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미술
지은이 : 수지 호지 Susie Hodge
감수자 : 크리스티나 릭스 Dr. Christina Riggs
옮긴이 : 서남희
파라오의 영원한 삶
<카프레 좌상>
BC 2520-2492년, 고왕국 제4왕조, 섬록암.
기자의 카프레 피라미드의 계곡 신전에서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세 시대로 크게 나뉘며, 각 시대는 (한 가문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여러 왕조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시대인 고왕국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일로 시작해서 내전으로 몰락했다. 중왕국 때 질서를 회복했지만 내전으로 몰락했다. 중왕국 때 질서를 회복했지만 내전으로 다시 혼란해졌다.신왕국은 이집트가 가장 강력했던 시대로 수도는 테베였다.
쿠푸왕과 헤누트센 왕비의 아들인 카프레는 이복형인 제데프레의 뒤를 이어 30여 년간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의 시대는 위대한 영광을 떨친 시대였다. 그가 기자의 피라미드 세 기 중 두 번째를 건설했을 때, 그의 계곡 신전과 피라미드 신전에는 수많은 인물상들이 놓여 그곳에서 치러진 의식들에 쓰였다. '카Ka'(고대 이집트인이 생각한 사람의 혼) 조각상들은 초상 중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저승으로 가는 배
<모형 배>
BC 1985년경, 제소와 채색한 나무 · 아마포끈 · 아마폰,
데이르 엘바흐리 부근 메케트레의 무덤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주인을 따르는 내세의 시종들
<공물을 나르는 여인상>
BC 1985년경, 나무 · 안료 · 제소, 서 테베의 메케트레의 무덤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모형은 서 테베에 있는 메케트레 대신의 무덤에서 나온 한 쌍 중 하나다.
약 4000년 동안 봉해져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이 무덤의 묘실은 1920년 세상에 드러났다.
이 시종은 한 손으로 살아 있는 오리의 날개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에 인 음식 바구니가 기울지 않게 잡고 있다.
신전을 장식한 선전물
<전투 장면 파편>
BC 1400-1390년경, 사암에 채색, 투트모세 4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
테베에서 출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원전 1400년경에 투트모세 4세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을 때, 천 년 전에 카프레 왕을 위해 만든 기자의 스핑크스는 목까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투트모세의 통치기는 9년에 불과했지만, 부유한 번영기이자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대규모 전투 장면이 신전 외부에 조각된 것은 모순 같아도, 이는 왕이 혼돈과 무질서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상징했다. 넘어진 군사들의 끝이 뾰족한 턱수염과 콧수염은 그들이 아마도 현재 시리아 지역인 서아시아 출신임을 알려 준다. 패배한 적들을 보여 주는 이 부조는 신전 외벽 장식의 모티프로 적절했다. 왕이 약한 세력을 정복하고 우주적 질서인 '마아트'를 유지할 수 잇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패배한 적들로 부터 빼앗은 보물은 이집트 병사들에게 분배되곤 했다. 용감한 행동은 토지와 묘지 터, 금 목걸이나 훈장 등의 선물로 보상받았다.
애절한 노랫소리의 주인공
<아멘호테프 3세의 거상>
BC 1375년경, 석영질 사암, 나일 강 서안, 테베, 현재 룩소르
제18대왕조 시대에 다양한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즐은 이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늘 그랬듯이 왕들은 신전 건축을 관장했는데, 특히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누비아의 주요 거점마다 신전을 건설했다. 진흙벽돌로 지어진 고왕국과 중왕국 신전들은 거대한 석회석이나 사암 덩어리들로 대체되었고, 신전에 들어가려면 양옆에 높은 기둥들이 늘어선 거대한 통로를 통과해야 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테베에 이제까지 건설된 것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장제전을 지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신으로 숭배받았을 것이다. 이곳의 유적 중 현재는 바깓문을 지키는 거대한 조각상 두 개만이 남아 있다. 왕의 권능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집트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크기와 위치 덕에 이 거상들은 멀리서도, 심지어 신전에 들어서는 것이 금지된 사람들에게도 보였다. 자연과 고대의 여행자들에게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지금도, 거대한 두 석상은 여전히 나일 강과 떠오르는 해를 향해 동쪽 방향으로 앉아 있다. 두 석상 모두 아멘호테프 3세를 상징하지만,
북쪽 석상(사진 오른쪽)은 그의 어머니인 무템비아와 함께 있는 파라오의 상이고, 남쪽 석상은 왕비인 티위와 딸 한 명과 함께 있는 파라오의 상이다. 이 여인들은 하늘의 여신인 하토르를 상징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석상들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며, 결국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멤논왕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이 신전 전체를 그의 이름을 따서 멤노니엄이라고 불렀다.
기원 전 27년에 지진이 일어난 후, 이 석상들에 균열이 생긴 탓에 아침마다 오른족 석상에서 애절한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기온과 습도가 오른 탓에 나던 소리로 추측한다. 이 '노래' 소리를 들으면 행운이 생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사비나 황후를 비롯해 수백 년 동안 이 석상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9년에 로마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때 이 석상들을 보수하려다가 뜻밖에 이 상들이 영원히 침묵에 잠기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세의 가족 초상화
<습지의 새 사냥>
BC 1356년경, 건식 프레스코, 테베의 네바문의 무덤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고위 관리였던 네마문의 무덤에서 발견된 여러 벽화 중 하나다. 고대 이집트 사회는 넓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과 상인, 예술가, 문관으로 구성된 중산계급, 그리고 노예로 이루어졌다. 네바문은 귀족계급이었다. 기원전 1356년경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무덤은 고인이 사후 세계로 순조롭게 갈 수 있도록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전형적인 신왕국 양식으로 그려져 이전 시대의 회화보다 덜 엄격 하지만 고인을 위한 사후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신왕국은 예술적으로 융성했던 시기로, 벽화와 조각이 더 많이 제작되었고 새로운 기법들도 시도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연회와 네바문의 소유지에 있는 거위와 마리수를 조사하는 서기의 벽화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이상화된 이미지로, 이승의 혼돈을 가라 앉히고 질서 있고 합리적인 사후 세계에 이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섬세하고 손상되기 쉬운 그림이지만 상당히 잘 보존되었고, 역동적인 구성과 다채로운 세부 사항은 예술가의 솜씨를 잘 보여 준다. 네바문이 사냥하는 그림이지만, 실제 그는 생전에 사냥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징주의는 질서의식을 세우는데 중요했고,사냥은 무질서를 없애는 것을 뜻했다. 커다란 물고기는 틸라피아다. 이것은 위험이 닥치면 새끼들을입 안에 넣어 보호하고, 위험이 사라져야 비로소 내놓는다. 이는 네바문이 사후 세계에서 새 삶을 시작할 때 보호받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또는 자기 재생의 상징일 수도 있다. 네바문은 아마포 킬트를 입고 섬세한 목깃을 달고 있으며,
그의 아내인 하트셰프수트는 연회복 차림이다.
그들의 딸은 옆머리를 땋고 귀걸이와 장식 목깃을 달고 있다. 이 가족이 함께 사냥을 아갔을 리는 없으니,
이 벽화는 사후 세계에서 이들이 함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네바문은 새떼를 향해 뱀 머리 장식의 막대기를 던지려는 참이며,
다른 손으로는 왜가리 세 마리를 쥐고 있다. 치켜든 팔 밑에 있는 신성문자는 그가 "부활할 것이며 영생의 장소에서 좋은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사냥에는 고양이들도 데리고 가곤 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고양이는
입과 발톱으로 세 마리의 새들을 잡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살아 있는 순간을 표현한 새로운 조각
<아케나텐과 그의 가족>
BC 1353-1336년, 석회석에 부조, 아마르나에서 출토, 베를린 구 박물관.
제18대왕조 동안 통치했던 아케나텐의 왕의 처소에 있는 가족 제단의 일부였던 것 같다.
그는 아멘토테프 3세의 뒤를 이어 아멘호테프 4세로 왕좌에 올랐다. 파라오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자신의 파라오 이름을 버리고 기존의 종교와 신관들을 멀리하고, 태양의 양원陽圓, 즉 아텐을 섬기는 종교의식을 시작하였다. 약 17년에 걸친 통치 기간은 그가 기존 신앙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온 때로 기억된다. 그의 지배 이전에 이집트에서는 약 2,000명의 신들을 섬겼지만 아케나텐은 세계 최초로 생명과 빛의 근원인 아텐만을 섬기는 유일신교를 만들었다. 다른 모든 신들을 밀어낸 여파는 엄청났고, 테베의 신관들은 이 종교를 이단 행위로 여겼다.
따라서 아케나텐은 나일 강의 동쪽에 있는 아케타텐(지금의 아마르나, 태양의 지평선이라는 뜻)에 새 궁전을 건설했다.
그곳에 그와 네페르티티 왕비는 새로운 건축물과 미술품으로 가득한 거대 도시를 세웠다. 왕이 절대 권력을 누렸기에 새 종교에 찬성 하든 안 하든 수천 명이 그를 따랐고, 절정기의 아케타텐 엘아마르나에는 약 20,000명이 거주했다. 이미 아멘호테프 3세 때 예술에서 일부 변화들이 시작되었지만, 아텐 신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불합리하게 여긴 것은 보다 자연주의적인 미술 양식을 발전시키고 건축 양식을 변화 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가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중시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려 했다.
어떤 사건을 기리기위해 석판에 그림이나 부조 또는 글을 넣어 장식한 석비들이 종교물이나 장식물로 제작되었다.
이 석비는 개인 집의작은 사당에 놓였던 것 같다. 여기에 나타난 편안한 자세와 상징들, 그리고 만들어진 양식으로 보아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새 수도는 건설 중 20년도 못 되어 버려졌다. 후대의 파라오들은 아케나텐과 그의 종교의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했다. 그 시대의 독특한 미술품 중 다수가 파괴되었고, 건물들은 해체되어 다른 용도로 쓰였다.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
<왕관을 쓴 네페르티티 흉상>
BC 1340년경, 석회석에 채색, 아마르나의 조각가 투트모시스 공방에서 출토, 베를린, 신 박물관.
제18돵조 때 혁명의 왕 아케나텐의 아내이자 투탕카멘의 장모였던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들 중 아마 가장 유명할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얼굴은 남편의 얼굴보다 미술품에 더 많이 등장하며,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고대 여성들중 하나로 꼽힌다. 이집트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후의 아케나텐)가 21살 때 이집트의 수도를 테베에서 신도시인 아마르나로 옮김으로써 당대의 종교와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암네호테프티는 이전 시대에 당연했던 것들을 뒤엎으며 이집트 종교의 다신들을 거부하고 전능한 유일신인 태양신 아텐을 섬겼다.
이 새로운 종교를 남편과 함께 섬기며 네페르티티가 이집트 왕정과 종교의식에서 보인 뚜렷한 역할은 대중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반영한다. 그녀는 아텐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었으며, 왕과 거의 대등한 지위였던것 같다. 아케나텐은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네페르티티를 가장 총해했고, 둘 사이에 딸을 여섯 명 두었다. 그녀의 이름은 대략 '미녀가 납셨다'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이 뿐아니라 '네페르' 목걸이는 그녀가 자주 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길게 늘어진 금 목 걸이를 말한다. 어떤 이집트 학자들은 아케나텐의 일부 통치기 동안 그녀도 공동 통치를 했다고 생각한다. 무덤 장식에서 그녀는 파라오의 레갈리아(예복이나 휘장 등, 공식 행사 때 사용하는 왕권을 상징하는 장식물들)를 입고 아케나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