놓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여러 층으로 포개어 쌓는 합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인종의 무덤에 넣은 청자 참외 모양 병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려 특유의 미감으로 재창조한 고려청자 절정기의 최고 걸작이다.

주름치마를 닮은 높은 굽, 참외 모양의 유려한 몸체, 부드러운 곡선의 긴 목,

극도로 절제된 입구의 꽃 형태 등 전체적인 비례와 조화도 뛰어나다.










왕실 약그릇


뚜껑 윗면에 구름과 용의 무늬를 음각하였고, 뚜껑과 아래 그릇이 맞닿는 부분에 아래위로 "상약국尙藥局"이라고 새겼다.

주로 환약을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릇은 왕실 물건의 품격이 느껴진다.





만월대 출토 전塼 · 조형 토기





청기와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청자기와파편들이 출토되었는데, 기와 안쪽에 청자기와가 놓일

위치를 표시한 명문들이 있어, 당시 청자기와가 궁궐 건축물의 구체적인 건립 하에 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청자기와로 지붕을 인 양이정養怡亭


또 민가 50여 구를 헐어 대평정을 짓고 ...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양이정을 지어 청자로 지붕을 이고

남쪽에는 양화정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 또 옥석을 갈아 환희 · 미성 두 대를 쌓고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고

멀리서 물을 끌어 비천을 만들어 사치하고 화려함ㅇ르 다하니...


- 『고려사』권 18, 세가 18, 의종 11년 4월 병신




관료와 문벌


고려시대 관료의 중심은 문신들이었다. 문신들은 정치와 일반 행정은 물론이고 전쟁 시의 최고 지휘관도 도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 강민첨이나,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 · 윤언이 등은 모두 문신들이었다. 고려 전기의 문신은 무신과

함께 양반 지배층을 이루었지만 무신보다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우월하였다.


문신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손은 음서라는 특권적 제도를 통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문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뒤늦게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과거는 중시되었다.

관료의 최상층부는 종2품 이상의 재상 〔일명 재추〕들이었다. 이들은 행정 실무를 책임지는 6부와 감찰 업무를 담당한 어사대,

재정과 회계를 맡은 삼사 등 주요 기구의 수장을 겸직하면서, 이른바 재추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며

국왕의 국정 운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고려의 관료 체제가 성숙되면서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ㅣ 고위 문신을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났다.

이들 문벌은 재상들도 다수 배출하면서 서로 얽히고 설킨 혼인을 통해 그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하였는데,

이자연이 토대를 닦은 경원 이씨慶源李氏가 대표적이다.









고려 관리 강민첨의 초상화


고려 명장 강민첨(963~1021)의 초상화이다. 그는 현종 10년 강감찬과 함께 10만 거란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 제11대 왕 문종은 그의 이러한 공을 높이 사 공신각에 그의 형상을 그려 모시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 정조 12년에

 박춘빈이 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당시의 초상화 화법 및 복식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청자 도장


원숭이 모양의 손잡이를 한 청자 도장이다. 청동 도장에 비해 청자 도장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고려 최고 문벌의 기틀을 마련한 이자연의 묘지명


고려 11대 왕 문종의 장인이자 순종 · 선종 ·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1003~1061)의 묘지명이다.

이자연은 생시에 세 딸을 문종과 혼인시켰는데, 인예태후 · 인경현비 · 인절현비가 그들이다.

이 중 인예태후가 순종 · 선종 · 숙종을 낳았다. 또 이자연의 손녀 하나는 외손자인 순종의 비가, 손녀 셋은 외손자인 선종의 비가,

그리고 증손녀 셋은 예종 비와 인종 비가 된다. 판편 손자 이자겸(?~1126)은 예종의 장이이자 인종의 장인 겸 외할아버지이다.

이와 같이 자자연은 경원 이씨를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이자 외척 가문으로 만드는 기틀을 마련했다.









철 솥


익산 미륵사터에서 출토된 철 솥으로, 속이 깊으며 폭 5cm 정도의 넓은 전이 돌려져 있다.

11~12세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향리 鄕吏

고려시대 지방 사회의 구심점은 토착 세력인 향리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령을 보좌하는 만단 실무자였지만, 과거 그 지역을

통치하던 호족의 후예답게 자신들의 집무소인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고을 현안을 논의하며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특히 수호장(일명 상호장)은 최고위 향리인 호장들의 대표로서, 『경주호장선생안』에서 보듯이 대부분 특정 성씨의 특정

가계에서 배출될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 그 위상이 독보적이었다. 이들은 고려 정부가 공인한 인신[도장]을 가지고 조세 · 공물의

수취, 노동력의 징발과 같은 공무를 집행하였고, 유사시에는 주민들을 이끄는 전투 지휘관이 되었으며, 정월 초하루나 국가의

경조사 때에는 마치 제후가 천자를 배알하듯이 지역을 대표하여 국왕을 뵙기도 하였다. 수호장을 비롯한 향리들은 또한, 불탑

조성 등의 각종 불사를 주도하고, 지역 수호신인 성황신이나 산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지역의 정신적 구심점 노릇도 하였다.


이같은 향리들의 기능과 위상은 과거 그 지역을 다스리던 호족의 그것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고려시대 내내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해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사회적 · 문화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향리는 낮은 지위의 조선시대 향리들과는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존재였다.









향리들이 탑을 세운 과정을 기록한 문서


 현종 10년부터 현종 22년에 걸쳐 약목군[지금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향리들이

정도사  오층석탑을 건립한 과정을 적은 것이다.



















지방 유력자의 도장


"돈수소봉" 

 머리를 조아리고 정성들여 봉합니다. 라고 새긴 도장으로 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보이는

청자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지방행정을 담당한 향리층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풍風' 자 모양의 벼루


향리나 그에 준하는 지방 유력 계층에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벼루이다.





금속화폐

고려시대의 기본 화폐는 쌀 · 베 등의 물품화폐였으나, 표준화된 금속화폐도 몇 차례 주조 · 유통되었다.

최초의 금속화폐는 성종 15년(996) 집권화를 위해 주조된 철전 건원중보인데, 일부 대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목종 5년(1002)

무렵에 그 유통이 중단되었다. 금속화폐의 유통은 고려 제15대 왕 숙종(재위 1095~1105)이 다시 추진하였다. 우선 숙종은 은병이라는

고액 화폐를  만들어 유통하였다.(속종 6년, 1101),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들었다는 은병은 한 개의 가치가

 쌀 10석에서 수십 석에 이르는 고액 화폐로서, 주로 무역 결제와 같은 고액 거래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이어서 숙종은 해동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였다(1102). 이는 친동생인 승려 의천(1055~1101)이 예전에 주장했던 동전 사용의

이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삼한통보를 비롯한 여러 동전들도 비슷한 시기에 주조 ·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부는 이들 동전의 유통

을 장려하기 위해 개경과 지방 주점 등의 점포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숙종이 적극적인 동전 유통 정책은 물품화폐에 의존하던 문벌귀족

세력의 기반을 약화하고 당시 상업 발달의 성과를 국가 재정으로 수렴하려는 의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동전은 기존 물품 화폐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속에서 그리 오래도록 유통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동통보海東通寶


고려 15대 왕 숙종의 명으로 발행한 동전이다. 전면에 "해동통보"라고 새겼는데, 전서체가 특히 많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삼한통보 · 삼한중보 · 동국통보


모두 해동통보와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동전들이다.





도량형

고려시대에는 일찍부터 국가가 도량형을 정비하고 관리하였다. [정종 6년(1040), 정종 12년(1046)], 이는 미곡 등의 조세와

금 · 은 · 구리 · 철 · 소금 등 공물의 수취에 정확성을 기하고, 물품의 가치 기준을 명확히 하여 상품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길이늘 재는 도제度制의 경우 건축 공사에 쓰는 영조척, 포목 측정용 포백척, 농업용 양전척 등 그 용도별 자의 실상에 대한

이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물품의 양을 재는 양제量制는 10작=1합, 10합=1승, 10승=1두, 15두=1석(석, 곡)이 원칙이었고,

무게를 재는 형제衡制는 1근의 중량이 600g 안팎으로, 중국 당 · 송의 형제와 체계 및 중량이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만 고려시대 도량형기의 실물은 전하는 것이 드믈어 구체적인 형태나 규격을 알 수 없는데, 근래에 청주 사뇌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 기름말[=유두] 같은 유물은 도향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관청에서 승인한 기름말 (油斗)

고려시대 청주목 사뇌사 터 출토. 지름 25.4cm, 높이 10.0cm



청자의 생산과 유통

고려시대에는 자기가 다량 생산되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그 기술이 도입된 자기는 통일신라 말기에

선종 불교와 함께 들어온 차 문화가 퍼지면서 그 수요가 확대되어 갔다. 자기는 종래의 도기나 토기와 달리 그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아름다우며 물을 흡수하지 않는 일종의 신소재 제품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지배 체제가 확립된 11세기

에는 원료 공급과 제품 운송에 편리한 강진과 부안이 왕실용 자기를 비롯한 최고급 청자의 생산지로 정착하였다.

문벌 귀족 중심의 체제가 무르익은 12세기에는 고려 특유의 비색청자가  이들 지역에서 탄생하였고, 아울러 상감청자도

 이들 가마에서 개발되었다고 한다. 고려 중기 이후로는 이 두 곳 외에도 여러 지방에서 청자가 생산되었는데, 대체로 그

인근 지역의 수요에 충당되었다. 강진과  부안의 청자는 공물 또는 상품으로서 세곡 운송로인 조운로를 따라 개경으로 공급 되었다.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의 물표이다. 먹으로 "최대경택상"이라고 썼는데,

 이는 청자 수취인이 "최대경"임을 의미한다. "대경"은 수취인의 벼슬 이름으로 보인다.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의 물표이다. 개경에 사는 안영의 집에 청자 1과, 즉 한 꾸러미를 보낸다는

내용이 먹으로 쓰여 있는데, 안영의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1과가 어는 정도 수량의 청자를 지칭하는 단위인지는 알 수 없다.






청자 대접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고려 12세기, 입지름 16.3cm, 높이 6.3cm, 바닥지름 5.8cm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청자 양인각 모란문 대접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고려 12세기, 입지름 17.9cm, 높이 6.4cm, 바닥지름 6.3cm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청자 음각 앵무문 대접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고려 12세기, 입지름 17.0cm, 높이 7.7cm, 바닥지름 5.8cm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청자 양인각 연화당초문 접자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고려 12세기, 입지름 13.6cm, 높이 3.6cm, 바닥지름 5.3cm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청자 화형 접자

고려 12세기,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입지름 10.3cm, 높이 1.5cm, 바닥지름 4.5cm





청자 양각 연판문 통형 잔

고려 12세기,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입지름 12.0cm, 높이 9.4cm, 바닥지름 6.4cm





청자 음각 뇌문雷紋 잔

고려 12세기, 군산 비안도 해저 출토, 입지름 8.1cm, 높이 5.3cm, 바닥지름 4.2cm






청자 죽순형 주자

고려 12세기, 전체 노이 22.1cm, 높이 19.3cm, 입지름 3.2cm, 바닥지름 8.7cm



 


청자 음각 초화문 화형 탁잔

고려 12세기, 전체 높이 9.4cm, 지름 6.9cm, 탁: 높이 4.4 지름 14.7cm, 바닥지름 7.9cm






청자 석류형 연적

고려 12세기, 개성 출토, 높이 8.0cm, 지름 7.9cm

개경의 상류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자연적으로  탐스럽게 과장된 석류를 얼싸안고 있는 것은 원숭이다.





청자 상감 투각 귀갑문 화장 상자 

고려 13세기, 높이 12.1cm

부인용 화장 그릇으로 추정되는 상자이다. 고려시대 나전칠기 경상의 겉 모양과 무늬를 닮은 이 상자에는 작은 합들과

청동 거울, 은제 바늘통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투각,  상감, 등의 기법으로 거북등무늬, 여의두무늬, 번개무늬,

덩굴무늬 등을 표현하였다.





청자 양각 모란 당초문 타호

고려 12세기 개성 출토, 높이 7.0cm, 입지름 15.3cm, 바닥지름 6.0cm





은제장도초

고려 12~13세기, 길이 21.8cm





은제 금도금 합

고려 12세기 개성 출토,

상 : 높이 2.6cm, 지름 3.3cm.  하 : 높이 6.1cm, 입지름 7.6cm





청동 정병

고려, 부여 부소산 출토, 높이 37.0cm, 바닥지름 7.7cm, 몸통지름 11.7cm





             


은제 약합

고려 12세기, 전체길이 18.5cm, 두께 1.5cm





은제 금도금 침통

고려 개성 출토, 상: 길이 7.6cm. 하: 길이 7.3cm





바둑알

고려 개성 출토, 지름 1.4cm

바둑 두기는 거문고 타기와 활쏘기, 말타기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 상류층의 필수 교양이었다.

당시 상류층이 실제로 사용하던 것임에 틀림없다. 모두 흰색이다.



송과의 관계

10세기 들어 중국 동북방에 거란이 대두한 가운데, 중국 대륙 중심부에는 오대십국의 혼란을 수습하며 송이 건국되었다.

(고려 광종 11년, 960). 송은 거란의 군사적 압박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통교한 반면, 고려는 선진 문물의 수용이

주목적이어서 거란이나 금의 동향에 따라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다. 회복하기를 반복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다.


고려는 송의 각종 전적과 예악 · 의학기술을 들여와 고려의 인쇄문화와 의료 및 각종 학문 · 사상과 의례를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송의 도자기 · 비단 · 약재 · 악기· 차 · 향료 · 상아 · 물소 뿔 등을 수입하고

금 · 은 · 구리 · 인삼 · 잣,  동물 가죽, 마포, 화문석, 나전칠기, 종이, 금은 세공품 등을 주로 수출하였다.

당시 예성강구의 벽란도는 각국 사신들은 물론이고 송 상인들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상인 및 일본 등지의

선박들까지 드나드는 국제 교역 항구로서 제 몫을 다하였다.







개성 출토 중국 거울

"호주" 명 동경 "湖洲"銘銅鏡. 송, 개성 출토, 지름 22.2cm, 두께 0.5cm





개성 출토 중국 거울

"항주" 명 동경.  송, 개성 출토, 세로 12.7cm, 가로 12.7cm, 두께 0.3cm





고위 관리 무덤에서 나온 송나라 동전들






개성 출토 송나라 도자기




청백자 참외모양 병

송. 경덕진요. 개성 출토, 높이 17.6cm, 입지름 8.5cm, 굽지름 8.0cm






청백자 화형 완

송. 경덕진요. 개성 출토, 높이 4.4cm, 입지름 13.5cm, 굽지름 3.6cm





청백자 연판문 합

송.월요. 개성 출토. 높이 10.2cm, 굽지름 7.1cm





청백자 사자 침枕

송. 경덕진요. 개성 출토. 높이 12.4cm, 너비 18.2cm





청백자 주자 승반

송. 경덕진요. 개성 출토. 전체높이 17.0cm, 굽지름 6.3cm, 승반: 높이 11.4cm, 굽지름 9.5cm







대방광불화엄경소 권제30

고려 14세기. 보물 제1124호. 세로 32.3cm, 가로 10.8cm, 목판본.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에 대한 정관의 해석과 설명을 송나라의 정원이 각 본문 아래 기록하여 엮은

책으로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그 목판은 정원이 고려로 가는 상인을 통해 의천에게 전달한 것이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유학할 당시

정원과 깊이 교유하면서 송나라에 없던 불교 전덕들과 함께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은 고려 · 송 두 나라의 대표적 고승

들을 통해 이루어진 불교 교류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인쇄 상태로 보아 실제 인쇄 시기는 14세기로 추정된다.




거란과의 관계

10세기 초 내몽골이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일어난 거란은 송이 통일한(960) 중원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고려가 송과 통교하고 자신들을 적대하자 송의 배후를 치기 위해 고려를 침략해왔고(거란의 1차 침입, 고려 성종 12년, 993),

고려는 서희의 활약 속에 송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강도6주[압록강 남쪽의 6주]를 얻는 큰 성과를 거두며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국제 교역과 군사상 요충인 강동6주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거란은 11세기 초에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다시

침략 해왔고(거란의 제2차 · 제3차 침입) 고려는 양규 · 강감찬 등의 활약 속에 이를 격퇴함으로써 강동6주를 확고한 고려 영토로 만들었다.


고려인들이 불력佛力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이른바 초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전쟁을 끝내고 국교를 맺은(고려 현종 10년, 1019) 두 나라는 이후 약 1002년 간 평화 속에 교류하였다.




탑을 세운 뜻



흥국사 석탑기 탁본


흥국사 석탑에 새긴 탑기를 탁본한 것이다.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948~1031)이 거란과 국교를 맺은 2년 뒤인

현종 12년(1021)에 건립한 탑으로, 오래오래 나라가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명장 강감찬의 우국충정이 새겨져 있다.

거란과는 조공을 통한 평화로운 사대 외교를 수립한 상태임에도 이 탑기는 아직도 송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다.






초조본 유가사지론初雕本瑜伽師地論 권제32

고려 11세기 전반. 국보 제272호. 세로 28.8cm, 가로 448.0cm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제32권을 당시 경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의 가호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하였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란 요가 수행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문제를 다룬 글로서, 인도의 미륵이 짓고 당나라의

현장(602~664)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경竟, 경鏡 등 송나라 태조의 할아버지 이름 경敬자와

 발음이 같은 글자는 한 획씩 생략하였다.





거란 문자가 새겨진 동경

거란. 지름 15.7cm, 두께 0.6cm


거란 소자小字가 새겨진 청동거울로, 고려와 거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란 소자는 거란 태조가 직접 만들었다는 거란 대자大字와 달리 표의문자가 아니라 음절 단위의 표음적인 요소가 있다.

1125년 거란이 멸망하면서 사용이 쇠태해갔고, 금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었다.

 기억하기가 어려워 일반인 보다는 황실의 공문서나 비문 등 제한된 경우에만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겨진 자료가 적어서 거란 소자를 제대로 해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수명장수를 바라는 문자가 새겨진 거란자명 동경


거울 꼭지를 중심으로 네모난 테두리 안쪽에는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장수복덕長壽福德"으로 읽히는 거란 문자 네 개가 양각되었다.

이 글자들과 가장자리 사이에는 넝쿨무늬가 얕게 양각되었다. 오늘날 같은 문자, 같은 모양의 거울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거란에서 많은 수량을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출토된 곳으로 보아

거란에서 수입되어 실제 개경 주민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진과의 관계


고려의 북쪽 변경에 살면서ㅓ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은 11세기 말부터 완안부를 중심으로 급격히

세력을 키우더니 거란이 쇠퇴하던 12세기 초에 고려의 동북방을 강력히 위협해왔다. 고려 숙종 때 여진 정벌에 나선 윤관은

한때 여진을 격퇴하며 변경의 요지에 9개 성을 쌓기도 하였으나, 9성의 방어가 워낙 어려운데다 공격을 병행한 여진의 끈질긴

9성 환부 요청에 따라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세력이 더욱 커진 여진족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더니(1115), 독이어 거란을 멸망시키고(1125) 송까지

양쯔강 이남으로 밀어내리며 중국 대륙을 장악하였다(1127). 게다가 금은 과거 자신들이 조공하던 고려에 대해 거꾸로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논란 끝에 이자겸의 현실론을 따라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두 나라는 금이 몽골에게 멸망하기까지(1234)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





척경입비도 拓境立碑圖

조선 17~8세기. 화가 미상. 세로 41.cm, 가로 31.0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조선후기에 제작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跡島帖』(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이나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은 그림첩이다. 제작 시기는 17~18세기로 추정된다.) 에 들어 있는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이다.

이 그림은 고려 예종 2년(1107)에 윤관(?~1111)과 오연총(1055~1116)이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9성을 쌓고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일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여진의 집요한 반환 요청과 잦은  공격으로 9성을 지켜내기가 어려워지자 결국 돌려주고 말았다.




개성 출토 금나라 도자기들



백자흑화 모란당초문 병

금. 자주요. 개성 출토. 높이 20.3cm, 굽지름 10.2cm





上, 백자 파어문 발

금. 정요. 개성 출토. 높이 9.1cm, 입지름 21cm, 굽지름 10.2cm

下, 백자 화당초문 대접

금. 정요. 개성 출토. 높이 7.6cm, 입지름 19.8cm, 굽지름 6.3cm









경원 여진자비慶源女眞字碑

함경도 경원 지방에 중국 금나라 사람들이 세운 비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여진 문자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 지역 오룡초사라는 절의 건립 및 불상 제작 과정, 시주자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여진 문자와 여진 인명, 지명, 관명 및 어휘와 형태소들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著 『고려시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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