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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봉황(鳳凰) 단상

 

2017. 3. 15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신도비(神道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241호(2008. 9. 19. 지정)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 - 2

 

 

 

 

 

 

 

 

 높이 238cm, 넓이 88cm, 두께 41cm.

 

예전엔 언덕 위에 비각도 없이 비석만 동그마니 서 있었던 기억인데

요번에 가 보니, 근자에 세운 듯한 번듯한 비각 속에 들어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비석은 1800년대 초반에 세워졌으며, 거북 모양의 좌대(座臺)와 글이 새겨진 비신(碑身)

지붕 역할의 가첨석(加檐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생의 묘를 전남 화순군 흑토평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장할 때인 1609년 월정 윤근수(尹根壽1537~1616)가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윤봉(尹鳳)이 비문 위의 전서(篆書)는  윤헌(尹憲)이 썼다.

 

 

 

 

 

 




 

 

 

 

 

만력() 임진년(, 1592년 선조 25년)에 국가가 왜난을 만나자 참의() 고공()이 그 난에 죽어 큰 절개를 나타내었으나, 십여 년이 지나도록 신도비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공의 고자() 고용후()가 나를 찾아와 청하기를, “선인()이 공의 형제()와 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국()한 시종()에 대해서도 공만큼 명확히 아는 분이 없으므로 감히 일언()을 빌어서 인멸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하고, 또 모부인()의 명령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아! 공의 사행()을 말하면 절로 눈물이 흘러 설움을 참을 수 없다. 내 비록 글을 못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랴. 왜적이 대거 침범하여 올 적에 공이 광주()의 시골집에 살았었는데,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번번이 패배하여 조령()의 요새지가 무너졌는데도 호남()의 순찰사란 자가 왕실()을 보위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ㆍ고인후()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조금 뒤에 또 ‘임금께서 의주()로 피난을 떠나고, 도성()도 지키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실성()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을 거느리고 금강()에 당도하였다가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자 온 도내의 인심이 두려워하며 떨고 있으므로,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뒷일을 잘 하도록 책망하며 진지하고 간절한 말을 많이 하였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나주() 사람 전 부사(使) 김천일()과 함께 홍복()을 꾀하여 편지 왕복이 있었는데, 공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5월 29일에 담양부()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옥과() 사람 학유() 유팽로()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으니, 공은 본래 군사()를 익히지 않았지만 개연히 단()에 오르며 노병()을 들어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격문()을 도내에 발송하니 모집에 응하는 자가 날로 많았다.

6월 11일에 공이 담양에서 출병하였는데, 이때에 삼도()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져 호서와 호남이 더욱 흔들리던 터라, 유독 공에게 기대가 많았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하면서 여산()에 당도하여 손수 격문을 초안하여 여러 도에 차례로 통고하고 관서(西)로 전달되게 하였다. 공이 장차 이산()으로 향하려는데 적이 황간()으로부터 금산으로 넘어드는 바람에 군수()가 패하여 죽고 적의 세력은 매우 창대하다는 소문이 들리자, 휘하의 군사들은 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려고 하므로 공도 그렇게 여겼다.

7월 3일에 공이 드디어 군사를 진산()으로 옮기어 금산의 적을 치려고 할 적에 날랜 군사가 많이 모집에 응하여 군사들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9일에 드디어 장병의 부서를 나누어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과 더불어 좌우익()이 되었다. 공은 먼저 정예한 기병() 수백 명을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을 덮치다가 적에게 눌리어 후퇴하게 되니, 공은 북을 울리고 싸움을 독려하자 군사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서 도리어 적병을 토성()으로 구축하였다. 그래서 성밖의 관사()를 불태워 없애고 또 포를 쏘아 성안을 불사르니 성세가 매우 장하였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에서 공격하며 포위하자, 적은 사상자가 많이 생겨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날은 저물어 가는데 관군은 싸움을 도우려 하지 않고 토성은 몹시 튼튼하여 졸지에 함락시킬 수 없어서 마침내 퇴군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합력하여 싸우기를 약속하므로, 공의 장자()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서 적을 곤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밤을 나면 혹시 야경()이 있을까 염려됩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네가 부자간의 정의로써 내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느냐? 나는 국가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책이다.”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을 모의하고 몰래 나와 잠복해 있다가 우리 순라군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인 10일에 공은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전진시켰다.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 진을 치니, 방어사의 진과 서로 바라 볼만한 거리였다. 공은 8백 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도전하여 미처 어울리기 전에 적이 진을 비우고 나와 먼저 관군에게 침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드디어 광주()ㆍ흥덕()에 육박하여 진을 치자 방어사의 진이 바람에 휩쓸리듯 무너지므로, 공은 혼자서 당해낼 생각을 하여 군사로 하여금 활에 화살을 메워 한껏 잡아당기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어떤 사람이 문득 급히 외치며 말하기를,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하자, 의병이 따라서 무너졌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타기에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는 날에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우가 공더러 말을 타고 뛰어넘어 가라고 간청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하게 모면하려는 자이겠는가?”하니, 공의 휘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으나 공은 곧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도망갔다. 공의 휘하 선비 안영()이 말에서 내려 제 말을 공에게 주고 도보로 뒤를 따랐다. 공의 종사() 유팽로()는 탄 말이 건장해서 먼저 빠져나가게 되자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하니, 대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하므로, 유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도로 들어가 공을 난병() 속에서 시종()하였다. 공이 그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나가야 한다.”하니, 유팽로가 말하기를, “제가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길을 찾겠습니까?”하였다. 적의 칼날이 공에게 미쳐 마침내 죽으니,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가로막다가 죽고 안영도 역시 죽었다. 공의 차자() 고인후는 무사를 독려하며 앞줄에 서서 시석() 속을 출입하였는데,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오()를 정돈하다가 진에서 죽었다. 근방 고을의 인사들은 공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짐을 메고 지고서 자빠지며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죽었다.”고 하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에 진동하였다. 의병이 무너지자 사졸()들은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차츰 모여들다가 공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울부짖으며 흩어졌다. 그리고 남방 인사들은 공을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서로 조상하며 애도하였다.

공은 백발의 서생()으로 국가가 다난한 때를 당하여 정의()에 의거해 일어나 양호()에서 부르짖자, 비록 우부()와 한졸()로 산중에 도피한 자들도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참여하여 한 달 동안 의병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 발현되어서 남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 봄에 천상()을 우러러보고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이 좋지 않으니, 장수된 자가 반드시 불리할 것이다.”하였다.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죽고 삶에 명철하여 의병을 일으키던 그날에 이미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금산의 적을 치게 되자 여서(婿) 박숙()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죽기로 자처한 것은 대개 평소부터 정하였던 모양이다. 적이 금산을 점거하고 있을 적에 문관 무관으로 병권()을 쥔 장수들이 기로()에서 방황하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불구하고 직접 호랑이 굴로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비록 승리를 아뢰고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공이 죽은 뒤로 공의 전사()한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적이 비록 자주 이겼지만 사상자 또한 반이 넘었고 군사를 걷어 밤중에 도망하였으니, 국가가 호남을 보유()하여 다음날 회복의 소지가 된 것은 그 공이 공에게 돌아갈 곳이 있게 된 것이다. 참찬() 성혼() 공이 행조()에서 “공의 충렬()이 왕실에 큰 공로를 끼쳤다.”고 극구 말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본 것이 있어서이다. 공의 체백()을 몰래 금산 산중에 묻어 두었는데, 적병이 길을 가로막아 교통이 두절된 터라 바로 수습을 못하였다가 8월에 고자() 고종후 등이 가서 의병으로 활동하던 승군()에게 애걸하여 공의 시체를 찾아내었으니 40여 일이 지난 뒤였다. 이에 비로소 염습하였는데, 여러 날의 무더위와 비를 겪었으나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아서 보는 자가 이상히 여겼다.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백성들이 탄식하고 슬퍼하며 혹은 좇아와서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대가()가 의주[]에 머물던 날에 임금께서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듣고 용안()에 희색이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 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使)로 임명하고 교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그 교서 가운데, “모든 고을을 절제하여 책응()하고 조도(調)하여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 양산숙()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오는데, 임금께서 면유()하기를, “돌아가서 고경명ㆍ김천일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 바삐 도성을 회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하였는데, 그 작명()이 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10월 4일 화순현() 흑토평()의 산록에 장사지냈는데, 장사지낸 다음날에 풍설()이 몰아치고 무지개가 무덤 왼편에서 일어나 묘역을 빙 둘러 수십 리를 뻗쳐 광채가 이상하게 하루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충분()이 감동하였다고 여겼다. 뒤에 묘소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서 기유년(, 1609년 광해군 원년) 3월 9일에 장성현() 오동리() 오좌 자향()의 산록에 이장()하였다.

공이 순국하였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크게 애도하고 명하여 자헌 대부 예조 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 좌빈객()으로 추증하였고, 뒤에 또 추가해서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하였다. 공이 죽자 순찰사는 전일의 혐의를 가지고 “어두운 밤에 행군하다가 군사가 무너져서 죽었다.”는 장계를 올려 무함하였는데, 그 뒤에 이정엄()이 순찰사가 되어 공의 순절한 사실을 포양()하면서, “고() 아무개는 맨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을 제창하고 몸소 적의 칼날을 맞이하여 적과 혈전을 벌이다 불행하게도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하였으니, 이것이 비로소 실상을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을미년(, 1595년 선조 28년) 여름에 나라에서 유사()를 시켜 정문()을 세우게 하였으며, 신축년(, 1601년 선조 34년) 가을에는 문생()인 전 감찰() 박지효()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광주에 단독 사우()를 세울 것을 명하고 포충()이란 편액()을 내림과 동시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서 봄ㆍ가을로 제사하기를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였으니, 아! 여기서 군신() 간의 의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휘()는 경명()이고, 자()는 이순()이며, 세계()는 탐라()에서 나왔는데, 그의 선세()에 장흥()을 관향()으로 받은 일이 있어 마침내 장흥 고씨()가 되었다. 충좌위 부사직()으로 통례원 좌통례()에 추증된 휘 상지(), 호조 참의()에 추증된 휘 자검(), 형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예조 참판 겸 동지 춘추관사()에 추증된 휘 운()은 바로 공의 고조(), 증조() 및 조부()였다. 고()의 휘는 맹영()으로, 벼슬은 사간원 대사간()에 이르렀는데, 남평 서씨()인 성균 진사() 서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 계사년(, 1533년 중종 28년) 11월 3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엄연히 성인()과 같았으므로, 참찬() 백인걸() 공이 한번 보고 애중히 여기며 공이 장래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영민하고 특이하여 시서()에 있어 두어 번 읽으면 바로 외웠으며, 20세 안에 경사()에 유학()하여 학업이 날로 성취되니, 한 때의 거유()들이 모두 사모하고 사귀어 명망이 대단하였다.

임자년(, 1552년 명종 7년) 사마시()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진사()에는 1등을 하였다. 무오년(, 1558년 명종 13년) 여름에 공헌왕(, 명종())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였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에 직부()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해 전시에서 또 갑과() 제일로 뽑혔다. 처음에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호조 좌랑()으로 옮겼으며, 기미년(, 1559년 명종 14년) 봄에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고 경신년(, 1560년 명종 15년) 봄에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으며, 여름에 형조 좌랑()으로 체임되었다가 옮겨서 병조 좌랑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항상 삼자함()을 띠었다. 조금 있다가 사가()를 받아 호당()에서 글을 읽었다. 신유년(, 1561년 명종 16년) 봄에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고, 여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헌납으로 천직되고, 사헌부 지평()으로 전임되었다가, 가을에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사명을 받들고 관서(西)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연로에서 지은 시()를 써서 올리라는 특명이 있었다. 겨울에 부교리()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임술년(, 1562년 명종 17년) 봄에 신병으로 전적()에 체임되었다가, 여름에 수찬에 임명되고, 또 부교리로 승진되었다. 일찍이 명화() 62폭을 내리어 공에게 시를 지어 써서 올리라고 명하여, 특별히 상을 내려 칭찬하였다.

공은 시를 잘 한다는 소문이 한창 높았으나 명리()에는 담박하여 매양 조회에서 물러나면 책만 보고 날을 보내며, 일찍이 상관들을 찾아가 간청하는 일이 없었다. 계해년(, 1563년 명종 18년) 봄에 순서에 따라 교리()에 승진되었다가 가을에 전적()으로 좌천되어 울산 군수()에 보직되었는데, 부임하지 못하고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경전()을 탐구하고 혹은 산수()에 유람하여 스스로 즐기며 빈척() 당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이렇게 19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만력 신사년(, 1581년 선조 14년)에 비로소 다시 기용되어 영암 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때에 국가에서 선계()에 대하여 변무()할 일이 생기자, 사신(使) 김계휘() 공이 공을 서장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주청하여, 성균관 직강()으로 사헌부 지평()을 겸직시켜 북경()으로 떠나게 하였다. 이듬해인 임오년(, 1582년 선조 15년) 봄에 다시 서산 군수()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한림 편수() 황홍헌()과 급사중() 왕경민()이 와서 조서()를 반포하자, 원접사(使) 이이()가 공은 국가를 빛낼 만한 재주가 있다 하여 종사관()으로 추천해서 종부시 첨정(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어떤 경박하고 글재주가 좀 있는 자가 공을 대신하여 제가 종사관이 되고 싶어서 언관()에게 사주하여 따지고 나오자, 이공()은 또 공의 재주를 조정에 극력 말하여 그 논쟁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종부시(簿)를 경유하여 사섬시 첨정()에 천직되었다. 이공은 본시 공을 알지 못하였는데 한번 보고 문득 경대()하여 간격 없이 마음을 통했으며, 그가 중국 사신과 창수()할 적에는 공의 시를 가장 많이 빌려 썼다.

계미년(, 1583년 선조 16년) 봄에 한성부 서윤()으로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한산 군수()가 되었다. 겨울에 문한()을 쓸 일이 있어 공을 예조 정랑()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은 사양하고 바로 시골 본집으로 돌아갔다. 갑신년(, 1584년 선조 17년) 여름에 종부시(簿)ㆍ사복시 첨정()으로 내리 임명되고, 겨울에 사예()로 임명되었으며, 을유년(, 1585년 선조 18년) 봄에 임금께서 공 같은 문장을 하관에다 오래 머물러 둘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세 단계를 뛰어 군자감 정()으로 임명하였는데, 때마침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공은 병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순창 군수()로 보직되었다가 무자년(, 1588년 선조 21년)에 파직되었다. 경인년(, 1590년, 선조 23년) 여름에 내섬시 정()에 임명되었다. 대신()이 탑전()에서 공의 문장을 추천하여, 승문원 판교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재상들이 모두 공을 애석히 여겨 서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는데, 공은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 시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처럼 하였다. 가을에 통정 대부()로 승진되어 동래 부사(使)에 임명되었는데, 본부는 바다의 관문이라 왜놈들이 머물러 있으며 화물()이 유통되고 객상()들이 모여드는 까닭에 명목 없는 세금과 몰수된 재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청렴하고 결백하여 티끌 한 점도 물들지 아니하니 서리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듬해 신묘년(, 1591년 선조 24년) 봄에 광국 원종 공신()을 녹선(錄)하는데, 공도 뽑혔다. 여름에 파직되어 서울로 들어갔는데 언관()이 좌상() 정철()을 논죄()하며 어떤 사람이 공을 지목하여 정공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공은 필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

공은 일찍이 호를 제봉()이라 하였고, 또 태헌()ㆍ태사()라고도 하였다. 공은 풍채와 모습이 점잖고 영특하여 학식과 도량이 넓고 깊으며, 후중하여 위엄이 있고 성실하여 가식이 없었다. 희노()를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고, 굴신()과 영욕()에 있어서도 항시 넉넉하게 처했으며, 일에 임해서도 역시 구차스레 이해를 가리려 들지 아니하고 사람을 대하면 별로 허허 웃는 적이 없어도 마음은 항상 즐겁고 평화로웠다. 평소에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을뿐더러 자질()들이 혹시 그런 말을 하게 될 때는 공이 문득 준절히 책망하였다. 관()에 처해서는 간결하고 평이하게 하며 세세히 살피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아니하므로, 공이 떠나간 뒤에도 백성들은 항상 공을 생각하였다. 본집에 있을 적에는 처자()가 남에게 전곡()을 꾸어대는 지경에 이르러도 공은 태연하여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으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선세()에서 물려준 노복()과 전토를 모조리 그 아우에게 사양하고 자기는 늙은 종과 황폐한 전토만을 가졌다. 다른 기호()는 없고 오직 서사() 수천 권을 수장하여 항시 열람하며 침식()을 위하여 폐한 적이 없었다.

무릇 삼교()ㆍ구류1)()의 서적에도 다 정밀히 연구하였거니와 상수()의 학에도 밝았으며, 문장이 훌륭하되 더욱 시에 능하여 조탁()을 일삼지 않아도 절로 준일()하여 무리에서 뛰어났다. 문집 5권이 있는데, 세상에서 글을 논하는 선비치고 그 시를 외우며 그 이름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러 번 군ㆍ부()를 맡아 다스렸지만 집안에 남은 재물이 없어서 자신이 죽던 날에도 향린()의 부조를 힘입어 마침내 상사를 치르게 되었다. 비록 출세의 길이 험난하여 녹()과 위()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지만 당세에서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공을 아는 것은 단지 그 문장과 재조()의 아름다움에 그칠 따름이고, 그가 권세와 이익에 담박하고 마음가짐이 성실하며 청고()로 가다듬은 그 절개와 국가를 근심하는 그 진지한 충성에 있어서는 반드시 다 알지 못하였다.

공의 배위()는 정경 부인() 울산 김씨()로 홍문관 부제학 김백균()의 따님인데,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은 곧 고종후()로서, 정축년(, 1577년 선조 1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찍이 임피 현령()을 지냈으며, 상차()에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영외()에서 싸우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차남은 곧 고인후()로서, 기축년(, 1589년 선조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성균관 학유()에 임명되었다가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었는데,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고준후()로 장가들기 전에 요사()하였고, 다음은 고순후()로서 신묘년(, 1591년 선조 2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공이 나라에 몸을 바친 것으로 추은()하여 특별히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다음은 고유후()로서, 공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병이 되어 상복()을 벗고 1년을 지나서 죽었다. 막내는 고용후()로서, 을사년(, 1605년 선조 38년)에 진사()에 1등으로 뽑히고 이듬해 병오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태인 현감()이 되었다. 장녀()는 광주() 사인() 박숙()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박충렴()이고, 계녀()는 영광()의 선비 노상용()에게 출가하였는데, 정유년(, 1597년 선조 30년) 난리에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손자가 여섯인데, 고부립()ㆍ고부언()은 고종후의 소생이고, 고부림()ㆍ고부천()ㆍ고부집()ㆍ고부량()은 고인후의 소생이다. 고부천은 을사년(, 1665년 현종 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부량은 이듬해 병오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아! 공의 2남 1녀가 다 난()을 당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어떻게 충효ㆍ의열()이 한 집안에만 모였단 말인가? 비록 그들의 타고난 성품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도 하였겠지만 그 유염()과 훈성()에서 얻은 것이 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의 평생을 일괄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전시(殿)에서 장원으로 뽑혀 영주(, 옥당())에서 노닐고 동호(, 호당())에서 수양을 쌓아 이해()를 세우고 문필에 종사하여 훌륭하다는 명성이 대단하였은즉, 한 시대에 진실로 문인으로써 지목할 만하였다. 장()을 품고 군()에 보직되어 지방에서 맴돌게 되어서는 가는 곳마다 청렴 결백하였으며, 직무를 받들기는 공평과 용서로 하여 서리와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으니, 곧 예전에 일컬었던 순리()ㆍ양리()가 바로 이 분이었다. 나라에 병화()가 있어 악독한 왜적이 살육을 자행하자 안신()은 물러나 몸을 움츠리고 무장()은 무너져 달아나는데, 공은 향리에 돌아온 한 사람의 유신()으로서 봉강()이나 성수()의 책임이 있지도 않으면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강한 왜적과 항거하여 약한 힘으로 강한 자를 쳐서 나라에 보답하기로 맹세하였으며,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아서는 몸을 바쳐 부자가 다 같이 순국()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절사()에 비하여 더욱 열렬하였다.

세상에서 매양 문인()은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그런 자들도 이에 이르러서는 다시 말을 못하게 되었으니, 공이야말로 한 시대의 전인()이 아니겠는가? 가형() 의정공(, 윤두수()를 이름)이 공과 더불어 친하게 교유를 맺은 것은 모두 나이 20세 전이었고, 내 나이 또한 적어서 안행()으로 그 뒤를 따랐었는데, 그때 공은 풍채가 매우 뛰어나 빙옥()처럼 환히 비쳐서 신선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에 와서 상상하매 꿈결같이 삼삼하여 50년이 오히려 어제와 같다. 나는 젊어서부터 공을 사모하여 하풍()에 따르기를 원하였고 늙어서도 쏠리는 마음은 시들지 않았는데, 공은 지금 떠나셨고 나는 이승에 남아 있어 이 비석을 세우는 날에 그 역사()를 보게 되었으니, 이 또한 무슨 운명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고용후가 손수 기록한 가장()에 의거하여 그 대략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장원 급제로 순절한 이는 옛날에 문산2)()이 있었는데, 공께서 번갈아 일어나니 정말 엇비슷한 사이일세. 사람들 또한 말이 있어 헛된 과거 아니로세. 문장은 선비 중에 뛰어나고 절의는 삶을 잊었도다. 국가의 위난에 눈물 뿌리며 적은 군사로 강적 대항하느라, 넋을 훼상하며 천분() 다하다가 부자가 나란히 목숨 바쳤도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같이 그 정신이 열렬하여 눈을 차마 감을 수 없어 맹세코 적의 멸망 보려 했다네. 충성을 정표하고 벼슬을 내려 남은 영혼 위로하니, 공이 구원에서 나라 은혜 감읍하리. 공께선 시에 더욱 조예 깊어 수많은 편장 밝게 빛나는데, 사림에서 조용히 재주 드러내매 글 짓는 이들 선두를 미루었네. 문장이랑 충의를 똑같이 전하는데, 옛날에도 드문 것을 공에게서 보겠구려. 묘역의 수목 울창하여 선대를 본받게끔 크게 비호하니, 앞으로의 천년 동안 정광이 하늘을 비추리다.

 

 

각주

  • 1) 삼교(三敎)ㆍ구류(九流) : 삼교(三敎)는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이고, 구류(九流)는 유가(儒家)ㆍ도가(道歌)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말함.
  • 2) 문산(文山) : 남송(南宋) 말 승상(丞相)이었던 문천상(文天祥)의 호(號)임. 당시에 신흥(新興) 왕조(王朝)인 원(元)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연속 패하자, 육수부(陸秀夫)ㆍ장세걸(張世傑) 등이 나이 어린 황제를 데리고 바다 가운데의 애산(厓山)에까지 파천하여 항거하다가 마침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문천상은 원군(元軍)에 붙잡혀 있다가 끝까지 충절(忠節)을 지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음.
  •  출처 : 국역 국조인물고

 

 

 

 

 

 

 

 제봉각(霽峯閣)

 

 

 

 

 

 

 

제실 마당의 네모난 샘이 이채롭다.

 

 

 

 

 

 

 

제봉각 옆으로는 전사청

 

 

 

 

 

 

 

제봉 고경명 선생 묘역 일원

 

 

 

 

 

 

 

 


고경명 선생의 마상격문(馬上檄文)  


 전라도의병장 절충장군 행의흥위부호군 지제교인 고경명 (髙敬命)은 삼가 제도(諸道)의 수령(首領) 및 사민(士民) 군인 등에게 고하노라. 저번에 국운이 비색함으로 인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침략해 왔다. 처음에는 역량(逆亮)의 맹세 어기는 것을 본받고 마침내는 포오(句吳)의 침식을 자행하며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대거 침입하였다.

하늘도 속일 수 있다 하여 방자하게 곧장 쳐들어오니, 병권(兵權)을 맡은 장수는 기로에서 방황하고 수령들은 모두 산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흉악한 오랑캐에게 임금과 어버이를 내맡겼으니 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중략) 위급존망의 날에 있어 감히 미천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리로써 명분을 삼는 것이라. 처음부터 직수(職守)에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써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은 논할 바가 아니다. 대소 인원은 모의를 기다리기 전에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士民)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아! 우리 여러 고을 수령과 각 지방 사민(士民)들이여! 충성하는 자가 어찌 임금을 잊으랴. 의리는 나라를 위해 죽음이 마땅하나 혹은 군기(軍器)을 빌리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행진(行陣)의 선구가 되고 혹은 농구(農具)를 팽개치고 밭두둑에서 분발하여 힘에 미치는 바는 오직 의기로 돌아갈 뿐이다. 왕사(王事)를 위하여 흉적을 막는 자가 있으면 그대와 함께 행동하기를 원하노라.

행궁(行宮)을 생각하면 멀리 서토에 있는데 묘산(廟算)이 장차 정해질 것이다. 왕업이 어찌 한쪽에서 편안할 수 있겠는가. 옳은 도리로 패하는 자는 멸망하지 않는 것이라 복성이 바야흐로 오(吳)나라 분야에 임하였고, 큰 근심은 앞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이를 읊음에 더욱 한(漢)나라를 생각하게 되었다. 호걸은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니 신정에서 마주 우는 일을 하지 않았고, 부로는 임금을 기다려 대가(大駕)가 옛 서울로 돌아옴을 지켜보리로다. 기력을 내어 출정함이 마땅하니 이에 먹은 마음을 털어놓아 충고하는 바이다.

 

- 넷상에서 발췌 -

 

 

 

 

 

 

 

 

 고경명 선생과 부인 울산 김씨 부부묘,

선생의 여섯째 아들인 고용후(用厚 1577~1648)와 부인 행주 기씨 부부묘,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첫째 아들 고종후(從厚 1544~1593)의 부인 칠성 이씨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역 맨 아랫쪽의 샘과 샘을 지키는 망부석 등이 이채롭다.

 

 

 

 

 

 

 

 광주의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등에 배향되었다.

 

 

 

제봉의 시문집으로 「제봉집」5권과 이의 「속집」1권,「유집」1권, 「정기록」1권, 「유서석록」1권 등이 있다. 원집의 5권과 속집은 모두 시로 되어 있고, 유집은 표전, 교서, 격문, 시, 잡저로 되어 있다. 그의 시는 원집에 1149수 (734제), 속집에 42수(42제), 유집에 44수 (34제)로 총 1235수 (810제)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절구와 율시, 5언과 7언 등 다양한 시형이 구사되고 있다. 

그러나 제봉은 주로 율시에 치중한 편이며, 5언시보다 단연 7언시를 좋아했다. 7언 절구가 약 350 수요, 7원 율시는 400여 수에 이르는 것을 보면,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제봉은 또 연작의 장시를 짓는 데에 서슴치 않았다. 이의 대표적인 것은 30세 때 명종의 명을 받아 62폭의 어병에 쓴 <응제어병62영>이다. 이밖에 <식영정 20영>, <면앙정 30영> 등은 제봉 문학을 평가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연작의 장편시들이다. 그는 배율을 짓는 데도 비교적 유장한 장형을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석천 임억령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만석천선생 7언배 50운>은 7언으로 된 50운의 장편이요, 백사장에서 놀고 금사사에서 유숙했을 때의 시정을 담은 <우백사정숙 금사사 50운>은 5언으로 제작한 50운의 장편이다.


제봉이 임진 왜란을 당하여 구국의 뜻으로 쓴 격문과 통문 등은 주로 「정기록」에 전한다. 그의 격문에는 '마상격문'이라 하여 말을 타고 가면서 썼다는 유명한 창의문도 있다. 그는 이같은 글을 통해 웅흔한 필력과 뛰어난 문학적 재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때문에 「우산집」에서는 제봉의 <격제도서>에 대해 "일찍이 이르되 충성된 마음과 의로운 담이 글자마다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문장의 묘함이 고금에 뛰어난 것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후로 오직 이 한편이라"했다.

 

그런데, 종래에 학계에서는「정기록」의 글을 문학작품으로서 거의 도외시해 왔다. 특히, 한시문을 국문학에서 예외로 하는 사람들은 이를 문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아니했다. 그러나, 비록 한자 한문의 기록일망정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선인들의 글이 모두 우리의 국문학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는 현실의 비극적 인식과 갈등을 글로 쓴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그는 충성을 몸으로 궁행하고, 또 이같은 글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한 우국 충정이 충일하고 울분의 개탄과 간절한 호소가 지배를 뚫고도 남음이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글이란 감동이 생명이요, 그것은 미적 형상화의 결과이므로 「정기록」의 글은 이런 점에서 문학적 감동을 준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 넷상에서 발췌한 내용 -

 

 

 

 

 

 

 

 오른편 앞쪽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제봉의  첫째 아들 고종후(1544~1593)의  부인 철승 이씨의 묘이고

윗쪽에 보이는 두 기의 무덤이 제봉 고경명 선생 부부 묘.

 맨 왼편은 제봉의 여섯 째 아들 고용후(1577~1648와 부인 행주 기씨의 묘이다.

 

 

 

 

 

 

 

첫째 아들 고종후의 부인 철승 이씨의 묘에 시립(侍立)한 망부석과 문인석

 

 

 

 

 

 

 

오동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드넓게 자리한 제봉 선생 묘역.

묘역 왼편의 네모난 돌은 2014년 11월 세웠다는 묘표문이다.

 

 

 

 

 

 

 

제봉 고경명 선생과 부인 울산 김씨의 묘

 

 

 

 

 

 

 

제봉의 여섯 째 아들 고용후(1577~1648)와 부인 행주 기씨의 묘

 

 

 

 

 

 

 

 아랫쪽 소나무에서 바라본 제봉 선생 묘역 일원.

내 기억이 흐린 것인지 몰라도 예전엔 더 큰 소나무가 근처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식영정 사선()으로 자리매김 되는 고경명 선생의 묘역에 번지는 은은한 매향.

 

 

 

 

 

 

유서석록(遊瑞石錄)  

 

목판본. 1책. 《고제봉유서석록()》이라고도 한다.

고경명이 1574년(선조 7)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에 걸쳐 광주 목사(使) 임훈() 등과 함께

4월 20일에서 25일에 걸쳐 서석산을 유락()하고 나서 순한문으로 쓴 글이다. 서석산은 지금의 무등산을 말한다.

자신의 고향 무등산을 심도있게 적은 것으로 문장의 구성이나 경치의 묘사에 있어 가히 걸작이라고 할만하다.
 1631년(인조 9)에 서광계()가 쓴 발문()이 있다.

 

 


  4월 20일(甲子) 맑음

서석(瑞石)은 내 고향의 산
갑술년(1574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해왔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 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서석은 우리고을 광주의 진산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나 깊은 숲, 그윽한 시냇물 등 도처에 내 발자취를 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묘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하는 시골 아이나 목동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산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더구나 산의 정취를 얻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청에 따라 산에 올라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니 황홀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날개 돋쳐 바람을 타고 낭풍과 현포(?風 · 玄圃 : 昆崙山嶺에 있으며 仙人이 살던 곳이라 함) 위에서 노니는 것과 같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통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흥이 나서 발길을 재촉하니 정오도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누교(樓橋 ) 위를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하며 바위는 더욱 웅장하게 보여 물소리도 요란하니 차츰 좋은 경치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말등에서 내려 저고리를 벗고 시냇가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저 옛날의 창랑가(滄浪歌 : 어부의 노래, 자연대로 맡겨야 함을 노래함)를 외우며 소산(小山 : 張可久 ,中國의 名樂人) 이 지은 초은의 가락을 읊으니 상쾌한 기운이 살갗에 스며들고 번거롭고 괴로운 마음이 사라져서 그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지팡이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문 앞에 조그마한 다리가 청류에 걸쳐 있고 여기에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니 절경이요, 그 그윽함에 마치 선경(仙境)에라도 온 양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증심사 스님은 내가 여기 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니 마중 나온 사람이 있겠는가?

취백루(翠栢樓)
마침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은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 백수정전취(栢樹庭前翠 ) 라는 글귀에서 따온 듯 싶다. 벽 위에 권흥(權興) 등 몇 분의 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홍무년간(1368~1398 )에 쓴 것으로 오직 김극기의 현판만 빠졌으니 후세사람으로서는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증심사 주지 조선(祖禪)스님이 나와서 자리를 쓸고 이불을 펴 주어 나는 피곤하여 잠깐 잠이 들었다. 한식경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노을은 서산에 비치고 안개가 자욱한데 놀란 노루는 대밭에 숨고 새떼들은 숲속에 날아들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승처상심자애(勝處傷心自哀) 라 하여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 던 말이 수긍이 간다.

조선스님으로부터 약주와 산채로 저녁을 대접받으며 소재(蘇齋 : 盧水愼 1515~1590) 가 놀러와서 하던 이야기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들을 만 하였다. 조선 스님의 말을 듣고 비로소 누교가 있는 시냇가 바위에 최송암(崔松巖, 應龍)이 쓴 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았으나 새긴 획이 옅고 이끼가 끼어 나로서는 얼른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었다. 절 옆에 있는 대밭은 산에 이어졌으니 규모가 커서 위천(渭川 : 중국 황하의 支流)의 그 넓은 죽림(竹林 )에도 비길 만 하다.갑인년(명종 9년, 1554년) 봄에도 내가 이절에 와 놀았는데 그때는 대 마디가 한 자쯤 되게 길고 그 크기가 서까래만큼 커서 이에 비할 만한 것이 딴 곳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가는 대(篠)만 우거진 쓸쓸한 숲이 되어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증심사(證心寺)
조선스님이 법당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건물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초에 유명한 목수가 지었다는데 천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기둥과 주춧돌이 기울지 않고 의젓하게 홀로 남아 있으며 좌우에 있는 요사(寮舍)는 몇 번을 개축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이절에 대장경(大藏經 : 일체의 佛經叢集) 판본과 여러 가지 불경이 든 상자가 한 전각 안에 가득차 있었으나 지금은 전각만 남고 경전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에 이만인(李萬仁, 一元)과 김회(金廻)가 함께 와서 유숙하였다. 노승이 등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예불을 마친 다음 숙소에 와서 공손히 앉아 말하기를 ‘이곳에는 옛날에 향반(香盤)을 설치하였다가 연루(蓮漏 : 연꽃 모양의 물시계)로 갈아 바꾸어 시각에 따라 종을 치기 때문에 시끄러워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까 염려 된다’ 하기에, ‘우리들이야 오랜만에 지저분한 속세를 벗어나 잠시나마 이 좋은 곳에 머물며 고요하고 맑은 저녁에 저절로 잠도 잊을 것이요, 또한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아닌데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깊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밤늦도록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밤은 깊은데 아까 노승의 코고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아서 더없이 우스웠다. 새벽녘에 남풍이 세게 불어 나는 비가 내리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선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이 산에 오래 살아 구름이나 바람을 예측할 수 있는데 비록 남풍이긴 하나 비 내릴 징조는 아니라고 하였다. 
    


  21일(을축)맑음

아침 늦으막에 임훈(林薰)목사가 당도했는데 신형(愼衡, 彦均),이억인(李億仁, 長元) 김성원(金成遠, 剛叔, 棲霞堂), 정용(鄭庸, 子常), 박천정(朴天?, 應須), 이정(李偵, 汝玉), 안극지(安克智,公達)들이 따라왔다. 나는 임 선생을 취백루에서 맞이하였다.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는 것이 보기에 한가롭고 좋았다. 이것이 비록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나 취백루(翠栢樓)라는 이름에는 손색이 없다.

사인암(舍人岩)
술을 두서너 순배 한 후 임 선생이 밥을 재촉하여 먹고 떠나기를 서두르는데 마부를 물리고 종들도 줄여 선생은 야복(野服)차림으로 대로 엮은 가마에 올라 증심사 주지 조선스님의 안내로 증각사(證覺寺 : 폐찰이 된 天門寺 터 근방에 있었다)로 향하였다. 도중에 우거진 나무 밑에서 선생이 가마꾼을 쉬게 하였다. 응수 박천정이 서쪽의 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사인암(舍人岩 :약사사 앞 서쪽에 있음, 속칭 세인봉)으로 전에 윱諭藪?올라가 보았더니 돌부리(石骨)가 구름을 찌르고 벼랑이 허공에 솟았으며 매의 둥지가 있는 것을 굽어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증각사(證覺寺)
정오에 증각사에 이르니 안개가 짙어 멀리는 바라볼 수 없었으나 정자와 넓은 들 그리고 비단결 같은 여러 시냇물을 모두 가리킬 수 있으니 비로소 이곳이 꽤 높은 자리임을 알겠고 그래서 더 멀리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절의 북쪽에는 분죽(粉竹), 오죽(烏竹) 두 종류의 대가 있는데 분죽은 그 진을 빼고 지팡이를 만들면 매우 광택이 나고 미끈한 것이 된다.

중령(中嶺)
차를 마시고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 : 지금의 중머릿재)으로 올라간다.

깍아 세운 듯한 가파른 길은 하늘에 닿을 듯 하여 사람들은 마치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놓은 듯도 하고, 꿰미가 줄지어 서로 붙들고 개미 기어가는 듯하였는데 한자를 올라가면 한 길쯤 뒤로 물러난다. 이윽고 평평한 곳에 이르니 시야가 탁 트이고 상쾌한 기분이 마치 바다에서 배 뚜껑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머리재에서 산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니 밀림이 우거져서 구름과 햇살을 볼 수가 없고 높고 험한 등성이는 허공에 걸쳐 있어 다만 새가 빠르게 날 때 푸른 이끼가 나부낄 뿐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노래를 읊조리며 오르노라니 잠시나마 등산의 힘겨움을 잊게 해준다.

냉천정(冷泉亭)
임 선생이 먼저 냉천정에 도착하여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샘물은 나무및 돌 틈에서 나오는데 그 찬 맛은 도솔천에 미치지 못하나 단맛은 그보다 더한 듯 싶다. 때마침 모두 목이 말라 서로 서둘러 미수가루를 타먹으니 좋은 간장과 단술(金醬玉醴)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그 맛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싶다.

입석대(立石臺)
석양에 입석암에 닿으니 양사기(楊士奇 ,中國 明나라 初의 文人 정치가)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十六峯藏寺)라는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쫑긋 쫑긋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치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긴 홀(笏)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다. 투구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신공귀장(神工鬼匠)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누가 구워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아미산(峨眉山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成都의) 석순(石筍)이 해안(海眼)을 눌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의 형세를 보니 뾰족뾰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이 16개 봉우리이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이다. 입석암은 입석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이 잇는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서쪽에 있어 아무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불사의사(不思議寺 )
암자를 떠나 조금 북쪽으로 입석을 오른편에 끼고 불사의사로 들어갔다. 승방은 몹시 좁아서 좌선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어렵게 보였다. 승방 남쪽에 있는 석대(石臺)는 평탄하여 앉을만 하고 그 곁에 큰 나무가 차일을 쳐놓은 것 같이 그늘을 이루고 서 있다. 입석암은 무등산의 여러 절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아 산이나 바다와 같은 높고 깊은 곳을 한눈에 멀리 바라볼 수 있어서 경치의 극치라 하겠으나 아깝게도 바람이 세어서 몸이 떨리므로 그곳에서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 함께 바위문을 나와 배회하면서 뒤돌아보니 마치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서운하다.
입석에서 동쪽 길은 험하지 않다. 반석이 마치 방석같이 판판하게 깔렸는데 지팡이를 짚으면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리고 나무 그늘이 깔린다.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니 낭선(浪仙)의 ‘나무 그늘 밑에서 자주 쉬어가는 몸이로다(삭게수변신 數憩樹邊身)’ 라고 한 시구가 이 정경을 나타내는데 알맞아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뵈기만 한다.

염불암(念佛庵)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염불암에 들어가 유숙하였는데, 일원 이만인(一元 李萬仁)이 매우 피곤하여 숨결이 거친 것을 보고 강숙 김성원(剛叔 金成遠)이 ‘오늘은 험한 길을 오래 걸었으니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하니 일원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천만에’ 하므로 모두 한바탕 웃었다.
판관 안언룡(安彦龍), 찰방 이원정(李元禎)이 편지를 받고 화순에 와 있다가 만연산(萬淵山 )에서 향로봉과 장불사를 거쳐 해 떨어질 무렵에야 이 암자에 도착했다. 이 염불암은 본시 강월헌(江月軒 懶翁禪師)이 창건한 암자로 중간에 오래도록 폐사되었다가 정덕(正德) 을해년(1515년)에 일웅(一雄)이 중창하였으며 융경(隆慶) 임신년(1572)에 보은(報恩)이 중수하였다. 옆에는 조그마한 원(院 ,승방)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결하(結夏 : 결하는 승려들이 음력 4월 16일부터 3개월 동안 參禪에 들어감을 말함 ) 할 때 참선하는 곳이다. 눌재(訥齋,朴祥)는 일찍이 일웅(一雄)을 위하여 중창기(重創記)를 지어 주었다고 했는데 글자가 완전치 못한 것이 많아 판독할 수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암자 동쪽에 지공너덜이 있어서 난석(亂石)이 서로 괴어 산처럼 쌓였고 그 속은 깊게 비어 있어 바닥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무하던 도끼를 잘못하여 빠뜨렸더니 그 쇳소리가 한식경 만에 들렸다가 그쳤다고 한다.

덕산(德山)너덜
이 산속에는 너덜(돌이 많은 비탈)의 이름이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는데 증각사 동북쪽에 있는 것은 덕산너덜이라고 한다. 덕산너덜은 소나기가 갤 때면 몰래 숨어 있던 이무기가 나와 햇볕을 쬐는데 몸을 칭칭 감고 도사리고 있어서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 일찍이 어느 스님이 보았더니 노루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어떤 괴물이 나타나 잡아채어 가로 물고 돌 사이로 들어가는데 햇빛이 번쩍거려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공(指空)너덜
그러나 이 지공너덜만은 벌레나 뱀 따위의 기어다니는 짐승이 없고 가을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이 산에 가득해도 여기만은 언제나 청소한 것처럼 나뭇잎 하나 떨어진 것이 보이지 않으니 스님들 사이에 전해지기를 이 너덜은 고승 지공이 그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곳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22일(병인) 맑음

상원등(上元燈)

아침에 판관 안언룡과 찰방 이원정이 먼저 일어나 입석암으로 나갔다. 그들은 어제 날이 저물어서 구경을 못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선생(林牧使)을 따라 바로 상원등으로 올라갔다. 새로 지은 자그마한 암자인데 몹시 좁고 누추하여 잠시나마 수어가기가 거북스러워 암자 조금 서쪽에 있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 그루의 전나무가 마주 서 있고 그 밑에 바위가 있는데 겨우 한 발을 들여놓을 만하다. 조금 있으니 판관과 찰방이 따라와서 악공들과 함께 천왕(天王), 비로(毘盧)의 두 봉우리로 올라가 퉁소를 몇 곡 불게 하니 마치 하늘에서 들리는 신선의 소리와도 같이 은은하다. 여기에 한 스님이 나와서 퉁소 곡조에 맞춰 손뼉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어 모두가 한바탕 웃고 즐겼다.

정상삼봉(頂上三峯)
상봉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동쪽이 천왕봉(天王峯)이며, 가운데 것을 비로봉(毘盧峯 ,地王봉峯)이라 한다. 그 사이는 백여 척쯤 되며 평 서쪽에 있는 것이 반야봉(般若峯 ,人王峯)으로 비로봉과 두 정상의 거리는 무명베 한필 길이나 되지만 밑은 한 자 거리쯤밖에 되지 않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상 봉우리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와 철쭉이 돌 틈에 무더기무더기로 피어 있으며, 키는 한 자쯤 되는 것이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만 쏠려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아마 지세가 높고 추운 풍설에 시달려 그렇게 된 듯 싶다.

 

때는 바야흐로 산살구나 진달래가 반쯤 지고 철쭉이 피어나며 나뭇잎이 무럭무럭 돋아나기 시작하는 좋은 계절이다. 상봉은 평지로부터 겨우 일유순(一由旬)정도 떨어져 있으니 기후의 다름이 이와 같다. 반야봉의 서쪽은 지면이 평탄하고 넓지만 봉우리는 뚝 끊어져서 천 척(尺)의 절벽은 아래로 진남산(眞南山)의 시에 있는 이른바 삼황타포소(杉篁咤蒲蘇)라는 구절이 이것인가 싶다. 낭떠러지 위 언저리에 둘러앉아 술잔을 서로 기울이다 보니 과연 우화등선(羽化登仙 )하는 기분이다.

서석대(瑞石臺)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 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서석대이다. 이날은 안개가 조금 개어 어제에 비하면 맑은 날씨이기는 하나 사방 산들을 멀리는 바라볼 수 없고 가까운 산이나 큰 강은 대개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저 먼 남해바다나 제주의 한라산과 여러 섬을 환히 바라볼 수 없어서 대자연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서 반야 · 비로 두 봉우리 밑을 지나 상원등의 동쪽으로 나와 삼일암(三日庵)에 당도하였다.

삼일암(三日庵)과 금탑사(金塔寺)
삼일암의 월대(月臺)에는 입석이 있어서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고 시원스러운 품이 모든 암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조선스님의 말에 의하면 사흘만 여기 머물면 도를 깨닫는다는 데서 삼일암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금탑사는 삼일암의 동쪽에 있으며 수십 척 되는 돌이 하늘을 떠받들고 우뚝우뚝 솟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돌 속에 구급상륜(九級相輪)이 감춰져 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은적사(隱迹寺)
금탑사의 동쪽에 은적사가 있으며 바로 멀리 적벽의 동북쪽에 있는 옹성산(甕城山)과 마주하고 있는데 맑은 샘물이 돌 틈에서 솟아오르고 있어서 경인년(1530년)의 큰 가뭄에 모든 샘이 다 말랐으나 오직 이 샘물만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석문사(石門寺), 금석사(錦石寺), 대자사(大慈寺)
석문사는 금탑사의 서쪽 80보 정도에 있으며 동서에 각각 기이한 바위가 마주 서서 마치 문처럼 되어 있고 이곳사람들은 여기를 거쳐 출입하게 되어있었다. 금석사는 석문사의 동남쪽에 있다.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고개마루 흰구름이 산 문을 닫았다 문장령운봉(門仗嶺雲封’)이라 한 것은 여기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암자 뒤에 기암초석(奇岩?石) 수십 가닥이 수북하게 높이 서 있고 그 아래 맑은 돌샘이 솟아 있으며 물이 매우 차갑다. 대자사의 옛터는 금탑사의 아래에 있고 여기에도 오래된 샘이 있어 물이 맑고 찬데 이끼가 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샘돌 위에는 산단(山丹)꽃이 피어 한창이고 길가에는 비바람을 피할 만한 석실이 있어 속칭으로 소은굴(小隱窟)이라 한다.


이날 나는 상봉에서부터 이미 취기가 있어 차분하게 두루 살피면서 기이한 곳, 아름다운 경치를 가려내지 못하고 마치 달리는 말 위에서 비단을 본 듯 그저 눈이 부셔 정신을 잃고 휘황찬란한 산경치만 보았기 때문에 그 자잘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으니 여기에는 구름을 쫓듯 그 대강만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 다시 찾아와서 오늘의 부족을 채울까 한다.

규봉암(圭峯庵)
금석사를 지나서 산허리를 감돌아 동쪽으로 나오니 이곳이 규봉으로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바윗돌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石形裁錦出峯勢 琢圭成)’ 라 한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암석의 기묘하고도 오래된 품이 입석과 견줄 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하고도 훌륭한 점에서는 입석이 이에 따를 수가 없다. 규봉의 경치는 권극화(權克和)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생략한다. 그런데 예로부터 전하기를 해동의 서성(書聖)이라 하는 신라 성덕왕 때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圭峯庵’이라는 삼대문자(三大文字)의 액자가 있었으나 훗날 어떤 자가 절취해 가버렸다고 한다.

광석대(廣石臺)
광석대가 있는 곳은 이 암자(圭峯庵)의 서쪽으로 그 석면(石面)이 깎은 듯 넓고 평탄한 것이 격에 맞고 수십 명이 둘러앉을 만 하다. 당초에는 서남쪽이 조금 낮았으나 절의 중이 사람들을 모아 큰 돌을 괴었다고 하는데, 그 엄청나게 큰 바위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그렇게 하였는지 감탄할 뿐이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이라 한 것이 광석대의 남쪽에 있는데 그 꼭대기가 숲 위에 창연히 솟아 있어서 바위가 더욱 웅장하게 보여 그 기세를 돕는 것 같다. 또 열 아름이나 되는 노송이 하늘을 가려 비스듬히 광석대 위에 걸쳐 뒤덮고 있으니 그 잎은 푸르고, 그늘은 짙어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일어나 한더위에도 홑것을 입고는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천관산, 팔령산, 조계산, 모후산의 여러 봉우리가 모두 눈아래 내려다 보인다. 무릇 규봉암의 빼어남이 서석(무등산)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 으뜸이라면 이 광석대 또한 규봉 10대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니 남쪽에서 제일경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다만 최치원 선생 같은 분의 행차를 얻어 훌륭한 시를 읊어 규봉 위에서 한번 취한 붓을 휘둘러 아름다운 휘호를 남길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감회가 없지 않다. 마치 진주의 쌍계사나 합천의 해인사에 최 선생이 시를 남긴 것처럼.

문수암(文殊庵)
광석대의 서쪽 길에는 문지방같은 돌이 가로질러 있는데 이 돌을 넘어들면 문수암이다. 암자 동쪽 기슭에 오목하게 패인 돌이 있어 그 중앙에서 샘이 솟아나오며 돌 틈에는 석창포가 수북히 피어 있고 그 앞에는 높이가 넓이가 수십 척 되는 바위가 있다.

풍혈대(風穴臺), 장추대(藏秋臺)
광석대에서 서북쪽으로 돌층계를 따라 몇 발자국을 돌면 자월암(慈月庵)이다. 이 암자의 동편에는 풍혈대가 있는데, 돌 밑에 있는 구멍으로 풀잎을 뜯어 넣어보니 조금 펄럭이는 기미가 있다. 이 암자의 서쪽에는 병풍같은 입석이 있으며 노송이 그 위에 우거져 있으니 여기가 바로 장추대인데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면 머리끝이 쭈뼛할 정도로 아스라하다.장추대에서 서쪽으로 가서 낭떠러지를 따라 남쪽으로 잡아돌면 오솔길로 나서는데 그 넓이가 한 자도 못된다. 좁은 길에는 패인 곳을 돌로 덮은 데가 더러 있어서 밟으면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고 내려다보면 아득한 절벽으로 조심스럽게 돌을 밟고 가는데 걸음을 멈추면 다리가 떨려 발꿈치를 붙이고 설 수가 없다. 낭떠러지가 다하면 움푹 패인 데가 나서는데 마치 원숭이처럼 기어 올라야만 한다.

은신대(隱身臺)
장추대 남쪽이 곧 은신대인데 여藪〈?누운 다복솔(矮松) 너댓 그루와 철쭉 몇 무더기가 모두 드러누운 듯 자라고 있다. 은신대의 서쪽에 있는 돌은 바둑판같이 네모 반듯한데 전하는 말로는 옛날 도선국사가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그 북쪽에 있는 청학(靑鶴), 법화대(法華臺) 등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모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한식경 뒤에 벌벌 떨며 다시 손으로 땅을 짚고 팽조(彭祖)가 샘을 굽어보는 형상으로 조심조심하며 내려와 선생을 모시고 문수암에서 묵었다. 

   23일(정묘)맑음

시를 못하면 벌주 한잔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니 산골짜기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라 고르게 퍼져 줄을 그어놓은 것 같고, 그 위에 솟은 수많은 봉우리는 만경창파 넓은 바다에 ㄸ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도 같았다. 그 뒤로는 아침햇살을 받은 구름이 붉은 빛깔로 물들어 바람따라 형형색색의 온갖 모양을 이루니 참으로 절묘한 광경이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이 때때로 평평하게 어렸네(橫雲時平凝)’ 하는 구절도 이 기묘한 절경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였다 할 것이다. 임 선생이 머리에 복건(幅巾)을 쓰고 처마 앞에 나와 앉으며 이 뛰어난 경치를 찬탄하는 4언 절구 한 수를 읊으신다. 그 사이 해는 이미 중천에 뜨고 구름도 차츰 흩어져서 날씨가 활짝 개니 천지가 개벽된 것 같은 참으로 절경이 펼쳐져 있다. 선생의 말씀에 따라 광섞대로 자리를 옮겨 일행이 시를 지어 화답하는데 이에 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주 한 잔씩을 큰 잔으로 내려 마시게 했다.


대체로 서석산의 경치는 이미 매일 남김없이 적었지만 서봉(瑞峰)의 풍수(風水)골과 향적사(香積寺)의 고목과 불영암(佛影庵)의 기암과 보리암(菩提庵)의 석굴 등 그 그윽한 풍경이 금석(錦石)의 여러 절에 못지않으나 다만 그것이 좀 넓고, 이것은 좁은 것이 다를 뿐이다. 선생이 이날 적벽으로 가기를 재촉하므로 이 산의 계곡과 초목의 아름다움을 더 자세히 감상할 수 없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지만 이는 나의 유감일 뿐만 아니라 이 산을 위해서도 불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영신(靈神)골
광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송하대(送下臺)가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산등성이를 타면 영신(靈神)골인데 그리로 가는 오솔길이 꼬불꼬불 줄을 그어놓은 것 같아서 소동파의 시에 이른 ‘길은 산허리를 감고 산백 굽이를 돌았구나(路轉山腰 三百曲)’ 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영신골에서 방석보(方石洑)에 이르는 그 사이의 마을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쓸쓸하고 고요하다. 이곳 두메산골의 주민들은 띳집을 짓고 돌밭을 일구어서 먹고살며 개나 닭을 치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경치의 아름다움은 중국 무릉(武陵)의 주진촌(朱陳村)도 여기에 미치지 못할 듯싶다.동네를 지나 시냇물을 따라 남으로 약 500궁쯤 가노라면 바위가 첩첩이 쌓인 위에 울창한 소나무가 덮여 있고 그 사이는 실낱같은 한 가닥 길이 나 있으니 주민들이 겨우 오가는 길이다.

장불천(長佛川)
장불천이 그 아래로 흘러 깊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는 측량 할 수 없으며 못가에 나부끼는 산갈대의 은빛이 푸른 소나무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펼쳐놓은 것 같다. 동네 이름을 몽교(夢橋)라고 하는데 시의 소재로도 쓰일만한 운치가 풍긴다. 시냇물 건너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절벽이 수백 걸음이나 이어져 있어 산수화의 채색병풍을 비스듬히 펴놓은 것 같고 그 위로 한 가닥 좀은 길이 나 있다. 이곳을 노루목(獐項峙) 이라고 부른는데 이 고개를 넘어 새가 나는 방향으로 남쪽에 접어드니 단풍과 늙은 소나무가 축 늘어져 못 바닥까지 닿아 물속에 그림처럼 잠겨져 있다.

창랑천(滄浪川)
창랑이라 함은 옛날 남장보(南張甫,彦紀)가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이름으로 남령(藍嶺)과 장불의 두 내(川)가 합쳐진다. 이곳 장불천은 상류에러 쇠붙이(鐵)를 씻었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못 가운데에는 돌층계가 있다. 큰 고기가 뛰는 모습이 햇빛에 반짝여서 한결 운치를 돋구어 주고 물고기떼의 그림자가 물속 돌 위에 반사되어 비단구름(雲錦)과도 같은 찬란한 모습이 마치 용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거기에 은어 수십 마리가 발랄하게 뛰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내 비록 고기의 마음은 모르기는 하나 그들이야 말로 얼마나 즐겁겠는가.

적벽(赤壁)
적벽에 다다르니 현감 신응항(申應亢)이 먼저 와서 차일을 쳐 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아리 모양 같은 옹성산(甕城山) 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돌로 에워싸여 골산(骨山)을 이루었는데 봉우리가 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일어섰고 어떤 것은 엎드리기도 하여 형세가 꼭 싸움터에서 군마가 달리다가 잠깐 멈춰서서 이 절벽이 될 것 같다. 천지조화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장관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높은 곳에 올라 덩굴을 이어 높이를 재어보니 거의 70발이나 됨 직하다. 창량천의 물이 굽이굽이 뻗쳐 흐르는데 그 수심이 깊고 검푸른 빛깔이어서 감히 내려다 볼 수가 없다.

 

그쪽 사람의 말을 들으니 석벽 속에 텅 빈 굴이 있어서 아무리 가늘고 작은 소리라도 산울림처럼 되돌아온다고 한다. 또 동복현감의 말을 들으면 높은 곳에서 퉁소를 불고 돌을 굴리면 방아 찧는 소리처럼 울리는데 밑에서는 물결이 솟구치고 바람이 일어 성난 기운을 내뿜는 듯 천둥치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곳 적벽에서 동복현까지의 거리는 십여리가 된다는 것인데 원래 이곳의 땅은 황폐하여 인적은 드물고 호랑이굴과 다람쥐의 구멍이 흔한 곳이었다. 따라서 화전민들만 구차하게 살고 있었고 어느 세상을 등진 한 늙은이가 여기서 한가로이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고려 공민왕 때 사람으로 이름은 김도(金濤)였다. 그가 떠나고 풍류객의 자취가 끊어진 뒤 후계자가 없어서 수백 년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최산두가 기묘사화로 유배되어 동복에서 생활하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달내(達川)에서 그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 어느 길손을 만나 내 끝에 명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적벽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때부터 비로소 남도 사람들이 이곳을 알고 찾아드는 시인묵객의 발자취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이 넉 자 한 짝의 이곳 경치를 찬양하는 글을 짓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시를 읊음으로써 드디어 남국의 명승지가 되었다. 생각건대 저 중국의 무창 적벽(武昌 赤壁 )도 원래는 황강(黃岡,) 만리 밖에 있는 남만(南蠻)지대로 황폐한 땅이었으나 소동파(蘇東坡)가 시 두 수(前後赤壁賦)를 지어냄으로써 그 명성이 온 세상에 떨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천하의 명승지도 때를 못만나 사람을 얻지 못하였던들 그와 같은 명성은 얻지 못했을 것이니 우리 적벽도 또한 그렇다 할 것이다. 적벽의 동쪽에는 오봉사(五峯寺)가 있는데 여기서 임 선생을 시종한 희경(希慶)이 시 한 수를 읊으니 참으로 좋은 시구였다.


오후에 동복현감과 작별하고 침현(砧峴)을 넘고 이점(耳岾)을 지나자 계곡 위쪽으로 자그마한 정자가 보이는데 이 마을 사람 정필(鄭弼)이 지었다고 한다. 민응소(閔應韶, 德鳳)가 현감으로 있을 때 이구암(李龜巖, 楨)과 더불어 이 정자에서 놀았다고 하며 그분들의 시가 지금도 벽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이날 찰방 이원정(李元禎)은 일이 있다 하여 동복으로 갔다.
날이 저물어서 창랑(滄浪)의 유정(柳亭,進士 丁岩壽의 별장)이나 무렴(無鹽, 勿染)을 감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다

소쇄원(瀟灑園)
신시(申時하오 3시~5시)에 소쇄원에 당도했다. 이곳은 양산보(梁山甫)가 지은 것이다.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집 동쪽에서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데 물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 흐른다.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밑 물속에는 큰 돌이 깔려 있는데 그 바닥이 천연의 절구통이 패어있다. 이를 조담(槽潭,구유통 못)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인 물이 쏟아져 내려가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처럼 맑고 시원하다. 조담 못 위로는 노송이 걸쳐 있어서 마치 그 위에 덮개를 덮어놓은 것만 같다. 폭포의 서쪽에 있는 자그마한 집은 그림배(畵舫, 채색 치장을 한 유람선) 같으며 그 남쪽에는 돌을 여러 층으로 포개어 높이 쌓아 올렸고 그 곁에 있는 작은 정자는 마치 일산(日傘)을 펴놓은 것만 같다.

 

정자의 처마 앞에 해묵은 큰 벽오동나무가 서 잇다. 이 벽오동나무는 가지의 절반가량이 썩어있다. 정자 밑에도 연못이 패어 있는데 통나무에 흠통을 파서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못 서쪽에는 큰 대가 백여 그루나 옥돌을 꼿꼿이 세워놓은 듯 서 있어서 참으로 아름답다. 이 대밭 서쪽에 있는 연못은 돌 벽돌로 된 수로를 통해서 물이 대밭 아래를 돌아 연못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여기에다 물레방아를 장치하여 움직이게 해 놓았으니 이 모두가 소쇄원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다. 당대의 석학 김하서는 시 48수로 이곳의 풍경을 자세히 그려 놓았다. 주인 양자정(梁子渟)이 임 선생을 위하여 술상을 차려왔다.

식영정(息影亭)
해질 무렵에야 식영정에 당도하였다. 이곳 식역정은 일행인 강숙(剛叔, 金成遠)이 지은 별장이다. 임 선생은 난간에 기대어 조용한 풍경을 뜻있게 감상하였다. 밤이 되자 주인 강숙이 촛불을 켜들고 나와 정성껏 환대해 주어서 흥겹게 놀다 파하니 이 또한 한때의 즐거움이었다. 식영(息影)과 서하(棲霞)의 두 액자는 그 모두가 박영(朴詠)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八分體)요, 서하는 전자체(篆字體 )로 쓰여져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詠)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 등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이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 주고 있다. 서하당 북쪽 모퉁이에는 네모진 연못이 반 이랑쯤 되는데 여기에 백련이 너댓 그루 심어져 있고 샘물은 대나무 홈통을 타고 층계 밑을 지나 못으로 흐르도록 해 놓았다. 못 남쪽에는 벽도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서쪽에는 석류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가지가 담장 위로 높이 뻗었다. 

   
  24일 (무진)맑음

환벽당(環碧堂)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듯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반석(盤 )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金允悌)가 살던 곳으로 신영천(申靈川,潛)이 환벽당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창평현령 이효당(李孝?)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를 돌리니 그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판관(安彦龍)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남가일몽야(南柯一夢也 )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하였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 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瑞石)의 영봉 (靈峯)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다.


맺음말 
이상으로 서석탐승의 대강을 적어 그 경과와 전말을 끝맺을까 한다. 임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나 후일에 다시 선생을 모실 기회가 없을지라도 이 기록을 펴봄으로써 선생과 함께 친히 이야기하고 즐기던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컨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6개 성상이 번개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오르면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없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산에 오르려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서석에서 느낀 감상을 알아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석양에 평상복 짚신 그대로 임 선생댁을 찾아 작별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 여옥(汝玉)을 비롯한 친구들과도 헤어져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린 것만 같다.

 

선조 7년(1574년)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 고경명은 기록한다.


- 넷상에서 발췌 -

 

 

       

 

 

 

 방울샘(鈴泉)

전라남도 기념물 제186호

 

둘레 15m, 높이 2m, 수심 1m의 타원형 형태로

오동촌 마을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표 가까운 내수층에서 방울이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물 색깔이 변한다는 등 여러 전설이 내재되어 있다.

임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적색 물빛으로 변했고,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는 우윳빛,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는 흑색으로 변했다고. 매 년 보름날에는 샘제와 당제를 올리곤 하는데 

 이를테면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 복합된 유적이라는 설명.

 

 

 

 

 

 

 

방울 영(鈴)에 샘 천(泉)이라....

 

 

 

 

 

 

 

처음 찾아왔던 지난 육십년대 보다 솟구치는 물방울이 많이 줄었다는 느낌.

 

 

 

 

 

 

 

피라미 종류도 살고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샘위에 우뚝솟아 백척되는 오동나무

밤이 오면 달빛받아 곱고도 투명하다.
모양은 수척한 듯 그림자는 너울너울

발(簾) 경치에 거문고 소리 끊이지 않나니.

 

'오천유고(梧泉遺稿)' 중에서



 

 

 

 

 

 

일제 치하인 1931년 장성면에서 샘을 정비했다는 내용인데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몇 군데 인위적으로 지워진 흔적이 보인다.

 기록은 시대의 유산이 아니던가? 천황의 연호 등으로 짐작되는데 이래선 곤란하다.

 

 

 

 

 

 

오천정사(梧泉精舍)

 

지금은 고인이 된 전남 도백을 지냈던 노농 김재식이 몇 년 전까지 거주하고 있었다.

오천정사는 노농의 부친 김규현이 지금으로 부터 약 90 여년 전인 39세 때 지은 것이라 한다.

대문 왼편은 오천(梧泉) 김규현의 실적비이고 오른편은 노농 생전에 기록된 불망비로 알고 있다.

 

 

 

 

 

 

 

몇 글자 안되는 내용인데 문맥이 이리도 엉망이어서야 어디 원....

 

 

 

 

 

 

 

 

왼편의 은목서 한 그루와 오른편엔 마악 피어난 산수유 한 그루가

마치 팔각정을 호위하고 있는 형국.

 

 

 

 

 

 

 

분합문으로 이루어진 팔각정으로 각 면과 기둥마다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다.

내부엔 김완 장군의 초상과 시문등이 빼곡한데 오늘은 문이 잠겨 있어서...

 

 

 

 

 

 

 

의친왕 이강의 친필 휘호.

이 글씨를 받는데 든 비용이 정자 건립비를 상회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

 

정자를 세운 김규헌의 문집 오천유고(梧泉遺稿)에 정자 유래가 나온다.



싱싱한 벽오동나무 봉황새 우는 언덕에

아름다운 뜻을 담아 집의 이름을 지었다.
천길이나 높은 산은 신령한 기운 모았고

아홉구비 휘감아 흐르는 물 근원 길구나.

빛난것은 바야흐로 문명의 기상이요

나라 일 돕기 위해 어진 선비 찾음이라.
옛부터 우리동방에 어진 정치 많았으니

천백세 큰 은혜를 어찌 능히 잊을손가.

 



 

 

 

 

 

편액 중 퇴계와 고종의 아들 이강의 글씨를 비롯,

오천(梧泉) 의 네 아들이 각각 한 점씩 쓴 글이 걸려있는 점도 이채롭다.

 

 

 

 

 

 

 

 

 

편액모음

 

 

 

 

 

 

 

 

 

 

 

 

 

 

 

 

 

 

 

 

 

 

 

 

 

 

 

 

 

 

 

쌍오영천(雙梧鈴泉)

 

본디 영천(鈴泉) 앞엔 두 그루 오동(梧洞)나무가 있었다는데

동네 아낙들의 성화로 그만 베어버렸다고.

방울샘과 어울리는 마을 상징목이었을텐데! 생전의 노농도 많이 아쉬워 했다고 들었다.

 

 

 

 

 

 

 

 

 

 

 

 

 

 

 

 

 

 

 

 

 

 

 

 

 

 

 

 

 

 

 

 

 

 

 

 

   

 

 

 

 

 

 

 

 


'쌀의 집' 뒷편 안채 세 칸 건물은 퇴락하여 거의 폐가 수준인 듯.

 

 

 

 

 

 

 

백매향에 휩싸인 오천정.

 

 

 

 

 

 

 

 

 

 

 

 

 

 

 

 

 

 

 

 

 

 

 

 

 

 

 

 

 

 

 

오천정에 피어난 산수유꽃

 

 

 

 

 

 

 

 

 

 

 

 

 

 

 

 

 

 

 

왼편 '쌀의집'은 도백을 지낸 노농 김재식이 말년을 보내며 

쌀 연구에 혼신의 열정을 쏟았던 곳이다.

 

 

 

 

 

 

 


내부는 노농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당신께서 육종을 통해 보급했던 여러 벼 품종이 걸려있는모습.


 




 

 

볍씨와 쌀 등도 마찬가지다.
우량 벼 품종의 개발과 보급을 위해 해외를 드나들며 노농이 수집 육종한 벼 품종들이

오늘 날 농촌의 풍요에 커다란 일조를 했다는 사실. 
언제 부터인가 내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서 휠체어 신세를 진 노농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선대로 부터 이어온 청빈한 삶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모습은 많이 쓸쓸해 보였다. 

 

 

 

 

 

 

 

 

 

오동촌 또 하나의 마을 샘.

 

약 400 여년 전, 김해 김씨, 여양 진씨, 금성 나씨 등이 마을을 일구기 시작하여

한 때 250 여 호에 이르는 마을이 형성된 시절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몇 동의 아파트까지 들어 섰으니 독립가옥 시절의 개념은 별무소용일거고...

 






 

마을 맨 윗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두 그루

 

 

 

 

 

 

 

 

 

 

우거(寓居) 취월당(醉越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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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이 영천리(鈴泉里) 오동촌(梧洞村) 이라면 

'방울샘'이 솟는 '벽오동 마을'이라는 의미 쯤으로 해석하면 될 터이다.

 

 

봉황(鳳凰)이 앉는 나무가 바로 벽오동이요,  마시는 물은 영천(靈泉) 아니던가.

안산, 주산 격에 해당하는 산과 마을을 한 바퀴 돌고나니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

 

 

풍수를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이

작명 자체만으로도 뭔가가 확 와 닿는 느낌이던데, 과연 이라는 결론.

 

 

살다 보니 어찌어찌 봉황이 깃들었다는 동네에 우거를 마련하게 되었는 바.

영천(鈴泉)과 오동(梧洞) 그리고 봉황(鳳凰)에 대한 단상(斷想) 이랄까.

 

   작금, 봉황(鳳凰)이 폐계(廢鷄)가 되어 

벽오동 나무에서 쫓겨내려 온 이를테면 무주공산 시국이다.

 

 따지자면 수컷은 봉(鳳)이요, 암컷은 황(凰)이라 했다.

 몹쓸 닭 한 마리가 말짱 황(凰) 신세가 되어 한강을 건너 갔다는 스토리 전개.

 

옳커니 !   그렇다면 내가 사는 동네 이름발(?)에 편승 

 이 기회에 최소한 앞산 오동나무에라도 한 번  기어 올라봐야 하는 거 아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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