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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지리산 자락을 어슬렁

 

 

남원 운봉 산덕으로 거처를 옮기신 윤중 선생님의'백일학교'를 찾았습니다.

 

 

 

 

 

 

만찬은 일백% 자연식으로...

 

 

 

 

 

 

이튿날 아침,

 강화에서 옮겨 오셨다는 몽골식 게르와 지리산 서북능선 바래봉 자락이 눈에 들어 옵니다.

 

 

 

 

 

 

수련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내부가 약쑥 건조 공간으로...

 

 

 

 

 

 

사단법인 밝은마을

 

 

 

 

 

 

윤중 황선진 선생의 공간 몽골식 게르.

 

 

 

 

 

 

 

아침 산책

 

 

 

 

 

 

오른쪽 멀리 고남산을 따라

왼편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병풍삼아 자리잡은 운봉읍 일대.

 

 

 

 

 

 

 

부운치 쪽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농약 살포용 무인헬기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최대 용량은 16 리터라는 설명.

거의 원액 수준으로 살포한다네요.

 

 

 

 

 

 

비가 오락가락하는 후텁지근한 날씨 가운데서도

숲 사이로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려 옵니다.

 

 

 

 

 

 

 

운봉읍과 고남산.

 

 

 

 

 

 

부운치로 올라가는 길,

드디어 지리산 다운 폭포가 나타납니다.

 

 

 

 

 

 

 

 

 

 

 

 

 

다시 돌아온 백일학교.

 

 

 

 

 

 

정심당님의 지리산표(?) 주문수련.

 

 

 

 

 

 

뚜란님께서 팽주를 맡아 우려내 주시는 보이차 세례.

 

 

 

 

 

 

찻자리를 털고 일어나 당도한 곳은 판소리 가왕(歌王) 송홍록 생가.

 

 

 

 

 

 

 

 

 

 

 

 

 

 

 

 

 

 

 

춘향가 중 옥중가를

이른바 귀곡성(鬼哭聲)으로 뽑는 게 송홍록의 장기였다는데,

후대의 인물인 임방울 선생의 귀곡성과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었을지 궁금.

 

 

 

 

 

 

내부를 거니는데, 춘향가 한 대목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여류 명창 박초월의 목소리인 듯.

 

 

 

 

 

 

 

송흥록(宋興祿)1801년 ~ 1863년

 

음악에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나 소리는 극히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고

부친이 한 두 번 선창을 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

 

부친 송첨지는 초대 명창 송첨지의 수행 고수였다.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가 소리공부에 전념하고 밤이면 글을 배우며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를 터득하였다. 또한 소리를 정리하고 집대성하였으며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1859년 (철종10년) 봄, 의정부좌찬성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왕 앞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다.

 이에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근세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가왕(歌王)으로 꼽히고 있다. 판소리에 우조, 계면조를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진양조를 도입하는 등 고도로 예술화시킨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다.

 

동편제 유파를 확립하였으며, 그의 가문에서는 공광록. 송우룡. 송만갑 등 쟁쟁한 명창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매부인 명창 김성옥(金成玉)과 함께 판소리에서 처음으로 진양조(판소리에서 제일 느린 가락)를 개발,

특히 세도가(勢道家)인 김병기의 총애를 받고 '호풍환우(呼風喚雨) 송흥록'이란 별호로 불리었다.

그의 집에서 몇 년간 기거했으나, 1862년(철종 13년) 김병기의 비위에 거슬려 함경도로 추방되었다.

 후에 흥선대원군이 그를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더늠은《춘향가》의 〈옥중가〉 중에서 ‘귀곡성’(鬼哭聲)과 단가 〈천봉만학가〉(千峰萬壑歌)이다.

이것은 오늘날 〈고고천변〉(皐皐天邊)으로 고쳐 불리고 있다.

 

 

 

 

 

 

 

 

 

한 가지 일화.

어느날 밤, 진주 촉석루에서 〈옥중가〉를 불렀는데, 수천의 청중이 송흥록의 소리에 눈물을 흘렸으며,

‘귀곡성’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바람이 일고 수십 개의 촛불이 일시에 꺼지면서 하늘에서 귀신 울음

소리가 들려와 수천 청중의 등골이 오싹하였다고 한다.

 

 

 

 

 

 

 

 

 

 

 

 

 

 

 

 

 

 

 





 

 

 

 

 

 

 

 

 

 

 

 

 

 

南原荒山大捷碑址

남원황산대첩비지

 

고려 말에 이성계(李成桂)가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일을 기록한 비가 있던 곳이다.

1380년(우왕 6)에 삼도순찰사 이성계는 산 아래 협곡에서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이두란(李豆蘭) 등

휘하의 여덟 원수를 거느리고 함양에서 공격해오는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

사살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황산대첩은 이후 크게 알려져 그 내용이「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수록되었다.

1577년(선조 10)에는 당시의 승전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 1520∼1593)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 1517∼1584)의 글씨로 새긴 황산대첩비가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비각(碑閣)·별장청(別將廳) 등의 다른 건물도 지어 비를 지키도록 하였다

지금도 비터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45년 1월에 남원의 경찰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소방대를 동원하여

 비를폭파하고 비문의 글자를 긁어 버렸다.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뒤 깨진 거북돌을

 맞추고 오석(烏石)으로 비신을 다시 세웠고, 1973년에는 비전(碑殿)·홍살문·삼문·담장 등과 함께

여러 부속건물 등을 새로이 정비하고 단장하였다.

 

새로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4.25m로, 용을 새긴 이수(螭首)와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다. 

 

 

 

 

 

 

 

 

 

 

 

 

 

 

황산대첩비지에서 바라본 덕두봉과 바래봉 일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백두대간 상 유일하게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구간인 노치마을.

 

 

 

 

 

 

많은 대간꾼 들이 지나서일까?

예전과는 달리 많이 화사해진 모습이다.

 

 

 

 

 

 

노치샘도 확실하게 정비 되었고...

 

 

 

 

 

 

 

 

 

 

 

 

 

 

 

 

 

 

 

 

수정봉과 여원치를 지나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

 

 

 

 

 

 

과거엔 산을 오르내리기 위해 이곳을 지나쳤다면,

오늘은 순전히 위에 보이는  네그루 노송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

 

 

 

 

 

 

노치마을 뒷편 500년 수령의 네 그루 소나무

이름하여 四仙松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노치마을 당산제

 

옛날 오래 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바로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는 사실.
 그 후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음력 1월 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자손이 없던 마을 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 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지금은 7월 백중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고.

 

 

 

 

 

 

 

 

 

 

 

 

 

 

 

 

 

 

 

 

 

 

 

 

 

 

 

 

 

 

 

 

 

 

 

 

 

 

 

 

 

 

 

 

 

 

 

 

 

 

 

 

 

 

 

 

 

 

 

 

 

 

 

 

 

 

 

 

 

 

 

 

 

 

 

 

 

 

 

 

 

 

 

 

 

 

 

 

 

'백두대간' 이라는 타이틀이 궁금하여,

물경 이천 냥을 지불하고 들어가 본 생태 전시관

 

 

 

 

 

 

 

 

 

 

 

 

 

 

 

 

 

 

 

 

산꾼들의 종조로 추앙되는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

 

 

 

 

 

 

 

 

 

산경표

 

                   

1책. 필사본. 표의 기재 양식은 상단에 대간(大幹)·정맥(正脈)을 표시하고 아래에 산(山)·봉(峰)·영(嶺)·치(峙) 등의

위치와 분기(分岐) 관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난외 상단에 주기(註記)로 소속 군현을 명기하였다

내용은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이에서 연결된 14개의 정간(正幹)·정맥으로 구분되어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그치며,

장백정간(長白正幹)은 황토령(단천)에서 시작하여 함경도 지역의 산계들을 포함한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은 지리산 취령(鷲嶺)으로부터 경상도 서남부 일대를,

청북정맥(淸北正脈)은 낭림산(강계)으로부터 평안북도 일원을,

청남정맥(淸南正脈)은 백운산 (개천)으로부터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해서정맥(海西正脈)은 발은산(勃隱山 : 서흥)으로부터 황해도 일대를,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은 개련산(開蓮山 : 伊川)으로부터

황해도 및 경기도의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 지역을 포함한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백운산(白雲山 : 安峽)으로부터 한강 이북과 임진강 이남 지역을,

낙동정맥(洛東正脈)은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부·서북부 지역을 포함한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속리산으로부터 충청북도 및 경기 일부 지역을,

한남정맥(漢南正脈)은 광교산(光敎山 : 수원)으로부터 경기도 및 충청남도 일부 지역을,

금북정맥(錦北正脈)은 송악(松岳 : 온양)으로부터 충청남도 일원을 포함한다.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은 장안산(長安山 : 長水)으로부터 전라북도 일대를,

금남정맥(錦南正脈)은 계룡산(공주)으로부터 시작하여 충청도 및 전라북도 서부 지역을,

호남정맥(湖南正脈)은 굴치(屈峙 : 태인)로부터 전라남도 지역의 산지들을 계통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의 산맥 체계를 수계(水系)와 연결시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놓은 책으로서,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인이 분류, 명명한 산맥 구분 및 산맥 명칭 이전의

조선의 전통적인 산지 분류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1913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활자본으로 간행, 널리 유포되었다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 의 묘. / 전북 순창군 소재

 

 

 

18세기 조선의 방향을 제시한 大실학자

 

 


 

조선의 실학자인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을 재발견한 사람은 국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였다.

위당은 1934년 전북 순창읍 남산마을의 신경준 고택을 찾아 "여암이 남긴 저술이 사람 키만큼 쌓였건만 귀한 줄 몰라 좀이 슬고

쥐가 갉아먹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위당은 여암을 '나라를 구할 인재'라고 평가했다.

여암은, 신숙주의 동생으로 세조에 협력치 않고 순창에 내려온 신말주의 10대손이었다.

 43세에 과거에 급제, 26년간 벼슬을 지낸 학자였다. 동국여지도·운해훈민정음·여지고(輿地考)·거제책(車制策)·병선책(兵船策) 등

25가지 이상의 저술로  실학과 국학의 토대를 세운 것으로 평가 받는다. 신경준은 '여암유고'에 시 145수를 남겼다.

 

 

 

 

 

 

신경준 선생 유지(遺址)에 1970년대 후반 들어선 한옥. 전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됐다.

 

이토 히데토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여암의 한자음-그 한국적 특징과 보편성'에서 "운해훈민정음은 현대언어학의 관점에서 볼 때

놀랄 만큼 과학적인 저술"이라고 평가한다. 이토 교수는 "여암은 중국 한자음을 훈민정음의 초·중·종성 이론으로 분석하면서

중국과 한국 한자음의 괴리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 했다"며 "20세기 들어 통용된 방법으로 2세기 전 분석에 성공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말한다.

여암은 영조의 명으로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한 '동국문헌비고'(100권)를 편찬하며 지리분야인 여지고 17권을 정리했다.
여암은 전국을 유람하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과거 급제 전부터 역사, 문학, 국어, 지리, 과학기술 등 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60대 들어 좌승지와 강계·순천부사, 제주목사를 지낸 뒤 낙향해 저술 활동 중 별세했다.

 

 

 

 

 

 

백두대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직원에게 물었다.

 

- 여암 선생 묘소는 가 보셨나요?

 

"....... 어디 있는데요?"

 

 

 

 

 

 

 

 

 

 

 

 

 

 

 

 

 

 

 

 

 

 

 

 

 

 

 

 

 

 

 

 

 

 

 

 

 

 

 

 

웨이스캐이꼬리나비

 

 

 

 

 

 

리페우스 무지개 나방

 

 

 

 

 

 

비단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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