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山禪門宗刹迦智山寶林寺
구산선문종찰가지산보림사
'피안의 세계'로 들어 서기 전, 일주문에서 돌아 보니...
長興寶林寺東僧塔
장흥 보림사 동 승탑
보물 제155호. 높이 3.6m. 보림사 동쪽 숲속에 있는 승탑 군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부도의 형식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기본을 따랐으며 지대석(地臺石)도 8각으로 매우 넓다.
하대석(下臺石)은 반구형(半球形)에 가까운데 매우 평평하며 큼직한 8엽의 복련(覆蓮)이 덮여 있고,
모서리의 연판(蓮瓣)에 귀꽃이 있다. 복련 밑에는 높직한 면을 돌리고 8각의 면마다 안상(眼象)을 1구씩 조각하였다.
이 안상의 끝머리 좌우에서 안으로 뻗은 두 개씩의 뿔은 매우 날카로워 일반적인 형태와는 다른 것이 특징이다.
중대석(中臺石)은 가늘고 낮은 8각 돌기둥으로 표면에는 조식(彫飾)이 없다.
상대석(上臺石)은 하대석과 같이 반구형에 가까운데 귀꽃이 없을 뿐 큼직한 8엽의 앙련이 돌려져 있다.
밑에는 낮은 3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높은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 역시 8각의 석주형인데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의 표시는 없고 한 면에 문호형(門戶形)과 자물쇠형이 얕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밑의 다른 부재들에 비하여 좁고 낮은 편으로 아랫면에는 탑신과 접하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 밑으로 넓은 낙수홈이 패여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박하고 옥개석 윗면에는 여덟 줄의 굵고 높은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 조식되었다.
상륜부(相輪部)의 옥개 꼭대기에는 간석(竿石)이 놓였고,
그 위에 추녀의 모퉁이가 약간 위를 향한 보개(寶蓋)가 놓였는데 우동 끝에 귀꽃이 표현되었다.
보개 위에는 보륜(寶輪)이 있고 바깥쪽으로 굽은 이중연판 위에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이 부도는 조각기법이 세련되었으나 밋밋하고 가냘퍼 입체감이 결여되었고
조형에 있어서도 중대석이 작고 좁아 불안한 감을 준다.
또한 각 부재의 너비도 좁아져서 더욱 이러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형식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시대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 승탑에서 내려다 본 승탑군.
보림사는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이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공비들이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長興寶林寺木造四天王像
장흥보림사목조사천왕상
보물 제1254호. 높이 3.2m, 너비 2.9m.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 중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제작된 유일한 상이기도 하다.
1539년(중종 34)에 처음으로 조상하였고, 그 후 1668년(현종 9)과 1777년(정조 1)에 중수하였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함께 활달한 율동감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유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후로 만들어질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전형(典型)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칼을 들고 있는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얼굴은 굴곡이 없이 원통형으로 처리되었으며 눈동자에는 마노(瑪瑙)와 같은 광물질을 박아 처리하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나 무서움을 주지 않는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화려한 보관의 높이가 얼굴의 길이보다 더 길게 강조되어 있다.
4위(位) 천왕의 팔꿈치 대의가 모두 심하게 말려 위쪽으로 올라갔으며 이것을 묘사한 기법은
천의 자락의 현란한 표현 기법과 더불어 이 작품의 우수성을 잘 보여 주는 면이라고 하겠다.
팔뚝이 신체 비례보다 강조되는 반면 가슴과 배 부분이 빈약하게 표현되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팔뚝에서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의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내고 있다.
3위 모두 왼쪽 다리를 들고 오른쪽 다리를 수직으로 내리고 있는데
용, 보주를 든 사천왕만이 두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다.
현재 발밑의 악귀는 보탑을 든 천왕의 왼쪽 1구만 남고 모두 없어졌으며 4위 모두 발을 허공에
띄우고 있는 점을 보아 8구의 악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의 사천왕상과 거의 흡사한 점으로 보아 불갑사상의 모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95년 2월에는 이 상의 해체 조사 작업 중 무릎과 발 등에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한 전적류 250여 권이 발견되었다.
보림사를 찾아 왔던 근 50여 년 전의 기억과 현재의 멀끔한 모습이 오버랩된다.
사천왕상을 지나 경내에 들어 서자니 온통 쑥대밭 가운에
석등을 사이에 둔 탑 두 기만 덩그마니 서 있었던 기억을 떠 올린다.
長興寶林寺南·北三層石塔─石燈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1석등
석탑 2기중 남탑의 높이는 5.4m, 북탑의 높이는 5.9m이며, 석등의 높이 3.12m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相輪)을 얹은 신라의 전형양식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된 지대석(地臺石)으로 놓였는데, 기단의 구성은 상·하층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의 갑석(甲石)이 얇고 부연(副椽: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하층기단은 면석(面石)과 갑석을 같은 돌로써 조성하였는데 하단에는 높직한 굽을 돌린 위에 가느다란 1단의 받침을
조출하였으며,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하층기단의 갑상면에는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평평한 곳에 상층기단을 놓고 있는데,
상층기단 면석 각 면의 양쪽 우주는 정연하나 탱주는 하나로 간략화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 상면은 약간 경사를 보이며, 그 중앙에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2단 받침대를 마련하여
탑신부(塔身部)를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받침대가 신라 성대의 석탑에서는 다각형이었던 것이 이때 와서는
1단이 원호로 되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각 층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한데,
2·3층 탑신석의 양쪽 우주는 초층에 비하여 가냘퍼졌음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의 옥개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이 탑신 굄대도 낮아져서 약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추녀도 기단부의 갑석과 같이 얇으며, 네 귀퉁이 전각(轉角)에는 반전(反轉)이 심하여 평박한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룬 것같이 보이고, 따라서 네 면의 합각(合閣)도 더욱 예리한 선으로서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양쪽 탑이 모두 완전하여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의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은 남탑에는 삼륜(三輪), 북탑에는
오륜(五輪)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로서 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그리고 양쪽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오목새김하여 신라시대 배례석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이 2기의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하여 하층기단은 협소하다.
탑신부에서 각 탑신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도 가늘며 옥개석 낙수면도 매우 얇고 전각의 반전만이 크기 때문에
가냘픈 느낌을 준다. 또 노반이 크고 상륜도 굵은 편이나 전체의 조각장식은 매우 약화되었다.
1934년 가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합(舍利盒)·자기류(磁器類)·목판(木版)·
비단·사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 및 중건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870년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願塔)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891년(진성여왕5)에 사리 7매가 봉안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1478·1535·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62년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전형적인 신라석등으로서,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地覆石)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下臺石)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8각이며 높은 받침과 복련석(覆蓮石)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1좌씩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모퉁이를 향한 연판(蓮瓣)이 조
각되었는데 꽃잎 끝은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竿柱)는 8각이지만 표면에 조각은 없고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석(上臺石)은 밑에 3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중엽(單瓣重葉)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 1석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에는 경미한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은 복잡하여 복련이 조각된 받침 위에 편구형(扁球形)의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가 얹혔는데, 안쪽에 중판연화(重瓣蓮華)가 조각되었음은 특이하다. 이 위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 완형을 보이고 있다. 이 석등 역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寶林寺石塔誌
보림사 석탑지
보림사석탑지는 두 석탑의 안에 들어 있던 납석(蠟石)제 탑지이다.
탑지는 1933년 삼층 석탑을 보수할 때 사리구와 함께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해서로 기록된 탑지의 서풍(書風)에 대해서는 초당의 구양순풍 혹은 남북조풍 등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고 쌍봉사(雙峰寺)·무위사(無爲寺)의 대회안거와 무위사 주존불 조성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더욱 남탑지의 바닥과 측면에는 1684년(숙종 10) 5월 26일에도 다시 탑을 중수한 사실도 기록하여 놓았다.
북탑지에 따르면, 탑은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왕생을 기원하여 870년(경문왕 10)에 세웠다.
이 사업은 서원부(西原部; 청주)의 장관 김수종(金遂宗)이 왕명을 받아 백사(伯士) 진뉴(珎鈕)와 함께 추진하였다.
그런데 김수종의 경우 958년 보림사에 철조 비로자나불조상기에 무주 장사현(전북 고창) 부관으로 나와 있다.
이는 그가 보림사의 불사활동에 깊숙이 관여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남탑지에는 891년(진성여왕 5)에 사리 7매를 넣었다고 기록하였는데, 20년 뒤 다시 보수를 한 것 같다.
또한 북탑지의 상면과 하면에는 조선시대의 수리사실이 기록되었다.
1478년(성종 9) 대회안거(大會安居)를 마친 대중 300여인이 탑이 기울어진 것을 보고 수리할 마음을 내었고,
화주(化主) 원식(元湜)과 대시주 박성미(朴成美)를 비롯 대중들의 보시를 받아 탑을 중수하였다.
과거 보림사의 사세에 비춰 볼 때 당간석의 규모는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듯.
두 마리 용이 늘어 선 용마루
長興寶林寺普照禪師塔碑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보물 제158호. 높이 3.46m.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지선(智詵)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碑身)과 귀부(龜趺)·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龍頭)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蟠龍 :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모두들 보조선사탑비와 귀부에 대해서만 사설을 늘어 놓는다.
하지만 나는 이 거북의 발 부분에 주목한다.
너무도 사실적인 발가락 모양과 날카로운 발톱하며 몸통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주름에 이르기까지
디테일 하나 하나가 이내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최상의 솜씨기에 하는 말이다.
長興寶林寺普照禪師僧塔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승탑
보물 제157호. 이 탑은 구산선문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 체징(體澄 ; 804∼880)의 승탑이다.
보조선사는 도의(道義)와 염거화상(廉居和尙)의 법맥을 이어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선사이다.
탑의 높이는 4.1m이며, 가지산 기슭에 탑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地臺石) 상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매우 낮은 각형(角形) 1단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上臺石)·중대석(中臺石)·하대석(下臺石)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中臺)를 받기 위한 원형의 굄돌을 따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측면에 권운문(卷雲文)을 원각(圓刻)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조식하였다.
굄돌 상면에는 8각으로 낮은 1단의 각형과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는데,
측면의 운문(雲文)이 반전(反轉)되듯 입체적으로 위까지 올려 덮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배가 약간 부른 형태로서 배흘림을 표현하고 있다.
각 면에는 상·하단부에 대칭으로 두 줄의 횡대를 돌리고 각 횡대 사이에는 모서리에 1좌씩,
그리고 그 중간에 1좌씩의 화문(花文)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상하에 괄호형이 있고 좌우에도 중앙에 1단의 굴곡을 둔 방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식의 안상을 평행선으로 이중이 되게 오목새김하였다.
여기에서처럼 안상이 방형이라든지 삼중으로 안상을 조각한 중대석의 양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안상 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이 간소하다.
탑신 굄대는 다른 돌로 높게 조성하여 끼웠으며 8각을 이루었는데,
각 측면에는 조각이 전혀 없으며 중간에 가로로 한 줄의 곡선을 돋을새김하고 상하단은 낮게 갑석형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측면이 수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중간의 횡선을 경계로 하여
각기 상하단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중대석의 배흘림의 의장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굄대 상면에 굄단이 없이 탑신석을 안치한 것은 상대석 상면과 같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석의 앙련대(仰蓮帶)는 상단의 8각 갑석형(甲石形)과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하면에는 8각의 중대석 상면에 맞게 놓이도록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였다.
앙련은 단엽1판(單葉一瓣)씩을 각 모서리에 조각하였는데, 이 판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또 하나의 연엽형(蓮葉形)을 오목새김하고 그 안을 고사리문과 곡선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모각되고
특히 상단부에는 주두(柱頭 : 대접받침)가 모각되어서 목조가구(架構)를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전후면에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甲胄)가 화려하다.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이 현재 남서면에 위치하고 있어 탑신의 앞뒤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두 면에는 상을 조각하지 않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옥개석 역시 8각형으로 하면에 서까래모양을 모각하였는데 탑신석에 놓이는 부분에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내고 처마 부분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여덟 면의 합각(合角)에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 굵직하게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추녀는 수평이나 매우 중후하고 막새기와의 표시도 전혀 없는데,
각 모서리에는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우동 끝에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표현되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옥개 정상에는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여 상륜(相輪)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완형이 아니지만 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복발은 원형이며 측면에는 여덟 귀퉁이를 표시하기 위한 화문을 조식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횡대를 돌렸다.
그리고 이 위에 대의 마디 모양의 간주(竿柱)가 세워지고 그 중간마다 보륜이 놓였는데
각 측면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식하였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현재는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며, 하단은 각 면에 안상(眼象)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승탑구역 한 편에 선 목이 사라진 석불.
長興傳義湘庵址石佛立像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장흥군의 의상암으로 전하는 폐사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불상.
광배(光背)와 불신(佛身)을 한 돌에 새겼는데 거신광(擧身光)의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肉髻)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은 보수되어 이목구비가 여성적이다.
체구는 아담한 편으로,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대의(大衣)는 양 어깨를 가린 통견식(通肩式)으로 입었는데, 가슴을 U자형으로 팠으며
대의 깃이 왼쪽 어깨 위에서 밖으로 접혀져 세모꼴의 주름을 이루었다.
양 손목을 거쳐 발밑까지 두꺼운 대의자락이 둔중하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전면에 U자형의 넓은 주름이 음각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長興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117호. 높이 273㎝.
광배(光背)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8행의 불상 조상기음각되어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와 장사(長沙: 지금의 장흥)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이 불상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되어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 부분은 나발(螺髮)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과
비슷한 것이며,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奉化鷲棲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995호)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육계(肉髻)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비만하다.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 선에서도 잘 나타난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평행의문선(平行衣文線)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다소 해이해진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 백과사전 해설 참조 -
보림사를 감싸 안은 가지산 일대에는 비자림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백련향을 떠올리며 근심을 풀어내시라는 권유.
누구의 아이디어 인지는 몰라도, 이런 배려야 말로 문화의 격조와 직결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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