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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우봉 조희룡 (2)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2편)



"평상시 "열에 아홉은 매화와 난을 그렸다." 라고 할 만큼 조희룡은 난을 즐겨 그렸다.

석포(石浦)가 비록 보잘것 없더라도 옥반(玉盤)에 담을 만하다. 하물며 그윽하고 곧은 난 같은 꽃에 있어서랴. 매양 그림을 그릴 때 고아(高雅)한 동이나 단지에 담아 공양한다.
고아한 골동 단지에 담긴 난을 그릴 때는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서 하고 '옛 벼루와 옛 먹'을 사용하였으며 '눈빛같이 흰 종이' 위에 그리는 등 정성을 다 하였다. 그로 인해 기가 맑아지니 어찌 장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 묵란은 묵매나 묵죽에 비해 늦은 시기인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활발하게 그려졌다.
그림에는 문장과 학문의 기운이 있어야 하고 글씨에는 금석적이(金石鼎彝)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이것이 최고의 경지이다. 난도 그림으로, 문장과 학문 이외에 산림의 유정한 운치와 구학과 연하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이것이 올바른 요체다. 가슴 속에 하나의 구학이 있어야 비로소 난을 이야기할 수 있다.
조희룡의 난은 화론에서 뿐만 아니라 화법에서도 젊어서는 김정희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래서 종종 조희룡 묵란이 김정희의 작품으로 오인되기도 하는데, 이는 대부분 김정희로부터 난을 배우던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년기 그의 난은 서예적 법식과 난법을 엄격하게 따를 것을 강조했던 추사와는 달리 자유롭고 거리낌 없는 창작 태도를 강조한다.




上, 김정희 《난맹첩》중〈이기고의(以奇高意)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9×27cm 간송미술관

下, 조희룡 <묵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26.5cm, 간송미술관

 

 

현재 전하는 조희룡 묵란은 김정희의 묵란법이 반영된 것과 자유로운 필법이 두드러진 것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조희룡의 초기 묵란은

정희가 난의 여러 기법을 예시하여 첩으로 묶은 《난맹첩》과 구도나 기법이 유사하다. 김정희의《난맹첩》은 김정희 이후 난을 배우는

은 문인서화가들이 따르는 모범이 되었는데, 조희룡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희룡 작품 중에는 《난맹첩》의 구성이나 포치(布置)등을 배

그린 듯한 작품이 상당수 있다. 김정희의 《난맹첩》은 그가 48세에서 51세 사이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세 살 아래인 조희룡이

이를 참고로 난 그림을 배웠다면 그 시기도 빨라야 40대 후반이 된다. 시와 글씨를 쓰던 조희룡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 아닐까 추측 한다고.

 

조희룡의 초기 묵란법을 잘 보여주는 예가 간송미술관 소장 <묵란>이다.

화면 왼쪽 아랫부분에 간략하게 몇 개의 잎을 사선 방향으로 내고, 엷은 먹으로 꽃대를 그린 후 한 대에 여러 개의 꽃을 그렸다.

화제는 일반적인 한자 쓰는 방향과 차이가 있으나 김정희의《난맹첩》중<춘농로중(春濃露重)> 과 유사한 구성이다.

왼편으로부터 대각선으로 뻗은 난의 흐름을 따라 화제를 적는 방식까지도 김정희의 묵란과 유사하다.

 

김정희의 <춘농로중(春濃露重)>은 난 잎이 단출하면서도 가늘고 길며, 거기에 잎과 같은 방향으로 가늘면서도

건실한 외줄기 꽃대가 뻗어 있다. 조희룡의 <묵란>은 형태와 기법 면에서 김정희의 <춘농로중>과 그의 비슷하나,

김정희의 난이 잎이나 꽃 모두 강하고 힘이 있어 필선이 절제된 데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하다.

 

조희룡은 <묵란>에 "난을 그리는 것은 비록 작은 재주이지만, 성령을 즐겁게 기를 수 있다."는 내용의 화제를 적었다.

인장은 "우봉(又峰)"이라는 호를 새긴 네모난 도장과 함께 아래쪽 빈 공간에 "승란관(崇蘭館)"

즉 '난을 숭상하는 집' 이라는 운치 있는 도장을 함께 찍었다.

 

 

 

 

 

 

 

 

上, 조희룡 <묵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26.5cm, 간송미술관

下, 김정희 《난맹첩》중 <춘농로중>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9×27cm, 간송미술관

 

 

 

 

 

 

조희룡 <묵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3.2×27.5cm,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 소장의 또 다른 <묵란>은 세련된 공간 구성이 일품이다. 화폭의 왼편 상단에 그려진 한 포기 난은 잎 하나가

길게 대각선을 그리며 오른쪽 하단 모서리까지 굽어져 내려오고, 다른 한 잎은 오른쪽 상단을 향해 뻗어 올라가 있다.

짧은 잎들 사이로 두 개의 꽃대가 짧게 올라와 한 대에 한 송이씩 꽃을 피웠다. 이와 같은 구도는 보통 절벽에 돋아난

 괘현란(掛懸蘭)을 그리는 법식(法式)인데 이를 응용하여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난은 간략하게 그리고 화면의 빈 공백에는 화제를 적어 그 뜻을 더하였다.

 

공활한 맑은 바람은

지금이나 옛날에나 얻을 수 있다는데

나이 든 눈이 구해 얻으려니

얻을 수도 구할 수도 없구나.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탁 트인 곳의 맑은 바람을 받는 난을 그리고자 하였으나

나이가 들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화면 오른쪽에는 "그 뜻에 있지 자취나 모양에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난의 형태만 닮게 그린 것이 아니라 고아한 풍치를 표현하려고 했던 그가 난에서 이루고자 했던 경지를 제시한 것이다.

인장은 양각과 음각으로 "우봉"과 "범부시화(凡夫詩畵)" 두 과(顆)를 찍었다. 파격적인 구도뿐 아니라 화제나 인장의 위치도

치밀한 의도 아래 배치함으로써 그가 난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바를 충분히 달성한 작품이다.

 

 

 

 

 

 

조희룡 《위로인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3×27cm, 개인 소장

 

위 <묵란>이 구도에서 파격을 이루었다면 <위로인란(尉勞人蘭)>은 그림과 함께 쓴 화제의 시각이 파격적인 작품이다.

 

문득 열흘이나 닷새 만에는 향기로운 난(芳蘭)을 대하기도 하고 쓴 차(苦茶)를 마시기도 한다.

때로는 미풍(微風)과 가는 비[細雨]로 성긴 울타리를 윤택하게 하고 측간(仄間0에 간 사이에도 속객(俗客)이 오지 않고

좋은 벗[良友]이 모여 항상 스스로 놀란다. 오늘에 있어 얻기 어려운 일이다. 대저 난과 돌을 그리는 것은

천하(天下)에 수고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한가로운 문인의 일상이지만 그 뜻만은 소외된 서민들을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는 화가 정섭의  시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시문, 화풍, 화제, 그림에 대한 생각까지도 정섭의 영향을 받았다.

<위로인란>처럼 화제를 왼편에서부터 오른편으로 적는 방식도 정섭이 화제를 썼던 방식이다.

난법도 기본적으로는 김정희 《난맹첩》구도를 응용하고 있으나 구성이 독특하고 난 잎에 변화가 있다.

난 잎은 대체로 짧은데,  두 개의 잎을 예외적으로 길게 빼 양쪽으로 펼쳐 그렸고, 꽃대도 잎들과 마찬가지로 길고 짧게 나서

난 잎과 어우러져 있다. 이 두 개의 난 잎으로 화면은 자연스럽게 대각선으로 반 나위고 화면 위편에는 화제시가,

오른쪽 하단에는 여러 촉이 수북히 모여 나 있는 난이 그려져 있다.

 

 

 



조희룡 <난생유분>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6.3×44.5cm, 간송미술관

 

위의 묵란들이 김정희에게 배운 난법을 기본으로 약간의 변화를 준 작품이라면, 부채에 그린 <난생유분(蘭生有芬)>에서는극도의 절제와 정결함이 느껴진다. 왼쪽 하단에서부터 선면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잎들과 함께 꽃대도 나란하게 휘어져만개한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잎은 굵기의 변화가 별로 없이 깔끔한 선 하나로 그었는데, 다만 부챗살에 따라 굵고 가는 선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법에서 뜻은 앞서가는데 붓이 미쳐 따라가지 못하여 선이 끊어질 듯이어지는 것을 '의도필부도(意到筆不到)'라고 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자연스럽게 유사한 효과를 내었다.
난 잎의 깔끔한 구성처럼 제목도 간결한 예서로 "난생유분(蘭生有芬)"이라 적었다. '난이 돋아나니 향기가 있다'는 뜻이다.이 화제는 김정희도 횡액(橫額)에 쓴 적이 있는 구절로, 조희룡은 이것을 "한나라 비(碑)에서 따온 것이다." 라고 한쪽에 행서로 썼다.





조희룡 <묵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32×34.2cm, 개인 소장

 

'향설관'에서 그렸다는 관지가 있어 50대 때 작품인 듯.

이전 시기 묵란에서 난 잎은 농묵으로 난화는 담묵으로 그렸던 것에 반해, 난 잎과 꽃을 모두 담묵으로 그렸다.

한 줄기에 꽃송이가 여럿 달린 꽃대가 여러 개일 뿐만 아니라 화심(花心)은 농묵점을 찍어 잎보다 꽃이 훨씬 두드러진다.

그러다 보니 더욱 난만한 느낌을 주게 되어 조희룡 묵란의 자유로움이 잘 드러난다. 화제는 다음과 같다.

 

성난 기운으로 대를 그리고 기쁜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고 한다. 대개 이것은 영롱하고도 투명한 말이다.

그러나 '기쁨과 웃음, 노여움과 꾸짓음이 모두 문장이 된다.'라는 말 보다는 끝내 못한 것이다.

 

그의 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비슷한 구도의 다른 작품에도 쓰여 있다.

 

 

 

 

 

 

 

조희룡 《사군자병풍》중 <묵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60×35cm, 삼성미술관 리움
유배 이후인 60대 시절의 묵란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로'라는 호가 적혀있다.대각선으로 무리지어 난 총란(叢蘭란) 무더기를 위아래로 배열하고 반대편 공간에 빼곡히 제시를 적었다.아랫부분은 엷은 먹으로 잎을 짧게 그렸고, 위로 올라갈수록 더 진한 먹으로 잎도 길고 크게 그렸다. 잎은 특별히 난법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꽃도 난만하며, 꽃술을 나타내는 점도 선명하게 찍었다.미적 안배에 따른 자연스럽게 피어난 난을 그리고자 한 듯하다. 화제도 그러한 뜻을 담고 있다.




조희룡 《사군자팔폭병풍》중 <묵란>과 <석란>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65.4×47cm,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사군자병풍》의 <묵란>과 유사한 화풍을 보인다.

난 잎을 상대적으로 연한 먹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격자로 교차하여 바람에 흩날리듯 분방하게 펼쳐 그렸으며,

농묵으로 잎과 꽃술을 표현한 점이 그렇다. 다만 이 작품은 난을 괴석과 함께 그린 것으로, 유배 시기 돌을 좋아하여 즐겨 그렸던

취향을 반영하듯 돌의 비중이 크다. 《사군자팔폭병풍》중 뾰족한 괴석과 난을 그린 <석란>은 한 방향으로 길게 뻗은 난 잎을

따라 긴 꽃대가 올라간 모양으로 그가 묵란도에 자주 쓰는 구도이다. 조희룡은 이처럼 거리낌 없는 필선의 묵란을 60대 초반인

유배 기간에 많이 그렸던 듯하다. 그가 유배지에서 난을 그리며 쓴 다음 글은 조희룡의 묵란이 분방하다 못해

풀처럼 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장기(瘴氣) 서린 바다, 적막한 물가, 황량한 산과 고목 사이에 달팽이집 같이 작은 움막 속에서 움츠려 떨면서도,

붓과 먹의 일에 손을 대어 때때로 돌과 한 떨기 난을 그린다. 되는 대로 붓을 놀리고, 먹을 튀겨 빗물처럼 흩뿌려서

돌은 흐트러진 구름처럼, 난은 젖혀진 풀처럼 그려놓으니 자못 기이한 기운이 있다.

하지만 알아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 나 혼자 스스로 좋아할 뿐이다.

 

 

 

 

 

 

 


 


조희룡 <묵란>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7×27.2cm, 삼성미술관 리움
질박한 항아리에 하나 가득 난이 담겨 있다. 길고 짧은 난 잎은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한데다 제멋대로 구부러져 있고사이사이 반쯤 피어난 꽃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림의 정법이 자유자재로 변형되어 있다, 난 잎의 화려함과는 달리선맛을 살려 간략하게 그린 항아리는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희룡이 추사체를 배웠지만추사체의 각진 예서보다는 더 둥글고 부드러운 맛이 있는 것처럼, 난법의 형식과 필치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고동기(古銅器)에 난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고인(古人)은 난을 그릴 때 대부분 고아한 동이로 공양했다. 내 경우는 매양 고아한 동기(銅器)인 종정(鐘鼎)이나준뢰(樽罍) 등속을 사용하였다. 대개 구리 그릇을 취하는 것은 땅에 묻힌 지 천년이 되어 흙 기운을 받음이 깊기 때문이다.간혹 구름이나 우레의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은 이들이 지닌 발생의 뜻을 취함이다.
'동기(銅器)가 흙 기운이 깊다.'라는 언급은 남송대의 문인 조희곡(趙希鵠)이 고동서화에 대해 쓴 글에서"고동기에 흙을 넣어 여러 해가 되면 흙 기운이 깊어 꽃을 기르면 선명하고 가자 끝이 빨리 자라며 잘 시들지 않는다.······"라고 한 것에서 취한 듯하다. 난뿐만 아니라 난을 심은 분에 대한 기호도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구도에 같은 화제를 쓴 분란도가 여럿 전한다.



 


조희룡 <분란>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38×13.2cm, 개인 소장
화분은 몸체가 긴 것도 있고 낮으면서 옆으로 넓은 것도 있다. 중앙의 화분은 입술 부분이 매끄럽고 두툼하게 처리되어 있다.각 화분은 양감과 표면 질감을 표현하려 한듯 바탕보다 약간 진한 먹이 붓질을 살짝 더하였다. 서양식 음영법과 유사하다.난 화분 뿐만 아니라 여기에 그려진 난도 60대 조희룡의 자유로운 난법을 보여준다. 겹쳐져 있는 중에 한 두 잎만을 길게 빼어 변화를 주었다. 길게 뻗은 난 잎 선을 따라 긴 꽃대를 그려 넣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희룡 난 꽃의 특징이다. 분란과 대련(對聯)을 이루는 <석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난을 그렸다. 위 아래 놓인 두 개의 바위 주위로 빼곡히 난이 둘러 있어 야생의 느낌이 강하다.




 


이하응 <석란>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19×61.5cm, 개인 소장
이하응도 김정희의 《난맹첩》을 모본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지만 두 사람의 난 화풍은 판이하게 다르다.스승이나 본이 같다고 하여 작품이 같을 수는 없다. 이는 조희룡과 허련이 모두 김정희르 스승으로 여겼지만 산수도에서 다른 화풍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스승인 김정희도 두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 데서도 알 수 있다.


 



 


김정희 <불이선란(不二禪蘭)>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55×31.1cm, 개인 소장
조희룡이 난법에 대해 김정희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다'고 비난했던 것은 역으로 조희룡 난 그림의 특징을 설명해 준다.조희룡의 묵란에서는 김정희가 <불이선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압축적인 필법이 아닌 화려하면서도 분방한 필치가 느껴진다.조희룡의 묵란은 김정희로부터 나왔지만 그를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이루었고, 이는 묵란에서만이 아니라 묵매나 묵죽에서도 볼 수 있는 조희룡만의 개성적인 면모이다.




 


조희룡 <죽석>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6×34cm, 개인 소장
조희룡은 자신이 대나무를 잘 그리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린 대나무는 난이나 매화 그림의 열에 하나를 차지하는데 개개 정판교를 배운 것이다.판교를 어찌 쉽게 배울 수 있겠는가? 판교에게는 판교의 재력(才力)이 있는데 나에게는 판교의 재력이 없으니, 비록 그것을 배우려 하더라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나의 재력이 미치는 곳에 맡겨 한 가지 법을 만들 따름이다.
<죽석>은 대나무를 괴석과 함께 그렸다. 구멍이 뻥 뚫린 괴석은 윤관선을 둘러 형태를 잡은 후 담묵을 칠하였다.괴석이 화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있는데, 그가 유배기에 그린 본격적인 돌 그림에 비해 자연스러운 맛이 덜하다.괴석 뒤편의 댓잎도 무질서하며 후대 그림에 비해 힘이 없다. 화제 말미에 "유운관에서 크게 열이 나는 가운데  병든 팔을 한번 시험하다."라고 적고 있음도 감안해야 할 터이다.

 




 


조희룡 <흉중지죽>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8×33cm, 개인 소장
앞서의 <죽석>에 비해서 필력이 힘차다. 사선 방향으로 잎이 길게 펼쳐진 대나무 가지의 끝 부분만을 확대해서 그려 꽉 찬 죽엽이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줄기는 가늘고, 일필로 힘 있게 쳐올리기 보다는 조심스럽게 그어 올린 듯하다. 잎은 길고 무성하며먼저 그린 잎이 채 마르기 전에 빠른 속도로 다음 잎을 그려 겹쳐진 부분이 번져 있는 경우도 있다. 변화를 주는 소밀(疎密)의 안배가부족하다고 해서 초기작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죽엽이 변화무쌍하고 분방한 특징올 보이는 60대 이후 작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초기의 미숙함이라기 보다는 고졸(古拙)함이나 졸박(拙朴)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필법이나 화보를 방(倣) 한다면 참고한 모본에 머물 수 밖에 없는 한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두 폭 모두 제사(題辭)에는 독창적인 화경(畵境0을 추구하고자 했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나는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초서를 쓰는 것과 같다고 말하노니, (댓잎) 셋을 모이게 하고 다섯을 취해 그려도 모름지기 구애받음이 없다. 희미한 달빛 창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스스로 터득하였는데, 비바람 치는 중에 다시 보니 모호해졌다.
나의 대에는 원래 법이 없으니, 다만 가슴속의 생각을 그렸을 뿐이다.
두 폭 모두 전면 하단의 댓잎은 농묵으로 그린 반면 뒷부분의 잎은 담묵으로 그려 시각적인 변화를 유도하였다.공기원근법을 적용한 것으로 키 큰 대나무의 윗부분 또한 멀리 있다고 여겨 흐리게 표현한 경우도 있다.대나무 줄기를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조희룡 《매죽병풍》중 <신죽>, <성죽>, <통죽>조선 19세기, 색지에 수묵, 각 126.8×44.7cm, 국립중앙박물관
8폭 그림 중에서 세 폭이 대나무 그림이다. 신죽(新竹), 성죽(成竹), 통죽(筒竹)으로 이루어진 묵죽은 모두 '人'자형의 죽엽이중첩되어 있으며, 죽절(竹節)은 '沈' 자에서 점을 뺀 모양으로 <신죽>은 괴석과 함께 그렸다. 죽엽 사이에 농담의 변화를 주었으며그 대비가 자연스럽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화면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농담의 점을 흩뿌린 조희룡 특유의 석법(石法)도 보여준다.
<성죽>은 화면 중앙으로 굵은 줄기를 기세 좋게 수직으로 올리고 줄기 끝 부분에 하늘을 향해 잎을 펼치고 있다.반면 끝이 부러진 <통죽>은 <성죽>에 비해 엷은 먹을 써서 해묵은 고죽(枯竹)의 마른 느낌을 살렸다. 탄은(灘隱) 이정(霆)이나 수운(峀雲) 유덕장(章) 통죽의 전형적인 특징이 보인다.




 

 
유덕장 <통죽>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99.3×65cm, 고려대학교박물관

조희룡은 <통죽>에 쓴 화제 중에 "학판교법(學板橋法)"이라 하여 판교 정섭의 묵죽화법을 말하고 있다.허나 조희룡의 작품은 정섭의 화풍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정섭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는 자신의 묵죽 역사를 말하는 것일 뿐, '정섭의 정신을 배웠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정섭 <탁근난암(托根亂巖)>청 18세기, 종이에 수묵, 160.8×51.7cm, 남경박물관
정섭의 사죽론(寫竹論)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다음 글은 조희룡과 정섭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서법에 항관(行款)이 있으니 대를 그림에도 항관이 필요하다. 서법에 농담(濃淡)이 있으니 대를 그림에도 농담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판교의 대 그림이 삼매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고요한 방에서 향을 사르며 옛 예서를 배우니 가슴속에 대가 있다는 것, 그 말을 잊어버렸네. 비로소 문자가 그림에 관계됨을 알게 되니 이는 문수보살의 불이문(不二門)이라네." 이것은 내가 판교의 말을 보기 이전의 시이다. 판교가 과연 나의 견해를 먼저 터득한 것일 뿐이다.
정섭의 죽법을 배웠지만 자신의 법으로 그리고자 했던 조희룡 특유의 자신감이다.




 


조희룡 <통죽>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33×53cm, 간송미술관
조희룡의 묵죽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만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임자도 유배 동안 조희룡은 거처 주변의 무성한 대나무를 보면서 얻은 감흥과 의취(意趣)를 화폭에 담아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 뒤엔 황량한 산 문 앞에 고래파도 일렁이는 가운데, 크고 작은 대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부딧치며 소리를 내고좌우에서 비쳐주며 훤칠한 키로 옥처럼 우뚝 서서 천연스레 웃고 있다. 그러니 누가 벗  떠나 외로이 산다 하겠는가?여기서 오히려 군자 육천 명을 얻었다.
'성난 기운으로 묵죽을 그린다.' 는 말을 인용할 만큼 유배 기간의 참담한 심정을 대나무에 담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렸던 것.여러 폭으로 구성된 조희룡의 묵죽 작품 중에는 끝이 부러진 대나무가 늘 표현되어 있다. 끝부분은 비백(飛白)이 분명하여, 마치 화가 나 힘껏 그어 올린 듯한 필획의 느낌이 잘 드러난다. 3년에 걸친 유배는 적지 않은 충격이자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화폭에 옮겨져 그림으로 터져 나온 것이 매화가 되고, 난이 되고, 대가 되었다.




 


조희룡 《사군자병풍》중 <묵죽>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60×35cm, 삼성미술관 리움
사선으로 화면을 분할하며 죽간을 뻗어 올린 후 아랫부분에는 농묵으로 잎을 중첩하여 표현하였다.먼저 그린 잎이 채 마르기 전에 다음 잎을 그려 교차되는 부분이 번져 있다. 복잡하게 겹쳐있지만 답답함 보다는 시원스럽다.번짐 효과는 묵매나 묵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를 의도적으로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화제에는 "소향설관 가을날 식재의 법을 방하다.[小香雪館秋日倣齊法]" 라고 쓰여 있다. 식재는 원나라 묵죽화가 이간(李衎)의 호. 이간은 최초로 대나무의 계통을 서술하고 이를 그림과 함께 엮은 『죽보상록(竹譜詳錄)』을 편찬한 인물이다.





 


조희룡 《묵죽팔폭병》 제2폭 부분



 

            제4폭                                         제3폭                                            제2폭                                    제1폭         
조희룡 《묵죽팔폭병》조선 19세기, 색지에 수묵, 각 126.8×44.7cm, 국립중앙박물관

 

       제8폭                                         제7폭                                       제6폭                                      제5폭

 

조희룡 묵죽의 완숙한 경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성과 배치가 다양하고, 전체적으로 생기가 있다.
농담으로 표시한 원근법은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유배로 인한 울울한 심사가 반영되었는지 다소 복잡한 구성을 보인다. 구도뿐 아니라 방향에 따라 힘을 가하여 가늘고 굵음의 변화가 크고 다양하며, 마치 글씨를 쓰듯이 필획에 힘이 들어가 있다. 각 폭에는 화제를 적어 그 뜻을 더하였는데. 왕원기의 시를 적기도 하고 자신의 묵죽을 정섭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각 폭에 그려진 대나무는 한 그루 혹은 여러 그루가 모여 있기도 하고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도 하다. 조희룡은 자신의 필력과 대가를 배운 안목, 그리고 실제 대나무를 보고 느낀 바를 자신의 감성과 함께 풀어냄으로써 초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 있는 작품을 그려냈다.




 


조희룡 《사군자병풍》중 <묵국>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60×35cm, 삼성미술관 리움
조희룡은 주로 매화와 난을 그렸고, 그 다음으로 대나무를 그렸으며, 드물게 국화를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한와헌제화잡존』에 실린 다음의 제화(題畵)는 묵국에 대한 그의 이른 시기 생각을 일러준다.
옛 사람들은 병에 꽃힌 꽃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나는 비록 그림에서이지만 매화를 한 가지도 꺾으려 하지 않아보배로운 병에 꽃힌 산호가지처럼 대했으니 그 애지중지함이 이와 같았다. 다만 일찍이 병에 꽃은 국화를 그리고 시를 지은 적이 있다."설령 뿌리가 착근(着根)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함양(涵養)이 또한 깊게 되도록 하였노라.
국화는 매화만큼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그의 국화 그림이 많지 않은 듯.현재 조희룡의 묵국은 국화도만 따로 그려진 것은 없고, 한 벌로 그린 사군다 병풍 가운데 남아 있다.

<묵국>은 가는 줄기 끝에 만개한 몇 송이 꽃을 그린 작품으로 'S' 자형 구도를 보인다.

꽃은 위가 평평하고 꽃잎이 긴 평정장판식(平頂長瓣式)이다. 그림 왼편 화제엔 "단적도인이 백양산인의 법을 시험해 보았다.

[丹篴道人白陽山人法]" 라고 적었다. 백양산인은 명대에 화훼화(花卉畵)로 유명했던 진순(陳淳)의 호인데, 그의 묵국도는

『당시화보(唐詩畵譜』와 『고씨화보(顧氏畵譜)』에도 실려 있다. 화보에 실린 진순의 것과는 구도만 비슷할 뿐,

 세부표현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실제로는 자신만의 법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조희룡 《사군자팔폭병풍》중 <국화> 두 폭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65.4×47cm, 국립중앙박물관

 

두 폭 모두 줄기는 가늘고 구불거리며 꽃잎은 길고 활짝 핀 대담한 구성이다. 《사군자병풍》의 국화가

잘 가꾸어진 대국(大菊) 종류라면, 《사군자팔폭병풍》중의 국화는 꽃이 작은 야생의 들국화 같은 종류이다.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듯 언덕과 절벽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국화를 선비의 꽃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가 「우일동합기」에서 그것까지 그릴 여유는 없었다고 했던 것처럼

그리 썩 좋아하거나 그림의 소재로서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던 듯하다.

 

 

 

 

 

 

 

조희룡 <비법산수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수묵, 56×32cm, 개인 소장

 

필치나 구도의 미숙함으로 보아 초기 수련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이 병풍은 조희룡 외에 이재관, 신명연, 강진 등

젊은 시절 그와 친했던 화가들과의 합작품이다. 북송대 문인화가 미불의 화법인 미점법(米點法)을 적용하여 안개 낀 습윤한 산수를

그린 것이다. 화면에 쓴 제시에 "내가 흉억(胸臆)을 다해 그려내어 매섭고 용렬하나 창창한 법 밖에서 도리어 법을 구하였다.

미원장(미불)을 따랐다" 라고 썻다.  자신의 그림만이 아니라 함께 병풍을 그린 이재관, 신명연, 강진의 그림에도 각각 제시를 적었다.

이들 사잉서 그의 시재(試才)가 뛰어났음을 알려준다. 정황 상 조희룡의 산수화로서는 이른 시기인 50세 이전의 작품으로 본다고.

 

 

 

 

 

 

조희룡 <산수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40.5×133cm, 경북대학교박물관

 

이 작품은 <미법산수도>와는 필법도 구성도 확연히 다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경에는 각진 바위들이 서 있는 듯

늘어선 언덕에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나 있으며, 소나무 아래 평평한 바위에는 남종문인화풍 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자가 놓여 있다. 화면 중앙에는 폭포가 흐르는 산이 높이 솟아 있으며, 산 위 공간에는 제시가 적혀 있다.

이 그림은 이재관의 <천지석벽도(天地石壁圖)>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여 눈길을 끈다. 화폭의 크기와 비율이 달라 구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화면 하단에 모여 있는 각진 바위들이나 소나무, 강한 물줄기의 폭포가 있는 등 유사한 소재들로 구성되었다.

 

 

 

 

 

 

 

左, 이재관 <천지석벽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35.6×43.3cm, 개인 소장 

右, 『고씨화보』<황공망산수도>

 

그런데 이재관의 <천지석벽도>에는 "천지의 석벽(石壁), 황산의 괴송(愧松) 이것이 원강(元剛, 이재관)이 격을 변화시켜 새로운

묘처를 만들어낸 점이라 하였다. 김정희는 이 작품을 황공망 <천지석벽도>의 뜻을 따르되 나름대로 재해석을 가한 작품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고씨화보』<황공망산수도>에는 명확히 표현되지 않은 소나무를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오른편 바위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를 유난히 크게 그린 것으로 볼 때 화보를 곧이곧대로 방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을 김정희도 새로운 묘처라 한 듯하다.

아래는 황공망의 <천지석벽도>를 감정한 김정희가 소장자인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천지석벽도는 여러 나무가 있는 한 숲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제일층(第一層)이 되고, 숲 밖 계곡 건너편에 바로

큰 산을 일으켰는데 산의 우측에는 못(池) 하나가 있어 인가가 이 못해 임해 있습니다. 못가에는 가파른 절벽을 세워놓았고

절벽 틈에서는 폭포가 나와 내리 쏟고 있는데, 여기에는 잔도(棧道)를 가까이 위치시켜 수구(水口)가 드러나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천지석벽의 제목을 정하게 된 곳입니다. 또 소나무 네 그루가 높이 솟아 있고, 돌 곁에는 모옥(茅屋)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체로 화면 전체를 통틀어 오직 큰 산 하나만이 주축이 되고, 산봉우리 밖으로는 작은 산 두 층을 배열하여

담담하게 국외(局外)에 머물러 있게 하였으며, 큰 산과 작은 봉우리가 서로 연결하여 일어나고 엎드리고 하는 것으로써

다함이 없는 운치를 거두어 마무리 합니다. 그 밖에도 아지랑이 기운이 화면 전체에 넘치어

그 혼륜(渾侖)함과 웅후(雄厚)함이 참으로 장관에 속합니다.

 

김정희가 설명한 <천지석벽도>의 내용과 조희룡의 <산수도)가 매우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조희룡 <방운림산수도>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27.6cm, 서울대학교박물관
앞에서 본 작품들과는 달리 소폭의 간일(簡逸)한 산수화이다. "유운관 겨울에 운림의 소경을 방한다."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이 산수도의 뜻이 원나라 화가 예찬의 그림에 있음을 밝혔다. 낮은 언덕, 키 큰 나무, 납작한 지붕의 정자 등은 예찬의 그림에 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소재들을 간략하게 그려내는 것도 예찬식 산수화의 특징이다. 유운관은 조희룡이 주로 50대에 사용하던 당호로 추정된다. 전경과 먼 산만이 표현된 간단한 구성은 고람 전기의 <계산포무도>와도 비슷한 예찬식 구도이다.화보식 산수도에서 점차 자신의 화풍으로 발전되어가는 단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찬 <용슬재도(容膝齋圖)>원 1372년, 종이에 수묵, 74.7×35.5cm, 대북고궁박물관




 

 

            

 

左, 조희룡 <산수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60.5×30.4cm, 삼성미술관 리움

右, 조희횽 <황산냉운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24×26cm, 개인 소장

 

납작한 정자가 있는 예찬식 구도는 조희룡이 산수도에서 가장 즐겨 사용한 구도였던 것 같다. 대련 형식의 <산수도>도

 이와 같은 구도를 상하로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구성을 보인다. 다만 작품에서는 <방운림산수도>에서는 생략되었던 중경의

강물이 있는 강안이 길게 펼쳐져 있어 근경과 중경 사이에 거리감이 조성되어 있으며 구도와 필치가 더 안정되어 보인다.

화축 상단에는 북송대 문인화가 소식과 황정견 등의 화론을 인용하여 빽빽하게 적어 놓았다.

종이는 얇은 금 조각으로 장식효과를 낸 분당지(粉唐紙)로 화면 전체에 마치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하다.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 는 지금까지 본 여러 산수화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보인다.

물가 작은 집에 키가 큰 나무가 서 있고 집 주변에 대나무가 둘러쳐진 전형적인 남종화풍의 산수도이다. 좁고 긴 화면에 산이

급하게 솟아 올랐고 언덕과 나무를 그린 필치는 거칠고 자유분방하다. 그럼에도 어딘지 암울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러한 분위기의 원인은 그림 화제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며 눈에 보이는 것이란 거친 산,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어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으니

화가의 육법이라는 것이 어찌 이를 위해 생긴 것이랴. 해수(海叟).

 

 

 

 

 

 

 

 

조희룡 <계옥추심>

조선 19세기, 비단에 수묵, 20×31cm, 개인 소장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펑사낙안(平沙落雁)'의 시어를 동원한 전통적인 가을 풍경으로 스산한 느낌이다.

그려진 집도 빈 정자가 아닌 작은 오두막이다. 대나무가 둘서선 이 집은 그가 임자도 유배지에 대나무가 있었노라

 했던 것과도 부합된다. <황산냉운도>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을 표출시킨 작품이라면

<계옥추심>은 유배생활의 격정을 가라앉힌 상태에서 그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조희룡 <제경소요>

조선 19세기, 비단에 수묵, 22×31.5cm, 개인 소장

 

키 근 나무 몇 그루, 근경의 강안과 화면 중앙을 가로 지르는 강물, 낮은 산이 펼쳐진 풍경으로 산 위쪽 여백에는 제문이 빽빽하다.

"예부터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들이 꼭 그림으로써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림 그리는 일에 조예를 가진 사람이 대대로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내용으로 『개자원화전』「청재당화학천설(靑在堂畵學賤設」중 '중품(重品)'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강희언 <세한청상도>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9.2×22.8cm, 간송미술관

 

북송대 은일 처사 임포는 항주 서호 근처 고산(孤山)에 매화를 심어놓고 20여 년 동안 성시에 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임포의 삶은 은거를 꿈꾸는 많은 선비들의 이상이었고, 이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이 '매화서옥도'이다.

 '매화를 감상하는 감실(龕室)이 있는 집' 이라는 뜻으로 '매감도(梅龕圖)'라고도 한다.

17세기 학자 이상(李翔))의 『타우유고(打愚遺稿)』에는 임포의 고사을 딴 매학적(梅鶴亭)을 짓고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매학정도>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당시 명필(名筆)이었던 황기로의 정자로써 임포처럼 살고자 했다는 내용이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서 임포의 삶은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매화도가 다수 그려진 것에 비해 전하는매화서옥도는 18~19세기 작품이 대부분이다.

 전하는 매화서옥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 바로 위 그림으로 초옥에 앉은 선비가 창밖의 매화를 감상하고 있고,

초옥 뒤에는 하얗게 핀 매화와 더불어 대나무 숲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구성은 1697년에 초간된 『개자원화전』에 실린 <남전숙[영]화서호도(藍田叔[瑛]畵西湖圖)>와 유사하다.

임포가 서호 가에 살았기 때문에 <서호도>라 한 것이다.

 

 

 

 

 

 

 

 

左, 『개자원화전』, 「모방각가화보」중 <남전숙[영]화서호도>

右, 『개자원화전』, <이영구매화서옥도>

 

조선시대 매화서옥도의 유행은 『개자원화전』 유입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산냉운도>를 비롯한 조희룡의 산수도 몇 점이 현실에서이 거처를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라면, 이상 속의 거처는

매화서옥도에서 볼 수 있다. 조희룡은 매화서옥도를 여러 점 그렸고, 이 주제는 당시 여항화가들 사이에 유행처럼 그려졌다.

19세기 매화서옥도 유행의 배경에는 중국을 자주 왕래했던 추사 김정희 일가의 폭넓은 교유가 있었다.

 

 

김정희의 동생 김명희는 1823년 부친 김노경의 사행(使行) 길에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가 청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의 제자 난설 오숭량과 교류하게 된다. 오숭량은 당대의 이름난 시인이자 매화 애호가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매화서옥'을 다농(茶農) 장심(張深)이라는 화가에게 부탁하여 그려 받고, 여기에 시를 짓고 친구들의 제를 받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명희도 장심에게 <매감도>를 청하여 그려 받았고, 귀국하여 김정희와 신위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이 그림을 감상하였다.

 

 

 

 

 

 

 

 

左, 조희룡 <매화서옥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30×32cm, 국립중앙박물관

右, 조희룡 <매화서옥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2×38cm, 개인 소장

 

조희룡도 장심의 <매감도>를 보았던 듯, 왼편 그림 서문에 "일찍이 본 장다농 <매감도>의 뜻을 방하여 그렸다."라고 적었다.

마치 눈꽃이 내리는 듯 매화가 활짝 핀 가운데 한 인물이 앉아 있는 매감이 있고 그 위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뒤편에는 푸른 담채를 쓰고 윤곽선만으로 형태를 잡은 큰 산이 그려져 있다.

 

우측 개인 소장 <매화서옥도>에 쓴 화제에서는, 이전에 장다농의 <매감도>를 보았다고 언급한 후 이번에는 "대나무는

잘라내고 그 자리에 산봉우리 하나를 그려 넣는" 등 약간의 변화를 주어 다시 그려보았다고 하였다. 화제의 내용인 즉,

 

일찍이 장다농의 <매감도>를 보았는데 필의가 노숙하고 묵기(默氣)가 영롱하여 놀랍고 기뻤다.

감의 앞뒤 주위가 매화로 둘러사여 매화 외에는 그린 것이 없었다. 산기슭은 순전히 쭉쭉 뻗은 대나무로 빈 곳을 메꿔

그 울창함이 귀에 울리는 듯 특별한 아취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매번 꿈속에서만 그리워 하였다.

어느 날 비오는 창가에서 외롭고 적적한 가운데 그 뜻을 부치니 저절로 마음속 생각이 그려졌다.

대나무는 지워버리고 근처 봉우리 한 모퉁이로 보충하였다.

 

 

 

 

 

 

 

 

조희룡 <매화서옥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06×45.4cm, 간송미술관

 

조희룡 매화서옥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매화서옥도>이다.  가파른 산기슭 절벽 아래 나지막한 서옥이 있고

 주변은 온통 만발한 매화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다.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온 산에 매화가 만발한 가운데

서옥 안에 좌정한 선비는 병에 꽂은 매화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우측 암벽에 적힌 발문 내용은 이렇다.

 

 

좀먹은 상자에서 한 장의 묵은 종이를 발견했는데, 이십 년 전에 내가 그린 매화서옥도였다.

대개 유희스런 필치이지만 자못 기이한 기운이 있고, 연기 그을음에 절어서 거의 백 년쯤 된 옛 그림 같았다.

그림으로 된 매화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펼쳐보고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생석(三生石) 위에 있는 느김이 든다. 단로.

 

이 그림에서 앞 언덕이나 뒷산에 찍힌 분방한 점이나 매화 줄기를 그린 붓질은 그의 매화도 중 60대 전후의 필치이다.

흐린 겨울의 적막한 분위기를 압도하는 매화의 풍치는 화면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조희룡의 예술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매화와 산에 표현된 서예적인 필치는 작가의 격정이 분출되어 작품에 몰입했을 때의 경지를 지칭했던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다' 는 것으로, 사물의 외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뜻을 반영한 듯하다.

각별한 매화벽이 있었던 조희룡에게 매화서옥도는 단순히 임포의 고사를 그린 그림이라기 보다는

매화를 좋아하여 매화에 묻혀 살기를 원했던 자신의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장심의 <매감도>를 본 것이 37세 무렵이고 이를 토대로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국립박물관 소장 <매화서옥도>나

개인 소장 <매화서옥도>와 간송미술관 소장 <매화서옥도>의 필치 차이는 확연하다. 매감(梅龕) 옆의 매화나무를 그린 필치도

개인 소장 <매화서옥도>는 한 붓으로 그려 직선에 가까운 반면 간송미술과 소장 <매화서옥도>는 거칠고 분방한 붓질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붓질의 차이는 산이나 근경의 언덕에 찍힌 이끼점에서도 드러단다. 필치나 구도에 자신감이 넘치며,

필선에 굵고 가는 비수(肥廋)가 강하여 파격적인 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전기 <매화서옥>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9.4×33.3cm, 국립중앙박물관

 

"역매 형이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 고람이 그리다."라는 관지(款識)가 있어

당시 역관이었던 역매(亦梅) 오경석에게 주기 위해 그려진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 문인들이

여항화가들의 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중국을 래왕했던 오경석과 전기와의 관계는 매우 주목된다 해야겠다.

전기의 매화서옥도는 지금은 몇 폭만이 남아 있지만 그가 여덟 폭 병풍에 매화서옥도를 그렸고

그것은 마치 향설해(香雪海)에 들어간 것 같은 울창한 모습이었다는 기록이다.

 

 

 

 

 

 

 

 

김수철 <계산적적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9×46cm, 국립중앙박물관

 

간결한 필치에 맑은 설채(設彩)를 쓰는 산수화가로 알려진 김수철(金秀哲)의 그림 또한 임포의 고사를 담은 매화서옥도이다.

화면 상단 여백에 "계산은 고요하고 물을이 없어도, 임 처사의 집을 잘도 찾아가네."라는 화제가 있어 시의 앞부분을 따

<계산적적도>라는 제목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매화서옥도 형식으로, 멀리 주산 아래로 물이 흘러내려오고 그 한편에 있는

높은 언덕에는 매화에 둘러싸인 서옥이 자리 잡고 있다. 서옥에 앉은 붉은 옷을 입은 은자는 전기의 <매화서옥도>에서  

다리를 건너오는 오는 인물을 연상시킨다. 조선 전 시기를 통틀어 매화서옥도는 19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고,

그린 사람들 대부분이 여항화가였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들에게 매화서옥도는 임포의 고사를 그린

고사도가 아닌 자신이 곧 임포가 되어 매화에 묻혀 지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었다.

 

 

 

 

 

 

 

 

이명기 <미불배석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05.7×58.7cm, 삼성미술관 리움

 

돌은 자연의 삼라만상 중 변하지 않는 존재 가운데 하나다. 중국 북송대 화가 곽희(郭熙)는 그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암석은 천지의 골격'이라고 하여 자연을 지탱하는 중심 불체로서 견고하고 깊어, 그림으로 그릴 때 얕게 드러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고려말의 선비 이곡(李穀)은 그의 <석문(石門)>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바위를 칭송하였다.

 

암석은 두터운 땅속에 뿌리를 박고 웅장하게 꽂혀서 위엄 있는 모습으로 거해(巨海)를 진압하는가 하면,

만 길 위에 홀로 우뚝 서서 어느 물건에도 요동되는 일이 없고, 구천 깊이 그윽하게 묻혀 있으면서

어느 물건에도 침해를 당하지 않는 가운데, 하늘과 더불어 시작하고 땅과 더불어 마감하니,

그러고 보면돌의 덕이 후하다고 할 것이다.

 

돌에 관한 송대 미불의 고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임강(臨江)의 태수로 부임하여 괴석을 접하자 돌을 향해 절을 하며

"내가 석형(石兄)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스무 해나 되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고사가 전해지면서

 '미불배석도'라는 고사도(故事圖)가 무수히 그려졌다.

 

 

 

 

 

 

 

 

 

김유근 <괴석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4.5×16.5cm, 간송미술관

 

김정희와도 친밀했던 황산(黃山) 김유근은 돌 그림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괴석도는 갈필을 써서 간일하고 문기 넘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겨울 밤 추사 김정희를 위해 그렸다."는 <괴석도>에 그는 정신이 뛰어나서 귀한데 하필 모양 닮은 것을 찾겠는가. 함께 좋아할 듯해서 보내니 벼루 놓인 곳에 두게나. 라고적어 보냈다. 돌을 그릴 때에도 형태를 닮게 그리는 형사(形似)보다는 그 내면의 정신성을 귀하게 여겨 굳이 닮음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희룡도 돌을 좋아하는 애석(愛石) 취미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조희룡이 본격적으로 괴석을 모으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은 유배지인 임자도에 있으면서부터였다.유배생활의 답답함을 괴석 채집으로 보냈고, 그렇게 모은 괴석이 대숲 속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도 말한 바, 서울에 있을 때는 맛볼 수 없었던 탁 트인 아취였던 것이다. 조희룡의 괴석 수집은 괴석도로 작품화 되었다. 그가 돌에서 취한 아름다움은 '괴'와 함께 '추'로 집약된다.






조희룡 <석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26.5cm, 간송미술관

 

괴석의 거칠고 추한 모습을 그리기 위해 그는 바위를 그릴  때는 담묵으로 윤곽을 한 후

특별히 준법을 쓰지 않고 크고 작은 점을 찍어표면 질감을 나타내었다. 그도 처음엔 기존의 여러 준법을 써보았을 것이다.

허나 여러 준법을 써본 결과 우점준과 타대준을 썼을 때만이 돌의 진면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자주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만큼 돌 모양은 제각각 변화무쌍하기 때문이었다.

유배 시절에 그린 괴석도는 이처럼 점(點)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작품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하늘이 바다를 보게 해주매 고래물결에 붓을 적셔 이에 벽과자(劈窠字)로써 거처하는 곳에 편액 걸기를

'수매수석려(壽梅壽石廬)'라고 하였다. 석(石)자는 바닷속에서 취해온 품목이고, 매(梅)자는 곧 스스로 그린 것이요,

수(壽)자는 일반 용법대로 한 것이다. 요즈음 돌을 그린 것이 모두 이 돌에서 가져온 것이다. 농묵과 담묵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종이 위에 떨어뜨려 큰 점 작은 점을 윤곽의 밖까지 흩뿌려, 농점은 담점의 권내(圈內)로 스며들게 하고 담점은 농점의 테두리에

서로 비치게 하니, 준법을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기이한 격을 이루게 된다. 이 법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먹 쓰기를

영묘하고도 활기 있게 한 뒤에라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한 점의 먹일 따름이다.

 

돌 그림에 묵점을 흩뿌려 표현하는 법은 그가 거침없는 붓질로 마음속의 흉억(胸臆)을 그려냈다고 하는

 '광도난말'의 경지와도 통한다. 유배 후 그의 매화도에는 거침없는 필치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쩍 많아진 괴석도에 표현된 다양한 묵법은 유배기에 응어리진 가슴속 울분의 표현이자

노년기 그의 자유로운 필묵의 경지가 최대로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上, 조희룡 <고목죽석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12.9×29.8cm, 서울대학교박물관

下, 『개자원화전』, 중 <고목죽석도>

 

괴석과 함께 고목, 대나무를 함께 그린 <고목죽석도>에서도 조희룡 돌 그림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고목이나 대나무 또한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 셋은 삼청(三淸)이라 불리며 문인화의 주요 소재로써 함께 다루어졌다.

 

 

 

 

 

 

 

 

조희룡 <죽석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60.5×30.4cm, 삼성미술관 리움

 

가늘고 긴 괴석을 중심으로 마른 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지면은 짧게 그은 피마준을 겹쳐 그린 후 윗 부분에

진한 먹으로 이끼점을 세워 찍었고, 괴석에는 부분적으로 마른 붓질을 가하여 음영을 나타내었다. 마치 기둥 모양 같은 괴석은

매우 독특하다. 조희룡은 화면 아래쪽에 쓴 제사에서 이 그림의 독특함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나의 그림은 본래 법이 없이 다만 가슴속의 뜻을 그릴 뿐이다. 그리고 기록한 여러 글은 남에게는 미치지 않겠지만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다. 넓은 천하에서 마음을 함께하는 사람과 공유할 것이다.

 

 

 

 

 

 

 

 

정학교 <괴석도십폭병풍> 중 제4폭(右), 제6폭(左)

1914년, 비단에 수묵, 196×40cm, 국립고궁박물관

 

 

 

 

 

 

 

조희룡 <군접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2.9×29.8cm, 국립중앙박물관

 

사군자와 산수, 괴석 이외에도 조희룡은 <군접도(群蝶圖)> 한 점을 남겼다.

그의 <군접도>는 긴 화축(畵軸)에 수없이 많은 나비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탕 금당지의 금박과

어우러져 더욱 화려하다. 나비의 섬세하면서 사실적인 표현도 아름답지만 그가 예술가의 몰입의 경지에 비유한

 '나비가 훨훨 낢에 이르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조희룡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한축은 동양회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감 중 하나인 '담(淡)'에 있다.

장자 미학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평담천진(平淡天眞)'의 경지이며, 현실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조희룡이

 '나비가 훨훌 나는 경지에 이른다' 고 했던 마음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사전적 의미에서 '담(淡)'이란 농(濃)'의

반대되는 말로, 맛이 엷거나 물결이 잔잔하고 물색이 옅은 것." 을 말한다. 나아가 사물의 특성이나 사람의 품성을

나타낼 때도 담백하다는 표현을 쓴다. 『노자』에서는 "도(度)를 말 한다면 담(淡)하여 맛이 없는 것 같고,

 보더라도 보기에 부족하고 들어도 듣기에 부족하고, 사용하더라도 부족한 듯하다." 라고 하였다.

담담한 상태가 도의 경지에 이른 상태라는 뜻이다.

 

『중용』에서는 "군자의 도는 담담하나 싫증 내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유가나 도가에서 '담'은 인격과 문혹, 예술면에서 문인들이 추구하는 도의 지극한 경지였다. 어느 경우에나 요란하거나

번잡하지 않으면서진실되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노자』에서 비롯한 평담(平淡)의 미학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와

 이들을 흠모한 명 · 청대 학자들에 의해 강조되었고, 동양 예술에서 줄곧 가장 영향력 있는 미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 진게유(陳繼儒)는 동기창의 저서『용대집(容臺集』 「서(敍)」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모든 시문가(時文家)는 객기(客氣), 시기(市氣), 종횡기(종횡氣), 초야(草野氣), 금의옥식기(錦衣玉食氣)를 모두

김매듯이 없애버려서, 미세한 것이라도 가슴속에 스며들어 손, 발, 입을 통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늙어가면 점차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점차 형식을 떠나게 되며, 형식을 벗으면 점차 평담 자연에 가까워진다.

 

조희룡은 담백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대표적 그림으로 난 그림을 들었다.

그는 난 그림은 '담담한 마음으로 성정을 기르는 것' 이라며 난에 쓰는 제사(題辭)에서도 간결함을 추구하였다.

 

난 그림에는 오언절구의 유한한 시가 적당하고, 칠언고시 같이 침웅한 편은 적당하지 않다.

유인(幽人)을 대접하면서 종교(鐘鼓)와 생용(笙鏞)으로 하는 것과 같아서이다.

 

 

 

 

 

 

 

 

허련 <방예운림산수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9.3×25.4cm, 서울대학교박물관

 

19세기 김정희를 비롯한 문인사대부들은 예찬과 황공망 등의 소산(蕭散)하고 간일(簡逸)하며 평담(平淡)한 화풍을 고전적

화풍으로 추종하였다. 대부분의 여항화가들에게 이러한 미감은 공유되었다. 이와 같은 수묵 위주의 깔끔하고 간결한 화풍은

전기의 <계산포무도>, 유재소의 <산수도>, 김수철의 <송계한담도>  허련의<방예운림산수도> 등에서 볼 수 있다.

 

담의 미감은 조희룡 예술을 길러낸 원천인 셈이다. 그는 담담한 가운데 뜻을 펼치는 문인화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려는 자신의 생각을 놓지 않았다. 이로써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조희룡 <홍백매도> 부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3.1×41.8cm, 고려대학교박물관

 

조희룡 회화미의 다른 한 축은 '격동'에 있었다. '광도난말'과 비슷한 의미의 '종횡도말(종횡塗抹)'이나 '횡도수말(橫途䝂抹)'

등의 용어를 즐겨 썼다. 이런한 용어에서도 작화(作畵) 과정에서 작가의 격정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희룡 회화의 특징 중 하나인 '거침없는 분방함'은 특히 그의 화풍 변화 단계에서 노년기의 특징이다.

 

그는 매화 그리는 일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의 『사기』를 읽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수천 년 전개된 격동의 역사를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엮은 『사기』의 감동을 매화 그림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같은 시기 다른 여항화가들에 비해 더 강렬하게 표현한 것도 그만큼 신분에 대한 고뇌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공우 《매도육폭》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각 124.2×45cm, 국립중앙박물관

 

조희룡이 추구했던 격동적인 미감은 같은 시기 이공우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이 이전 시기 전통을 계승하고 

 매화의 고고한 정신을 담담하게 표현했던 것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 미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조희룡의 미의식은 내적 감성의 표출을 중시하는 여항문인들의 문예 미학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조희룡이 '담의 미'와 '격동의 미'라는 양면을 모두 갖고 표현했던 것처럼, 여항문인들의 미의식과 '남종문인화풍'으로

대변되는 문인화가들의 미의식은 격변하는19세기 문예계를 이끈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김홍도 <서원아집도>1778년, 비단에 수묵담채, 122.7×287.4cm, 국립중앙박물관
조희룡은 벽오사 동인들과 꾸준히 모임을 이어갔고, 그 모임은 동인들의 시문집을 통해 여러 모습으로 전해온다.그가 67세였던 1855년 단오절에는 북송대 소동파를 비롯한 당시 문화계 명류 16인이 왕선(王詵)의 정원인 서원(西園)에 모여풍류를 즐긴 '서원아집(西園雅集)을 모방하여 계당(溪堂)에서 이기복 등과 아회(雅會)를 가졌다. 모두 7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이 장면을 혜산 유숙이 그렸는데, 현재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렇듯 함께 모여 아회를 갖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을 마치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비슷하게 그렸다고 한다. 참석치 못한 사람도 그림을 대하면누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도록 기문(記文)으로 꼼꼼하게 남겼다는데, 이 기록에서 조희룡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구 떠드는 사람' 으로 묘사되었다. 다른 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활달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어 흥미롭다.

 






유숙 <수계도권>1853년, 종이에 수묵담채, 30×800cm, 개인 소장
유숙은 이보다 먼저 있었던 1853년의 시회 모임도 그림으로 남겼는데 현재까지 전한다.이 그림이 그려진 1853년은 왕희지의 난정시회(蘭亭詩會)가 열린 때로부터 1500년이 되는 해이자, 1793년에 결성된 '송석원시사'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키 위해 그해 봄 소당(小棠0 김석준(金奭準)을 비롯한 30명의 중인들이 시회를 열었다.여항인 최대의 시회였느나 조희룡은 그해 3월 14일 임자도 유배에서 막 해배되었으니, 서울에서 열린 이 시회에는 아마 참석치 못한 듯.

 

1861년 원로 모임의 정경을 그린 <벽오사소집도>는 1편에 올려져 있다.

 






조희룡과 유최진이 쓴 『오로회첩(五老會帖)』 서문 부분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오로회는 70세가 넘은 노인들의 모임이었기에 이후 벽오사 동인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게 된다.그래서 유최진은 8년 전의 모임을 회상하며 『오로회첩』을 제작하게 된다. 조희룡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79세의 유최진의 나이도 이미 79세인지라 손자의 손을 빌려 정리하였다고 한다.서첩 서문에 제작 동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신유년(1861, 철종 12년) 상원(上元) 날 비가 내리는데 네 노인이 연달아 찾아와 안부를 묻고 무릎을 맞대고서 술을 마시며 서로 기리고 웃으며 이야기 하였는데, 늘그막에 자주 있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을 꼽아보니 지금으로 부터 아홉 해 전으로, (그후) 우봉이 먼저 하늘나라로 갔고, 석경이 우봉을 이어서 세상을 떠났고, 미촌(美邨)은 몹시 늙어 기력이 없고 가는귀가 먹었으며, 만취(晩翠)는 우환으로 얽히었고, 나는 빈궁한 홀아비로 지내고 있다. 비가 개고 이날 저녁에 이르러 보름달이 몹시 환하건만 더불어함께 감상할 사람이 없어 등불을 걸고 홀로 누워 초조한 마음에 잠들지 못한 채 잇따라 장율(場律)을 지어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기록할 따름이다.
여러 모임이 있었지만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는 노년의 삶은 쓸쓸하기 마련이었다.간혹 친구들의 서신이 있기는 했지만 항상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감정이 없는 사물들과 사귐을 맺었다고도 했다.그동안 감정 있는 사람들과의 부대낌에 지쳤는지, 조희룡은 감정없는 사물과의 사귐을 참다운 사귐이라고 하였다.그것은 벼루, 붓과 같은 문방구나 서화, 골동품, 매화, 난 같은 것들이었다. 이들과의 애틋한 조우의 순간을 시로 쓰거나,그간 자신이 즐겼던 시와 그림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호산외기』, 『일석산방소고』, 『화구암난묵』, 『환와헌제화잡존』, 『우해악암고』, 『수경재해외적독』등이 조희룡이 남긴 저서들이다.
시서화를 두루 잘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조희룡의 일생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부러운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분의 차별이 분명했던 조선시대에 낮은 벼슬아치의 어중간한 양반으로서 지배 양반의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나름대로의 억울함과 분노로 괴로워 했다. 그러나 문인 예술가였기에 이 모든 것을 글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의 분노는 시가 되고 그림이 되어 작금 그를 더욱 빚나게 한다.

인용 도서 ; 이선옥 著 『우봉 조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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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의 의태(意態)를 가슴에 품고 이땅의 고매(古梅)를 찾아 나선 탐매만리(探梅萬里).

 넋 빠진 이내 행보에 대한 수습은 커녕, 짐짓 단 한 번의 물음표 조차 던져본 바 없다.

 

 매화 그림에 담긴 의취(意趣) 절절함으로 유추하는 괴이한(?) 습성까지 길러 온데는

 매공(梅公)이 지닌 의미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 또한 고백하련다.

 

그렇다면, 거침없는 붓질로 마음속의 흉억(胸臆)을 그려냈다고 하는

조희룡의 '광도난말' <홍백매도> 이미지는 진정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아는한, 위 사진상 독수쌍매(獨守雙梅)가 거의 유일하게

의 사고(思考)와 필의(筆意)를 완벽히 대변(代辯)하고 있다고 본다.

 

우봉 조희룡을 탐매(探梅)의 등불로 추존(推尊)케 하는

 확실한 증표이자 물증이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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