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산행·여행·풍경

논산 문화탐방 <2>

          ● 관촉사    ● 계백장군의 묘   ● 백제군사박물관

 

                                                                                                                                                                    2011. 11. 18

 관촉사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불상 중의 하나인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는 목조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다.

전형적인 산지가람으로 본래의 사역은 현재보다 더 넓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촉사 석문

968년(광종 19) 승려 혜명에 의해 조성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백호에서 발한 빛이 세상을 비추고

중국의 명승 지안대사가 그 빛을 찾아와 예불하면서 그 빛이 마치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사적기』에 따르면 1386년(우왕 12) 법당과 정문이 중건되었으며, 1581년(선조 14)에는 백지가,

1674년(현종 15)에는 지능이, 그리고 1735년(영조 11)에는 성능이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각 지역에 걸쳐 투박하지만 거대한 불상들이 많이 조성되었다.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에 성행한 거대 불상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현존 국내 최대의 고려시대 미륵보살상이다.

고려 전기인 968년(광종 19)에 제작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경기·충청 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에 거대 불상이 조성된 이유]

 

고려는 불교국가였던 만큼 많은 사찰이 조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찰 건축물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이다. 이들 사찰의 건축 양식은 모두 주심포 양식으로,

공포가 기둥 위에 하나씩 있다. 또 대부분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사찰 내에는 보통 탑이 세워졌는데, 고려시대의 탑은 통일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4각의 방형과 여러 층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형식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층수가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사찰에 있어 필수적인 불상도 많이 조성되었다. 철불이 등장하였고,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분포되었던 불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거대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고려조에 들어오면서 불상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소재 면에서 철불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철불은 9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찌하여 철로 만든 불상이 탄생한 것일까? 그것은 후삼국시대의 전란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후삼국시대에는 각 지역의 호족 세력들이 등장하여 각축을 벌이던 시기이다. 따라서 무기를 만드는 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이러한 시기에 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장하기 위해 철불을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자신들이 다른 지역 호족보다 훨씬 많은 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불상의 분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경주나 그 인근의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경상도·경기도·충청도·강원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신라시대의 신앙 경향이 귀족 중심적이었던 데 비해 고려시대에는 기층민까지 확산되었다는 것과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거대 석조불상의 제작이다. 이 점은 고려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남도 부여군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남도 당진군 안국사지 석불입상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작품의 수준이나 형식은 전대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선종(禪宗)의 유행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도 선사(禪師)의 언행을 따르고 사색하는 풍조가 일면서 불상 조각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불상 조각이 퇴보하였고 표현력도 떨어졌다.

불상 조각 쇠퇴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원의 지나친 비대함, 승려들의 국정에 대한 지나친 관여, 몽고 침입으로 인한 라마교의 전래 등이다.

이로 인해 불교 조각은 새로운 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고려시대 불상은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표현은 더욱 둔화되고 위축되었다.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신비성이나 통일신라시대에 보이는 이상을 향하는 내재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관촉사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18 은진현조에 보면 ‘반약산에 높이 50척의 석미륵이 있는데,

고려 광종(950~975년) 때 승려 혜명이 대석을 얻어서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조선 1744년(영조 20)의 사적비에 전하는데, 968년(광종 19) 반야산 기슭에서 거석을 얻어

승려 혜명이 970년(광종 21)에서 1006년(목종 9)까지 37년에 걸쳐 완성하였고, 큰 돌을 올려놓기 위해 옆에 토담을 쌓아서 세우게 된 내력과

조선조에 이르러 개수되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좀 더 고증이 있어야겠으나

대체로 이 불상이 광종대 즉, 10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높이는 54척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불상을 세운 것은 이 지역 민심을 무마함과 더불어

고려 조정의 위압적인 형상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양식을 보더라도 개태사의 좌협시보살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개태사 좌협시보살상의 투박하고 둔중한 형태에서 오는 불균형감, 전체적으로 신비함 없이 괴량감(塊量感)만을 강조한 양식,

세속적인 인간화가 더욱 짙고, 도식적이며 추상성까지도 보이는 불상의 특성들이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는 더욱 단순화 내지는

추상화되어 나타났다. 개태사와 마찬가지로 고려 왕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바로 관촉사의 창건과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이 개태사 창건의 의도와 맥을 같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술사가 유홍준은 그의 저서에서 속 시원한(?)한 해설을 내 놓는다. 

 

" 흔히 고려시대 불을 말할 때면 개성적이고, 파격적이고, 못생긴 불상이 많다는 얘기를 한다. 그것은 틀린말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반드시 전제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불교신앙의 연속성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고려불상이라고 할 때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만 말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에는 백제의 익산 미륵사, 틍일신라의 경주 석굴암 등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사찰과 불상 모두를 신앙의 대상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고전적이고 아카데믹한 형식의 불상은

삼국과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에 의존하고 그런 불교의 혜택이 없던 곳에 불상과 탑을 만들면서 불교문화의 폭을 넓혀갔던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고려시대 불교미술은 마치 도전적이고 지방적인 것만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또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상이 괴이하게 보이는 큰 요인은 머리 위의 보관(寶冠)이 허옆게 드러나 마치 얼굴이 거기까지 연장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데서 기인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 하얗고 거친 부분은 이마가 아니라 보관의 일부분으로 원래는 아름다운 청동 꽃장식이 있던

곳이니 두 손으로 위아래를 가리고 보면 그 얼굴이 새롭게 다가온다. 정확히 말해서 석조관음보살상 앞에 있는 관음전 안으로 들어가 예불을

올리는 자세로 앉아있으면 낮게 뚫린 창틀로 보살상의 얼굴이 많은 복을 줄 것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계백 장군 묘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계백이 전사하자 신라김유신계백의 시신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 부근의 백제 백성들이 계백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6년 구전되어 오던 무덤을 찾았으나 당시에는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부적면 사람들이 복묘(覆墓)하고 지석을 안치한 후 내광 회벽을 완봉하였고, 1976년 5월 19일 성분(成墳)하였다.

봉분은 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이다.


 

 

성왕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의자왕의 즉위 이래 백제고구려와, 신라

나라와 협력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결국 백제의 위기가 현실화되어, 660년(의자왕 20) 김유신(金庾信)소정방(蘇定方)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지금의 대전 동쪽 마도령백강(白江)으로 진격해 왔다.

이에 백제의 장군으로 554년에 관등이 달솔(達率)에 올랐던 계백은 결사대 5,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벌에 나가 50,000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황산벌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천호리(天護里)·연산리·표정리(表井里)·관동리(官洞里)·송정리(松亭里) 등을 포함하는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계백이 결사대 5,000명을 뽑으며 말하기를

 “한 나라 인력(人力)으로 당(唐)·신라의 대병(大兵)을 막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쾌(快)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식솔들을 다 죽이고 황산벌에 나와 세 곳에 진영을 마련하였다.

계백은 장차 신라군과 일전을 앞두고 사람들과 맹세하기를 “옛날 나라의 임금 구천은 5,000명으로 나라의 700,000명의 군사를 무찔렀다.

오늘 모두 다 분발하고 온 힘을 다해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이렇게 5,000명의 결사대는 신라군을 상대하여

매우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하여 네 차례나 신라군을 물리쳤으나 결국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계백의 달

                               - 윤순원-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아련한 등잔불 밑으로                                     다소곳이 아미 숙여오는 밤이면                                     하, 조신하여 하얀 보름달 같았을 백제의 여인                                     깊고 아득한 눈빛으로 裸身 슬어 내리며                                     굵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을 때마다                                     이 뜨거움은 무엇이란 말이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곰삭이며                                     젊은 계백은 되뇌었을 것이다.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 온 화랑의 勇과 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 있으랴                                     하늘까지 뻗친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 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

 

 

 

 

 

백제(百濟)고구려·신라와 함께 한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각축전을 전개한 고대국가의 하나로 부여 계통의 여러 이주민 세력이 한강 유역의

선주민과 결합하고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인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으며, 538년에는 다시 사비(부여)로 천도하여 공식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로 하였다. 이후 660년 신라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따라서 백제사의 시대 구분은

천도를 기준으로 한성시대(B.C. 18~A.D. 475), 웅진시대(475~538), 사비시대(538~660)로 구분하기도 한다.

충청남도 지역은 백제웅진천도와 사비천도로 백제 역사의 중심 지역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특히 천안·아산·연기 등과 더불어 논산 지역도

한성도읍기에서부터 사비도읍기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영향력 속에서 문화의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이 이루진 지역이었다.

최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조사·발굴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대단위의 백제 관련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산성·고분·생활유적 등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 [한성시대]

원삼국시대의 마한 54국 중 논산 지역을 관할한 소국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가장 가까운 진잠신흔국(臣釁國)이 위치하고 있어

이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논산 지역은 남부의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지리적 요충지인 관계로 한성시대의 백제

논산 지역에도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논산 지역에서 조사·발굴된 자료 가운데 재지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

 논산 모촌리 유적의 존재로 미루어 볼 때 한성시대의 백제논산 지역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문화적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웅진시대]

논산 지역이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 체제 하에 편입된 시기는 백제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자료 가운데 성동면 정지리원북리 등지에서 조사된 백제시대 유적에서 백제의 대표적인 중앙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삼족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재지세력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연산면 표정리 고분군양촌면 모촌리 고분군도 있다.

특히 모촌리의 백제고분군 내에서는 재지세력의 수장급 무덤에 해당하는 5호 수혈식 석곽묘의 한쪽에 백제 중앙양식의 병형토기와 개배 등이

부장되어 있는 모습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논산 지역이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지만

백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논산은 왕도인 공주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교통로였다.

또한 연산에서 양촌으로 연결되는 평야지대는 옥천이나 금산을 통해 신라와도 교류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과 왕도였던 공주와의 근접성으로 미루어 논산일대는 백제의 직접통치 하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웅진시대에 논산 지역은 중앙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의해 다스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사비시대]

백제사에 있어서 논산이 그 존재를 분명하게 나타낸 시기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이다. 사비천도로 인하여 논산 지역은 백제신라 진출뿐만 아니라

신라백제 진출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따라서 논산에는 백제 지방 통치 체제인 방군성제의 5방성 가운데 하나인

동방성(득안성)을 비롯한 왕도의 동쪽 방비를 위한 백령성, 신흥리 산성, 황화산성, 모촌리 산성, 청동리 산성 등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으며

이들 산성은 사비천도 이후 논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시대 논산 지역은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행정 단위가 언제부터 성립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대개 지방 통치 체제가 새롭게 정비되는 사비기로 판단된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나타난 백제시대 논산 지역과 관련된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남부 지역은 덕근군, 동부 지역은 황등야산군, 북부 지역은 웅진열야산현에 편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덕근군완산에 소속된 군이었으며, 은진면 일대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익산완주의 일부도 포함되었다.

황등야산군의 중심은 연산 지역이었으며 대전금산의 일부가 동일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열야산현노성면 일대로 비정되는데 공주의 직할 지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록을 통해 볼 때 현재의 논산 지역은

덕근군황등야산군 등 2개의 군과 웅진 열야산현의 일부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비시대 논산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고고 자료로는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이 있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논산 지역에서는 재지세력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수혈식 석곽묘가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육곡리 고분군에서는

은제화형관식이 출토되어 백제의 중앙관제에 편제된 관료계층의 존재가 확인된다.

고분의 형식도 백제 중앙에서 사용된 고임식의 횡혈식 석실분일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도 모두 중앙의 것에 해당된다.

특히 은제관식은 당시 관제규정에 의해 1품인 좌평부터 6품인 나솔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층만 착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육곡리 고분군은 중앙관제에 편제된 고위 귀족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논산 지역이 중앙의 직접 지배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사에서 논산이 특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백제 역사상 최대의 격전이자 국운을 걸었던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도성 사비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전선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백제는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황산벌 전투와 관련해서는 3영(三營)의 설치 지점과 전투 지역의 위치,

계백의 충의정신 등에 대한 검토가 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전투 지역이 논산 연산 일대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현재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던 논산 일대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설화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국가 백제논산 지역과의 관계는 백제의 태동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초기에는 논산 지역이 배후 지역으로 존재했으나 백제의 팽창과 더불어 중요 지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웅진천도를 계기로 백제의 최고의 요충지의 하나가 되었다.

사비천도로부터 황산벌 전투에 이르기까지 신라를 비롯한 남부 지역과의 교통로적 입지가 강조되면서,

논산 지역은 백제문화의 진정한 터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나무와 매를 배경으로 바위에 앉은 이상 장군을 그린 초상이다.

손에는 등채를 들고 허리엔 장도를 매달았는데 초상화로는 특이한 형태이다.

화가인 청담이 누구인지는확실하지 않지만 세밀한 표현이 돋보인다.

  

  1750년 충훈부에서 제작한 '분무공신화상첩'을 바탕으로 옮겨 그린 초상화이다.

 

 

언월도

길이 193cm, 너비 10cm  

 

 

 

 

 

 

 

 

 

 

 

 

  

 

 

 

  

 

 

* 논산 문화탐방 1, 2부 해설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의 내용을  참조한 것임을 밝힌다.

 

 

 

 

*********************************************

 

 

 

 

장성 문화원 초청으로 충남 논산 일원의 문화탐방에 나서게 되었다.

아마도 일행 중 내가 가장 막내인 듯 싶다.

 

돈암서원에서의 일례.

예의 어길가나 대동소이한 해설사의 천편일률적인 앵무새 해설에

듣는이들이 지겨울 즈음.

 

한참을 듣고 있던 필암서원 집강 노강 박래호 선생께서

해설사의 양해를 얻어 마이크를 넘겨 받는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 등의 이런 저런 비사들을

한학을 해오신 이력 답게 해박하게 풀어놓으시는데....

 

 

 

해설사 왈,

.

.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 모두 저로선 정말 처음 듣는 내용이네요. !@#$%^&*."

 

 

 

 

 

 

 

 

 

 

 

'자연 > 산행·여행·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춘한담(新春閑談)  (0) 2012.04.03
첫눈이 내리는데...  (0) 2011.12.09
논산 문화탐방 <1>  (0) 2011.11.19
두륜산 만추는 바다를 건너고  (0) 2011.11.16
을씨년스런 날의 소묘  (0) 20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