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극기(太極旗)의 변천사(變遷史)
『해상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
조선, 1882(고종 19년)
미국 해군성 항해국에서 발간한 책 속에 수록된 태극기다.
태극은 청색이 좌측, 적색이 우측에 자리잡고 있으며, 흑색으로 그려진 건곤감리(乾坤坎離) 사괘는
현재의 태극기에서 좌 · 우가 바뀐 형태다. 박영호가 제작하였을 것이라 보는 견해와 이응준이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박영호가 1882년 8월 일본 동경에 도착한 뒤 영, 미, 독, 일 등 각국에 배포했던 조선의 국기를 옮겼을 것이라는 견해다.
후자는 1882년 5월 인천에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조선 대표인 신헌(申櫶) ·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이었던
조선의 역관 이응준이 만든 것을 옮긴 것으로 보는 견해다.
조약 당시 청나라의 특사로 파견된 마젠중은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며 조선에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와 비슷한 '청운홍룡기'를 계양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이 조선 대표에게
"국기를 제정해서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김홍집의 명령을 받은 이응준이 만든 조선의 '국기'가
조약 당시 미국 국기인 성조기(星條旗)와 나란히 게양된 것으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 하다고.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에 실려 있는 태극기
조선, 1882(고종 19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1882년 11월 1일 일본 외무성의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남아 있는 태극기다.
지나치게 큰 태극의 비율과 비좁은 공간에 배치된 사괘 때문에 일본측의 일장기 제작 방법을 따라 만든 태극기로 보는 견해와
문서의 작성 시기가 박영효의 일본 체류 기간과 일치하며 당시 각국 공사에게 태극기를 배포하였다는 점에서
이 태극기를 박영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고.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뒷수습 차 같은 해 8월 수신사(修信使) 대표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호는 철종(哲宗)의 사위로
조선 개화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당시 국기 제작의 권한을 위임받은 바 있는데 당시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사화기략」과 본국의 기무처에 보고한 글인 「송기무처」에 남기고 있다.
새로 만든 국기를 기거하던 숙소 누각에 걸었다.
깃대에 흰색 바탕을 네모지게 펴서 길이(세로)가 폭(가로)의 5분의 2를 넘지 않게 하였다.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채우고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의 4괘를 그렸다.
일찍이 上으로 부터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일본 행 배 안에서 만들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기술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당시 조선의 수도 한성은 청의 군대에 거의 점령 상태 였고 청나라 국기에 준하는 모습을 강요 받고 있었던 형편.
고종은 청의 입장을 고려치 않고 국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 행 배 안에서 만들고 각국 사절에게
이미 배포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기술케 한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때의 태극기는 전하지 않지만, 이듬해인 1883년 1울 27일
(양력 3월 6일)에 조선 조정이 선포한 국기와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고.
유길준 태극기
조선, 1882년(고종 19), 출전: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편. 『유길준전서』4, 일조각, 1996
1882년 12월 27일에 기록한 「상회규칙商會規則」에 실려 있다.
이 그림에서처럼 당시 조선의 정식 국기는 흰색 바탕에 태극은 적, 청이며 사괘는 지금과 달리 청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제작한 태극기
조선, 1884년(고종 21)경,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당시 조선의 외교를 담당하던 관청이 제작하여 각국의 공사와 영사에게 제공한 컬러 조선 국기.
사괘 색깔이 분명한 청색임을 볼 수 있다.
左 『통상장정성안휘편』의 대청국속고려국기
조선, 1886년(고종 23),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右 『통상약장유찬』의 대청속고려국기
조선, 1886년(고종 23),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
청나라가 발행한 책에 실려 있는 태극기 그림이다. 위 두 책에는 태극기와 함께 국기 제정을 알리기 위해 조선이 청에 보낸 문서가
함께 실려 있다. 여러 정황 상 태극기가 공포될 당시의 모습이라 보기도 하지만, 그림에서 바탕색을 노랑으로 칠하고 태극에 작은
원을 표현한 것에 대해 청나라가 자국의 입장에서 조선의 국기를 변조한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가 소장했던 태극기
조선, 1890년경, 263×180cm, 등록문화재 382호
데니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던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데니의 가족에게서 기증받은 윌리엄 롤스턴이 우리나라에 기증하였다.
당시의 태극기와 비교해 보면 혹시 태극을 뒤집어서 박음질 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고.
데니(德尼: 1838~1900년)
美 외교관으로 청나라 리홍장의 추천으로 고종의 외교 고문을 맡아 『청한론淸韓論』을 저술, 근대 국제법 이론을 인용하여
리홍장이 주장한 속방론屬邦論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선이 엄연한 독립국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리홍장의 미움을 받아 고문직에서
파면당해 고국인 미국으로 떠났다. 동양 원예 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우리나라 꿩을 미국 전역에 퍼트린 장본인이다.
쥬이 태극기
조선, 1884년(고종 20), 53×36cm,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장
1883년 미국 공사 푸트가 조선에 왔을 때 그를 수행했던 쥬이가 미국으로 가져간 것이다.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
대한제국, 1897년(고종 광무 1), 전체높이 14.28m, 사적 32호
이 태극기를 비롯한 1897~1910년 대한제국기의 태극기들은 아직 제작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태극의 모습이 매우 다양하고 사괘의 위치도 일정치 않다. 다만 시대가 지날수록 태극의 꼬리가 점차로 줄어들었다.
대한제국 통신원에 게양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대한제국, 1900년경, 120×86cm.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일본에 빼앗겼다가 한일협정에 따른 문화재 반환으로 1966년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앞서의 '쥬이 태극기'등과 비교해 보면 감괘와 리괘의 위치가 바뀌어 있고 사괘를 붉은 색으로 표현 하였다.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의 손녀가 대여한 태극기
위) 조선, 1890년 전후, 245×18.5cm. 아래) 대한제국, 1900~1910년, 17.5×11.5cm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선교 활동을 했던 윌리엄 아서 노블이 소장하였던 것. 그의 손녀가 보관해 왔다.
도안의 형식, 명주明紬 바탕 재질, 채색 등으로 볼 때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두 점 모두 박음질로 천을 덧대어 태극문과 사괘문을 만들었다.
아래 태극기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의 한국 국기'라는 노블 목사 부인의 친필이 적혀있다.
호남의 의병장 고광순이 일본과 싸울 때 지녔던 태극기
대한제국, 1907년 128×82cm, 등록문화재 394호, 고영준 소장.
임란 때 금산성(金山城)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12대 손 고광순高光洵이 지녔던 태극기,
고광순은 명성황후 시해를 보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구례 땅에서 순절하였다.
붉은 글씨의 '불원복不遠復'이란 '조국이 국권을 곧 회복할 것이다.'라는 뜻.
지리산 자락 구례 연곡사 에 있는 「고공광순 순절비」
대한황제폐하 몸기 그림
대한제국,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독일인 헤르만 산더(1868~1945년)는 보병 중위 신분으로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그가 근무 기간 중 1906년 3월 대한제국을 방문하여 많은 사진을 남겼고, 특히 '하은'이라는 호를 가진
조선 화가에게 부탁하여 이 그림을 포함한 다수의 그림도 남겼다.
그림의 깃발은 '대한황뎨폐하몸긔'라는 제목인데 대한제국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황제가 곧 국가인 시대이고 대한제국이 조선 말기에 제정한 국기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이 그림의 깃발은 단순히 황제의 깃발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기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3 · 1독립운동 때 평양 숭실학교에 걸렸던 태극기
일제 강점기, 1919년, 166×125.5cm,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당시 숭실학교 학생 김건에게 "반드시 너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 한다."고 당부해서
3 · 1만세운동 이틀 전 동료들과 제작한 것으로, 이후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마포삼열(馬布三恱: 1864~1939년)
목사가 1년 동안 보관하다가 미국의 아들에게 보냈으며,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 시기에도 태극기 제작에 관한 일정한 제도가 없었으나 대체로 태극의꼬리가 짧은 모습으로 통일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태극기과 같이 태극의 머리를 상하로 두거나 태극기의 오른쪽을 국기봉에 매단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태극기
1930~1940년, 99×74cm, 국회 헌정기념관 소장, 손세일 기증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태극기
1923년, 189×142cm, 등록문화재 395호, 이군옥 소장, 독립기념관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김붕준(金朋濬: 1888~1950년 납북)이 보관하였던 유품으로
지금은 유족에 의하여 독립기념관에 기탁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태극기
1930년대, 257.5×128cm,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장준하 기증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광ㅂ고 후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장준하(1918~1975년)가
1949년 김구 선생으로 부터 받아 보관하다가 1975년 이화여대에 기증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친필이 적힌 태극기
1942년, 62×44.3cm, 등록문화재 388호, 독립기념관 소장, 이혜련 기증
김구가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던 벨기에 출신 미오스 오그 신부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한인 교포들에게 보낸 태극기다.
미오스 신부가 뉴욕에서 1년간 활동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에게 이 태극기를 전달한 것으로 친필 내용은 이렇다.
매우사(梅雨絲: 미오스 오그)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광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아래의 의구(義句: 옳은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 인력· 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努末勢):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重慶)에서 김구 근증(謹贈)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제작 규정을 통일한 태극기
1942년 출전: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제75호,
현재의 태극기와 비교하면 작도법은 거의 같으나 음양 양의와 사괘의 위치가 현재와 다르고 감과 리의 두 괘가 바뀌어 있다.
또한 국기 오른쪽에 게양봉을 두었다. 태극기의 상징에 대해서는 "태극의 홍색은 양(남성)을 대(代)하고, 청색은 음(여성)을 대함.
사괘의 건과 리는 천(하늘)과 일(해)을 표(表)하고 곤과 감은 지(땅)와 월(달)을 표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광복군들의 친필이 적힌 태극기
1945년, 87.9×61.8cm, 등록문화재 389호, 독립기념관 소장, 문수열 기증
1944년부터 광복군 제2구대 대원으로 활약한 문수열(文洙烈: 1926년생, 광복군명 문웅명(文雄明)이 1945년 1월 10일 광복군과
협약을 맺고 있던 미국 특수부대로 옮겨가게 되자 전우 이정수(李廷秀:1920~1987년)가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물한 것이다.
특히 이 글귀들은 광복이 된 뒤인 1946년 1월에 중국에서 적은 것으로 여기에는 70여 광복군 대원들이 조국의 완전한 주권을 찾아
진정한 광복을 이루자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이 태극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규격을 통일한 태극기와 태극 및 사괘의 위치가
모두 다름을 볼 수 있다. 국기양식일치안을 내놓았지만 그것이 실용화되기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의 태극기
1945년 11월 8일 미군정하의 문교부에서 국기 도형을 공표하여 규격에 맞는 태극기를 사용하게 된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서정희 의원이 지녔던 태극기
1948년, 80×54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서정희 의원이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유족들이 간직하고 있다가 2008년 기증하였다.
제헌국회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구성된 국회를 말한다.
제헌국회는 7월 12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정 ·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병들의 친필이 적힌 태극기
1950년, 74×59cm, 등록문화재 392호, 독립기념관 소장
건국대학(현 건국대학교 전신)법률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서명한 것으로 전하며,
'대한민국초석', '필승학병' '용맹한 우리 역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등의 글귀가 적혀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이철희가 지녔던 태극기
1950년, 87×56cm, 등록문화재 393호, 독립기념관 소장
참전용사(예비역 특무상사) 이철희李鐵熙의 유품이다. 태극 주위에 1950년 6월 25일부터 동년 10월 5일까지 머물렀거나
참전했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고, 네 귀퉁이에는 사변폭발事變爆發 즉 '전쟁이 발발하였음'을 의미하는 글귀가 있다.
달에 갔다온 태극기와 달에서 채취해 온 돌
1969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박정희가 1969년 미국 방문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을 탐사하고 돌아온 뒤
달에 갔다온 태극기를 목제 받침대 위에 놓고 그 위에 달에서 채취한 돌 4조각을 진공 유리 반구 속에 넣어 설치한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대회 응원 태극기
한일 월드컵대회 응원 때 사용한 가로 60m, 세로 40m의 대형 태극기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국기國旗의 계양일揭揚日 · 제작기준製作基準 · 게양위치揭揚l位置 · 게양방법揭揚方法
2. 태극太極과 팔괘八卦 · 사괘四卦 문양文樣
기氣를 상징하고 표현하는 문양 - 태극문太極紋과 연화문蓮花紋을 중심으로
서울 종묘 문설주 아래의 태극문
3. 태극기와 태극 · 팔괘 · 사괘 문양
1900년 1월~1901년 5월, 이화李花 보통 우표 14종
1884~1905년, 천안 우정박물관 소장 우표郵票로 태극 문양을 사용하여 발행한 우표들이다.
민영환 태극장 증서
대한제국, 1900년, 91.5×67.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민병기 기증
네 모서리에 태극문이 있고, 상단 중앙에는 대한제국의 무장인 이화문李花紋이 있다. '대한국새大韓國璽'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는 공종황제의 수결이 있다. 우측 면에는 종1품인 민영환을 일등으로 올리고 태극장을 하사하며 그에 맞는 대우를
영원히 누리게 한다는 황제의 명령을 적었다.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영환은 외무대신 · 시종무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며 자결하였다.
여권旅券
대한제국, 1904년, 33×29.4cm
1904년 12월 19일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 관청인 외부外部에서 박기오朴基五에게 발행한 것이다.
왼쪽에는 영어와 불어로, 오른쪽에는 한자로 내용이 기입되어 있고 1년의 유효기간이 명시되어 있다.
상업빙표商業憑票
대한제국, 1899년, 18.9×24.5cm
1899년 상무사商務社에서 상인에게 발급한 상업빙표다.
상무사는 전국 보부상인褓負商人의 관리 등 상업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1899년 세운 기관으로
상업빙표는 보부상인에게 지급한 것이다.
독립신문 과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호에는 태극기가 함께 인쇄되어 있는데 항상 일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태극기의 제작법이 통일되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 같다.
황성신문은 한글과 한문을 혼용했다. 맨 윗쪽 교차된 두 태극기 문양이 있는데 사괘의 위치가 다른 태극기와는 다르다.
3. 태극기와 함께한 격동의 100년
독립문은 1896년 11월 21일 기공하여 이듬해 11월 20일 준공한 것으로 조선과 중국의 종속관계가 종식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 중국 사절단을 영접하던 장소에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에 새긴 태극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뒷 산은 인왕산이고 앞의 돌기둥 두 개는 독립문을 지을 때 헐어낸 영은문迎恩門의 것이다.
대한제국 군대의 병영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하였을 때 찍은 사진 가운데 하나다.
경부선 개통식
1905년 서대문역에서 거행되었다. 대한제국 국기와 일본 국기가 교차되어 게양된 것은
당시 이 철도공사가 일본의 힘과 자금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부산항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에 내걸린 만국기 가운데 태극기
순종 황제는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수원, 대전, 대구, 부산 등 남쪽 지방을 순수한 뒤 부산항을 방문하였다.
이에 일본황제는 순종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특별히 일본 군함들을 보냈고 각 군함의 정상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오른쪽 중간의 연기들은 예포禮布의 연기로 추정된다.
태극문과 팔괘문이 있는 통천관을 쓴 초상화
1915년, 채용신 그림, 경기도박물관 소장.
통천관通天冠은 황제가 쓰는 모자다. 이 초상화 속의 인물은 당시 신흥 종교의 지도자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첫째 이전의 통천관에 태극문과 팔괘문을 장식한 사례가 없었다는 점, 둘째 이 초상화 속 인문이 당시 왕족이 아니라는 점,
셋째 흔히 당시 신흥 민족 종교 지도자들이 황제, 천자를 자처하였다는 점, 넷째 그림의 작성 시기가
'일천십오만팔백이십이년을묘년'으로기록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신흥 종교에서는 대개 우리나라의 역사를 실제보다 과장하여 소급하려는 경향이 있다.이 초상화의 통천관과 거기에 담긴
태극문과 팔괘문은 종교 지도자의 위상을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역할과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1932년 4월 26일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입단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위 내용 대부분은 지난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행한 『대한의 상징 태극기』를 첨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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