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를 가다
(2편)
무신정권
12세기에 들어 고려사회는 귀족적인 문화가 무르익은 한편에서, 농민의 유망과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이어지는 등
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벌귀족의 견제 차원에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의종이 측근에 치우쳐 향락과 실정을 거듭하자, 평소
차별 받았던 무신들과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의 불만이 무신정변으로 폭발하였다(의종 24년, 1170). 무신정권 초기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주요 관직을 독점하며 사병을 길러 권력투쟁을 벌였고, 지방에서는 민생 악화 속에 농민과 천민이 대규모로 봉기
하였다. 이런 혼란을 마무리한 것은 최충현이었다. 개혁 방안으로 봉사10조를 제시한 최충헌은 농민 봉기의 진압에 적극 나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으나, 스스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기르는 과정에서 애초 표방한 개혁은 흐지부지 되었다. 13세기 초에
최충헌의 권좌를 이은 아들 최우는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는 등 최충헌 때처럼 독단적으로 정치를 운영하였으나,
한편으로 문학적 소양과 행정 능력을 갖춘 문인들을 적잖게 등용하면서 무신 일변도의 정치 운영을 일부 보완하기도 했다.
아래는 최충헌 가족을 위한 호신용 경전과 경갑이다.
소자본 불정심관세음보살 대다라니경 합각본 小字本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合刻本
고려 희종 2년(1206)~고종 6년(1219). 보물 제691호.
경갑: 길이 5.3cm, 두께 0.5cm, 불경: 전체 길이 27.5cm
"행군만호" 명 청동인 "行軍万戶" 靑銅印
고려 강종 2년(1213) 충북 중원 가금면 가흥리 출토. 길이 6.5cm, 너비 5.5cm
군사 지휘관의 직임인 만호의 도장이다. 도장 면과 옆 면에 각기 "행군만호방자호지인行軍万戶傍字号之印"이라 새겼고,
윗면에는 "숭경2년3월"이라 새겨 놓았다. 숭경 2년(1213년, 강종 2)은 도장이 제작된 해일 것이다. 만호는 그동안 충렬왕
(재위 1274~1308) 때 설치된 것으로 보아 왔으나, 이 도장은 그보다 훨씬 앞선 13세기 초
최충헌 집권 시절에 이미 만호라는 직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장양수 급제첩 張良守及第牒
고려 희종 1년(1205). 국보 제181호. 세로 45.0cm, 가로 90.3cm, 마지麻紙, 울진장씨대종회 소장
최충헌 정권이 확고하던 희종 1년(1205)에 장양수에게 발급된 과거 급제 증명서로서, 현존 과거 관련 문서 중 가장 오래되었다.
고시관인 지공거 대신 재신들이 기록된 점과 당시 과거 기록 등으로 볼 때, 이 문서는 문과 급제를 뜻하는 예부시 급제 홍패가
아니라 국자감시의 급제첩일 가능성이 크다. 맨 뒤 재신들 중 "파병부어사대사 최"는 아름 아닌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후에 자신을 죽이려 한 희종을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제숙공처" 명 청동 저 "濟肅公妻" 銘靑銅 著
고려 13세기. 청주 명암동 고려 무덤 출토. 길이 27.5cm, 너비 0.5cm,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제숙공의 부인되는 사람이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점각되어 있다.
"단산오(옥)"명 묵 "丹山烏(玉)" 銘墨
고려 13세기. 청주 명암동 고려 무덤 출토. 길이 11.2cm, 너비 4.0cm, 두께 0.9cm,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 먹이다. 먹집게로 집은 흔적이 있고 아래쪽이 갈려 있어서,
죽은 이가 생시에 쓰던 먹임을 알 수 있다. 파도무늬로 둘러싸인 가운데에 "단산오(옥)이라 양각하였다.
조선시대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충청도 단양의 특산 먹 가운데 최상품을
"단산오옥"[단산은 단양, 오옥은 먹]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 먹의 출토로 "단산오옥'이란 이름이
고려시대 부터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 결사結社 운동
무신정권 시절 불교계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 지방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지눌의 수선사修禪社로 대표되는 결사 운동이 그것이다. 이는 종래의 불교가 불교 본연의 실천이나 지방사회의 현실과
멀어진 데에 대한 불교계의 자기반성이었다. 그 중심에 선 지눌은 경전 공부와 창선이 본래 하나라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
등을 말하면서, 모든 승려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두루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여러 주장은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을 통합하는 조계종의 성립으로 나아갔다. 수선사는 제2조 혜심 때에 이르러 치고 권력자 최우와 유학자 관료들과도
연결되며 크게 발전하였고 참회수행을 강조한 요세의 백련결사와 더불어 교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문염송집 禪門拈頌集
고려 고종 31년(1244). 세로 26.3cm, 가로 16.0cm
수선사修禪社 제2조 혜심이 엮은 공안집이다. 혜심은 불경이나 선문 조사의 어록에서 공안公案 1,125측을 뽑고 그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 염과 찬송을 붙여 이 책을 만들었다.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몽골과의 전쟁으로 그 초판이 불탄 뒤 347측을 더하여 고종
31년(1244)에 대장도감 남해분사에서 새로 펴냈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판되었다.
혜심고신 彗諶告身
고려 고종 3년(1216). 국보 제43호. 세로 35.0cm, 가로 352.2cm, 비단. 송광사 소장.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수선사 제2조 혜심(1178~1234) 사마시에 합격한 유학자 출신으로 수선사의 제2조이다. 그에 이르러 수선사는
무신정권 최고 권력다 최우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을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일명 '고종제서'라고도 한다.
현존 고신[임명장]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승려 인사 및 국가행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대선사는 선종 승려의 최고 법계로 왕사 또는 국사가 될 자격을 지닌다.
팔만대장경과 대몽항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새로운 강자가 된 몽골이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며 고려를 압박해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전쟁을 불사하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고종 19년, 1232). 이후 육지의 백성들은 강화도 정권을 떠받치는 어려움 속에서도 농민 · 천민 할 것 없이
치열하게 몽골군과 맞섰다. 전쟁 과정에서 2세기 전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새긴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자 최씨 정권은 새로운
대장경을 새겼다. 부처에 힘입어 몽골군을 격되하려는 염원에서였다. 약 16년에 걸쳐 집권자 최우로부터 진사 · 승려 ·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조판된 대장경은 그 경판이 무려 8만 여 장에 이른다 하여 흔히 팔만대장경[일명 재조대장경,
고려대장경]이라 한다. 그러나 오래도록 지속된 몽골과의 전쟁은 몽골군의 강력한 압박과 최씨 정권의 붕괴로 사실상 종식 되었고
(고종 46년, 1259), 뒤이은 무신정권들도 무너지면서 원종과 다수 문신들의 희망에 따라 개경 환도가 이루어졌다.(원종 11년, 1270).
이에 최씨 정권의 무력 기반이던 삼별초는 환도에 강력히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진도와 제주도로 그 거점을 옮겨가면서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역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고려와 원[몽골]의 연합군에 진압되고 만다(원종 14년, 1273).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조선 후기. 세로 33.2cm, 가로 22.6cm, 목판본
저명한 문인지자 관료인 이규보(1168~1241)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자체가 뛰어난 문학 작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9고종 24년, 1237)도 그러한 글 중의 하나로서, 대장경을
새겨 그 공덕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겠다는 고종과 신하들의 의지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고려첩장불심조조 高麗牒狀不審條條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 1271년. 세로 32.9cm, 가로 49.7cm, 복제품 (원품:일본대학 사료편찬소 소장)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가 고려 원종 12년(1271)에 진도 삼별초 정부가 보내온 외교 문서[첩장]를 3년 전의 문서란 원종 8년 (1267)에
고려 정부가 발송한 「고려원종국서」로 추정된다. 3년 전의 문서란 원종 8년(1267)에 고려 정부가 발송한「고려원종국서」로 추정된다.
「고려원종국서」는 몽골과이 통교를 일본에 권유하는 것이어서 몽골에 맞서 싸운 삼별초의 문서와는 그 내용이 판이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이 문건을 작성했다는 것은 일본이 두 문서의 발송 주체가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파편 이 문건은 현재
남아 있지 않은 "고려첩장". 즉 삼별초 외교 문서의 내용을 일부 짐작하게 한다. 예컨대 일본에 대한 몽골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경고라
든지, 표류인 등의 송환이 원만히 이루어지던 고려-일본 간 우호 관계에 대한 언급, 그리고 몽골의 위협에 즈음한 연대의 필요성과
긴급한 군사적 지원 요청 등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고려 고종 18년(1241) 세로 34.5cm, 가로 12.0cm, 목판본
석가모니의 열반에 대해 말한 불교 경전으로, 중국 북량이 인도 승려 담무 참이 번역한 것이다. 현존 열반경류 경전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완비된 이 경전은, 여래의 법신은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가 없으며,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유물은 고종 28년 (1241)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반열반경의 유일본으로, 각 경판 맨 앞의 판수제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권차券次, 장차長次, 함차函次를 표시하였다. 장차의 단위는 "장丈"자를 쓴 초조대장경판과 달리
"장張"자를 썼다. 함차 아래에 쓴 것은 경판을 직접 새긴 각수의 이름이다.
경률이상 經律異相
고려 후기~조선 전기. 보물 제1156호. 세로 31.0cm, 가로 12.3cm, 목판본
중국 양나라의 승려 승민 · 보창 등이 편찬한 일종의 학습용 불교 사전으로, 고종 30년(1243)에 남해의
고려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팔만대장경판을 후대에 찍어 인출한 것이다. 각 판 맨 끝의 작은 글씨는 본문 내용의 출전을 밝힌 것이다.
불사佛事와 발원發願
고려인들은 신선이나 하늘신을 모시며 복을 빌듯이 불보살에 대해서도 여러 불사를 통해 정성과 믿음을 표현하며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다. 인연 있는 사찰을 위해 불탑을 세우거나 범종과 반자[쇠북], 향로, 촛대, 경자磬子와 같은 불구류를 시주하는 일,
불화의 제작이나 불경의 인쇄, 사경의 제작에 참여하는 일 등이 모두 발원을 위한 훌륭한 불사들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불사가 수도 개경 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서, 왕족이나 고위 관료뿐만 아니라 하급 관료나 군인, 향리까지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계층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정우 12년" 명 반자 "貞祐十二年" 銘飯字
손씨 성의 향리들과 품관이 이의사라는 절에 시주한 반자[쇠북]이다. 가장자리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전쟁 종식 등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반자가 영동군 가곡리에서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반자를 시주한 이들은 토성으로
손씨가 있던 당시 영동현 소속의 풍곡부곡 또는 앙암부곡의 향리와 그곳 출신의 품관일 가능성이 크다.
반자에 새긴 발원문
"을사" 명 동종 "乙巳" 銘銅鐘
고려 명종 15년(1185) 또는 고종 32년(1245). 제천시 인근 출토 추정.
전체높이 62.2cm, 높이 50.3cm, 입지름 44.0cm
재상직을 겸직한 상장군 조 아무개가 부인과 함께 발원, 시주한 종이다.
우리나라 범종의 형식을 비교적 잘 갖춘 이 종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 중생의 편안함 등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상장군 조"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종의 모양이나 발원문에 나타나는 관직 명칭 등으로 볼 때,
종을 시납한 "을사"년은 명종 15년(1185)이거나 고종 32년(1245)에 해당한다.
청동 은입사 향완 靑童 銀入絲 香椀
고려 12~14세기. 높이 29.5cm, 입지름 21.0cm, 바닥지름 14.6cm
불단에 안치해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한 고려시대 향완으로 은입사 기법으로 화려한 무늬를 장식하였다.
범자와 함께 용, 여의두 · 구름 · 번개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기면 전체에 은입사로 표현하였다.
금강령 金剛鈴
고려 12~13세기. 진주시 남성리 출토. 높이 20.4cm,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몸통 면에 갑주와 창, 활, 도끼, 검 등을 찬 무사상 6구가 양각되었고, 몸통의 위쪽 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금강저 金剛杵
고려 12~13세기. 진주시 남성리 출토. 길이 20.1cm,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경자에 새긴 글
"대정20년" 명 청동 경자 "大定二十年" 銘靑童磬子
고려 명종 10년(1180) 진주시 남성리 출토. 높이 15.0cm, 입지름 30.0cm, 바닥지름 19.8cm,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진주의 조문기관詔文記官들이 명종 10년(1180)에 장흥사라는 절에 시납한 경자로 안쪽 면에 먹물로 범문이 쓰여 있고,
가장자리에는 시납에 대한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조문기관은 지방관의 직접적인 행정 관할을 강화하기 위해 고려 중기에
신설된 향리직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 경자의 명문을 통해 그 설치 시기가 종래 알려진 고종 17년)(1230)보다
최소 50년 앞서게 되었다. 명문에서 경자를 "경자鏡子"로 표기한 점도 특이하다.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권 제20
고려 13~14세기, 보물 제1083호. 세로 31.0cm, 가로 12.0cm, 목판본
당의 승려 반야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이다.
보현보살의 권유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구도 과정을 다루었다. 표지는 감지紺紙이다.
감지금니묘법연화경 紺紙金泥妙法蓮華經 권 제7
고려 공민왕 15년(1366). 보물 제1138호. 세로 30.7cm, 가로 11.0cm
전농직장(전농사의 하급관원) 권도남 등이 죽은 아버지와 선조들의 명복을 빌며 공민왕 15년(1366)에 봉정사에 봉안한 사경이다.
『묘법연화경』권 제7을 감색의 종이에 금니로 배껴 썼는데, 끝부분과 사성기寫成記에 비해 본문 앞부분은 상대적으로
금니 빛깔이 바래고 글씨 획의 일부가 희미하다. 이것으로 볼 때, 권씨 일가는 기존의 사경을 구하여
본문 뒷부분을 보충하고 자신들의 사성기를 써서 봉정사에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오백나한 제92 수대장존자 五百羅漢第九十二守大藏尊者
고려 고종 22년(1235). 세로 64.6cm, 가로 42.2cm, 비단에 색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
고려 14세기. 보물 제1286호. 세로 100.3cm, 가로 52.5cm, 비단에 색, 용인대학교 박물관 소장
도교
고려시대에는 정부 주도 하에 왕실과 나라의 복을 빌고 재난의 소멸을 기원하는 의례 중심의 이른바 과의도교가 크게 성행하였다.
수도 개경에는 복원궁 · 대청관 · 구요당 · 신격전 · 청계배성소와 같은 도관道觀[도교 사원]이 있어서 도사들이 출퇴근하며 제사를 담당하였다.
도사가 거향한 제사는 십일요 등의 별에 대한 재초齋䩌, 태일 · 삼청 등의 천계에 대한 재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도교는 불교처럼 조직적인 대중 종교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경신과 같은 수명 연장이나 복을 비는 도교적 습속을
지켜나가는 정도였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도가 사상과 도교적 양생수련법으로 심신을 다스리며 신선과 같은
탈속의 경지를 지향하는 풍조가 많았다.
청자 도석인물형 주자 靑磁道釋人物形注子
고려 12세기. 대구 달성 공산면 내동 출토. 국보 제157호. 높이 28.0cm, 바닥지름 19.7cm
두 손에 선도仙桃를 받쳐 든 인물 모양의 주전자로 의복과 봉황이 장식된 관, 선도를 받쳐 든 모습 등에서 이 인물은
도사이거나 도교 전설에 나오는 서왕모일 것으로 추정된다. 서왕모는 도교의 대표적 여신선으로서 중국 한 무제에게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물의 머리 위에 물을 넣는 구멍이 있는데 뚜껑은 없어진 상태이다.
등 뒤에 손잡이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주전자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나,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청자 "십일요전배" 명 접자 靑磁 "十日曜前排" 銘楪子
고려. 높이 3.0cm, 지름 13.7cm
도교 제사에 사용하던 제기이다. 그릇 바깥 면에 "십일요전배"라고 새겨져 있다. 십일요란 월화수목금토를 포함한
11개의 별자리를 가리킨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나라의 복을 빌고 재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십일요을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도교 제사를 많이 지냈다. 이러한 제사를 일컬어 재초齋䩌라 하였다.
왕이 별자리 운행의 정상화를 기원하는 글
일관日官(천문과 날씨를 관측하는 관리)이 변고를 관찰한 보고를 받아보니, 별 들의 운행이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여러번 말하나이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닦고 반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진실로 깊이 자신을
책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재앙을 없애버리겠습니까? 이에 정성을 다하여 특별히 법도를 엄숙히 하고 도사들을
모아 경전의 신령스런 글월을 외나이다. 바라건대 굽어 흠향하시고 도움을 더해 주셔서 삼신(해, 달, 별)의 궤도가
다시는 잘못되는 재앙이 없이 사방이 태평하며 영화로운 경사를 이루게 하소서
- 『동국이상국집』권39, 초소 십일요소재도량문
청자 "소전색" 명 잔 靑磁 "燒錢色" 銘盞
고려. 개성 출토. 높이 5.8cm, 지름 7.9cm
고려 때 도교 제사를 담당하던 소전색이라는 관청에서 쓰던 잔이다.
소전색은 복원궁 · 구요당 · 대청관과 같은 도교 사원들과 함께 조선 건국 직후 폐지되었다.
"황비창천" 명 항해도문 동경 "煌丕昌天"銘航海圖文銅鏡
송~금, 또는 고려. 개성 출토. 지름 24.2cm, 두께 1.7cm
개성에서 출토된 청동거울로, "황비창천"이라는 명문과 함께 범선과 일상, 월상, 용 등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들 무늬는 바다의 神山을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황비창천"이란 말은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이란 의미로서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종류의 거울은
송~금대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다량 수입 되었고 고려에서 이들을 본떠 만들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청자 양각 연당초문 표형 병 靑磁陽刻蓮唐草紋瓢形甁
고려 12세기. 높이 39.3cm, 입지름 2.5cm, 몸통지름 19.4cm
조롱박 모양의 몸체 전면에 연꽃 넝쿨무늬를 양각하고 굽 위쪽에도 양각으로 두 겹의 연꽃잎무늬를 둘렀다.
몸체 양면에 각각 마름꽃 모양의 창을 내고 그 안에 시구를 흑상감하였다.
이 시는 도교에 심취했던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657-744)의 주흥酒興을 이 병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 내용이나 병의 생김새로 보아 술병으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내세관
고려시대 사람들은 불교나 도교, 민간신앙 등을 넘나들며 죽은 이를 축복하였다.
불교 승려의 장례에서 도교적 장례 풍속의 하나인 매지권이 사용되고, 거기에 서왕모를 비롯한 도교 신선과 사신四神, 하늘신, 땅의 신 등이
등장하는 것이나, 거창 둔마리무덤 벽화의 천녀처럼 도교적 존재가 고려 나름의 토속화한 모습으로 악기를 불며 죽은 이를 천계로 인도하는 것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성 수락암동 벽화 무덤과 파주 서곡리 권준 무덤, 안동 서삼동 벽화 무덤 등에 보이는 십이지신상이나 성수도, 석관에 새긴 사신도와 십이지신상, 비천상 등도 모두 도교나 불교, 민간신앙 등의 구분을 넘어 다양한 종류의 신들이 죽은 이를 보살피고
수호해주리라는 고려인의 소박한 믿을 표현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세관의 바탕에는 유교 · 불교 · 도교 등의 공존 속에 조화를
도모하던 고려인들의 여유롭고 다채로운 정신세계가 놓여 있었다.
사신문 석관 四神文石棺
고려. 석관石棺
통일신라시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식 하장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상류층에 널리 퍼졌다.
이때 유골을 모시기 위해 석관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 석관에는 바깥 면에 사신이나 십이지신, 비천 등을 주로 새기고,
안쪽 면에는 꽃이나 새 등의 동식물,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 등을 많이 선각하였다.
간혹 석관 주인공의 묘지명을 안쪽 면에 새기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설
고교 및 선종 불교와 더불어 고려시에 와서 크게 성행한 것이 풍수지리설이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속에 흐르는 기기가 사람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 산천의 형세를 잘 살펴 도읍이나 사찰, 주거, 분묘 등의 위치를 정할 때 많이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온조왕이 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고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고유한 풍수지리적 관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보다 체계화된
풍수지리설은 통일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다녀온 선승들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선승 도선(827~898)은 이러한 풍수지리설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사찰이나 이궁의 건설, 천도 논의 등에서 도선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선각국사 도선 초상 先覺國師 道詵 肖像
조선 순조 5년(1805) 도일비구道日比丘 그림.
보물 제1506호. 세로 132.5cm, 가로 106.0cm, 비단에 채색, 선암사 소장
본래 화엄종 승려였던 도선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의 문하에서 선종으로 개종하였고,
이후 전국 산천을 돌아다니며 당시 선종과 함께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서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도선비기道詵秘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등은 모두 도선의 저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초상화는 조선 순조 5년 승려 도일비구가
대각국사의 초상화와 함께 그린 것으로, 서안과 발받침대, 돗자리 등의 형상이 다소 사실적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안정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원 간섭 하의 고려
몽골과의 전쟁을 끝낸 고려는 이후 80여 년 간 원[몽골]의 간섭을 받았다. 고려 국왕은 어린 세자 시절을 원나라 대도大都에서보내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국왕의 호칭이나 묘호를 비롯한 각종 관계가 격하되었고,왕위 교체에 대해서도 원나라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 간섭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일반 백성들이었다.이들은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일본 침략에 필요한 선박과 식량, 무기 등을 장만해야 했고, 군사와 선원으로 동원되기까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년 원나라에 바쳐야 하는 막대한 양의 금 · 은 ·
모시 · 마포 · 인삼 · 잣 · 매 등 특산물도 바로 백성들이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수시로 공녀를 차출하여 원나라에 보내는 제도 또한 고단한 고려
백성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한편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인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풍속과 언어, 학문 등 문화적 교류도 함께 이루어졌다.
몽골의 용어와 관제, 인명, 몽골식 머리모양과 복장 등 이른바 몽고풍이 고려 사회에 성행하였고, 마찬가지로 고려의 의복과 신발 · 쓰개, 장신구 등도 원나라에서 유행하여 고려양이라 일컬어졌다. 특히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도입한 성리학과 라마교, 『농상집요』등의 농서,목면, 화약 제조 기술, 수시력 등은 이후의 한국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몽고습래회사 蒙古襲來绘詞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 1293년. 세로 40.3cm, 전체 길이 2111.0cm.
복제품(원품: 일본 궁내청 소장)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일본 가마쿠라 바쿠우의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작성한 것으로, 고려 · 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것이다.
다케자키 스에나가의 활약상을 부각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어서 자료로서의 한계는 있지만, 당시 전투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전술과 무기, 복식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청자상감 금채수하원문 편호 靑磁象嵌金彩樹下猿文扁壺
고려 13세기 말. 개성 고려 궁궐터 출토. 높이 25.5cm, 몸통지름 19.8cm, 바닥지름 9.5cm
법지 法旨
고려 1275~1308년. 보물 제1376호. 세로 77.1cm, 가로 51.2cm. 송광사 소장
개성 출토 원나라 도자기들
백지흑화 운룡문 병 白地黑花雲龍文壺
원, 자주요. 개성 출토. 높이 36.5cm, 입지름 6.8cm, 굽지름 10.6cm
황유 칠보문 반 黃釉七寶文盤
원, 자주요, 개성 출토, 높이 12.4, 입지름 42.9cm, 밑지름 33.5cm
청자 연판문 완 靑磁蓮辦文碗
원, 용천요, 개성 춡토, 높이 6.8cm, 입지름 16.7cm, 굽지름 5.0cm
제왕운기 帝王韻紀
고려 말~ 조선 초, 보물 제1091호, 세로 27.2cm, 가로 14.0cm, 삼성박물관 소장
고려 후기의 문인 이승휴(1224~1300)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문으로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승휴는 우리나가가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생활 영역을 지녔음을 분명히 하는 한편,
단군 조선을 한국사의 출발점에 올려놓고 중국 고대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들은 당시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다져진 지식인의 자의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3세기 말에 처음 간행되었고, 이 판본은 고려 말~조선 초의 것이다.
성리학의 도입
원나라에서 왕[충렬왕 · 충선왕]을 모시던 안향 · 백이정 등의 관료들은 주자성리학[이하, 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성리학을 고려에 본격 소개하였다. 이후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 대도로 간 이제현은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이라는 서재에서 저명한 원나라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당시 고려 학자들이 성리학의 도입과 연구에 열심이었던 것은, 성리학이 종전의 유학과 달리 우주와 인간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논리체계를 가진 새로운 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리학은 지나치게 관념론에 빠진 불교나 미신적 기복 신앙 또는 개인적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