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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자미화 기행 1

2016. 8. 6

 

 

 

 

담양 명옥헌(鳴玉軒) 원림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가 산천경개를 벗하며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거하면서 만든 정원이다.

  

 

 

 

 

 

 

 

 

 

 

 

 

 

 

 

 

 

 

 

 

 

 

 

 

 

 

 

 

 

 

 

 

 

 

 

 

 

 

 

 

 

 

 

 

 

 

 

 

 

 

 

 

해가 뜨기 한참 전에 당도한 명옥헌.

 

 

 

입구 맞은 편 언덕에 벌써부터 대포로 중무장한 진사님들의 삼각대 행렬이 즐비한 모습.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윽고 희뿌연 일기 속에서 해가 떠오르고, 동시에 이어지는 분주한 셔터음과 

드론이 날면서 내는 소음이 명옥헌 배롱숲의 고요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담양 연계정(蓮溪亭) 원림

연못 안 '모현관'에 『『미암일기』(, 보물 제260호)가 보관되어 있다.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 확대 이미지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11년간에 걸친 내용으로, 

조정의 공적인 사무로부터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매일 일어난 일과 보고들은 바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임란으로 선조 25년 이전의 기록이 다 타고 없어져,『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이이의『경연일기』와 더불어 『선조실록』의 기본사료가 되었다. 

본래는 14책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11책뿐이며, 부록으로 미암의 부인 송덕봉의 시문과 잡록이 실려있다.

 

 

 

 

담양 몽한각夢漢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인 이서(李緖)가 1507년(중종 2) 이과(李顆)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평(昌平)에 유배되었다가 1520년 해배되었으나 귀경하지 않고 이곳에 남아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1803년(순조 3) 그의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와 창평현령 이훈휘(李薰徽) 등이

지방에서 관직을 지내면서 이서를 추모하고자 현재의 규모로 조영한 것.

 

예전과 달리 굳게 걸어 잠근 문.

관리인마저 어디로 출타 중인지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담 너머로 흘깃 댈 수 밖에 없었다.

 

 

 

 

 

 

 

 

몽한영고

         

몽한영고 / 낙지가 / 이서

 

몽한영고 (夢漢零稿)  /  낙지가 (樂志歌)


3권 1책. 목활자본. 고종 때 후손 항선(恒善)이 편집, 간행. 권두에 송사 기우만(奇宇萬)의 서문이 있다.

권1에 시 21수, 가(歌) 1편, 권2·3은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몽한각상량문(夢漢閣上樑文)·속록(續錄)·

몽한각화수록(夢漢閣花樹錄)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그가 14년간을 적거(謫居)하면서 불우를 한탄하고 억울함을 호소한 것으로, 비분강개하여

참상을 짐작하게 하며, 적거하던 형과 화답한 것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술회(述懷)」는 1507년(중종 2)

초계(草溪)로 귀양와서 추성군수(秋城郡守)로 있다가 귀양간 아우 계숙(繼叔)에게 소감을 적어 보낸 것인데

, 꿈속에도 고향을 잊지 못하여 달려가는 애절한 사연과 모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지 못하는 죄스러운 심정을 담고 있다.

 

「낙지가(樂志歌)」는 담양의 미풍양속과 승경(勝景)을 노래하고, 부귀영화를 잊고 

굳은 결의와 함께 태평성대를 기원한 내용이다. 이 가사는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지은 것으로,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가사의 형식 등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밖에도 행장과 신도비명에는 연산군과 중종의 정권교체 시기에 죄 없이 14년간 가족과 격리되어 살아온

 지은이의 생애가 실려 있고, 자손들이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몽한각을 짓고 그것을 상량할 때

집의 제도와 의의, 추모의 사유들을 적은 「몽한각상량문」이 있다.

 

 

 

 

 

담양 죽림재(竹林齋)

 

 

 

죽림(竹林)조수문(曺秀文, 1426∼?)이 건립한 정사로 창녕조씨 문중의 강학장소로 이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시 귀중한 문서와 함께 소실되었고

1623년(인조1)에 죽림의 6대손인 삼청당(三淸堂)조부(曺簿)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그후 죽림과 그 아들인 운곡(雲谷)조호(曹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에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죽림재와 같은 위치로 죽림사를 이건하였다

 

 

 

.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복원되었으며,

현재 4위(竹林曺秀文, 雲谷曺浩, 三淸堂曺簿, 簫隱鄭敏河)를 배향하고 있다.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문하(《동국문헌록》에는 江湖金淑滋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음)에서

수학한 뒤 죽림정사를 건립하여 후진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식영정(息影亭)

 

 

 

 

 

- 식영정을 지키는 노송 -

 

 

식영정은 1560년(명종 15)에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이른바『성산가단』의 진원지이자『가사문학』의 산실.

 

 

 

- 식영정 노송과 자미화의 어울림 -

 

 

 

 

서하당(棲霞堂)

 

 

 

서하(棲霞 ) 김성원(金成遠)은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誣告)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고 말았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성모산(聖母山)에서 왜병을 만나자

부인과 함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 살해되었다.

 

 

 

 

 

- 부용당과 어우러진 자미화 -

 

서하 김성원은 『성리서(性理書)』·『주역(周易)』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시(詩)로서도 이름이 높아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척서도(滌署圖)」 등은 인구에 회자되었다.

저서로는 『서하당유고』가 있다.

 

 

 

서하당유고(성산별곡) 확대 이미지

서하당유고』중 '성산별곡' 부분

 

 

 

 

 

 

 

 

환벽당(環碧堂)

 

 

 

 

 

 

  환벽당 앞을 흐르는 증암천을 자미탄((紫薇灘)이라 칭한다는 사실.

자미목(紫薇木)이 냇가에 많이 서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화순(和順나한산(羅漢山) 만연사(萬淵寺)

 

 

 

 

 

1208년(희종 4)에 선사 만연(萬淵)이 창건한 절로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만연산은 나한산(羅漢山)이라고도 한다. 한말에는 당시 국창(國唱)으로 불리던 이동백·이날치 명창이

이곳 만연사에서 소리를 닦았으며, 정광수·임방울 등 당대의 명창들도 이곳에서 창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국동란 때 모든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78년부터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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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15세기 원예서(藝書)화소록(養花小錄)을 펼치면

꽃과 나무를 격에 따라 모두 9품으로 분류해 놓은 걸 볼 수 있다.

 

그 중 소나무(老松), 매화(故梅), 자미화(紫薇花)를 이른바 최고 등급인 1품으로 분류해 놓았는데.

관심이 많은 나로선 정말이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독야청청 소나무는 겨울을 뜻하고, 설한풍을 견뎌낸 매화는 당연히 봄이요,

폭염 속에 백 날을 피어나는 자미화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인고의 상징일 터.

 

'백일홍나무'에서  소리나는 대로 ' 배기롱나무'를 거쳐 

오늘날엔 '배롱나무'로 불리우는 폭염 속의 제왕 '자미목'(紫微木)의 명칭 변천사.

 

불꽃의 상징 자미화(紫薇花)에게만 유독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지 않은가?

 

 

 

 

그러나  어찌 자미화라고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여름 내내 늘 피어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론 몇 번에 걸쳐 피고 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고대 중국 천문용어 '자미원(紫微垣)'과 천상의 세계 '자미궁(紫微宮)'

송 대의 신선 진희(陳希)가 창제 했다는 점술 '자미두수(紫微斗數)'에 이르기까지.

 

자줏빛이 신선과 제왕을 상징하는 색깔이라면,

언감생심(焉敢生心), 깜 안되는 나로선 그저 배롱꽃 구경이라도 열쒸미...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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