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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이집트 미술



이집트 미술


지은이 : 수지 호지 Susie Hodge

감수자 : 크리스티나 릭스 Dr. Christina Riggs

옮긴이 : 서남희





파라오의 영원한 삶


<카프레 좌상>

 BC 2520-2492년, 고왕국 제4왕조, 섬록암.

기자의 카프레 피라미드의 계곡 신전에서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세 시대로 크게 나뉘며, 각 시대는 (한 가문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여러 왕조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시대인 고왕국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일로 시작해서 내전으로 몰락했다. 중왕국 때 질서를 회복했지만 내전으로 몰락했다. 중왕국 때 질서를 회복했지만 내전으로 다시 혼란해졌다.신왕국은 이집트가 가장 강력했던 시대로 수도는 테베였다.


쿠푸왕과 헤누트센 왕비의 아들인 카프레는 이복형인 제데프레의 뒤를 이어 30여 년간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의 시대는 위대한 영광을 떨친 시대였다. 그가 기자의 피라미드 세 기 중 두 번째를 건설했을 때, 그의 계곡 신전과 피라미드 신전에는 수많은 인물상들이 놓여 그곳에서 치러진 의식들에 쓰였다. '카Ka'(고대 이집트인이 생각한 사람의 혼) 조각상들은 초상 중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저승으로 가는 배


<모형 배>

BC 1985년경, 제소와 채색한 나무 · 아마포끈 · 아마폰,

데이르 엘바흐리 부근 메케트레의 무덤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주인을 따르는 내세의 시종들


<공물을 나르는 여인상>

BC 1985년경, 나무 · 안료 · 제소, 서 테베의 메케트레의 무덤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모형은 서 테베에 있는 메케트레 대신의 무덤에서 나온 한 쌍 중 하나다.

 약 4000년 동안 봉해져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이 무덤의 묘실은 1920년 세상에 드러났다.

이 시종은 한 손으로 살아 있는 오리의 날개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에 인 음식 바구니가 기울지 않게 잡고 있다.







신전을 장식한 선전물


<전투 장면 파편>

BC 1400-1390년경, 사암에 채색, 투트모세 4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

테베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원전 1400년경에 투트모세 4세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을 때, 천 년 전에 카프레 왕을 위해 만든 기자의 스핑크스는 목까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투트모세의 통치기는 9년에 불과했지만, 부유한 번영기이자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대규모 전투 장면이 신전 외부에 조각된 것은 모순 같아도, 이는 왕이 혼돈과 무질서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상징했다. 넘어진 군사들의 끝이 뾰족한 턱수염과 콧수염은 그들이 아마도 현재 시리아 지역인 서아시아 출신임을 알려 준다. 패배한 적들을 보여 주는 이 부조는 신전 외벽 장식의 모티프로 적절했다. 왕이 약한 세력을 정복하고 우주적 질서인 '마아트'를 유지할 수 잇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패배한 적들로 부터 빼앗은 보물은 이집트 병사들에게 분배되곤 했다. 용감한 행동은 토지와 묘지 터, 금 목걸이나 훈장 등의 선물로 보상받았다.










애절한 노랫소리의 주인공


<아멘호테프 3세의 거상>

BC 1375년경, 석영질 사암, 나일 강 서안, 테베, 현재 룩소르


제18대왕조 시대에 다양한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즐은 이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늘 그랬듯이 왕들은 신전 건축을 관장했는데, 특히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누비아의 주요 거점마다 신전을 건설했다. 진흙벽돌로 지어진 고왕국과 중왕국 신전들은 거대한 석회석이나 사암 덩어리들로 대체되었고, 신전에 들어가려면 양옆에 높은 기둥들이 늘어선 거대한 통로를 통과해야 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테베에 이제까지 건설된 것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장제전을 지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신으로 숭배받았을 것이다. 이곳의 유적 중 현재는 바깓문을 지키는 거대한 조각상 두 개만이 남아 있다. 왕의 권능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집트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크기와 위치 덕에 이 거상들은 멀리서도, 심지어 신전에 들어서는 것이 금지된 사람들에게도 보였다. 자연과 고대의 여행자들에게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지금도, 거대한 두 석상은 여전히 나일 강과 떠오르는 해를 향해 동쪽 방향으로 앉아 있다. 두 석상 모두 아멘호테프 3세를 상징하지만,

북쪽 석상(사진 오른쪽)은 그의 어머니인 무템비아와 함께 있는 파라오의 상이고, 남쪽 석상은 왕비인 티위와 딸 한 명과 함께 있는 파라오의 상이다. 이 여인들은 하늘의 여신인 하토르를 상징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석상들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며, 결국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멤논왕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이 신전 전체를 그의 이름을 따서 멤노니엄이라고 불렀다.


기원 전 27년에 지진이 일어난 후, 이 석상들에 균열이 생긴 탓에 아침마다 오른족 석상에서 애절한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기온과 습도가 오른 탓에 나던 소리로 추측한다. 이 '노래' 소리를 들으면 행운이 생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사비나 황후를 비롯해 수백 년 동안 이 석상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9년에 로마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때 이 석상들을 보수하려다가 뜻밖에 이 상들이 영원히 침묵에 잠기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세의 가족 초상화


<습지의 새 사냥>

BC 1356년경, 건식 프레스코, 테베의 네바문의 무덤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고위 관리였던 네마문의 무덤에서 발견된 여러 벽화 중 하나다. 고대 이집트 사회는 넓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과 상인, 예술가, 문관으로 구성된 중산계급, 그리고 노예로 이루어졌다. 네바문은 귀족계급이었다. 기원전 1356년경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무덤은 고인이 사후 세계로 순조롭게 갈 수 있도록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전형적인 신왕국 양식으로 그려져 이전 시대의 회화보다 덜 엄격 하지만 고인을 위한 사후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신왕국은 예술적으로 융성했던 시기로, 벽화와 조각이 더 많이 제작되었고 새로운 기법들도 시도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연회와 네바문의 소유지에 있는 거위와 마리수를 조사하는 서기의 벽화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이상화된 이미지로, 이승의 혼돈을 가라 앉히고 질서 있고 합리적인 사후 세계에 이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섬세하고 손상되기 쉬운 그림이지만 상당히 잘 보존되었고, 역동적인 구성과 다채로운 세부 사항은 예술가의 솜씨를 잘 보여 준다. 네바문이 사냥하는 그림이지만, 실제 그는 생전에 사냥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징주의는 질서의식을 세우는데 중요했고,사냥은 무질서를 없애는 것을 뜻했다. 커다란 물고기는 틸라피아다. 이것은 위험이 닥치면 새끼들을입 안에 넣어 보호하고, 위험이 사라져야 비로소 내놓는다. 이는 네바문이 사후 세계에서 새 삶을 시작할 때 보호받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또는 자기 재생의 상징일 수도 있다. 네바문은 아마포 킬트를 입고 섬세한 목깃을 달고 있으며,

그의 아내인 하트셰프수트는 연회복 차림이다.


그들의 딸은 옆머리를 땋고 귀걸이와 장식 목깃을 달고 있다. 이 가족이 함께 사냥을 아갔을 리는 없으니,

이 벽화는 사후 세계에서 이들이 함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네바문은 새떼를 향해 뱀 머리 장식의 막대기를 던지려는 참이며,

 다른 손으로는 왜가리 세 마리를 쥐고 있다. 치켜든 팔 밑에 있는 신성문자는 그가 "부활할 것이며 영생의 장소에서 좋은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사냥에는 고양이들도 데리고 가곤 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고양이는 

입과 발톱으로 세 마리의 새들을 잡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살아 있는 순간을 표현한 새로운 조각


<아케나텐과 그의 가족>

BC 1353-1336년, 석회석에 부조, 아마르나에서 출토, 베를린 구 박물관.


제18대왕조 동안 통치했던 아케나텐의 왕의 처소에 있는 가족 제단의 일부였던 것 같다.

그는 아멘토테프 3세의 뒤를 이어 아멘호테프 4세로 왕좌에 올랐다. 파라오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자신의 파라오 이름을 버리고 기존의 종교와 신관들을 멀리하고, 태양의 양원陽圓, 즉 아텐을 섬기는 종교의식을 시작하였다. 약 17년에 걸친 통치 기간은 그가 기존 신앙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온 때로 기억된다. 그의 지배 이전에 이집트에서는 약 2,000명의 신들을 섬겼지만 아케나텐은 세계 최초로 생명과 빛의 근원인 아텐만을 섬기는 유일신교를 만들었다. 다른 모든 신들을 밀어낸 여파는 엄청났고, 테베의 신관들은 이 종교를 이단 행위로 여겼다. 


따라서 아케나텐은 나일 강의 동쪽에 있는 아케타텐(지금의 아마르나, 태양의 지평선이라는 뜻)에 새 궁전을 건설했다.

그곳에 그와 네페르티티 왕비는 새로운 건축물과 미술품으로 가득한 거대 도시를 세웠다. 왕이 절대 권력을 누렸기에 새 종교에 찬성 하든 안 하든 수천 명이 그를 따랐고, 절정기의 아케타텐 엘아마르나에는 약 20,000명이 거주했다. 이미 아멘호테프 3세 때 예술에서  일부 변화들이 시작되었지만, 아텐 신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불합리하게 여긴 것은 보다 자연주의적인 미술 양식을 발전시키고 건축 양식을 변화 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가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중시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려 했다.


어떤 사건을 기리기위해 석판에 그림이나 부조 또는 글을 넣어 장식한 석비들이 종교물이나 장식물로 제작되었다.

이 석비는 개인 집의작은 사당에 놓였던 것 같다. 여기에 나타난 편안한 자세와 상징들, 그리고 만들어진 양식으로 보아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새 수도는 건설 중 20년도 못 되어 버려졌다. 후대의 파라오들은 아케나텐과 그의 종교의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했다. 그 시대의 독특한 미술품 중 다수가 파괴되었고, 건물들은 해체되어 다른 용도로 쓰였다.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


<왕관을 쓴 네페르티티 흉상>

BC 1340년경, 석회석에 채색, 아마르나의 조각가 투트모시스 공방에서 출토, 베를린, 신 박물관.


제18돵조 때 혁명의 왕 아케나텐의 아내이자 투탕카멘의 장모였던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들 중 아마 가장 유명할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얼굴은 남편의 얼굴보다 미술품에 더 많이 등장하며,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고대 여성들중 하나로 꼽힌다. 이집트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후의 아케나텐)가 21살 때 이집트의 수도를 테베에서 신도시인 아마르나로 옮김으로써 당대의 종교와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암네호테프티는 이전 시대에 당연했던 것들을 뒤엎으며 이집트 종교의 다신들을 거부하고 전능한 유일신인 태양신 아텐을 섬겼다.


이 새로운 종교를 남편과 함께 섬기며 네페르티티가 이집트 왕정과 종교의식에서 보인 뚜렷한 역할은 대중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반영한다. 그녀는 아텐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었으며, 왕과 거의 대등한 지위였던것 같다. 아케나텐은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네페르티티를 가장 총해했고, 둘 사이에 딸을 여섯 명 두었다. 그녀의 이름은 대략 '미녀가 납셨다'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이 뿐아니라 '네페르' 목걸이는 그녀가 자주 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길게 늘어진 금 목 걸이를 말한다. 어떤 이집트 학자들은 아케나텐의 일부 통치기 동안 그녀도 공동 통치를 했다고 생각한다. 무덤 장식에서 그녀는 파라오의 레갈리아(예복이나 휘장 등, 공식 행사 때 사용하는 왕권을 상징하는 장식물들)를 입고 아케나텐의 왕좌와 비슷한 크기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혈통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왕족 같지는 않다.


그녀의 아버지는 투탕카멘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된 아이라는 중신으로 추측된다.

그녀와 아케나텐이 죽은 뒤, 이집트는 이전의 다신교로 되돌아갔다. 이 채색 석회석 흉상은 그녀를 묘사한 것 중 가장 유명하다. 1912년에 독일 고고학자 팀이 아마르나에서 발견한 이흉상은 1920년에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것은 사진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상징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고, 10년 후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고대 이집트 조각 중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었다.








내세를 향해 가는 길


<『사자의 서』중 나크트의 파피루스>

BC 1350-1300년경, 파피루스에 채색, 테베의 나크트의 무덤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 내내 모든 부유층은 사후 세계를 준비했다. 왕들은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더욱 화려한 장식을 갖춰서 준비했지만 말이다.(이집트 학자들이 이름 지은) 『사자의 서』('죽은자가 지니는 책')는 어느 무덤에나 꼭 들어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내세에 이르는 데 필요한 많은 주문들이 쓰여 있고, 여러 신들에 대한 찬송이 담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초기의 주문들은 피라미드 벽에 새겨져 있어 피라미드 텍스트라고 했고, 무덤 벽이나 관 위에 새겨지거나 아마포나 양피지에 쓰인 것들도 있다.나중에는 각색한 것들을 파피루스에 써서 두루마리로 말아 죽은 이의 관 속이나 묘실 안에 넣기도 했다. 여기에는 주문들과 비네트(윤곽이나 배경을 흐리게 한 그림)라는 삽화들이 들어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것들 중 일부는 신왕국 제18왕조 후기와 제19왕조 전반기에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사자의 서』는 남성들을 위해 쓰였고 그런 사실이 자주 표현되곤 하지만,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도 꽤 있었다.


주문과 글은 무엇보다도 죽은 이들을 보호하고 음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위험한 지하세계를 통과하여 내세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데목적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문들은 상당히 변화했고, 고대 이집트 역사 후반기에 접어들면 대부분의 주문은 근본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지만, 텍스트에서 의례적인 부분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의 신관들이 특정한 신을 선호하는 경우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신이 삽화에 더 자주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한 파피루스에 모두 나온 것은 아니지만, 모두 합쳐서 그의 200여 개의 주문들이 발견 되었다. 부유한 이집트인들은 서기에게 자기가 고른 주문들을 쓰게 하고, 자신이 등장하는 삽화들을 채색하게 했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다면, 여백에 고객의 이름을 넣으면 되는 기성 제품을 살 수도 있었다. 나크트는 제18왕조 말과 제19왕조 초기의 왕실 서기이자 군 지휘관이었다. 솜씨와 개성이 뛰어난 그의 『사자의 서』는 그가 생전에 얼마나 부유하고 지위가 높았는지를 보여 준다.


위 그림이 그려진 파피루스는 사후 세계에 있는 공물의 들판과 골풀 들판에 사는 신들을 향한 주문 110번을 보여 준다.

죽은 이는 골풀 들판에서 농사를 지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 그림들은 물로 둘러싸인 땅을 보여 준다. 오른쪽 위에는 나크트가 마아트

여신의 비늘과 깃털을 가진, 따오기 머리의 토트 신과 함께 있는데, 이는 뒤에 나오는 <『사자의 서』중 후네페르의 심판> 장면을 뜻한다.

옆의 그림에서 그는 공물의 호수 위로 배를 저어가고 있고, 공물 제단 앞에는 미라 모습을 한 신이 두 명 서 있다. 그 아래 장면에서

나크트는 베누 새를 경배하고 있으며, 그 다음 장면에서는 아마를 뽑고, 수확하고, 쟁기질 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맨 아래 장면에서

뱀 머리 모습으로 그려진 웨너페르(오시리스의 다른 이름) 신의 배는 수로에 매여 있다. 엔네아드(총 아홉 명의 신) 중 셋이 오른쪽 아래에

보인다. 이 파피루스를 만화처럼 보이게 한 것은 의도적이다. 삽화들은 늘 글(고문서들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읽게 되어 있다)의

시작 부분에 위치해 주문이나 의식을 표현한다. 전통에 따라 단순하게 그려진 초상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표현법으로 믿어졌고

관련되 모든 행동은 되도록 명확하게 묘사되어 죽은 이와 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야 했다.








내세와 현세를 모두 중시하는 예술


<투탕카멘의 황금 왕좌>

BC 1300년경, 제18왕조, 나무 · 황금 · 채색 유리 · 청금석 · 방해석.

테베의 왕들의 계곡에서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투탕카멘은 1922년 무덤이 발견되지 전까지는 가장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들 중 하나였다.

무덤은 급히 마련된 탓이었느지 다른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당시 전형적이었던 긴 통로 대신 고작 작은 방 네 개 뿐이다.

그는 아마르나 시기에 아케타텐에서 태어났고, 아케나텐의 아들이었지만 네페르티티가 아닌 다른 왕비의 태생으로 짐작된다.

기록에 따르면,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사이에는 딸만 여섯 있었다. 투탕카멘은 곧 이들 중 하나인 안켓나문과 결혼하였다.

왕의 핏줄인 여인과 결혼을 하면서 투탕카멘의 계승 서열은 더 위로 올라갔고, 당시 근친결혼은 흔한 일이었다.(예를 들면,

그의 아버지는 자기 딸들 중 하나와 결혼했다.) 처음에는 투탕카텐으로 알려졌던 그는,

아케나텐의 아텐 숭배론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조언자들의 권고에 따라 투탕카멘으로 개명했다.


이 매끄러운 상감 의자는 무덤의 전실 밖의 작은 방에서 발견되었고, 이밖에도 여러 개의 침대, 궤, 스툴, 왕좌 등 훌륭한 가구들도

있었다. 이 의자는 특히 빼어난 가구 제작 기술을 자랑한다. 이집트인들은 보석들을 다루고 상감하는 데 뛰어났을 뿐 아니라

솜씨 좋은 목공인들이기도 했다. 현대의 공예가들조차 이 의자이 극히 세밀한 세부 장식과 전체적으로 뛰어난 구조를 따라가려면

꽤 어려울 것이다. 의자 등받이를 상감하고 채색한 이러한 양식은 제18왕조의 인기 있는 왕좌 디자인이었다. 안케세나문과 함께 있는

왕을 보여 주는 의자 등받이의 구성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아마르나 스타일의 유산임을 잘 나타낸다.


젊은 왕비는 용기에서 향유를 덜어 남편에게 발라 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영생을 보장하는 관습이었다.

그녀가 의식을 행할 때, 햇살 끝부분에 작은 손과 앙크(고리 모양 쇠붙이인 앙크는 영생의 상징이다)들이 있는 아텐 원반이 이 부부에게

축복을 보낸다. 이 도상의 주제는 전 시대의 아케나텐을 연상시키고, 의자에 새겨진 왕고 왕비의 이름은 초기(아텐)와 후기(아멘) 형태가

모두 쓰였는데, 이는 그들이 아마르나로부터 전통적인 이집트 미술과 종교로 넘어가는 시기에 살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파라오의 부적

<날개 달린 스카라브 팬던트>

BC 1330년경, 칠보 · 금 · 은 · 옥수 · 청금석과 터키석 등으 준보석 · 색유리.

테베의 왕들의 계곡,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장신구들 중 하나다.

이런 장신구들은 단순한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호와 상징들을 결합해 주술적 의미를 담아 파라오가 부적으로 달던 것이다.

부유한 이집트인들은 대개 보호나 행운의 의미를 담은 부적을 달았고, 신이나 상징적 모양, 재료 또는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예들 들어, 파란색은 보호의 색이며, 황소나 사자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앙크는 생명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이 목걸이가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이집트인들은 이 팬던트 전체에 신비로운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적은 단연 풍뎅이였는데,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가 그렇듯 이집트인들에게는 풍뎅이가 신성의 상징이었다.

쇠똥구리들은 동그란 배설물 안에 알을 낳고 그것을 굴리는데, 이집트인들은 이 행동에서 태양의 이미지와 거대한 쇠똥구리가 하늘에서

굴리며 움직이는 태양의 운행을 연상했다. 따라서 풍뎅이들은 하늘에서 태양을 움직이는 이집트 신인 케프리와 관계가 있다.

태양은 날마다 사라졌다가 다음 날이면 변함없이 떠올라 부활했고, 따라서 풍뎅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은 장신구와 부적으로 쓰였다. 뒷면에 신성문자가 새겨진 하트 스카라브(스카라브 중에서 크기가 큰 것은 장부를 빼낸 미라 심장의

위치에 놓였기에 심장의 스카라브, 즉 하트 스카라브라고 불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죽은 자의 심장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내세에서 부활을 보장하기 위해 죽은 자의 심장 자리에 놓이곤 했다.


이 펜던트의 중심은 날개 달린 풍뎅이지만, 다른 부분들도 모두 상징적이다.

이 풍셍이에는 매의 날개와 꼬리가 달렸고, 발톱으로는 영생을 상징하는 셴 링을 잡고 있다. 또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상징이자

태양과 창조의 상징인 신성한 푸른 연꽃과 파피루스 꽃들도 쥐고 있다. 앞다리와 날개 끝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선체가 터키석으로

 상감된 황금 범선이다. 이 범선은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 강을 상징했다.








어린 파라오의 흔적


<투탕카멘의 장례용 가면>

BC 1323년경, 금에 색유리와 준보석들을 상감.

테베의 왕들의 계곡에서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숨어 있던 보무 중 최상급인 투탕카멘 왕의 이 찬란한 장례용 가면은 그의 미라와 함께 나온 것이다.

무게 11길로그램인 이 가면은 몸 전체를 아마포로 감은 투탕카멘 미라의 머리와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겨우 9살의 나이에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12대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살 즈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다리가 부러진 뒤 나타난 급성 괴저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의 사후에 이집트의 장인들이 가면을 만들었고,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왕들의 계곡에서 발견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이제까지 발견된 것들 중 사람 손이 닿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된 유일한 무덤으로, 발견된 후부터 모두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투탕카멘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명문에 따르면, 그는 왕의 아들이지만 어느 왕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멘호테프 3세가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이들도 있고, 아케나텐의 아들이나 동생으로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아케나텐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그는 아케나텐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가 이집트를 통치한 10여 년간 그의 이름은 '아텐의 살아 있는 상'을 뜻하는 투탕카텐에서 '아문의 살아 있는 상'을 뜻하는 투탕카멘으로 바뀌었다. 그의 유명세는 위대한 업적이나 발견 덕이 아니라 무덤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미술품과 보석, 화려한 세공품들 덕분이다. 이 가면은 어린 파라오의 내세 여행을 보호 하려는 목적을 지녔다. 가면의 양 어깨 위 매의 머리 뿐 아니라 이마 위에 있는 독수리 여신 네크베트와 코브라 여신인 와제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그리고 신성한 권위를 상징한다. 기원전 2061-2010년의 멘투호테프 2세 이후 모든 파라오들은 이 상징들을

보호의 의미로, 그리고 자신들이 두 이집트를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하였다. 어께와 가면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투탕카멘의 통치 약 500년 전인 중왕국 때의 가면들에 처음으로 실린 주문이다.








죽은 자를 위한 의식


<『사자의 서』중 후네페르의 파피루스>

BC 1285년경, 파피루스에 안료, 테베의 후네페르의 무덤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부자들이 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될 주문들이 실린 『사자의 서』를 구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맞춤 제작을 시킬 수도 있었고, 적절한 자리에 구매자의 이름을 넣을 수 있는 기성 제품을 살 수도 있었다. 서기가 되기 위한 훈련과

복잡한 신성문자를 익히흔 공부는 고되었지만 일단 기술을 익히면 독립할 수 있었고, 서기가 최고 전문직 중 하나로 꼽혔다는 것은

흥미롭다. 후네페르는 귀족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파피루스를 주문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각 장의 분량과 종류, 삽화의 수와 수준,

전체 파피루스의 길이를 정할 수 있을 정도로 존경받는 부자였다. 대개 두루마리들은 가로 4.5-27.5 미터에 세로 30-46 센티미터 정도였다.

죽은 자는 사자의 영역을 통과하는 데 하룻밤이 걸린다고 여겼다. 자신들의 『사자의 서』에 나온 주문과 노래들을 부르며

모든 시험과 시련을 무사히 통과하고 다음 날 태양이 떠오를 때 사후 세계에 이르러 신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다채로운 색과 정보가 가득한 후네페르의 『사자의 서』의 이 부분은 '입을 열어 주는 의식'(미라의 입을 열어 주는 의식을 통해

사제는 망자의 감각들을 되살려 다시 말하고 먹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믿었다.)을 표현한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치르는 의식으로

내세에서 살 수도 있고, 사후 세계에 이르면 몸이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부활한 사자는 내세에서도 살 수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이 의식은 미라 뿐 아니라 조각상으로도 피러졌고, 일단 의식이 이루어지면 미라나

조각상은 먹고, 숨쉬고, 보고, 득고, 그들을 위해 남겨진 공물과 제물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생명의 힘인 카가

다시 자유롭게 떠다닐 것이다. 이 의식은 사제가 주관하거나 마지막 효도의 의미로 죽은 이의 아들이 맡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왕위 계승을 합법화하는 벙법이기도 했다.


위쪽 장면 한가운데에 자칼 가면을 쓴 사제 또는 아누비스(망자를 미라의 형태로 만들어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신)의 도움을

받고 있는 후네페르의 미라가 보인다. 흰 어깨띠를 두른 두 사 입을 열어 주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한 사제는 특별한 도구들을

들고 있고, 다른 사제는 단지에서 액체를 따르고 있다. 자제의 손에 들린 단지 네 개는 그가 액체를 네 번 따른다는 뜻이다.

그들 뒤에 서 있는 사제는 표범 가죽을 두르고 향과 헌주(종교의식의 하나로 액체로 된 공물을 따르는 것)를 드리는 역할을 맡는다.

미라 앞의 두 여인은 애도하는 훈페르의 아내와 딸이다. 오른쪽의 흰 건물은 후네페르의 무덤을 뜻하는데, 당시 테베의 실제 무덤

들에서 보이는 입구와 작은 피라미드가 갖춰진 완벽한 모습이다. 아래쪽 장면의 오른쪽에는

입을 열어 주는 의식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이 놓인 탁자가 보인다.







죽은 자를 위한 심판


<『사자의 서』중 후네페르의 심판>

BC 1285년경, 파피루스에 잉크와 안료.

테베의 후네페르의 무덤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고위 관리 후네페르와 아내인 네샤는 기원전 1300년경 신왕국 시대에 테베에서 살았다.

왕실 가축 감독관, 세티 1세의 집사, 왕실 서기, 신성 공물 담당 서기를 두루 지냈던 후네페르는 주요 인사였을 뿐 아니라

왕과도 친밀했다. 그의 높은 지위는 생전에 의뢰한 『사자의 서』의 높은 수준과 개성에서 잘 드러난다. 이 파피루스는

지금은 위치를 알 수 없는 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보존 상태가 뛰어난 이 『사자의 서』의 도움으로 이집트 학자들은

19왕조의 종교 사상들과과 일상생활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들을 짜 맞출 수 있었다. 주문 125번에 상세히 담긴 이 이야기는

이집트 장례 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자, 『사자의 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문이었다.


여러 주문들은 심장이 도난당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혹시 불행한 사건이 생긴다 해도 빠르고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은 '심장의 무게를 다는' 의식을 보여 준다. 이 그림에서 아누비스(사자와 그의 무덤을

보호하는 신)가 후네페르를 마아트의 저울로 데려온다. 아누비스는 진실의 깃털과 함께 후네페르 심장의 무게를 재고,

그동안 따오기 머리의 토트 신이 정확한 대답들을 받아 적는다.


상징적인 의미로 가득한 이 파피루스는 구성의 관습을 따랐으나 상상화로 그린 것이다.

맨 위4명의 신과 여신들이 앉아 후네페르를 평가한다. 그들이 죄목이 적힌 긴 목록을 주면 그 하나하나 부인해야 한다.

그때마다 부인한 내용이 타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깃털과 그의 심장을 저울 위에 올린다. 이 시험에 통과한 뒤 후네페르는

매의 머리를 한 하늘의 신호루스의 인도 하에 천막 아래 신좌에 앉아 있는 오시리스를 만나게 된다.

물 위에 떠 있는 신좌에서는 신성한 연꽃이 피어나 있다. 꽃잎 위에 서 있는 것은 호루스의 네 아들로, 사자의 내부 장기들의

수호자다. 이들은 저마다 특정한 장기를 맡고 있고, 나침반에서 각기 다른 방위를 관장한다. 예를 들면, 하피는 폐와 관계가

있으며 북쪽을 가르킨다. 신좌 뒤에는 강력한 두 여신인 이시스와 그녀의 여동생 네프티스가 있다.










위대한 파라오의 상


<아부심벨의 람세스 2세 신전>

BC 1284-1264년경, 사암, 이집트 남부, 아스완 부근.


아부심벨의 암벽을 파서 만든 거대한 두 신전은 람세스 2세 때 이룬 최고의 업적이었다.

이 신전들은 인근 백성에게 파라오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당시 람세스의 세력은 멀리

이집트 북쪽까지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신전 중 대신전은 람세스를 높여 아문라, 라호라크티, 프타 신과 관련 시켰고, 소신전은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높여 사랑, 파괴, 죽음 등 많은 것을 관장하는 하토로 여신과 연결시켰다. 아문라가 태양신이고 하토르는 그의 아내이므로

이 두 신전은 왕과 왕비를 두 신과 상징적으로 일치시킨다. 이 신전들은 원래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의 승리를 기리고 이웃 누비 아인

들을 위협하기 위한 영구적인 기념비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20년간의 공사가 마무리된 그의 통치 기간 24년째에 이 신전들은 봉헌될 준비

를 마쳤고, 람세스와 네페르타리와 딸인 메리타문이 나일 강을 거슬러 이곳에 이르렀ㅎ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네페르타리는 행사 직전에

돌연 사망한 것 같다. 왜냐하면 칭호 수여식을 서술한 명문에는 그녀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그 후 살아있다는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아스완 댐의 물이 점점 차올라 이곳은 완전히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궁리 끝에 돌덩어리를 블록 형태로 잘라서 저수지의 콘크리트 돔 인공 언덕 위로 약 60미터 들어 올리는 방법이 합의되었다.

 이 두 신전과 태양 간의 관계를 원래 그대로 정확히 옮긴 대단히 성공적인 복원 작업이었다. 두 신전 중 규모가 큰 대신전은 람세스 2세에게

봉헌된 것이다. 람세스 2세 조각상은 아문라, 라호라크티, 그리고 가장 안쪽 지성소에 있는 프타와 함께 앉아 있다. 신전 정면은 각각

20.5미터가 넘는 파라오의 거대한 석상 네 좌가 지키고 있다. 석상 뒤쪽 벽 맨 위에는 개코원숭이들이 조각된 프리즈가 떠오르는 태양을

맞는다. 람세스의 각 상은 왕좌에 앉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뜻하는 이중관을 쓰고 있다. 조각상 하나는 고대에 일어난 지진 탓에

상체가 파손되었다. 왕관들의 옆면은 이집트 통합의 상징인 나일 강의 신들로 장식되어 있다. 조각상들이 서 있다.

신전 안의 거대한 열주전을 따라 들어가면 안쪽 지성소로 이어진다.









파라오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


<네페르타리 왕비의 무덤 벽화>

BC 1255년, 부조 위에 프레스코, 테베의 왕비들의 계곡.


제19왕조 때 주요 왕실 여인들과 자녀들을 위해 무덤들이 테베의 왕들의 계곡 남쪽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지역을 왕비들의 계곡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왕실 일꾼들이 이 무덤들을 지었고, 왕실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장식을 맡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람세스 2세가 사랑했던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짓게한 무덤이다. 그녀의 무덤은 이집트

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하나로 꼽힌다. 람세스 2세의 긴 통치 기간 중 약 25년 동안 네페르타리는 엄청난 영향력과 명망을 누렸다.

람세스는 그녀를 위해 작은 신전과 그녀를 그린 무덤을 짓게 했다. 네파르티티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름은 아름다움을 뜻하는

'넾페르'로 시작하는데, 그들을 표현한 미술 작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름다움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아내를 더 작게 그리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그녀의 상들은 네페르티티처럼 남편과 같은 크기로 표현되곤 한다.


1904년에 이탈리아 원정대가 발굴한 이래 이 무덤은 습기와 방문객들의 입김, 화가들이 칠한 물감 아래 회반죽 밑에서 일어나는

소금 침전 등으로 심각하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손에 의해 모습을 되찻아 1955년 일반에 재공개 되었다.

체스와 비슷한 보드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종교적 의미의 세네트는 사자가 사후 세계로 가는 위험한 여행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돕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졌다. 무덤의 벽과 통로에 있는 약 520제곱미터의 벽화들은 그녀가 사후 세계로 여행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세네트는 '춤꾼들'이라고 불리는 말들을 옮기는, 30칸 짜리 보드 게임이다. 네페르타리가 홀로 게임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까닭은 보이지 않는 맞수가 운명의 여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며, 이 여신은 네페르타리가 사후 세계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당연히 지게 된다. 이 그림은 네페르타리의 무덤 첫 번째 방에 있으며, 『사자의 서』에 나온 것이다.












이집트의 변화된 장례 미술


<헤네타위의 덧관>

BC 1040-991년, 나무에 제소와 채색,

서 테베의 데이르 엘바흐리에서 출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헤네타위는 신왕국의 뒤를 이은 제3중간기의 21왕조 때인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 시대 사람이었다. 이 새대에는 대부분 지배

세력들이 나일 강 델타 지역의 타니스 도시를 수도로 한 왕실 왕조와 자신들의 '왕조'를 따로 세웠던 테베의 아문 신전의 고위

사제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쯤 되면 왕권은 이미 위엄을 일었고 파라오들은 왕들의 계곡에 거대한 장제전이나 무덤을 더 이상

짓지 않았다. 불안한 시절 탓에 개인의 무덤보다는 암굴로 지어 도둑의 침입을 조금 더 막을 수 있었던 가족묘를 선호했다.

재활용된 무덤에 묻힌 헤네타위는 "이 집의 여주인이자 아문라의 여성 찬송자"로 묘사되어 있다. 는 테베의 아문 신전의 여사제

이자 가수였다. 또한 왕비의 손녀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생전에 이집트 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고위 사제 멘케페레였다.

당시의 주요 인물이었던 헤네타위는 두 개의 관, 즉 속관과 덧관을 쓰고 그 위에 띄어난 그림을 그리게 할 만했다. 관 위에 그린

그림은 정교한 종교적 상징성과 형상화가 강조되면서도 복잡하고 세부 묘사가 뛰어났다.

그녀가 20대에 사망했을 때, 관 장식 기술은 정점에 올라 있었다.











죽은 이의 친구


<크헨수모세의 『사자의 서』>

BC 1040-991년, 파피루스에 채색과 잉크,

서 테베의 데이르 엘바흐리에서 출토, 빈, 미술사 박물관.


제21왕조 시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은 여전히 죽은 이가 내세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신들의 허락을 구하는 의례들과 행위들이

주축이 되었다. 재료와 양식이 바뀌었을 때 조차 모든 이집트 장례 미술의 바탕에 있는 근원적인 힘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은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쳐 이어져 온 문명의 가장 뜻렸한 특징 중 하나로, 제3중간기 때에도 미술적인 부분에서 이미 미묘한

변화들이 있었지만 그 중요성은 다를 바 없었다. 누트는 하늘과 천상의 여신이며 낮과 밤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왕조 후기에

그녀는 낮의 하늘의 여신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천상을 아우르는 여신이 되었다. 그녀는 (대기에서 건조와 습기의 신

들로 묘사되는) 슈와 테프누트의 딸이자, 태양신 라의 손녀였다. 남편이자 오빠는 계브였고, 호루스에게는 할머니이자 오시리스,

세트, 이시스, 네프티스의 어머니였다. 누트는 죽은 이의 친구이자 수호자이기도 했다. 『사자의 서』중에는 사자가 지하세계인

두아트를 통과해 내세에 이르도록 도와달라고 그녀를 부르는 주문들도 있었다. 이 파피루스의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일에서도 파피루스의 주인을  도와주었다.


제3중기에 살던 크헨수모세는 아문 신전 공예가들의 수장이자 수석 문서 보관 담당자였다. 또한 금세공 공방 감독관이자 모든

건축의 감독관이었으니, 그의 파피루스는 특히나 뛰어나고 아름답다. 삽화들이 대부분인 이 파피루스는 '신화적인 파피루스들'

중의 하나로 분류되는데, 이 용어는 케베 근처에서 제21왕조 때 제작된 유난히 긴 두루마리들을 뜻한다. 여기에는 검은색이나

다색으로 칠해진 장면들이 들어가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삽화들이 실렸다. 이 중 많은 것이 전 시대에 만들어진

『사지의 서』와는 다른 장례 절차와 주제들을 담고 있다. 크헨수모세는 비네트마다 나오며 모든 선화들은 우아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양식은 전 시대 이집트 텍스트들과는 다소 다르고 채색에 쓰인 색들은 적다.


위 장면이 '신화적인 파피루스'에서 특히 중요한 까닭은 누트신이 크헨수모세를 돕는 모습을 곧이곧대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수인 신성한 뽕나무 앞에 서서 크헨수모세가 내세까지 여행하는 데 힘이 될 빵과 물을 주고 있다. 나무 줄기에는

누트 여신의 이름이 신성문자로 쓰여 있다. 예전의 표현과 달리 이 그림에서 크헨수모세는 여신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예전

관행과 다른 점은, 우선은 누트가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과, 크기가 큰 크헨수모세 형상이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자의 서』에서 사자는 오른쪽을 바라보고 신이나 여신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시에게 바치는 공물


<나니의 『사자의 서』의 일부>

BC 1040-945년경, 파피루스에 채색과 글.

서 테베의 나니의 무덤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3중간기 21왕조 때 살았던 나니는 70대에 세상을 떠났다. 헤네타위 처럼 생전에 그녀도 테베 아문의 고위 사제이자 당대 이집트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피노드젬 1세의 딸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무덤 안에는 그녀의 관이 있었고, 옆에는 샤와브티

(작은 장례용 조상으로, 샤브티 또는 우샤브티라고도 불린다)를 넣은 함들과 속이 우묵한 오시리스 목각상이 놓여 있엇는데, 그 안에는

『사자의 서』의 텍스트들이 적힌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여기서 다루는 파피루스가 그 일부다. 이 시대에는 매장 관습을

유난히 중시했는데, 전 시대의 관습과는 다소 달랐다. 미라 제작 방법과 실제 매장 방식에서 변화가 있었다. 『사자의 서』에는 전 시대

처럼 많은 삽화들이 들어 있지 않았고, 그림들은 훌륭하고 색채 또한 섬세했지만 이미지들은 상상력이 부족했고, 신왕국의 뛰어난 작품

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제한은 있었지만, 고대 이집트의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니는 법적, 경제적 권리에서

상당한 수준의 독립을 누렸다. 그녀의 파피루스는 그녀만을 위해 서기가 글을 짓고 예술가가 그림을 그려서 따로 만든 것으로 값이 상당

했을 것이다. 이전에는 『사자의 서』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왕족이나 귀족 남성들은『사자의 서』를 주문 제작했지만,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이 삽화에서 나니는  오시리스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소의 다리를 제물로 바친다. 오시리스는 미라가 된 인간의 녹색

얼굴에 흰색 왕관(왕의 상징)을 쓰고 있고, 구불구불한 신의 턱수염을 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왕관은 흰색으로 양쪽에 깃털,

꼭대기에는작은 원반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특정한 종교 의례 때 쓰는 것이었다. 지하세계의 왕인 오시리스는 선한 삶을 살았고 적법한

매장 권리를 받은 사람들만 그에게 사후 세계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 파피루스에는 전통적인 갈색과 노란색 테두리가 그려져 있고

신성문자는 세로로 쓰여 있다. 빨간색 신성문자들은 문장의 시작을 뜻하며 전체적으로 질서정연한 기준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상징과 글로 가득한 이 파피루스는 사후 세계에서 나니를 보호하고 부양해 주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믿어졌다.

이것을 펼치면 길이가 5미터를 넘는다. 이것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가장 왼쪽이기에 마지막 부분이다. 파피루스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니의 내세 여행의 정점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오시리스가 그녀에게 과연 다음 세계로 갈 수 있을지의지의 여부를

말하고 있다. 비옥함과 부활, 새로운 초목을 관장하는 힘의 신이기에 녹색 얼굴로 묘사되는 오시리스는 미라처럼 아마포로 감겨 있다.

이것은 전통에 따른 것으로, 모든 이집트인들이 믿고 있듯이 원래 사랑받는 파라오였던 오시리스는 질투심 많은 동생 세트에 살해당해

몸이 14조각으로 잘려 나일 강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남편의 시신 조각들을 모두 수습해서 아마포로 잘 감았다.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신인 아누비스와 강력한 부적의 도움으로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부활시켜 사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된다.











로마의 영향을 받은 사실적인 초상화


<소년의 초상>

보리수나무판에 납화(물감에 뜨거운 밀랍 용액을 섞어 쓰는 그림 기법) 로마 시대 2세기,

이집트 파이윰 지역에서 발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집트는 로마에 정복되어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한 때인) 기원전 30년부터 서기 395년까지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였다.

이 초상화는 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그려진 장례용 초상화들 중 일부는 건조한 이집트 기후에서 살아남았지만,

로마에서는 그렇지 못해 실내 벽에 그려진 일부 프레스코화를 제외하면 이집트에 있는 초상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유일한

회화들이다. 이 특별한 초상화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나일 강 동쪽 도시인 안티노오폴리스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 초상화는 아마포

로 감은 미라의 얼굴 위에 씌운 마스크였다. 이런 형태의 모든 초상화들은 살아 있는 모델을 보고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나중에는 사자의

미라 위에 놓여 장례식 때 쓰였지만 생전에는 벽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소년의 특징들을 능숙하게 표현한 목적은 전 시대

이집트 회화의 정서와 같았으니, 사후 세계를 위해 그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믿음은 같았을지 몰라도 실제 표현은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는 매우 달랐다.


초상화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꽃피었는데, 그고에서는 모델들이 사실적인 이미지를 요구했고, 심지어 못생긴 모습이라도 그대로 그리게 했다.

이것은 자연주의가 아직 유행이었을 때 그린 것으로, 이집트에서는 전에 시도된 적 없던 사실주의를 보여 준다.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과는

매우 다르지만 그리코로만 시대 이집트에서 널리 알려진 이 회화 양식은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그리스 고전기에서 유래했다. 소녕의 튜닉

목둘레 아래에 어두운 보라색 안료로 쓴 글은 죽은 소년이 누구인지와 그의 짧은 생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보여 준다.

 "에우티케스, 카사니오스 1세의 자유 노예, 에반데르의 아들, 헤라클리데스가 부서副署함(다른 사람이 서명한 문서를 인정하는 서명을 하는 것).

"노예제는 그리스와 로마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에우티케스 같은 일부 노예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주인의 가정에서 자랐고, 친밀한 관계를

이루었다. 카사니오스가 젊은 에우티케스에게 그러했듯이 주인은 마음에 드는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신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중요했다. 이 미라 초상화 또한 에우티케스의 전 주인인 카사니오스가 비용을 댔을 것이다.













Dreaming Of Home And Mother - Wang Sheng 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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