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2편)
"평상시 "열에 아홉은 매화와 난을 그렸다." 라고 할 만큼 조희룡은 난을 즐겨 그렸다.
석포(石浦)가 비록 보잘것 없더라도 옥반(玉盤)에 담을 만하다. 하물며 그윽하고 곧은 난 같은 꽃에 있어서랴. 매양 그림을 그릴 때 고아(高雅)한 동이나 단지에 담아 공양한다.
고아한 골동 단지에 담긴 난을 그릴 때는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서 하고 '옛 벼루와 옛 먹'을 사용하였으며 '눈빛같이 흰 종이' 위에 그리는 등 정성을 다 하였다. 그로 인해 기가 맑아지니 어찌 장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 묵란은 묵매나 묵죽에 비해 늦은 시기인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활발하게 그려졌다.
그림에는 문장과 학문의 기운이 있어야 하고 글씨에는 금석적이(金石鼎彝)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이것이 최고의 경지이다. 난도 그림으로, 문장과 학문 이외에 산림의 유정한 운치와 구학과 연하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이것이 올바른 요체다. 가슴 속에 하나의 구학이 있어야 비로소 난을 이야기할 수 있다.
조희룡의 난은 화론에서 뿐만 아니라 화법에서도 젊어서는 김정희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래서 종종 조희룡 묵란이 김정희의 작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