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선병국 가옥(報恩宣炳國家屋)
충북 보은군 장안면 소재 조선 후기의 고택.
속리산 남쪽 자락의 물과 만수계곡이 합쳐져 삼가천을 이루는 삼각주 울창한 송림에 자리한다.
고택에 이르는 다리를 건너 대문 반대편 뒷문에서 부터 고택 내부를 둘러 보기 시작.
나라 안에서 이처럼 크고 복잡한 구조를 보이는 집이 또 있을까?
3 구역으로 이루어진 물경 4천여 평에 이르는 면적인지라 한참 동안 발품을 팔아야 겨우 돌아볼 수 있을 정도.
선병국 고택의 랜드마크 장독대가 서서히 시야에 들어 오고...
검붉은 덩굴장미가 걸친 담장과 사랑채로 들어 서는 중문.
사랑채와 수 십칸에 이르는 행랑채가 자리한 드넓은 마당이 고택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안채 뒷편 담장가 원추리 군락과 장독.
사랑채 뒷편 모습.
이 고택의 화려함은 봄 날이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온통 녹음 일색인지라...
전남 고흥이 고향이었던 보성선씨 참의공파 18세손인 선영홍 공이
'섬에 집을 지으라'는 꿈을 꾸고나서 전국의 명당을 수소문 한 끝에 이곳을 낙점하게 되었다고.
냇물이 고택을 돌아 흐르는지라 영락없는 육지 속 섬 형세라고,
그는 본디 고흥 거금도에서 해산물 무역으로 부를 이룬 거상(巨商).
1903년 (고종 40년) 이사 행렬은 소달구지 수십 대가 동원된 최대의 볼거리 였다고.
가리개 역할을 하는 담장이 집안 내부까지 자리한다.
집의 원래 터는 4만 평으로, 2만 평의 가옥과 2만 평의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한국동란으로 상당 부분이 사라졌으며, 나머지 절반의 송림에는 현재 군(軍) 부대가 주둔 중이라고.
사랑채 마루 난간의 형태마저도 근 현대의 영향을 받은 듯.
대문 옆으로 길게 늘어선 담장을 따라오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중문.
집 안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담장에서 외부로 통하는 작은 출입구가 보인다.
집을 지을 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배수(排水)였고,
현재도 자연배수가 완벽하다는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난 80년 수해로 많은 손상을 입어,
이후 예전의 유현(幽玄), 고졸함은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게 대체적인 중론.
'공(工)'자형 평면을 지닌 사랑채 전경
도편수 방대문을 비롯 당대 최고의 목수들을 동원,
1924년 99칸 대저택이 완성되었다는데. 자그만치 곳간만 33칸이요 연자방앗간과 마구간에 이르기까지...
고택의 형태나 각종 문살의 문양을 일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해야겠다.
위선최락(爲善最樂)
'
'선善을 배푸는 즐거움'이라는 편액을 사랑채에 내 걸었다면야
시쳇말로 '노블리스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 주겠노라는 쥔장의 다짐이 아니었을지.
소작인들의 세금 대납과 논밭을 나누어 주는 살뜰함에다
글방을 설치해 무료로 글을 배울 수 있게 하는 등, 이른바 '적선지가積善之家'의 전형이라는데...
보은 향교 명륜당에 서숙(書塾)을 설치해 후학을 양성하고
1927년에는 33칸 규모의 서당 ‘관선정(觀善亭)’을 열어 1944년 일제에 의해 폐쇄되기까지
전국의 인재를 초청 한학을 가르쳤으며, 그들이 60년대 이후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잇는다고.
사당
쥔장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솟을대문을 나서는 모습.
문턱이 없는지라 우마차가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했음을 알 수 있겠다.
대문을 나서며 돌아보니 다소 어수선.
대문 바깥 비각 구역.
효열각
맛배지붕에 간단한 익공에다 단청을 생략하는 게 통례이건만
팔작지붕에 아기자기한 다포와 화려한 단청이라...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누군가는 성리학의 비틀림이라 표현 할 정도이던데,
그것도 오백년 사직을 말아먹은 고종이 내린 정려를 보고 있자니 까닭모를 회한이 밀려 온다.
거개는 솟을 대문에 정려문을 거는 게 통례인데 이 집은 따로 閣을 짓고 비와 정려문을 모셔놓았다.
어쨌 건 '정려문'을 받았다는 것은 조선조 최대 가문의 영광이요, 자랑이자 긍지.
헌데, 살진 서체도 그러하려니와 배열과 새긴 솜씨도 어째 쪼옴~~~
사당 구역 송림에서 바라본 고택과 배경이 된 옥녀봉.
저 옥녀봉을 올라 밀티재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걸어 본 기억도...
‘아랑골’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는 고택의 장꽝 행렬.
전국의 장독을 수집, 이른바 지역별 '장독 전시장'을 꾸며놓은 모습이다.
씨간장의 역사는 삼 사백 년을 헤아린다는데. 그렇다면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
본향 전남 고흥 의 간장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다는 얘기가 될 터.
이 집 간장 1ℓ가 물경 500만 원에 팔린 적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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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 여기저기 여러 형태의 '사숙(私塾)'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거개의 학숙은 '입신양명'을 모토로 훌륭한(?)인재를 찾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이 고택을 거쳐 간 학인들의 수는 무려 1천여 명,
그 중, 사법시험 합격자만 50명 이상을 헤아린다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인재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1893년 전국의 동학교도들은 이 고택 근처에 집결하여
근 한 달 동안 '교조신원운동'과 '척양척왜'등의 함성을 쏟아낸 바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 민주 역사의 시발점이 된 이 보은취회(報恩聚會) 현장에서
혹여 인재 양성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수직적 개념을 털어내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올바른 해석과,
시천주(侍天主)로 대표되는 동학정신의 바른 구현(
具現)
과
실천
을 모색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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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보와 답보를 거듭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진정한 실학(實學)의 의미를 궁구(窮究) 할 때가 도래한 작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