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28
내산서원(內山書院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강항로 101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 창건 당시에는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으로 수은(睡隱)강항(姜沆) 사후 18년째
되는 해인 1635년에 강항의 도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관찰사와 향리의 협의하에 사우(祠宇)건립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최초의 건립지는 강항의 태생지이자 선영이 있던 불갑면(佛甲面) 금계리(金鷄里) 서봉(酉峯)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우 명칭이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더 이상 상세히 확인할 수 없다.
강항의 유적을 충심으로 보살폈던 동토(童土)윤순거(尹舜擧, 1596∼1668)를 추가로 배향(配享)하였고, 훼철
(毁撤) 후 복원시에 내산서원(內山書院)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윤순거는 강항의 수제자였으며 향토들의 추앙을
받았는데,특히 용계사 창건이나 강항의 저서인 《수은집 睡隱集》 편찬 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1684년(숙종 10)에 윤선거의 아버지이자 강항과 함께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했던
팔송(八松)윤황(尹煌)을 추배(追配)하였다. 창건 이듬해인 1636년에는 화재로 인하여 사우의 이건이 추진되었다.
이 때에는 김지수(金地粹), 임담(林潭), 김방급(金方伋) 등의 주도하에 많은 사림들이 참여하여 불갑면
순룡리(順龍里)용산(龍山, 龍溪)마을에 사우를 복설·이건하였다.
이 때 사우의 명칭도 마을의 이름을 따라 용계사라 하였는데, 액판(額板)의 휘호(揮毫)는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고 전한다(이 편액은 훼철 후 후손들에 의해 家傳되다가 6·25전쟁 때 소실됨).
1702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했던 용계사는 1868년에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터만 유지해 오다가, 1974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 소재지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서원내의 건물로는 경내(境內) 전면에 사우(용계사), 강당(내산서원), 내·외삼문(內·外三門)과
서원 좌측으로 경장각(敬藏閣)이 있으며, 좌측 산기슭에는 묘소가 있다. 1977년 10월 20일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원내에 경장각(敬藏閣), 함평이씨열녀각(咸平李氏烈女閣), 장절비(奬節碑), 용계사사적(龍溪祠事蹟)이 있다.
- 내산서원과 강항에 대한 해설 대부분은 백과사전 참조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영광 출신. 좌찬성 희맹(希孟)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오복(五福), 아버지는 극검(克儉),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김효손(金孝孫)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간양록(看羊錄 ) / 건거록(巾車錄)
1책. 목판본. 원래 저자는 죄인이라는 뜻에서 이를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년(효종 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지금의 것으로 고쳤다. ‘간양’이란 흉노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에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수은집(睡隱集)』의 별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尹舜擧)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규장각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은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와 당시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준 고부인격(告俘人檄), 귀국 후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에까지 언급하고 있는 충절의 기록이다. 이 책은 민족항일기에 분서(焚書)의
화를 입어 현재는 희귀본으로 되어 있다.
간양록(看羊錄)은 퇴계 이황의 문인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서의
포로생활 경험과 현지 사정을 기록한 책이다. 기간은 1597년 9월에서 1600년 5월까지 약 2년 8개월이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전라북도 남원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읍성이 함락된 뒤 고향인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영광 인근 지역 또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가족을 데리고 바닷길로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적선을
만나게 되었다. 같이 가던 형제자매들이 바닷물에 뛰어들었으나 일본군이 끌어 올려 포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강항은 부친이 탄 선박과 멀어지게 되었고, 그의 형제와 가족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의 일행은 이송되던 중 배 위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어린 조카의 죽음을 목격했다.
- 간양록의 내용 일부 -
(1597년 9월 14일) 적은 이미 영광군을 불 지르고 산과 바다를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나는 밤 열 시쯤에 배를 탔다.
(9월 20일) 해상의 왜선(倭船) 1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에 당도했으므로 통제사는 중과부적으로전략상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9월 23일) 대낮에 당두에서 또다시 논잠포로 향했으나 아버지께서 행여나 논잠포에 계신가 해서였다.이때 안개 속에서 괴이한 배 한 척이 문득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오니 사공이 놀라 왜선이라고 외쳤다.
나는 순간 포로가 될 위기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해 이내 옷을 벗고 물속에 몸을 던졌다. 처자 형제 등
배의 남녀 태반이 나를 따라 함께 물에 투신했다. 그러나 물가라 물이 얕아 적이 모두 건져내어
배에 눕히고 꽁꽁 동여 세웠다.
(9월 24일) 무안현의 한 해안가에 당도하니 땅 이름을 낙두(落頭)라고 했다.이곳에는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차서 붉은 기와 흰 기가 햇빛 아래 비치고, 우리나라 남녀가 반 수
이상 뒤섞여 있다.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쳐 파도와 같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중략)
둘째 형님의 아들 가련(可憐)은 나이가 여덟 살인데, 주리고 목말라서 짠 물을 마신 까닭으로 구토 설사하여병이 나자, 적이 물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했다.
강항은 일본 도착 후 오쓰성(大津城)에 갇혀 있다가 오사카를 거쳐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이자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교유했으며, 사서오경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등 일본 주자학 발전에 기여했다. 훗날 일본 주자학의 태두가 되는 후지와라는
강항으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강항은 3년에 가까운 포로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정세와 사회상을 습득하고
정리하여 본국에 알렸다. 그는 후시미성에 억류되어 있을 때부터 현지의 관호(官號)와 형세 등을 적어 인편으로
서울에 보내고 있었다. 특히 학식이 높은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에게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에게서 들은 현지의 지리, 군사시설, 관제를 비롯한 정세와 정황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했다.
1600년 강항은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다. 강항이 적지에서 지켰던 절의와 그가 보낸 일본 관련
자료의 의미를 평가한 조정은 1602년에 그를 대구교수(大丘敎授)로 임명했다. 그러나 강항은 포로의 신세가 되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지 목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에 사임했고, 1608년에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강항은 포로 시절에 보고 들은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을 ‘건거록(巾車錄)’이라 이름 했다.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이다. 포로가 된 자신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책은 일본 현지의 정세를 적어 고국에 있는 임금에게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疎) 일본의 관직, 지도,
장수들의 특징 등을 기록한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 귀국 후 조정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일본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 귀환할 때 현지에 남아 있는 포로들에게 준 격문(檄文)인
고부인격(告俘人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산서원 강감회요(綱鑑會要)목판
『강감회요』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강항(姜沆, 1567∼1618)이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보완하여 정리한 사서(史書)이다. 이 목판은 총 642판으로, 1702년(숙종 28)에
판각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어 내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의 전체 크기는 가로 50.5㎝, 세로 22㎝이다. 변란은 사주단변이며, 반곽의 크기는 가로 16㎝, 세로 20.2㎝이다.
판면은 계선이 보이고 있고, 반면은 12행으로 1행에는 22자가 배자되어 있다. 판심부에 서명은 보이지 않고
권수와 장수만 표시되어 있으며, 어미는 상하내향에 2엽화문이다. 판면의 상단부[天頭]에 두주(頭注)가 판각되어 있다.
사당뒷편의 오죽
4권 4책. 목판본. 1658년(효종 9) 윤순거(尹舜擧) 등 그의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원집 외에 「간양록(看羊錄)」·
부록·별집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권1은 대부분 율시절구로 채워져 있고, 권2는 부(賦)·계(啓)·상량문·제문·명(銘)으로 되어 있다.
3은 소·문·서(序)·기(記)·서(書)·잡저로 되어 있으며, 권4는 행장·묘지명·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 단편의 것들이다.
별책인 「간양록」은 적중봉소(賊中封疏)·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고부인격(告俘人檄)·
제승정원계사(諸承政院啓辭)·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저자가 일본 복견성(伏見城)에
억류되어 있을 때 그 곳의 여지(與地)·관호(官號)·형세 등을 몰래 적어 본국에 보낸 것과, 자신이 난을 겪은
내용 및 술회·증답의 시편들을 합친 것인데, 임진왜란의 사료로 중요한 내용들이다.
별집 부록은 「시부조표의설집(詩賦詔表議說集)」과
그의 행장·시·서(書)·제문·만사·제묘문·사우상량문 등으로 되어 있다.
경장각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서원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외삼문과 사당 용계사를 중심축으로 외삼문, 내산서원,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했다. 용계사에는
수은 강항의 위패와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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