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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우봉 조희룡 (1)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편)

 

 

 

 

<매화서옥도>

종이에 수묵담채, 106×45.4cm, 간송미술관 소장

 

 

 

둥근 창 젖혀진 커튼 사이로 한 인물이 앉아 있다.

마주한 낮은 책상에는 책갑이 여럿 포개져 있고, 목이 긴 병에는 매화 한 가지가 촛불처럼 봄밤을 밝힌다.

향기 그윽한 찻잔을 앞에 놓고 기대 앉아 매화 시를 읇조린다.

 

기름불 지글거리는 명리(名利) 속을 뚫고 나와 매화와 함께 지내노라니

철석(鐵石)같은 마음이 모두 꽃 기운이라네.

 

글을 읽다 매화에 빠져 그림을 그린 지 수십 년. 가슴을 울린 매화는 시가 되고 난이 되고 돌이 되었다.

풍족한 삶, 그저 즐기고 살 수도 있었지만 문자를 아는 사람의 소임 다하려다 인생의 큰 굴곡을 겪었다.

후회는 없다. 한 시대가 바뀌는데 나의 예술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면. 봄바람에 매화향이 서재를 감싼다.

 

19세기 여항문인(閭巷文人)이었던 우봉의 삶과 예술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당연 신분제.

영 · 정조 연간의 통청(通淸) 운동을 비롯, 숫자상의 양반은 많아졌지만 사회 정점에 있는 극소수 양반들의

 위세는 여전 했던 것. 20세기 전반까지도 향촌 사회에 반상을 구별하는 유습이 남아 있었음을 떠올리면 

우봉이 살던 당시의 정황은 미루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런 와중에, 이른바 중간 계층에 속하던 사람들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신분에 대한 울분과 격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19세기 문화의 다채로움 속에는 이들의 활약이 활발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핵심에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석감(石憨)·철적(鐵笛)·호산(壺山)·단로(丹老)

또는 매수(梅叟)라 일컫는 여항문인 조희룡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 1346~1405)의 15대 손으로  본디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항인으로 전락했다.

신분상의 변동은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문인으로서의 교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분상의 이중성은 그의 문학과 예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유숙, <벽오사소집도>종이에 수묵담채, 14.9×21.3cm, 서울대학교박물관

 

조희룡도 참여했던 벽오사(碧梧社) 모임을 그린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를 보면 아회(雅會)가 열리는 울타리 바깥으로

물결이 그려져 있어 벽오사의 맹주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의 집 또한 물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분명치는 않지만 조희룡 역시 중인들이 모여 살던 청계천 근처에 살았을 것으로 본다고.화면 중앙에 화폭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인물이 73세 때의 조희룡이다. 나이 육십에 아내 진씨를 잃었고 같은 해에 동생도 잃었으며

신안 임자도에서의 3년 유배를 겪고 돌아와 문예활동에 전념 78세로 생을 마감한다.


 

 

 

 

신윤복 <주유청강>

종이에 수묵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배에 관심이 많았고 친구들과 배를 빌려 선유(船遊)를 즐기기도 하였다는 우봉.

한강 선유는 조선시대 상류층 문인들의 호사 풍류로, 위 그림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풍속화 중에는 이들의 뱃놀이를 그린 그림이 다수 전한다.

배에 대한 관심과 선유 기록은 조희룡의 생활환경과 수준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조희룡의 인장들

『수경재해외적독 외』도판 인용.

 

삼백 개가 넘는 호를 썼다는 김정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호도 적지 않았다.

 조희룡의 호는 그가 모범으로 삼고자 한 문인화가들과 연관이 있다.

우(又) 자를 쓴 것으로 보아 봉(峰) 자가 들어간 호를 쓰는 어떤 화가를 잇는다는 뜻. 원나라 황공망(黃公望)의

호 중 하나가 일봉(一峰)이고, 매화도로 유명한 청나라 화가 나빙(羅聘)의 호가 양봉(兩峰)인데

자신의 매화도가나빙에 연원을 두었다고 했던 만큼 나빙의 호인 양봉을  따라 우봉이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매도인(又梅道人)이라는 호 역시 매도인을 잇는다는 뜻.

매화도인이라면 원나라 화가 오진(吳鎭)의 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진이 매도인이라 했듯이 그도 우(又) 자를 써 우매도인이라 한 듯하다. 앞서의 예가

역대 문인서화가들과 관계가 있다면 도교나 불교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도교와 불교를 넘나드는 그의 의식은 그림에 쓴 화제에서도 확인된다. 한 폭의 그림에서 매화가

부처도 되고 신선도 되었던 것처럼 그는 불교에도 도교에도 닿아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모양.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김홍도, 1791년, 종이에 수묵담채, 25.6×31.8cm,  한독의약박물관

 

야경의 산수 속 모임 장면으로 중인(中人) 신분의 문인이었던 인왕산 자락 천수경(天壽慶)의 집에서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중인들의 시사는 17세기 초반 최기남(崔奇男)을 중심으로 결성된 낙사(洛社)를 시작으로 18세기 중반 김광익(金光翼)이맹주가 된

금란시사(金蘭詩社), 금란시사를 계승하여 엄계흥(嚴啓興)이 결성한 향사(香社)와 이를 이은 함취원시사(涵翠園詩社), 향사의 동인

이었던 천수경(千壽慶)이 1786년에 연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시사가 이루어진 장소인 인왕산 아래

옥류동 계곡의 이름을 따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하는데, 정조 10년 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후 19세기에는 1817년 정수혁(鄭守赫)의 금서사(錦西社), 서원시사(西園詩社), 장지완(張之琬)의 비연시사(斐然詩社), 그리고

1847년 유최진을 중심ㅇ로 한 벽오사(碧梧社), 1853년 초 최경흠(崔景欽)의 주도로 결성된 직하시사(稷下詩社) 등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중인층의 집단의식은 평등의식의 현실적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제의 모순에 대한 몸부림이기도 하였다.

조희룡은 직하시사와 벽오사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벽오사 동인들과의 교유는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당시 중인이었던 의사나 역관, 화원화가들이었던 동인들 중에서도 학산(學山) 유최진, 대산(大山) 오창렬(吳昌烈), 석경(石經)

이기복(李基福), 소치 허련 등과 가까웠으며, 그보다 연소자였던 고람(古藍) 전기(田琦), 혜산(惠山) 유숙, 손암(蓀庵) 나기 등과도

 매우 각별하였던 모양. 조희룡과 벽오사 동인들과의 사귐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하였다. 그는 가장 잊기 어려운 곳은

벽오당(碧梧堂)이라며, 문자의 사귐이 골육보다 낮다는 소동파의 이 말이 아직도 분명하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그의 문집에 실리고 그가 편지와 시를 주고 받은 인물들 대부분이 벽오사 동인들이다.

 

 

 

 

 

 

이한철 <초상>

1857년, 비단에 채색, 131.5×57.7cm, 국립중앙박물관

 

조희룡이 평생 교분을 쌓은 벽오사 동인들 대부분이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추사파 서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조희룡의 유배 죄목에 조희룡이 추사 김정희의 '복심(腹心)' 즉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 적혀 있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서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추사와 우봉의 관계가 사제 관계일 뿐 아니라, 주공(主公)과 겸인(傔人)이라는 중층적 관계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18~19세기 서울에서 겸인은 흔히 문하인(門下人), 혹은 문객(門客)으로도 불리며 독특한 사회계층의 하나로 존재했다.

 

물론 조희룡이 김정희의 겸인이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중인임에도 김정희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될 정도였으므로,

그가 김정희의 정치적 실무를 대행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두 사람 각각의 문집에  상대방에 대한 언급은 의외일 만큼 미미하다.

\어찌되었든  당대 문예계에서 김정희의 영향력은 막강 했다.

권돈인 세한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권돈인 <세한도> 부분

 19세기, 종이에 수묵, 101×27.2cm,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문예계에서 추사와 함께 여항문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사람이 권돈인이다.

김정희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소치 허련을 헌종에게 소개하고 그 뒤를 돌봐준 이도 권돈인이었다.

그 자신이 문인서화가일 뿐 아니라 수많은 서화에 품평을 남겼다. 당연히 조희룡의 시에도 품평을 해주었다.

영의정을 지낸 만큼 지위만 높았던 것이 아니라 여섯 살 위의 선배로서 조희룡을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임자도 유배 이후 1856년 조희룡은 스승 김정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를 쓴다.

 

- 전략 -

공이여! 고래를 타고  떠나갔으니 호호라 만 가지 인연 이제 끝이 났네.

글씨의 향기가 땅으로 들어가 매화로 피어날 것이요, 이지러진 달 공산(空山)에 빛을 가리리.

침향나무로 상(像)을 새기는 것은 원래 한만(閑漫)한 일. 백옥에 마음을 새기고 황금으로 눈물을 주조함은

우리네 궁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네. 조희룡은 재배(再拜)하고 만장(挽章)을 올린다.

 

 

추사와 세 살 아래이지만 그들이 몸 담고 있는 신분 배경이 다를 뿐만 아니라 타고난 기질도 달랐던 듯.

추사가 끝없는 완성을 추구하는 유가적(儒家的) 면모를 보여준다면 우봉은 자족 지향적인 노장(老壯) 쪽에 가깝다고 본다.

이러한 다름은 결국 완성된 작품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추사가 중시했던 문기(文氣)를 추구하기는 하였지만

우봉은 근본적으로 유학자가 아닌 만큼 심미적 지향점이 추사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유교적 미감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

홍매도의 만발한 붉은 꽃이 신선의 단약(丹藥)을 먹고 피었다거나 부처가 현신한 것이라 하는 등,

도교와 불교까지 아우르는 미감을 작품에 적용한 것이다. 종래에는 추사와는 다른 성향으로

중서층의 입장을 대변하여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였고 그림에 있어서도 필묵과 채색에서

종래의 전통을 넘어서는 심미적 경향으로 19세기 화단을 새롭게 이끌어갔다.

 

 

 

 

 

『예림갑을록』 표지

1849년, 종이에 묵서, 27×33cm,

 

1849년(헌종 145) 여름 조희룡은 소장파 서화가들을 이끌고 이들의 작품을 김정희에게 보여

품평을 받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들의 작품과 추사의 평가를 담은 품평집이 『예림 갑을록』이다.

 

본래 서예가 8명(김계술(金繼述), 이형태(李亨泰), 유상(柳湘), 한응기(韓應耆), 이계옥(李啓沃), 전기(田琦), 유재소(劉在韶),
 윤광석(尹光錫))이 묵진(墨陣)을 이루고, 화가 8명(김수철(金秀哲), 허유(許維), 이한철(李漢喆), 박인석(朴寅碩), 전기(田琦),
 유숙(劉淑), 조중묵(趙重默), 유재소(劉在韶))이 회루(繪壘)를 이룬 뒤 서화를 번갈아 가며 경연하고 비평했다.
 하지만 전기와 유재소는 서화에 모두 참여하였기 때문에 실제 참여 작가는 총 14명이다.
 
경연과 비평이 행해진 것은 1849년 6월 20일부터 7월 14일까지 7회로서, 서예 4회, 회화 3회이다.
서예는 주련[聯]·편액[扁]·해서[楷]의 3종을 대상으로 하여 각 종마다 ‘매화시경(梅華詩境)’, ‘운하울흥(雲霞蔚興)’ 등과 같은
문장을 제시하고 모든 참여 작가가 똑같이 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회화는 ‘추산심처(秋山深處)’, ‘추수계정(秋水溪亭)’ 등과
 같은 화제(畵題)를 각 개인별로 달리 제시하고 각자 주어진 화제를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유재소,『예림갑을록』중 <추수계정도>                  김수철,『예림갑을록』중 <매우행인도>

 

 

 

 

 

 

 

박인석,『예림갑을록』중 <고촌모애도>                   유숙,『예림갑을록』중 <소림청장도>

 

 

김정희의 비평 내용은 기본적인 학습태도는 물론 구체적인 기법이나 이상적인 심미관 등 서화에 관한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그 기본적인 관점은 금석학(金石學), 고증학(考證學) 및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토대로 하고 있다.
김정희가 겸재(謙齋)정선(鄭敾)의 동국 진경(東國眞景)과 원교(圓嶠)이광사(李匡師) 계통의 동국진체(東國眞體)를 비판하고,
윤두서(尹斗緖)와 심사정(沈師正) 등의 남종문인화 계통과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의 비학(碑學)을
높이 평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서화관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이 초기에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성장하였을지라도 김정희의 유배 동안 나름대로 여항화가들의 좌장으로서

세력을 키웠을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을 터. 더구나 조희룡 자신의 그림이나 글은 이 품평에서 비켜나  있는데다

참여한 서화가의 작품에 시를 써서 격려 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 가늠 될 터이다.

 

 

 

 

 

 

 

오세창의 조희룡 평문(評問)

유재소의 <수수계정도> 상단에 기록

 

이러한 정황을 간파했었던지 훗날 오세창은 『예림갑을록』의 유재소 그림 위에 쓴 글에서 조희룡을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 칭하였다. 대부분이 화원이거나 직업화가인 이들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한 조희룡에 대한 매우 적절한 칭호였다는 것이 후학 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강세황 <묵매>

18세기 조선, 종이에 수묵, 33.3×22.5cm, 한빛문화재단

 

 

조희룡의 매화벽(梅花癖)

 

나는 매화를 몹시 좋아하여 스스로 매화를 그린 큰 병풍을 눕는 곳에 둘러 놓고,

벼루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을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裝煙)을 쓰고 있다.

바야흐로 매화 시 백 수를 지을 작정인데, 시가 이루어지면 내 사는 곳의 편액을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하여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뜻을 쾌히 보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이루어내지 못하여 괴롭게 읊조리다가

소갈증이 나면 매화편차를 마셔 가슴을 적시곤 한다.

현재 이루어놓은 것이 칠언율시 오십 수인데, 또 다시 시상(詩想)이 고갈된 것을 깨달았다.

정희 한차례 고취(鼓吹, 음악)를 등어 시상을 윤택하게 하고자 한다.

 

옛 문인들이 매화(梅花)를 꽃 중의 으뜸으로 꼽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매화의

고고함에 대한 의취(意趣) 에 방점을 찍고 있다.하지만 매화를 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각 개인의 특성과 취향이 드러나는 걸

볼 수 있는데, 꽃이 성글고, 나무가 오래되고, 가지가 마르고, 꽃봉오리 진 것을 네 가지 귀한 요소(四貴)로 꼽고 완상의

요점으로 삼았다. 한 마디로, 고태미 물씬 풍기는 고매(故梅)여야 한다는 이구동성의 합창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그러나 우봉의 매화에 대한 시각은 이전 시기 매화 그림과는 상당히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을 본다.

무성한 가지에다 만화방창 화려한 모습에다 연지(臙脂)를 써 붉은 홍매를 담대하게 그려 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희룡도 초기에는 간결함의 배인 전통 화법을 따랐지만 점차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전개하게 된다.

 

 

 

 

 

 

左) 나빙, <삼색매도> 청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8.4×51.2cm, 길림성박물관.

 

右) 동옥, <월하매화도> 종이에 수묵

 164.8×56.4cm, 양주시박물관.

 

 

조희룡은 자신의 화풍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에 와 있는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천 개 만 개의 꽃을 그리는 법은 왕회계(王會㮷), 왕면(王冕)로 부터 시작하여,

 근래의 전탁석(鋑籜石, 전재鋑載), 동이수(童二樹, 童鈺), 나양봉(羅兩峯, 나빙羅聘)에 이르러 극성하였다.

 나의 매화는 동이수와 나양봉 사이에 있는데 결국 그것이 나의 법이다.

 

조희룡은 동옥과 나빙의 매화도를 소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배 길에도 매화도를 챙겼으며,

자신의 화풍이 나빙과 동옥 사이에 있음을 도장에 '이수양봉지간(二兩峯之間)' 이라고 새기기도 했다.

 

 

 

 

 

왕면, <남지춘조(南枝春早)>

 원 14세기, 비단에 수묵, 151.4×52.2cm, 대북 고궁박물원

 

조희룡이 자신의 화풍 연원을 청대 양주팔괴에 두었고, 거슬러서는 원의 왕면(王冕)에 있다고 말한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왕면은 관리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생계 유지를 위해 화가의 길을 택했던 사람이다. 그의 묵매도를 보면 줄기가 S자를

그리며 휘어져 올라 꽃봉오리들이 만발한 모습이다. 빠른 필치와 경쾌하고 활달한 필치는 조희룡의 매화도와 유사하다.

여러 정황 상 우봉도 중국에서 들어 오는 청대 화가들이 화풍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여기서 조희룡의 독창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자신만의 화풍을 이루겠노라는 의지를 여러 글에 남기고 있다.

한 편으로는 스승 추사가 잘 하지 않았던 매화 그림을 통해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조희룡, 《묵란묵매대련》중 <매화>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93×29cm, 개인 소장

 

조희룡의 매화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독특한 줄기 표현과 꽃 모양, 화려한 홍매와 한 두 그루 매화를 여러 폭의 병풍에 펼쳐 그리는 이른 바 전수식(全樹式) 매화도를 그린 점이다. 가장 이른 시기 작품으로 생각되는 것이《묵란묵매대련》의 매화도라고 한다. 이 대련은 긴 화축에 난과 매화를 각각 그린 것으로, 이 중 매화 그림 여백에 중국 매화도의 흐름을 적고 자신의 화풍이 동옥과 나빙 사이에 있다고 했는데, 그림 아랫쪽 나무 밑둥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어색함에 주목한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작품의 정확한 시기를 상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화풍이 정착되기 이전 초기작으로 본다고.



조희룡 <묵매도> 조선 19세기, 중이에 수묵, 22.7×27.4cm, 간송미술관

 

이 <묵매도>는 단순한 구도를 보여주는데, 가는 줄기가 펼쳐진 모양으로 보아 『개자원화전』같은 화보에 실린매화 그림의 구성을 변형한 것이다.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구도나 줄기 표현 등에서 이 또한 이른 시기의작품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꽃잎의 윤곽선을 굵기 차이가 큰 두 번의 붓질로 길쭉하면서도 탄력 있는 표현은 그의 여러 매화도에서 볼 수 있는 매우 독픅한 기법이라고. 조희룡은 이러한 꽃잎 표현 기법을 이른 시기부터 사용했던 것이다. 탄력있는 붓질로 그린 탱글탱글한 꽃잎은 조희룡 자신 화풍의 연원이라 했던 왕면 매화도의 꽃 모양과 흡사하다. 더군다나 그림 상단에는 왕면의 「묵매」시를 바꾸어 적어 그 영향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 집 벼루 씻는 연못가 나무

我家洗硯池邊樹

송이송이 꽃이 피니 먹 자국이 담담하네

朶朶花開淡墨痕

사람들이 꽃 색 좋다 자랑하는 건 필요도 없고

不要人誇好顔色

단지 맑은 기운이 사립문에 가득 머무르기를

只留淸氣滿乾坤

 

 

 

 


왕면 <매화도>원 14세기, 종이에 수묵, 68×26cm, 상해박물관

 

《묵란묵매대련》중 <매화> 화제에 화보의 글을 옮겨 쓴 것처럼 유명한 매화 시를 화제로 쓴 경우는조희룡이 매화도에서 아직 독자적인 세계를 성립하기 이전의 특징이다. 이후 자신만의 개성을 확립한 후 선보이는매화도에서는 화제에 자신의 생각이나 그림과 어울리는 명구를 적었다.


 

 

 

조희룡 <백매도>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64.8×53cm, 고려대학교박물관
화면 왼편 하단에 "담화서옥에서 눈 오는 날에 나양봉(나빙)의 화법으로 방하였다,"고 적혀 있다.옅은 먹선으로 간결하게 그어 올렸고 간간히 둥근 태점(苔點, 이끼점)을 찍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작품에 비해힘이 없어 보인다. 나빙을 따랐다고 하지만 아직 화풍이 무르익기 이전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左) 조희룡 <백매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5.5×52.2cm, 개인 소장右) 조희룡 <홍백매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1.3×51.3cm, 부산시립박물관
한편 유사한 크기와 필치의 매화도 작품들에서는 차차 줄기가 굵어지고 표면은 거칠어지면서 점점 힘이 더해짐을 볼 수 있다.가장 왕성한 필력의 50대 무렵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고. 이후 먹이 점차 진해지고 번지는 형태의 발묵(潑墨)을 쓰거나 거친 점을 찍는 등 더욱 다양한 묵법과 구도로 진행하게 된다.

 

 



 


조희룡 《홍매대련》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20×302cm, 개인 소장
이러한 필력으로 《홍매대련》에 이르면 줄기가 더욱 굵고 거칠어져 힘이 극대화된다,거친 줄기는 마치 수면을 박차고 승천하는 용처럼 구불대며 올라간다. 줄기에는 옅은 먹색으로 용 비늘 같은 고목 등걸을표현하였고, 먹석으로 가장자리를 둘러 꺾이고 각이 진 모습을 강조하였다. 가지는 서로 뒤엉켜 몸부림을 치는 듯하고,가지마다 만발한 붉은 꽃은 온몸의 기가 분출된 듯 불꽃처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보기에만 용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용 그리는 법을 매화도에 적용했다고 밝혔다.
일찍이 원나라 사람이 용 그린 것을 보았는데, 먹을 뿌려 구름을 만들고 물을 머금게 하여 안개를 만들었다...  ... 매화를 그리는데 얽히고 모인 가지와 만 가지 꽃의 향배 정할 곳에 이르면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서 크게 기굴(奇崛)한 변화가 있게 한다. 용 그리는 법을 매화 그림에 도입했으니 그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은하수를 보는 듯 막연하여 그 뜻을 알기가 어렵다 할 것이다.
또 다른 묵매도의 화제에서 "줄기 하나를 치더라도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매듯이 해야 하며, 꽃 한 송이를 그려 넣더라도구천에서 현녀(玄女)가 노닐 듯 해야 하며, 한 줌의 벼룻물을 곧 푸른 바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도 하였다.매화 그림을 향한 그의 원대한 에  뜻과 제작 태도에 부합하는 화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홍매대련》의 오른편 제시 끝 부분에 '소향설관(小香雪館)'이라는 관지가 보인다. '소향설관'은 신안 임자도 유배지 처소의 당호였으므로, 이 작품은 60대 초반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화풍이 가장 무르익었던 시기로 유배지에서의 답답한 심정이 필묵에 적극적으로 표출되어 있는 것이다.



조희룡 <홍백매도>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3.1×41.8cm, 고려대학교박물관
점차 분방해진 붓질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단로제(丹老題)"라는 낙관 이외에 다른 화제는 없다.붉고 흰 매화가 가득 피어 있는 굵고 오래된 줄기는 꿈틀거리듯 힘차게 솟구쳐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이것은 조희룡이 말한 '미친 듯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다'는 '광도난말(狂途亂沫)을 실행한 것이다. 이처럼 분방하고 장식적인 화풍에서 감성을 중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출한 조희룡의 개성이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다.




조희룡 <매화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22×27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이 작품은 줄기에 거친 붓질을 가한 것과는 달리 발묵 기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느낌을 끌어낸 작품이다.

조희룡 화풍의 다양성을 엿 볼 수 있는데, 줄기 표현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잔가지들과 그 위에 핀 꽃송이들도

 지극히 빠르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그려져 자못 경쾌함 까지를 느낄 수 있다.

 

일련의 작품으로 보아 조희룡 매화도의 구도는 간결한 데서 점차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경향으로 바뀌었으며,

줄기는 가늘고 선적인 표현에서 점차 거칠고 각이 진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홍매도대련》이나 <홍백매도>에서 그 거친 듯 힘찬 필치의 절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조희룡 《사군자병풍》중 <매화>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60×35cm, 삼성미술관 리움

 

조희룡이 매화를 그리는 기법은 그의 매화도 특징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꽃은 크게 수묵으로 형태를 그린 백매와 붉은 안료인 연지를 쓴 홍매로 나눌 수 있다. 꽃을 그리는 방법도 점을 찍듯

안료를 바르는 선염법(渲染法) 또는 지묵법과, 윤곽선으로 형태를 그리는 구륵법(鉤勒法) 혹은 권법(圈法)을 함께 사용하였다.

그중 홍매의 꽃잎은 대채로 연지로 점을 찍듯 선염법으로 그렸고, 백매는 흰색 호분(胡粉)으로 점을 찍거나 윤곽선을 빠르게 그리는

방식으로 하였다. 백매를 그릴 때 윤곽선으로 그리는 방법과 호분점을 찍는 두 가지 방식은 오랜 옛날부터 애용되었던 것으로

윤곽선을 그린 다음 그 위에 호분을 덧칠하는 경우도 있다.

 

 

 

 

 

 

 

조희룡 <백매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4.7×29.7cm, 서울대학교박물관

 

조희룡은 그의 백매도에서 위 세 가지 기법을 두루 썼다. 흰 꽃이 만발한 우람한 가지나 매화서옥도처럼 울창한 매화 숲을

표현할 때는 흰 점만을 찍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매화 한두 가지를 근접해서 그린 경우는 대부분 호분을 쓰지 않고 윤곽선만으로

 꽃잎을 그렸다. 이 경우 두 번의 붓질로 꽃잎 하나를 그리는 양필권법(兩筆圈法)을 썼는데, 붓을 강하게 댔다가 재빨리 끌듯이

들어 굵고 가는 선의 대비가 강하다. 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백매도>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백매도>는 양필권법을

쓴 대표적인 예다. 이 두 <백매도>의 꽃잎 표현처럼 꽃잎을 그린 굵고 가는 비수(肥瘦)가  뚜렷한 윤곽선은 매우 힘이 있다.

그의 매화도 대부분ㅇ든 이처럼 힘 있는 윤곽선으로 꽃잎을 그렸으며, 매화가 전체적으로는 분방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 송이 한 송이가 탄력이 있고 흐트러짐이 없다. 꽃송이 뿐만 아니라 날카롭게 뻗친 잔 가지의 필선도 힘이 있다.

이와 같이 세부에서의 힘이 모여 탄탄한 한 그루 매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강이오 <묵매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2.5×27cm, 개인 소장

 

생동감 있는 두 번의 붓질로 윤곽선을 그리는 방식은 화려하면서도 회화성 풍부한 표현과 함께 조희룡 매화도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은 조희룡이 자신의 매화도 연원으로 생각한 왕면 매화도에서 취한 것으로 매화도를 그리기 시작한 초기부터

 줄곧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꽃 그리는 법은 후배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강이오 <묵매도>의 꽃 모양은 조희룡 매화와 매우 흡사하다.

 

조희룡 매화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홍매를 즐겨 그렸다는 점이다. 조희룡 매화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19세기 이전에는 홍매를 그리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림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기록 가운데 홍매를 노래한 제발문(題跋文)만이 전한다.

 

 

夢覺瑤臺踏月華
꿈속에서 요대(瑤臺)를 발견하여 달빛 밟으니
香魂脈脈影橫斜
향기로운 혼이 빛나며 그림자 비끼었네.
似嫌玉色天然白
옥색(매화를 뜻함)이 천연의 백색임을 꺼려하는 듯
一夜東風染彩霞

하룻밤 동풍에 붉은 노을빛이 물들었네.

 

조선 초기 문신 조위(曺偉)가 홍매를 그린 족자에 붙인 시 「제홍매화족(題紅梅畵簇」이다.

이런 시가 지어진 것을 보면 당시에 홍매도 그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강세황 《사군자화첩》중 <梅>

1761년, 종이에 수묵 담채, 27×26cm, 개인 소장

 

조선 후기에 이르면 강세황과 심사정의 작품 중에 홍매를 그린 예가 있다.

강세황의 《사군자화첩》중 <매>는 꽃잎의 윤곽선을 그린 후 엷게 붉은색을 칠했다.

 

 

 

 

 

심사정 <딱따구리>

조선 18세기, 비단에 수묵채색, 25×18cm,개인 소장

 

둥지를 쪼고 있는 머리와 배가 빨간 딱따구리와 엷은 홍색의 매화를 함께 그려 밝고 생기 있는 화면을 연출하였다.

18세기가 되면 백매를 선호하던 문인들이 점차 색깔 있는 매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화조화,

풍속화 등에서 채색화가 많아지는 등 미감의 변화가 일어난 것과 관이이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당시 유입되었던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나 『개자원화전』등 채색판화 기법의 화보도 채색 매화도의 유행에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조희룡은 홍매를 매우 자주 그렸다. 단지 붉은 안료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가지마다 만발한 붉은꽃을 그려 화려한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그러한 미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 분위기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매화도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조희룡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조희룡 《홍매대련》 부분

개인 소장

 

조희룡 홍매도의 최고 걸작은 개인 소장 《홍매도대련》이다.

홍매의 꽃잎은 붉은 점으로, 꽂받침과 꽃술은 먹으로 점을  툭툭 찍어 표현하였다. 이 그림의 화제에서는 도가에서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단약과 홍매를 연관지었다. 단약의 붉은색으로 홍매를 연상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일백(日魄_, 월화(月華),

현주(玄珠), 백고(白膏), 오금(五金), 사황(四黃)과 같은 단약을 소개하여 매화가 신선의 꽃이라는 의미를 더하였다.

덧붙여 화가가 단(丹)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산문양의 향로, 옛 자기, 연지옥관(胭脂玉管)과 같은 골동품을 좋아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골동 취미가 정신을 수양하는 자양분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그가 골동품을 좋아한 뜻이 고아한 매화를 그리기 위함에 있음을 밝혔다.

 

도가의 단약으로 상징되는 붉은색에 대한 또 다른 연상으로, 조희룡은 같은 그림의 화제에 "홍로주(紅露酒), 붉은색 술)

한 잔이 있으면 이 중 7분(分)은 매화에게 주고 3분(分)은 남겨 한서(漢書)를 보는 데 쓰는데, 이때에도 책을 펴면 먼저

「매복전(梅復傳)」을 읽는다고 하였다. 그리니 자연 홍매화가 그려졌다는 멋진 표현이다. 

단약을 통한 선가의 불로장생 사상과 홍로주라는 붉은 물방울이 주는 영험한 상징성을 동시에 활용해 홍매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희룡이 홍매를 단약이나 홍로주에 비유한 것은 소동파의 도가적인 경향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소동파도 유명한 시 「홍매」에서 홍매를 단약과 연관 지어 읊은 바 있다.

《홍매도대련》의 왼편 하단에는 또 다른 성격의 화제가 적혀 있다. 이 글에서는 매화를 불교와 연관지어 해석하였다.

 

연지에 봄이 드니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는데 하나의 꽃이 곧 하나의 부처이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하게 하는 것과 같다.

가히 그 향불에 대한 정이 깊음을 알 만하다. 그림으로 불사(佛事)를 이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조희룡은 가지에 핀 수많은 꽃을 부처의 현신이라 여겼고, 그처럼 많은 꽃을 그림으로써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매화를 그리는 일이 자신의 혜업(彗業)이라고 하였으며, 한 점 한 점 매화 꽃송이를 찍으면 보살상이 하나하나 만들어 진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매화를 불교와 연관지어 생각한 것은 그가 문집 곳곳에서 보인 불교적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다양한 사유를 바탕으로 조희룡은 여러 점의 홍매도를 그렸던 것이다.

 

 

 

 

 

 

조희룡 《홍매도대련》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각 145×42.2cm, 삼성미술관 리움

 

개인 소장 《홍매도대련》과 화풍이 유사하다. 화면 가득 꽃이 만발한 모습은 두 작품이 비슷하나 줄기의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홍매도대련》은 개인 소장《홍매도대련》처럼 줄기의 가장자리에 가는 먹선을 쓰지 않고, 힘 있는 붓질을 거듭 반복하여 입체감을

표현했다. 이 작품에 조희룡의 관지는 없고 근대 서화가이자 수장가인 김용진(金容鎭)이 1947년에 쓴 후제(後題)가 있다.

대련의 오른쪽 작품에 쓴 화제는 명나라 문신 유기(劉基)의 시 「제화홍매(題畵紅梅)」로써 달빛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홍매를

요대(瑤臺)에서 잔치가 끝난 뒤 달빛 밟으며 돌아가는 선녀"에 비유하고 있다. 그림 왼편에는 칠언시 한 구절과 함께

"향석옹이 우봉의 매화를 읽고 쓰다. 1947년 중양 전 날."이라고 적었다. 향석옹은 김용진의 또 다른 호인 듯.

구룡산인 김용진이 조희룡의 그림을 보고 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조희룡 <홍매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6.6×21.7cm, 서울대학교박물관

 

작은 화첩에 그려진 홍매지만 앞서 본 축 형식《홍매도대련》의 홍매와는 다른 미감을 보인다.

이 소폭 홍매는 줄기를 간단하고 깔끔하게 그렸다. 색다른 미감을 나타내고자 다양한 실험을 한 듯하다.

이 <홍매도>에 쓰인 화제에서도 홍매와 단약을 직접 연결시켰다.

 

모고야산의 신선에게 큰 단약 한 알이 있는데, 혼자 먹기가 부끄러워 세상 사람들의 장수를 위해 주고자 하나

모두 비린내가 나 창자에서 삼켜내지 못한다. 천하의 만물을 보건대, 이렇게 큰 약을 함께할 만한 대상이 없다.

다시 명산을 찾았더니 오직 매화가 있을 뿐이다.

 

신선의 단약을 삼키고 피워낸 꽃, 조희룡 홍매도의 한 축은 도가사상에 닿아 있었다.

조희룡의 의도인 즉,  기존의 유교적 도의 구현체인 군자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도교나 불교사상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두고 일반 대중의 성정을 위로하고 드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가 각 분야에서 빼어났지만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들의 전기인 『호산외기』를 쓴 시각과도 일맥상통한다.

남병철과 같은 경화세족들이 매화 분재를 가꾸고 매화 시만을 읊는 시사(時社)도 여럿 있었다. 그런 만큼 조희룡이 그려낸

 파격적인 매화도는 19세기 화단을 풍미하였던 것. 고동서화에 탐닉하며 심미적 대상을 찾고 애호하는 시대 분위기에 힘입어

조희룡의 매화도도 홍매를 통해 점점 더 힘차고 화려한 경향으로 변모해갔다.

 

 

 

 

 

 

오카타 고린 《홍백매도병풍》

에도시대 17~18세기, 금지에 채색, 각 155.6×172.2cm, 일본 MOA 미술관

 

 

 

 

 

마쓰무라 고슌 《매림도육곡병풍》

에도시대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75.5×373.cm, 오사카 이츠오 미술관

 

여러 폭의 병풍에 매화 한두 그루를 펼쳐 그리는 형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전수식 병풍은 청대 왕사신(汪士愼)이나 나빙의 작품에서

볼 수 있고, 비슷한 형식을 일본의 병풍에서도 볼 수 있다. 오가타 고린의 《홍백매도병풍》은 굽이치며 흐르는 물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백매와 홍매가 한 그루씩 서 있는 모습으로, 매화가 전 화면에 펼쳐져 있는 전수식 매화도 병풍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매화를 대폭(大幅)의 병풍에 그린 예라는 점에서는 비교해볼 만하다. 비슷한 의미로 매화를 그렸으면서도

 한중일 삼국의 표현 방식이 상당히 다른 것도 흥미롭다.

 

 

 

 

 

 

조희룡 《매화도십곡병》중 좌측 5폭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56.5×361cm, 개인 소장

 

 

 

 

조희룡 《매화도십곡병》중 우측 5폭

 

조희룡은 전수식 매화도 병풍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그렸고, 또 상당히 많이 그렸다.

이러한 매화 병풍에서 볼 수 있는 크고 기굴(奇崛)한 매화를 조희룡은 '장육매화(丈六梅花)'라 하고 이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불상 중에 장육금신(丈六金身)이 있는데, 나는 대매(大梅)를 일컬어 '장육철신(丈六鐵身)'이라 하였다. 대개 "장육매화(丈六梅花)'는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소산(吳小山), 인장가 오규일)에게 부탁하여 한 인장에 새길 만하다."라고 한 것이다.

자신이 처음 시도한 것이니 인장가에게 부탁하여 인장에 새겨 길이 전할 만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크고 멋진 매화도에 대하여 조희룡은 『석우명년록』에 다음의 설화 같은 이야기로 그 유래를 적었다.

 

 

강가의 누정에 비바람 치는 날, 매화 그림 큰 폭을 그렸다. 그리기를 마친 저녁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났는데,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그 모습이 준수하였다. 마치 세속의 그림에서 보는 당도릉(張道陵)과 같았다.

나에게 읍하며 말하기를, "나부산 속에 살면서 오백 년 동안 매화 만 그루를 심었소.

그 중 돌난간 가의 세 번째가 가장 기굴(奇崛)하여 매화 중에 으뜸이었소.

어느 저녁 비바람이 이 세 번째 나무를 말아 가버렸는데, 그 간 곳을 알지 못하였소. 어찌 뜻하였으랴!

그대의 붓끝에 말려 갔을 줄을! 원컨데 이 매화나무 밑을 빌려 사흘을 묵고 돌아가고자 하오!

하고 벽에 시 한 수를 썼다.

 

 

나부산은 중국 광동성 증성현 소재 매화 숲으로 소동파가 귀양가서 매화시를 읊어 유명해진 곳인데 바로 그 나부산의 기굴한 나무가

신선의 힘에 의해 뿌리째 뽑혀 자신의 화폭으로 들어온 것이라며, 이를 꿈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려 상징할 만큼 그는 기이하고

고태(古態)가 있는 강한 모습의 매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조희룡의 전수식 매화도 병풍은 지금까지 세 점이

알려져 있을 뿐이라고 한다. 위 매화도 병풍의 기본적인 구도는 조선 중기 매화도와 유사하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형성 되기 이전, 비교적 이른 시기의 매화도라는 평.

 

 

 

 

 

 

조희룡 《매화팔곡병》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24×375.5cm, 일민미술문화재단

 

대폭의 병풍 그림 중 유일하게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가 임자도에 유배 가서 쓴 것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 전략 -

나손암(羅蓀菴, 나기)은 나의 친한 벗인데, 작기 서린 바닷가에서 넘어지고 불안정한 곤경 속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매화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함에 있ㅎ어서 처지가 좋고 나쁨을 헤아리리 않아

마치 평상시 벼루 뒤, 향로 앞 생활을 누리던 때와 같이하였다. 그 청명한 가슴속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이에 망치를 매단 듯한 내 열 손가락을 억지로 채찍질하여 기꺼이 응한 것이 이 매화 그림이다.

얼마 동안이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옥문관(玉門關)에 들어가 다시 손암과 같은 좋은 벗들과 매화음(梅花飮)을

벌여 큰 술잔을 들어 권하고자 하는데, 혹 희신(喜神)이 그 곁에서 야유하지나 않을까?

 

 

63세였던 1851년 가을부터 1853년 봄까지 그의 유배 기간 중에 그려진 작품으로

거대한 화폭 중앙에 그리 굵지 않은 홍백매 두 그루의 매화와 바위를 함께 그려 매화의 기상을 강조하였다.

거친 느낌의 붓질로 고매 표면의 질감과 양감을 살려내고 동시에 화려함을 더했다.

화려한 매화도에 찍은 청록의 이끼점은 조흴요 매화의 특징으로, 이후 다른 이들도 채색 매화도에 자주 사용하였다.

 

조희룡이 매화나 난을 그릴 때 바위를 함꺼ㅔ 그린 것은 임자도 유배 이후의 특징이다.

60대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의 난 그림 중에 석란도(石蘭圖)가 많은 것은

유배지에서의 수석 모으기 취미가 그림에 반영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매화팔곡병》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펼쳐진 듯 보이지만 매화의 가지 끝은 예리하며, 수많은 붉은색과 흰색의 점으로

표현된 꽃도 모두 꽃받침과 꽃술을 갖춘 단정한 모습이다. 거친 듯하나 매화의 꽃송이 하나하나를 정승스럽게 그리는

특징이 드러나 있다. 거칠지만 산만하지 않고, 가지가 길고 구불거리지만 힘이 느껴지는 것은

세부 표현에 소홀하지 않았던 철저함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희룡 《홍백매도팔곡병》

종이에 채색, 124.8×46.4cm, 국립중앙박물관

 

조희룡의 본격적인 전수식 매화도 병풍이다. 용이 솟구치며 올라가는듯 꿈틀거리며 올가간 줄기는 좌우로 긴 가지를 뻗어내고,

가지에는 희고 붉은 꽃송이가 가특 피어있다. 호분으로 점을 찍듯 툭툭 찍어 표현하고, 농묵으로 꽃받침과 꽃술을 묘사하였다.

줄기의 내부는 비우고 마치 용 비늘처럼 구불거리는 선으로 가장자리를 둘었으며 진한 먹점을 찍어 입체감을 살렸다.

이처럼 농묵점으로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은 중국 청대의 나빙과 금농을 비롯한 양주팔괴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조희룡은 여기에 더욱 힘을 실어 매화 줄기를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신의 매화 그림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화제를 적었다.

 

이 글에서 조희룡은 자신의 매화 그림이 기존의 화론(畵論)에 나오는 매화와 나무 그리는 법인 육지, 칠수, 팔결, 구변과 같은

그림 그리는 법이 아니라 전서와 예서의 글씨 쓰는 법에서 온 것이라 말 하고 있다. 그림의 요체를 서체(書體)에서 찾은 것이다.

점점히 피어 있는 화려한 꽃은 '은하수에서 쏟아져 내린 별 무늬'와 같고, '오색 빛깔 나부산의 나비를 풀어놓은 것 같다' 고도

하였다. 예술세계에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절정의 단계를 '나비의 훨훨 낢에 이르는 것'에 비유했던 그의 글이 연상된다.

 

 

 

 

 

 

上),  유숙 《홍백매팔폭병》1868년, 종이에 수묵담채, 112.9×387.9cm, 삼성미술관 리움

下), 허련 《노매도십폭병》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12×32cm, 개인 소장

 

다양한 화면에 개성 있게 그린 조희뵹의 매화도가 조선 말기 매화도에 끼친 영향은 크다.

19세기에 활동한 화원화가 혜산 유숙의 《홍백매팔폭병》에는 다분히 조희룡의 영향이 보인다. 유숙과는 벽오사 동인이었던 만큼

서로 간에 미감을 공유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여덟 폭의 화폭에 바위와 함께 홍백매 세 그루가 그려져 있는 바위와 매화의 구도뿐

아니라 꽃잎 표현법, 청록색의 이끼점, 그리고 화면 하단 긴 화제를 쓴 것도 조희룡의  작품과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다만 매화의 긴 가지가 마치 춤을 추듯 펼쳐져 있어 조희룡 매화도의 강건한 표현법과는 차이가 있다.

 

 허련의 《노매도십폭병》이나 장승업의 《홍백매십폭병》이 있어 그 영향이 이후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인용 서적 : 이선옥 著 『우봉 조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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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지나온 삶을 회고컨데, 별달리 크게 기억에 남은 게 없을 뿐더러

굳이 기억에 두고 싶은 이유와 까닭도 찾지 못한  통한과 희열의 교차점을 까닭없이 서성거린 시간들이었던 게 분명.

 

그나마 내가 숨 쉬었던 이유를 들라면 딱 한 가지, 매향(梅香)에 어우러지는 탐매(探梅)를 들 수 있겠다.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로 칭송되는 우봉에 관한 책을 펼치고 고아한 품격의 매화에 허우적 거린지 벌써 여러 날.

 

성인(聖人)의 목소리를 인간의 직관과 사유를 통해 적어 놓은 게 '형이상학(形而上學)'적 경전이라면,

 봄날에 무한 흩뿌려지는 매향과 탐매의 세계는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평이평학(平而平學)의 교과서.

 

수백 년 수령의 홍백매로 이루어진 위 사진상 독수쌍매(獨守雙梅)  앞에서 중얼거렸던 기억이다.

"지하의 우봉을 일으켜 세워 꼭 한 번 이 매화 그림을 청해 받아 봤으면..."

 

결단코 흰소리가 아니다.

매화가 이내 경전이라면, 우봉은 영원한 탐매(探梅)의 등불.

 

 

 

 

 

 

Annie's Wonderland - Band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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