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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드 월봉

제 9회 살롱 드 월봉 salon de wolbong

 

              2012 문화재생생사업 ‘2012 도담도담 월봉서원’

 

        ‘월봉서원은 창의가 춤추는 Academy다!’

 

 

 

          -제 9회-

          고품격 문화살롱  salon de wolbong   

 

           인 문 다 담 향긋한 차로 월봉서원을 만나다.      

          이야기 마당 광주 근 * 현대사 이야기                                    

                                      조 광 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문 화 공 연  :  이야기가 있는 세계음악 산책

                                               라 의 승(음악칼럼리스트)

        

 

           - 장소 : 월봉서원 교육체험관

           - 일시 : 2012년 5월 25일 (금)

           _ 주최 : 문화재청,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육문화공동체 '결'

           - 후원 : (재)고봉학술원, 행주기씨문헌공종중, 광곡마을 주민, 광산문화원, 광주향교여성유도회, 광산구문화유산 해설사회

 

 

- 1 부 -

 

라의승(음악컬럼니스트)

 

 

 

이야기가 있는 세계음악 산책

 

 

 

 

 

 

 

 

 

 

 

 

 

 

 

 

 

 

 

 

 

 

 

 

 

 

 

 

근대의 인도음악

 

북인도

파트나의 무하메드 레자 칸(Muhammed Rezza Khan of Patna)은 라가를 남성 라가와 여성 라가로 분류하는 것은 우습다 하고,

 여러 음계(라가)의 구성음(構成音)에 의하여 새로 라가를 분류하였는데, 여러 라가 중 기본 라가인 빌라발 라가(raga Bilaval)를

 채택하였다. 그 음계는 대략 서양의 장음계 비슷하다(CDEFGABC). 바하트칸데(Bhatkhande,1934-1941)는 북인도의 라가

전부를 10개의 기본음계로 분류하여 근대의 북인도 음악체계를 창시하였다. 10개의 기본음계는 ⑴ Bilaval, ⑵ Kalyan,

⑶ Khambaj, ⑷ Bhairon, ⑸ Poorvi, ⑹ Marva, ⑺ Bhairavi, ⑻ Asavari, ⑼ Kafi, ⑽ Todi 등이다.

 

남인도

 

또한 고빈다(Govinda)는 그의 저술 삼그라하쿠다 마니(Samgraha-Cuda-Mani, 18세기 후기)에서 72개의 멜라(mela)와

그 밑에 딸린 많은 자냐(Janya)로 분류하는 방법에 더 손질을 하였다. 72개의 멜라가 아래와 같이 12개의 차크라(chakra)

에 묶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시타르(sitar)

이 악기는 비파와 같이 생겼는데, 목이 길고, 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타르는 셋 내지 일곱 줄을 가졌고, 밑에 공명줄 12개(또는 13개)를 가졌다

 

 

 

 

 

 

 

 

 

 

 

 

 

 

 

야니의 음악세계

 

 

 

 리베리아 반도의 음악에 이어 이번에는 그리스와 인도 음악을 들려 주며

아시아 각국의 음악과 우리 음악의 상관관계를 이해시켜 주고 있었다.

 

 

 

- 2 부 -

 

 

광주 근 * 현대사 이야기

             조광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광주읍성 고지도

 

광주읍성은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났는가

 

성벽처리위원회 1907년 설치…당시 철거기록은 없어

 그러나 광주를 대표하는 풍경으로서 읍성에 대한 기록은 위원회와는 다른 기록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된다.

1888년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지략’을 보면, 광주읍성의 둘레는 1500미터, 높이는 2.5미터라고

소개하고 있다. 높이는 얼추 들어맞는 듯하지만 둘레는 실제 2500미터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 것과 비교하면

조금 동떨어진 듯하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광주읍성이 돌로 쌓은 성, 즉 석성으로 알려져 온 것과 다르게,

이 책은 읍성이 흙으로 쌓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착오라기보다는 당시 광주읍성의 상황을 간접적

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본디 읍성은 석성이었지만 오랫동안 유지관리가 되지 않아 겉을 싸고 있던 석재가

거의 사라지고 그 안의 흙더미만이 남은 상태였던 것 같다.

 이후 10여년이 흐른 뒤에도 읍성의 형태는 대충 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본디 읍성이 석성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이 성이 처음부터 흙으로 된 것인 양 비쳐질 만큼 성벽은 거의 강둑처럼, 토루(土壘)처럼

광주읍내를 덩그러니 에워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성문이 있어 이곳이 본래 성이 있었음을 간신히 알려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본디 네 개였을 성문도 본디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1896년 광주를 방문한

오횡묵(吳宖默)이란 관리는 광주의 네 성문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고 있지만 성문의 형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만큼 성문은 초라하게 변모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1826년 광주 지도

석성이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흙성으로 비춰질 정도

 그래서 네 성문이 언제까지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확언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적어도 네 성문 가운데 하나인 북문만은 1900년대까지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 같다.

 이는 1901년 광주를 방문한 일본의 저명한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의 기행문에서도 확인된다.

그 역시 북문의 형태나 보존상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북루와 함께 북문이 아직 건재해

있었음은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1917년에 측량된 광주 최초의 지형도에도 공북루는 여전히 지도에 나와 있다.

다만, 이 때에 이미 네 성문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작 옛 전남도청 뒤편에서 동쪽 성벽에 이르는

구간만 토루의 형태를 그려 넣어 마지막 읍성의 잔영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성문과 성벽은 언제 본격적으로 헐렸을까? 1910년 1월 전남관찰부는 중앙부처에 이런 요청서를 띠운다.

광주의 성벽과 문루를 철거하고 생긴 토목재를 사용하겠으니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중앙부처는 이를

승인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시기에 광주읍성은 사실상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자리엔 군데군데 도로가

놓이게 되는데 오랫동안 광주보통학교(현 서석초교)의 교장을 지낸 야마모토 데스타로(山本哲太郞)에 따르면 그

시기는 1910년과 11년 사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만큼이나 오랜 것은 중요하다. 도시의 풍경에서도 그렇다. 사실 광주 원도심의 풍경에서 이 도시의

깊이 있는 역사를 일깨워줄 만한 것은 거의 없다. 풍경만을 놓고 본다면 광주는 1960·70년대에 시작된 새파랗게

젊은 도시라는 인상뿐이다. 철근과 콘크리트, 유리로 이루어진 도시에 호젓하게 옛 성문 터를 알려주는 기념석의

 존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광주객사인 광산관(光山館)을 정면에서 본 모습. 중앙에 주관(主館)을 두고 좌우에 익헌(翼軒)을 둔 웅장한 규모였다. 사진촬영 당시에는 광주군청 회의실로 사용 중이었다.(사진 왼쪽), 객사 건물의 동쪽 일부를 개조해 광주군청으로 사용하던 모습. 지붕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일본식으로 치장된 것을 볼 수 있다.

 

광주의 객사는 오늘날 무등극장 자리 일대에 있었다. 영화관이 있는 자리가 꼭 객사 터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객사는 영화관이 들어선 블록 어딘가에 있었을 테지만 지금 그 자리를 꼭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광주객사엔 ‘광산관’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광산은 서석·무진 등과 함께 광주의 옛 이름들 가운데 하나다.

객사의 정식명칭을 이처럼 고을의 별칭을 따다 짓는 것은 다른 고을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또한 광주객사 앞에는 정문 격인 2층으로 된 누각도 있었는데 이를 황화루라 했다. 이름은 ‘시경’에 나오는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글귀에서 따왔을 것이다. 어떻든 광산관은 여러 관아건물들이 들어선 광주읍성의

남문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가장 웅장했을 것이다. 이런 규모와 상징을 통해 객사는 임금이 늘

광주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편, 광주객사의 창건과 변천에 대한 기록은 산발적으로만 전해진다. 성현이란 인물이 조선초엽에 쓴 글에

 따르면, 광주목사를 지낸 설순조가 처음 객사를 지었다고 했다. 설순조는 1480년경에 광주목사를 지낸 사람이다.

이 무렵에는 다른 고을에서도 객사 건립이 붐처럼 일어났던 것 같다. 나주객사인 금성관도 얼추 이 무렵에 이유인이란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후 광산관은 수차례 수리를 거듭하면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해 나갔던 것 같다. 1

9세기에만 목사 신석유와 남호원이 1872년과 1879년에 각각 수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광산관은 나라의 운명과 행보를 같이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목포에 있던 일본영사관은 외교공관에서

내정간섭을 위한 기관, 즉 이사청으로 이름을 바꿨고 전남관찰부 소재지인 광주에는 그 지청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6년 당시 통감부는 수원, 원주, 공주, 전주, 경성(함북), 함흥 등과 함께 광주에 그 지청의 설치를 공표했다.

그러면서 일제는 광산관을 지청 건물로 사용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전남관찰사와 광주군수의 거듭된

 반대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지청은 불로동 1번지 현재의 메가박스 자리에 있던 일본사찰인 본원사의 일부

건물을 빌려 사용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하지만 객사의 존속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전국의 다른 객사들과 마찬가지로 광산관도 1909년 공식적으로 본래의

기능을 중단했다. 궐패나 전패는 회수됐고 더 이상 그 앞에서 이루어지던 의례도 행해지지 않았다. 다만 건물은 그

뒤에도 얼마동안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최근에 입수한 사진에 따르면, 일제 초엽까지 광산관의 건물은

무등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지금의 나주객사인 금성관처럼 중앙에 맞배지붕 형태의 주관을 두고 좌우에

날개처럼 잇대어 동익헌과 서익헌을 두었던 형태였음이 확인된다.

 합방 후에 일제는 이 건물을 광주군청과 회의실로 사용했다. 주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은 회의실로 사용했고

군청사는 건물 가운데 충장로 쪽으로 면한 동익헌을 개조해 이용했던 것이다. 광주면사무소도 초창기에는 이

건물의 한 켠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또한 1920년에는 지역민들의 성원으로 설립된 광주고보(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도 바로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광주고보는 2년여 동안 이곳에 머물다가 1922년 누문동에 새 건물을 지으면서 옮겨갔다. 그리고 곧이어 군청도 지금의

 대의동으로 새로 청사를 지으면서 이곳을 떠났다. 이후 어떤 기록에서도 광산관에 대한 내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1931년 옛 객사가 들어선 땅의 일부에 제국관이란 극장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공화극장, 동방극장

 등으로 불리다 지금처럼 무등극장으로 상호를 바꿔 영화관으로 계속 영업을 하면서 객사는 이제 극장 자리로만

기억되고 있다. 객사 앞에 버티고 서 있던 황화루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1913년 동명동에 있던 형무소(교도소)

정문 앞으로 옮겨진 황화루는 간수양성소로 사용됐다. 일제시대를 경험한 옛 광주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가끔

이 누각에 오르면 발치 아래로 굽이치던 동계천을 굽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선홍 선생의 책 ‘광주1백년’에

 의하면, 1970년대 교도소가 문화동으로 다시 이설될 때 이 건물이 헐렸다고 한다.

 

 

 

옛 광주천의 모습.

오른편은 양림동 일대이고, 왼편 강가의 작은 집들은  장터의 모습.

 

 

 

광주읍성 개념도

 

 

 

동문 앞 석장승

 

 

 

지금은 사라진 '경양방죽'의 모습

 

 우리가 기억에 묻은 경양방죽의 본디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저 널찍한 호수였을까? 아니면 광주 사람들의

삶을 담은 호수였을까? 희뿌연 간유리창 너머의 진실처럼 흐릿하게만 전해지는 기억을 더듬어 경양방죽의

옛 모습을 더듬어 본다. 방죽은 본래 농사용 저수지였다. 여름엔 처지 곤란할 정도로 많았을 지라도 막상 농사에

쓰려고 하면 늘 부족했던 물 때문에 방죽은 광주 사람들에게 아주 실리적인 수원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적게

곱씹어도 족히 수백년 동안 광주의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던 방죽은 사실 저수지 이상의 풍경이었다.

 광주 동문 밖에 해당하는 이곳은 19세기 말엽까지도 주위가 허허벌판이었다. 가까이에는 이렇다 할 민가조차 없었다.

북쪽으로 조금 가야 경양찰방이 머무는 관아, 즉 구윗집들을 감싸 안은 우산동 역말이 있었다. 보시기를 엎어놓은

듯한 중흥동의 태봉산도 여기서는 아렴풋이 멀리 보였다. 주위가 온통 너른 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죽에서

흘러내린 덕분에 둑 아랫녘은 봄부터 가을까지 생기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 들녘도 겨울이면 잿빛의 논으로만

휑하니 남았다. 그래도 방죽 안쪽만은 연중 푸른빛으로 빛났다.

 봄이면 이 푸른 방죽에 또다른 장관이 피어올랐다. 화사한 연꽃이 방죽을 가득 수놓았던 것이다. 경양방죽을

달리 일러 `연꽃방죽’이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높다란 곳에 오르면 이런 연꽃 장관은 더욱

극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방죽 주변에서 높다란 곳은 지금의 광주고와 계림초교가 들어선 언덕이다.

이 언덕은 원래 경호대라 했다. 한때 경호정이란 정자가 있던 까닭이다.

 경호정은 1800년대 초엽 김선이 광주목사를 지낼 때 처음 지었다고 한다. 당시 김선에게 방죽은 거울처럼

맑은 모습이 가장 큰 미덕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도 경호정(鏡湖亭)이었다. 그 후 1840년대

윤치용 목사 때 경호정을 고쳐 지은 적이 있었다. 이 때 이름을 바꿔 응향정(凝香亭)이라 했다. 방죽에서 올라온

연꽃의 향기가 이 언덕의 끝자락에서 맺히는 것 같다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연꽃말도도 방죽에는 다른 장관도 있었다. 방죽 서쪽에는 기다란 둑이 그 너머의 들녘과 수면 사이에 다리처럼

걸려있었다. 이 둑은 지금의 대인동 광장 근처에서 우산동으로 반듯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둑은 그저 밋밋한 흙길이

아니었다. 둑길 위에는 담양의 관방제림처럼 느티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수종의 고목들이 즐비했다.

 젊은 시절에 광주를 자주 방문했던 정약용도 이 둑길의 숲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 때문에

말을 타고 지나가기가 버겁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에 오횡묵이란 관리도 이 둑길을 지났다.

의 눈에 숲길은 울창함 못지않게 규모도 당당했다. 그래서 숲길의 끝과 끝이 5리는 족히 되는 싶다고 했다.

물론 이들만이 경양방죽의 둑을 따라 늘어선 숲길에 찬사를 보낸 건 아니었다. 1930년대 일본인 조사자들은

이 숲길의 규모가 유명한 유동과 임동의 유림숲에 버금간다고 믿었다. 실제 그들이 조사한 내용이 `조선의

임수(숲)’이란 책에 자세히 남아 있다.

 한편, 경양방죽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자주 말하는 것이 있다. 푸른 물 위에서 즐기던 뱃놀이가 그것이다.

18세기에 정약용도 둑길을 지나며 방죽이 워낙 커서 뱃놀이를 하기에 좋을 듯하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그런

상상을 즐길 만큼 방죽은 드넓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 정말 이곳에서 뱃놀이가 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약용도,

그 후의 조선시대 사람들도 실제 뱃놀이를 즐겼거나 봤던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옛 경양방죽을 담은 현대의

사진에는 뱃놀이 풍경이 많다.

 우리에게 사진으로 전하는 경양방죽의 뱃놀이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1930년대 말엽 방죽의 상당부분이

매립되고 일부만이 남아 호수의 체모를 간신히 유지했다. 이 무렵에 광주시에서 배 한 척을 띄워 간단하게

뱃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다.

 그 후 1941년 시당국은 방죽의 남은 수면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공모했다. 이 때 시내 불로동에 살던

후지가와(藤川)란 일본인이 호수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아이디어를 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작은 배를 띄워

유료보트장으로 이용하고 겨울엔 유료스케이트장으로 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본인은 시당국으로부터

영업권을 따내 방죽에 배를 띄웠다. 훗날 추억이 된 뱃놀이가 사실은 방죽의 부분 매립과 경관의 상업적

이용이라는 시대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아이였던 셈이다.

 모든 무덤에 사연이 있듯 모든 풍경에도 사연이 깃들어 있다. 풍경은 그것이 호젓하면서도 위엄을 지닌 대자연의

외양을 띠는 것이라도 상당수는 사람들의 손과 숨결이 배어있다. 경양방죽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오히려 도시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는 탓에 더 많은 시련을 겪었다.

 한때 거울처럼 맑다 하여 경호(鏡湖)라 불렸던 이 방죽은 그래서 단지 그 위를 떠가는 해와 달, 구름만을

품은 것이 아니었다. 경양방죽은 시대를 달리하여 광주 사람들의 세월까지도 담은 호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얼마만큼 풍경에 깊은 상처를 줬고, 얼마만큼 풍경에 목말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과거 경양방죽의 모습

 

이미 사라진 호수이긴 하지만 이제 어지간한 광주사람이라면 경양방죽에 대한 귀동냥을 많이 한다. 물론 기껏해야

사라진 호수일 뿐이었다고 말하는 냉소론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몇 걸음으로 잴 수 있는 크기의 호수가

아니었기에 그 거대함만으로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경양방죽과 마을사람들’에 나와 있듯이 방죽의

원래 넓이는 6만 5000평이었다. 숫자로는 잘 가늠하기가 되지 않는 넓이다. 하지만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조금

이해가 빠를 듯싶다. 1925년 4월 평양에서 이륙한 일본육군 정찰기들이 한반도 남부를 향해 날아온 적이 있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당시 극락면, 지금의 상무지구 안에 있던 활주로였다. 그리고 정찰기 가운데 2대는 예정대로

목적지에 안착했다. 하지만 1대만은 길을 벗어났다.

 요즘처럼 항법장비가 발달된 시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무릎에 지도를 펼쳐놓고 발치 아래의

지형과 일일이 대조를 해보며 비행했다. 지문항법이라 일컫는 이런 비행을 하다보면 왕왕 하늘에서 길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당시 비행기에는 무선장치도, 유사시 사용할 낙하산도 없었다. 무선장치가 없으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도, 길을 물을 수도, 적어도 당혹스런 상활을 하소연하거나 여차하면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선택의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비행기는 착륙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한참을 하늘을 헤집고 다니던

조종사의 눈에 드넓은 활주로가 보였다. 설핏 거울처럼 반짝이는 것이 호수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대개 비행장이 큰

하천을 끼고 있는 터라 곧 의심은 사라졌다. 더욱이 설령 거울처럼 반짝이는 것이 호수라 해도 그 옆에 반반하게 펼쳐진

벌판은 영락없는 활주로였다. 결국 조종사는 착륙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체가 땅에 닿을 순간, 딱딱할 것이라 기대했던 땅바닥은 질펀한 진흙이었고 비행기는 순식간에

뒤집히고 말았다. 비행기가 불시착한 곳은 바로 경양방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종사가 활주로라고 착각했을

 만큼 당시의 경양방죽은 넓었다.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일이 있고 몇 해 뒤에 광주지역에서는 아예

경양방죽의 일부를 비행장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항공우편과 얼마간의

여객수송을 위해 전국에 민간비행장을 설치하려고 계획했다. 이 때 광주우편국을 통해 광주상공회

(지금의 상공회의소)에 비행장 후보지를 물색해 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얼마 뒤에 광주상공회는 비행장의 유력후보지로 경양방죽을 추천했다. 경양방죽이 당시 비행장의 충족요건인

길이 600미터의 활주로를 가설할 수 있고 주변에 항로의 방해가 될 지형이나 건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활주로 가설에 필요한 흙은 호수를 준설해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광주상공회가 비행장

부지로 추천한 땅은 호수의 3분의 1인 2만평이었다. 물론 경양방죽의 일부를 비행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호수의 일부는 매립됐다. 다만, 1930년 광주상공회가 제안했던 계획과 달랐다.

1930년 상공회는 6만 5000평의 호수 가운데 4만 5000평은 호수로 남겨두고 나머지 2만평만을 매립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에 수립된 계획안에 따르면, 4만 5000평을 매립해 택지로 만들고 나머지 2만평만을 호수로

존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부 조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양방죽 둘레길에 해당되는 바깥쪽이

 매립됐고 그 안쪽이 호수로 남게 됐다. 그렇다면 나머지 2만평은 왜 지금까지 호수로 남아 있지 않는 것일까?

 경양방죽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에는 추상 같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해방 후에 우리가 내지른 어리석음이나 과욕에 대해서는 너무 고무줄 같은 잣대를 사용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나머지 2만여 평을 묻은 것은 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묻는다고 신안동의 태봉산을 허문 것도

 일본인들이 아니었다. 일제가 결코 선량함이나 혜안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있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더구나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질문을 던질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

 답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 이것이 또한 계림1동 주민들이 펴낸 책에게 느끼는 무게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 확장 되기 이전의 중앙로.

 

광주의 젖줄, 광주천을 표현하는 관용구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늘날 광주사람들이 쓰는 생활용수는 수 십 킬로미터 밖의 화순군의 동복댐이나 그보다 먼 주암댐에서 끌어다

쓰고 있다. 그래서 광주천이 광주의 젖줄이란 말은 얼핏 경관적인 의미밖에 없는 듯 느껴질 때가 많다.
광주천이 이렇게 보이는 데는 생활방식의 변화도 큰 몫을 한다. 현재 광주사람 열 중 여섯은 걸어서 10여분만 걸으면

광주천을 만나는 거리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일상은 광주천과 훨씬 거리가 멀다. 광주사람들의 대부분이 물을 대어

작물을 키우는 농사와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90% 이상이 농사에 목을 매어 살던 시절은 달랐다.

 광주천만한 큰 수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천은 변덕스럽다. 거의 모든 우리네 하천이 그렇듯이 광주천 역시

계절별 수량변화가 극심하다. 지금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광주천에 나가 강물의 변화를 지켜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나마 요즘은 하류의 물을 상류로 되돌려 수위를 유지한 덕분에 수위변화가 덜 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엔 달랐다. 홍수기에는 툭하면 범람해 침수피해를 입혔다. 그러다가 갈수기에는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수위가

 낮았다. 가뭄 때면 농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경양방죽은 이런 광주천과 관련이 깊다. 사실 광주천이 없다면 경양방죽도 없었다. 경양방죽 가까이에는 원래

 별다른 수원이 없다. 그래서 멀리 광주천의 물을 끌어다 채운 것이 경양방죽이다. 즉, 홍수기에 넘쳐나는 광주천의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 때마다 빼내 썼던 것이다. 물을 일종의 예금통장처럼 이용했던 셈이다. 또한 이런 방식은

광주천의 범람을 예방하는데도 도움을 줬다. 상류에서 유입되는 물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빼내 하류지역으로 유입되는

 물의 양을 줄였기 때문이다. 즉, 남는 전기를 담아뒀다가 필요할 때에 끌어다 쓰는 배터리 같은 구실을 했던 셈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광주천에서 경양방죽에 이르는 연결수로 중 일부는 시내를 관통했다. 이 수로는 광주읍성의

북쪽 성벽 앞 해자를 지나가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수로는 침입자들이 불시에 성벽을 타고 넘을 수 없도록 하는 군사적인

기능도 했다. 결과적으로 치수와 농업용수 그리고 군사적 목적을 동시에 해결했던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대체로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은 김방(金倣)으로 알려져 있다. 김방은 조선 초엽인 태종 때 벽골제를

수리했고, 세종 때엔 중국 사신들의 숙소인 태평관을 수리하는 등 토목사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경양방죽의 역사는 김방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는 광주천의 치수사업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로부터 광주천의

잦은 범람은 큰 우환이었다. 그래서 범람으로부터 시내를 구하기 위해 광주천의 물을 두 갈래로 나눴다. 한 갈래는

바로 하류로 흘러가도록 하고 다른 갈래는 읍성 밖을 돌아 우회시켰다. 그리고 그 물이 갈리면서 섬처럼 된

부분에 정자를 지었는데 이것이 석서정(石犀亭)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모든 일을 한 것은 고려 말엽 때 사람인

 김상(金賞)이었다. 그래서 광주천이 없이 경양방죽을 생각할 수 없듯, 김상 없이 김방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로 경양방죽을 본격적으로 굴착한 김방의 공로를 깎아 세울 수는 없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빼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김상이 광주천 치수사업을 하면 자연의 흐름을 이용했듯 김방도 지세를 이용해 경양방죽을 굴착했다.

 김방이 광주천의 물을 가둬 둘 만한 장소로 계림동 일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양방죽 터는 본디 저습지였다.

1970년대 중반, 경양방죽의 마지막 호수 부분을 매립한 뒤에 많은 이들이 새로 집을 지어 살았다. 이런 집에 살던

사람들은 간혹 아궁이에 물이 고여 있는 현상을 목격했다. 매립됐다고 하나 본디 호수였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농촌진흥청이 제작한 <정밀토양도>를 보면, 경양방죽 일대는 원래 하해혼성토층(河海混成土層)이었다고 나와 있다.

 방죽이 들어서기 전, 아주 태곳적에 하천이 흘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이곳은 본디부터 지대가

낮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토대로 김방은 광주천의 물을 끌어다가 이곳에 저류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천의 물은 어떻게 경양방죽에 이르렀을까? 광주천 중간에 작은 댐을 쌓았다. 조탄보라 불린 이 댐이 광

주천을 가둬두는 구실을 했다. 여기서 물을 뽑아내는 취수구는 지금의 서석교 근처에 있었다. 취수구에서 뽑아낸 물은

 광주세무서 쪽으로 놓인 대각선 방향의 수로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광주세무서에서 중앙로를 따라 중앙초교 뒤편

 네거리로 흘렀다. 광주읍성의 북쪽 성벽 앞에 있었던 해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중앙초교 뒤편에서 물은 동문 쪽에서 흘러온 개울과 만나 동부소방서 쪽으로 나갔다. 동부소방서 근처에서

방향을 틀어 경양방죽 쪽으로 유입됐다. 이렇게 취수구에서 경양방죽까지 수로는 모두 2km에 달했다.

 오늘날 그 흔적을 더듬기란 몇 시간 전 바닷가에 쌓아놓은 모래성의 흔적을 찾는 격이다. 그래도 도시는 옛 흔적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옛 한국은행 자리에서 금남로와 교차하는 중앙로는 1970년대에 확장공사를 통해 생겨난 길이다.

원래는 도로 중앙선을 따라 상가들이 띠처럼 길게 이어졌고 그 좌우편으로 작은 길이 놓인 모습이었다. 이 같은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광주천에서 경양방죽으로 가는 수로, 즉 해자를 덮고 그 땅을 민간에 불하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 뒤

1970년대에 중앙로를 닦으면서 상가들을 헐고 길을 확장했다. 흔적들이 사라진 호수의 얘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광주천의 이름들

건천·금계·조탄·서천·전천·용주천·곽천·한강·대강·혈포

 

광주천은 무등산 서쪽기슭인 샘골에서 발원해 광주시내를 가로질러 24km를 흘러 영산강에 합류한다.

산강을 이루는 600여개의 샛강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 하천을 대하는 광주 사람들의 느낌은 남다를 것이다.
그런데 광주천이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과거에도 우리는 이 하천을 광주천이라 불렀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광주천을 일컫던 가장 오래된 이름은 건천(巾川)일 것이다. 이 이름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리고 고려 말엽의 사람으로 조선왕조가 세워진 것을 보고 관직을 그만두고 광주에서 평생 은둔생활을 했던 정광의 호가

건천이었다는 것으로 보면 건천이란 이름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이름 건천(巾川)

 금계(錦溪)라고도 했다. 비단처럼 곱게 흐른다는 뜻이다. 1914년 양파정 건립에 맞춰 여러 시인묵객들이 쓴 글에도

 이 이름을 시사하는 글귀가 잠깐 등장한다. 그리고 1933년 광주 부호 최석휴가 펴낸 `운림당시문집’에는 광주천

전체를 명확하게 금계라 표시해 놓은 그림이 실려 있다.

 이 때는 이미 광주천을 금계나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문학적인 수사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이름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었던 탓에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광주천의 옛 이름인

금계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금의 동구 금동이란

 지명은 바로 이 금계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때 해방 직후 금동을 금류동(錦流洞)과 금계동(錦溪洞)이라

불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한편 광주천은 조탄(棗灘)이란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글자 그대로 하자면 대추여울이란 뜻이다.

 한때 광주천변에 대추나무가 많아서였을까?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광주의 토산물

가운데 대추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나오는 조탄이란 이름도 이런 기록과 관련됐을지 모른다.



 비단처럼 곱게 흐른다는 뜻 금계(錦溪)

 어떻든 조탄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사용했던 이름 같다. 광주 출신으로 조선 명종 때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인

정만종의 호가 조계(棗溪)였다. 그의 아들 정엄의 호가 또한 양촌(楊村)인 것을 보면, 정만종의 집안은 오래 전에

지금의 양림동 일대에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 앞을 흐르던 개천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은 것

같은데 굳이 조탄이라 하지 않고 조계라 했던 것은 문학적인 운치를 가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광주천은 또한 서천(西川)이라고도 불렸다. 서문(황금동 일대) 밖을 흐르는 개천이란 의미였다. 광주천이

지금처럼 반듯하고 강폭이 좁은 하천으로 바뀌기 전에 강을 가로지르는 놓인 교량이 있었는데 이를

천교(西川橋)라고 했던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이 다리는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전북 순창에서 체포돼 광주까지 끌려왔다가 일본군에게 처형당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천변의 건물은 일제때의 요정.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고 18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변사인

방안지도(備變司印 方眼地圖)’에 따르면 광주천을 전천(前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옛 사람들 특유의

간결한 문제로 “전천은 무등산에서 발원해 부동방면 앞을 흐른다”고 했다. 부동방면은 광주천 상류지역에 해당된다.

 전천이란 이름은 광주읍내 앞을 흐르는 개천이란 뜻이었을 것이다. 이 말에 대응하는 뜻으로 당시 광주읍내

뒤편을 따라 흘렀던 영산강은 후천(後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광주천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광주천은 1916년에 생겨났다.

그 이전에 광주천을 광주천이라 불렀다는 정황이나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대신에 옛 사람들은

같은 하천, 즉 광주천을 두고서도 동네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이를테면 발원지에서

지금의 원지교에 이르는 상류구간에서는 광주천을 용추천(龍湫川)·곽천(藿川)이라 했고 시내 중심부를 관통할 때도

 금동 사람들은 금계, 불로동 사람들은 조탄이나 전천, 또는 서천이라 했다. 그리고 북구 임동 앞을 지나면

폭이 넓다는 이유로 한강 또는 대강(大江)이라 했고 마지막으로 영산강과 합류할 즈음에는 혈포(穴浦)라고 했다.



 1916년 6월7일 `광주천’ 이름 출생신고

 이처럼 수천, 수백년 간 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광주천을 부르면서도 사람들은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른바 근대적인 관념에 생기면서 다양한 이름은 혼란, 번거로움, 불편과 동의어가 됐다.

 때마침 일제는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영산강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하천 12개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가 부딪친 문제 중 하나도 하천의 명칭에 관한 것이었다. 광주천처럼 전국의 크고 작은 하천들의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1914년 조선총독부는 하천 이름을 정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지침을 공표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하천명칭을 정하기 곤란할 때는 그 발원지가 되는 유명한 산이나 하천이 통과하는 큰 고을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정하도록 했다. 광주천은 바로 이 지침에 따라 정해진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광주천은 1916년 6월7일 공식적으로 출생신고를 하게 됐다. 동시에 조금은 무덤덤하고

단조롭기조차 한 이름이 생겨나기도 했던 것이다.

 

 

읍성 축조에 쓰인 돌

 

 

 

 

 

 

 

 

 

 

 

▲ 공북루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화루 모습.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여 년 즈음, 공북루 주변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북문을 나서 공북루에 이르는 길은 흙길이었다. 요즘 같이 메마른 계절이면 그 길바닥은 바위처럼 단단해졌고

바람이 빗질 하듯 휩쓸고 지날 때면 흙먼지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리고 이런 길을 따라 자그마한 초가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고, 이들 초가집들이 울타리 삼아 쌓은 돌담들이 길의 형상을 더욱 또렷하게 그려보였다.

 또한 길섶 중간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초병들처럼 지키고 있었다. 공북루 바로 안쪽에도 제법 큰 고목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물론 누문 밖 빼곡하게 들어찬 ‘유림숲’과 견주면 조금은 초라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런

고목들과 돌담 덕분에 길섶 바깥의 너른 논밭들과 길은 확연하게 구분됐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북루를

통해 드나들었던 이 길을 당시엔 ‘북문밖거리’라 불렀을 것인데 오늘날 우리가 ‘충장로’라고 부르는 길의 일부가 그것이다.

 한편 실학자 유형원이 ‘동국여지지’에서 큰 길 가운데에 떡 버티고 섰다고 한 공북루(유형원의 표현대로 한다면 절양루)

는 당시 북문밖에서는 가장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측면 2칸이었던 이 누각에 오르면, 광주천과

그 주변의 들녘이 한 눈에 굽어보일 만큼 높았고 온통 편평한 들녘 위에 산처럼 우뚝 솟아 더욱 도드라져

보였을 것임에 분명했다. 이런 공북루는 20세기 초엽까지도 이 일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였다. 1900년대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라는 사람이 광주를 답사하며 이 누문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가 이 누문 위에서 북문 쪽을

향해 촬영한 사진이 그의 책 ‘조선기행록’에 실려 있는데, 우리가 공북루와 북문 사이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 찍은 사진 덕분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공북루를 북문 위에 있었던 또 다른 누각, 즉 북문루와 왕왕 혼동하여 북문루를 누문이라 칭하기도 하고,

공북루를 성문이란 뜻으로 읍문(邑門)이라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무렵 일본인들이 ‘광주의 읍문’이라 소개한 사진들이

과연 북문루와 공북루 가운데 어느 것을 촬영한 것인지 헷갈리는 때가 많다. 이런 현상은 드물게,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광주 땅을 밟은 조선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구례군 운조루의 류씨 집안 사람인 유형업이 쓴 일기인 ‘기어(紀語)’ 1916년 10월5일자를 보면,

“북문이 곧 누문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광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공북루만을 누문이라 불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광주의 옛 누각들이 어떻게 시간의 저편 너머로 사라져갔는가를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더 주목된다.

 그 다음 날짜의 일기에서 유형업은 이런 요지의 기록을 남긴다. ‘북문루’는 마치 큰 산과 같이 웅장하고 수십 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독부가 이를 철거하려 했다. 그러자 광주군청에서 300냥을 지급하고 사들여 다른 빈터로 이축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여기서 말하는 ‘북문루’는 공북루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기를 쓸 무렵 일본인들은 광주읍내 일원의

상세한 지형도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지형도에 북문루를 비롯해 광주읍성의 네 성문 누각은 기록에 빠져 있다.

이미 철거됐기에 지도에 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북루만은 지금의 충장로5가와 독립로가 만나는 네거리 근처에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 유형업이 말한

누문이란 바로 이 공북루였을 것인데 광주가 초행길이었던 그는 이를 북문루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공북루를 다른 곳으로 이설했다면 그 누각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광주의 읍성 등이 철거된 시점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기록이 없지만 황성신문 1910년 1월23일자에는 광주군 성벽과 문루를 철거한 뒤에 거기서 나온 토목재를

 재활용하겠다고 전라남도 관찰사가 중앙부처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읍성의 네 성루는

이 무렵에 완전히 제 모습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형업이 북문루로 착각하긴 했으나 공북루는 성루들과는 다른 운명을 겪었다. 과연 공북루는 어디로

이설돼 어떻게 쓰인 것일까? 1920년대에 광주에는 북사정(北射亭)이란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지역 유지들이

 북문밖 주민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설립할 때 회합장소로 이용됐다면서 당시 신문에 잠깐 등장한다.

 그런데 이 건물을 일러 북사정이라 한 것은 오랜 생활 관습상 옛 북문밖 일대에 있었던 것에서 붙여진 것인데

 동시에 그 반대편인 남문밖, 지금의 조선대 장례예식장 일대에 남사정(南射亭)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부른

이름이기도 했다. 필자 생각에 유형업이 다른 곳으로 이설됐다고 말한 공북루는 이 시기에 북사정으로 사용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위치에 대해 1960년 대에 발간된 ‘광주시사’는 비록 전해지는 말이란 전제를 깔며 북사정이

광주구역 일대인 대인동에 있었다고 했다.

 물론 북사정의 위치나, 북사정이 본디 공북루를 해체 복원했던 것이라는 주장 등은 명확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는

공북루의 역사에 수많은 빈칸이 있고 이런 빈칸을 당분간은 사실과 추정, 그리고 정황 등을 통해 보충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공북루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 충장치안센터 앞 북문터.

 

 충장로는 아주 오래된 길이다. 금남로는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동안에 새로 닦인 도로인데 비해

충장로는 최소한 조선시대부터 줄곧 존재했던 길이었다. 그런데 충장로라는 이름은 해방 후에 쓰인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일제강점이라는 시대상황 때문에 혼마치, 즉 본정(本町)이라 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충장로1가(街), 2가처럼

가로를 구획하는 것도 일제 때 본정1정목(丁目), 2정목 하는 식으로 불렀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떻든 충장로란 이름이 아주 최근에 생긴 것이라면, 그리고 그에 앞서 본정이라 부르기 전에는 이 길에는 따로

이름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제 때만 해도 본정이란 말과 함께 광주 사람들은 광주우체국 앞

네 갈래로 뻗어나가는 길을 일러 각각 동문거리, 남문거리, 서문거리, 북문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그 가운데 북문거리가 바로 지금의 충장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금방 알아차렸겠지만 이런 이름들은 길의 끄트머리에 있는 각각의 성문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일례로 북문거리는 그 끄트머리, 엄밀하게 말해서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북쪽 성벽과 충장로가 만나는 지점인

지금의 충장치안센터(일명 충파) 앞에 북문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북문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기는 했지만 성문 위 누각 위에는 어엿하게 성문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름 하여 공북문(拱北門)이 그것이다.

 다른 성문들도 마찬가지여서 동문은 서원문(瑞元門), 남문은 진남문(鎭南門), 서문은 광리문(光利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 사대문인 홍인문(弘仁門), 숭례문(崇禮門), 돈의문(敦義門), 숙정문(肅靖門)처럼

이것이 광주 사대문의 정식명칭이었다.

 이들 성문의 명칭은 아주 심사숙고하게 지었던 듯하다. 공북문은 분명 이 문을 통해 왕도인 한양과 연결돼 있었던 탓에

군왕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이렇게 지은 듯하다. 북문 밖을 나서 지금의 광주일고 근처에 있었던

누각을 일러 다시 공북루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남문은 오랜 걱정거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남문의 정식이름에 사용된 ‘진남’이란 글자, 즉

남쪽을 수호한다는 것은 일찍이 왜구로부터 고통받았던 상흔이라 할 만하다. 사실 광주 중심부에 처음 성을 쌓게 된

동기도 고려말엽 적어도 네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받았던 것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 지

지금 학동의 전남대 의과대학 교정에 있는 느티나무 옆 비석을 오랫동안 진남비(鎭南碑)로 불렀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동문을 서원문, 서문을 광리문이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필자는 서원문이 동쪽에 위치한

성문이었으므로 옛 사람들의 동쪽에 대한 관념을 유추해 상서로운 기운이 태동한다는 뜻으로, 광리문은 그 맞은편인

서쪽에 있었으므로 그 동쪽의 기운을 받아 이롭게 되었으면 하다는 염원을 담고 있었을 것이라고 정말 막연하게

추측해 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추측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수많은 한자들 가운데 딱히 동문에 서원을, 서문에

광리란 글자를 택해 새긴 이유까지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옛 사람들은 그 글자들을

어디서 따왔고, 어떤 의도에서 그 글자들을 선택했던 것일까?

 ‘주역’이란 책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약간의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읽었을 법한 책이었다.

우리의 태극기에 그려진 네 괘(卦)도 여기서 나왔고,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같은 인물도 전투에 임박해 점을

쳐보고 이 주역에 맞춰 전투의 승패를 가늠해 봤다는 대목이 있을 정도로 당시엔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이 책은 “하늘, 곧 건(乾)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이야

문외한인 필자가 길게 사족을 붙일 수 없는 처지이지만 대체로 하늘은 모든 사물의 시작이며 그로부터 모든 것이

형통하고 이로우며 최종적으로 모든 사물이 그곳으로 갈무리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원형리정’은

조선시대엔 오상(五常)이란 성리학적 해석이나 오행설(五行說)과 어울려 다음과 같은 관념체계를 만들어냈다.


 생각해 보면, 광주의 동·서문도 이런 관념체계나 상징적 의미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먼저, 동문은

동쪽이란 방위에 걸맞은 주역의 ‘원’자를 취하고, 서문에는 서쪽에는 해당하는 ‘리’자를 취해 각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 광주의 별칭들을 수식어로 붙여 각각의 성문에 복합적인 의미를 갖도록 했던 것 같다.

즉, 서원문(瑞元門)은 동쪽에서 태동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받는 문인 동시에 서석(瑞石) 고을의 동문이란 의미를

지니게 했고, 광리문(光利門)은 만사가 형통하기를 바란다는 염원의 의미와 함께 광주 또는 광산(光山) 고을의

서문이란 뜻을 동시에 함축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추측이 맞는다면, 옛 사람들은 공공건축물의

이름 하나를 짓는데도 꽤나 세심한 것을 생각하고 공을 들였던 듯하다

 

 

 

임동 옛 광주농업고등학교 근방의 모습

 

 

 

유림숲(나고야성)

 

 자연과 사람이 동업해 이뤄낸 관방제림

 숲이 들어선 강둑은 17세기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1640년대 성이성이 담양부사를 지낼 시절에 담양 관아의

주관으로 제방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 담양 관아에서 제방을 고쳐짓고 숲을 재건했다. 1850년대 부사

홍종림이 주도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숲을 관방제림(官防堤林)이라 불렀다. 관아에서 제방을 쌓고 거둔

숲이란 뜻이었다. 오늘날 관방제림의 길이는 1.5킬로미터 남짓 되고 나무들은 푸조나무, 팽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등

활엽수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처럼 관방제림이 자태를 뽐낼 수 있었던 건 담양 사람들의 공이 컸다. 제아무리 큰 건축물이라도 몇 년

 혹은 몇 십 년이면 짓지만 숲은 다르다. 숲을 건사하고 둑을 고쳐짓는 일은 결코 한 두 해의 노력만으로 해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방제림이 그랬다. 최근의 일로는 1930년대에 둑을 고쳐지었다고 한다. 관방제림은 자연과

사람이 동업을 통해 이뤄낸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늘을 가릴만큼 빼곡했던 유림수

 광주에도 예전에 이런 숲이 있었다. 숲은 광주천에서 200미터 쯤 떨어진 북구 유동과 임동의 길가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충장로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해 무등경기장 쪽으로 길게 이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숲을

유림수(柳林藪)라 불렀다. 본디 처음엔 버드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얼마 뒤에

자리를 내줬고 그 자리엔 느티나무, 팽나무 같은 나무들이 뿌리를 내렸다.

 유림수도 본디 관방제림처럼 강물의 범람을 막고자 쌓은 야트막한 제방 위에 가꾼 숲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숲은 제방림 이상이었다. 숲은 하늘을 가릴 만큼 빼곡했고 길 위에 짙푸른 그늘을 드리웠다. 사람들은 그 길 위에

베푼 수백년 된 시간의 그늘을 축복으로 반겼고 사랑했다. 또한 이 숲이 광주고을의 좋은 기운을 틀어막은 방패인 양

여겼다. 가뭄이 들면 이 숲에 들어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광주에 유림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흐릿한 옛 사진으로만 유림수를 볼 뿐이다. 무엇이 담양과

광주 사이에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임동 옛 광주농업고등학교 자리에 서 있었던 비석

 

 

 

 

역시 광주농업고등학교 구령대 옆에 서 있었던 석불.

지금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뜨락에 서 있다.

 

 

 

 

사라지기 전의 태봉산

 

300년만에 드러난 태봉산

태봉산이 유명해진 것은 1928년 7월에 일어난 해프닝 때문이다. 평소 이 일대 주민들은 태봉산에 무덤을 쓰면

재앙이 든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들 농투성이였던 그들에게 재앙은 곧 가뭄을 의미했다.
그해 여름, 심한 가뭄이 들자 동네 아낙네들이 들고 일어났다. 각자 호미 한 자루씩을 차고 산으로 올라가 암장을 한

묘를 파헤쳤다. 그런데 얼마쯤 파자 쇳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커다란 돌항아리, 즉 태실이 나왔다. 또 태실을 열자 안에는

새하얀 백자항아리 등 몇 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태봉산의 유래를 글로 남긴 석판도 있었다.
석판에 적힌 글을 풀어보면 이렇다. “명나라 연호로 천계 4년 9월3일 지금의 임금께서 사내아이인 아기씨대군을 낳았는데

그 태를 이듬해 3월 이곳에 묻었노라.” 천계4년은 인조임금이 즉위한 2년째인 1624년이다.
어떻든 열혈아줌마들 덕에 태가 묻히고 300여 년만에 태봉산의 실체가 드러난 셈이었다. 대단한 발견치고는 좀 괴

상하고 싱겁다고 여기실 분도 있겠지만 사실 사람 사는 얘기가 다 이런 게 아니겠는가?

‘광주지도’엔 ‘고려왕자태실’


그렇다면 태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인조에겐 적어도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소현세자 둘째가 봉림대군, 즉 나중에 효종임금이 된 사람이다. 셋째가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태는 분명 인평대군의 것은 아니다. 인평대군은 1622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아기씨 대군은 인평의 동생인 용성대군일

가능성이 크다. 용성대군은 결혼도 하기 전에 죽었다. 자연히 후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광주지도’에 태봉산을 ‘

고려왕자태실’이라 했던 것처럼 태실 관리도 좀 부실했던 것 같다. 원래 태봉산에는 관례에 따라 그 유래를 적은

태실비가 있었다. 태봉산이 헐리기 전에 찍은 사진에도 산꼭대기에 지겟작대기마냥 좀 비딱하게 서 있는 뭔가가

보이는데 태실비였다. 하지만 꽤나 마모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한때 광주공립제일보통학교(현재의 서석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야마모토 데스타로란 사람이 1920·30년대 이것을 읽어보려 했는데 천계 몇년이란 글자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출산 7개월 뒤에 아기의 태를 묻은 게 개운치 않다. 1624년은 이괄의 날이 일어난 해다.

인조를 임금으로 만든 쿠데타를 이루고도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이괄이 난을 일으켜 떠들썩했던 해였으니

그랬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금남로가 생긴 유래와도 연관

결과론이긴 하나, 이괄은 이 태봉산말고 광주에 남긴 것이 또 있다. 이괄의 난은 두달만에 평정됐다. 그러나 인조가

충청도 공주까지 몽진을 갔을 만큼 당시엔 화급했던 사건이었다. 이 때 이괄의 반란군을 소탕해 인조의 구세주가 됐던

이가 광주 출신 정충신이었다. 이 일로 정충신은 군호(君號)를 받았는데 해방 후에 사람들은 그의 군호를 따서 광주의

아주 유명한 도로의 이름으로 삼았다. 정충신이 받은 군호는 금남군(錦南君)이었다.
태의 주인인 용성대군도 완전히 잊혀지진 않았다. 고종 때 용성대군의 후사를 잇는다며 느닷없이 인평대군의 아들

복평군을 용성의 양자로 들였다. 그런데 이 뜬금없는 조치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용성의 형 인평의 후손에 남연군이 있고, 남연군의 아들이 이하응, 곧 흥선대원군이고, 흥선의 아들이 다 알다시피 고종이다.
따라서 용성은 고종에게도 관련이 깊은 사람이었으니 인평대군 못지않게 떠받들어야 할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조치가 취해진 해가 1872년, 앞서 말한 ‘광주지도’가 그려진 해다.

태봉산이 도시에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여담이지만 1928년 직전에 태봉산에 무덤을 쓴 사람은 정말 운이 없었다. 아니면, 좀 모자랐던가?

원래 태를 묻는 산은 죽은 이의 무덤을 쓰는 곳이 아니다. 태는 산 자의 장소요, 무덤은 죽은 이의 안식처다.
‘세종실록’ 등에 나와 있듯 예로부터 왕실의 태는 주변 산줄기와 통하지 않는 봉우리를 골라 묻었다. 즉, 무덤을

써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결국 암장을 한 사람은 번지수를 잘못 알고 무덤을 썼다가, 달리 말해서 과욕을 부렸다가

화만 당했던 꼴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태봉산이 사라진 것을 애석해 한다. 하지만 누군가 태봉산이 아직

남아있었으면 좋은 점을 물으면 필자는 늘 추상적인 얘기만 했다. 하지만 지난 주말에 분명한 답 하나를 얻었다.

태봉산이 떡 버티고 서 있었더라면, 우리는 적어도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길에서 길을 잃는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광주 근 * 현대사 이야기 해설 대부분은 강사께서 "광주드림" 신문에 연재중인

"조광철의 광주 갈피갈피"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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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회에 이어 그리스와 인도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산책을 이어간 라의승 선생.

평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선곡으로 세계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2부에서는 광주읍성을 중심으로한 광주의 근 * 현대사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지금은 전혀 흔적을 찾아볼 길 없는 옛 건물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사연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이후의 광주 변천사에 대해선 내가 살아온  이력과 동 시대인지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는 내용,  슬라이드를 보면서 과거를 회고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격동의 세기와 질곡의 삶을 달려온 광주의 근 * 현대사.

 무등산에 기대어 살아온 빛고을 사람 모두는 가일층 통렬한 심정으로 저간의 역사를 반추해야 하리라.


 

 

 

 

 

 

 


Gheorghe Zamfir - Pluie D`Ete (여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