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탑산사 주차장 / 구룡봉 / 환희대 / 연대봉 / 거북바위 / 포봉 / 탑산사 주차장(원점회귀)
일시 : 2011. 10. 11 (금요일)
탑산사 오름길에 널려있는 돌탑군
산자락에서 불쏙 마주친 첫번째 토굴
두번째로 마주친 또 다른 토굴
토굴 입구를 외로히 지키고 선 가을 야생화
장대한 탑산사지 석축이 오름길을 가로 막는다.
석축 위로 올라서자니 탑산사 중창불사가 한창이었다.
탑산사 하경
복원 불사 현장을 지키는 도성 스님으로 부터 자상한 안내를 받는다.
/아래는 신문에 실렸던 기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호남의 5대 명산인 천관산 중턱 6백미터 고지에 있는 탑산사는 지금도 옛 사지의 흔적이 뚜렷하다.
암자터에 주춧돌이 괴여 있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도 널려 있으며, 근처에는 아쇼카왕 탑으로 알려진 바위와
의상대사등 고승들이 수양한 선방터가 남아있다. 주요 유물로는 보물 제88호로 지정된 '탑산사 동종'과
지방문화재 '탑산사 석등', 고려대장도감에 새긴 '반야심경 경판' 등이 있다.
전남 장흥 천관산 탑산사(주지 도성스님)가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곳이라는 문헌 근거가 제시돼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이 학술적으로 인정될 경우 한국불교사는 5백년 이상 앞당겨지게 된다.
국내 각종 기록 인증 민간법인인 한국기록원은 최근 동문선(東文選)의 '천관산기(天冠山記)'와 보물 제523호
'석보상절(釋譜詳節) 제23권, 24권'의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탑산사 큰절이 한국 불교 첫 도래지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석보상절'에는 인도의 전법왕인 아쇼카왕(阿育王,재위 BC268~232)은 '부처님 사리를 금, 은, 유리 등으로 만든 통과
병 8만4000개에 담아 8만4000탑을 세우니 중국에는 19개이고 우리나라에는 전라도의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이 탑이 있어 영험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는 것.
여기에는 또‘아쇼카왕이 탑을 세운 것이 려왕 마흔여섯째 해인 무진년(BC 23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불교와 부처님사리의 전래시기는 5백년 이상 당겨진다.
우리나라 불교는 영광 법성포나 경남 김해 등 남해안으로 들어왔다는 구전설화는 많았지만
명확한 문헌기록이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탑산사 큰절 주지 도성스님은
"탑산사의 이름도 아육왕 탑의 동편에 있다고 해서 얻어졌다"며 "불교 전성기 천관산에 89암자가 있었는데
탑산사는 89암자를 이끌었던 으뜸 사찰이었다"고 말했다.//
복원중인 탑산사 뒷편을 기어오르는 거북바위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연원은 크게 북방전래설과 남방전래설로 나뉜다.
문헌에 근거한 북방전래설은 불교가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고구려에 전해졌다는 주장이다.
고구려 불교사 특징은 전래된 시점과 국가 공인된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시점을 대략 BC 1세기쯤으로 잡는다면 고구려의 실제 민간신앙 차원에서는
공인 시점보다 더 일찍 전래되었다고 추정 가능하다.
남방전래설은 이 땅의 불교가 중국이 아니라 인도에서 곧바로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아직 역사적 고증은 미약하지만 그 경로는 크게 가야설, 제주도설, 법성포설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가장 알려진 가야설은 AD 1세기 경 인도 북부 아유타국 공주가 부처님을 모시고 배로 가야국에 도착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허황옥)가 되며 불교가 전래됐다는 주장이다.
가야국의 수도였던 경남 김해의 은하사, 지리산의 칠불암 등의 창건 설화가 근거다.
제주도설은 한라산 영실의 존자암이 부처님 당시 부처님 제자가 와서 포교한 곳이라고 하는데
역사적 신빙성 보다는 설화적 측면이 강하다.
세번째는 백제 침류왕 1년(서기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불갑사를 창건했다는 주장이다.
현재 법성포에서는 매년 이를 봉축하는 대법회가 봉행되고 있다.
문헌적 근거를 가진 탑산사 첫 도래설이 제기됨에 따라
이 땅의 불교 기원지를 둘러싼 활발한 논의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탑산사 복원 현장 하경
탑산사 뒷편을 오르다 보면 구룡봉 아랫쪽에 아육왕탑(阿育王塔)이 서있다.
아육왕은 인도 아소카(Asoka)왕을 말하며 인도 불교성지 곳곳에 석주(石柱)를 세웠다.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아소카왕석주는 인도 국가 문장(紋章)으로까지 쓰인다고.
이 곳 장흥 관산 출신 존재 위백규 선생이 쓴 「지제지」에는 아육왕탑에 얽힌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조선 선조때 아육왕탑 아래에는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이곳에서 여러 선비가 수학을 하고 있는데,
그 중 위정훈과 선세징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위정훈을 찾아와 자신이 기거하는 불영대라는 암자가 좋으니
구경을 가자고 했다. 그 중을 따라 암자에 가니, 다른 중은 없고 그 중 하나만 극진히 대우를 했다.
새벽 삼경이 되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 들어와 말하기를 '아육왕탑이 무너져 의상암에 있던 모든 선비들은 다 죽었다'고 했다.
위정훈이 놀라 그 중에 친한 친구인 손세징 또한 죽었느냐고 묻자 중은 '학덕이 있고 청빈한 선비는 죽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의상암에 가보니 중이 말한 데로 아육왕탑이 무너져 의상암을 덮쳤고
다른 선비는 다 죽고 오직 손세징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손세징의 말인 즉,
갑자기 밖에서 '급히 나오라'는 세 번의 외침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아육왕탑이 무너졌다는 것.
이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그 중이 산신령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 글에 나오는 의상암(義相庵)지.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이기(異氣)가 있어 연기와 같은 하얀 것이 끼었고
때때로 신선의 음악이 들려왔다고.
조선 선조 때 선세징, 위정훈 등이 이 곳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의상암지에 서 있는 탑산사지 석등 (長興 塔山寺址 石燈)
문화재 : 전남 문화재자료 196호
이 석등은 현재 앙연석(仰蓮石)과 화사석(火舍石)이 유실된 상태여서 전체의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하단에 복연(伏蓮)의 8엽을 장식하고 있는 연화문의 양식과 옥개석 윗면에 나타난 밋밋한 곡선등에서
어느 정도 전체의 외모와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돌의 재질은 천관산 북쪽에 있는 천관사 석등(지방유형 134호)과
같은 것이나 그 양식면에서는 약간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즉 천관사 석등은 보림사 석등과 같은 계통으로
4각방형의 하대석과 그 위로 8각의 중석과 원형의 복연석이 이어지는, 이를테면 우리나라 전형적인 석등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탑산사지 석등은 4각방형 하대석 위에 8각의 중석을 생략한 채 바로 8엽의 복연이 한돌로
연결되고 있으며 그위로 다시 8각의 간석(竿石)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합천 백암리 석등(보물 381호), 실상사 백장암 석등(보물 40호), 충남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 운문사 금당앞 석등(보물 193호)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천관산 일대에 통일신라 9세기에 접근하고 있는 불교유적의 예는 천관사 3층석탑 및 석등을 꼽을 수 있는데, 아마 이 석등 역시 위와같은 불교유적의 조성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해남 대둔사로 옮겨진 탑산사 동종(보물 88호)과 함께 옛 탑산사의 불교조형물을 규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초반으로 추정된다.
옆에서 본 아육왕탑(阿育王塔)
위에서 본 아육왕탑(阿育王塔)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애당초는 5층이었다고.
삼족당 위세보(1669~1707)는 탑산사에서 머물며 아래의 시를 남겼다
구룡봉(九龍峯)
壁立層巖入太淸
암벽은 층층이 푸른 하늘로 솟아 있고
九龍潛處玉潭靑
아홉 용이 숨어든 물이 옥처럼 푸르네
鶴生寥亮來何遠
학의 맑은 울음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風雷時作絶頂來
이는 바다 너머 삼신산에서 오는 거겠지
구룡봉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는 풍화혈
구룡봉에서의 하경
부처바위 능선
천관산의 기암 퍼레이드
억새밭에서 바라본 구룡봉
진죽봉(鎭竹峯)
환희대
환희대에서 조망한 지장봉 능선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연대봉
하산 능선
정남진과 보성만
당겨본 정남진 일대인데 날씨가 워낙 흐려서리...
돌아본 연대봉
산비장이
용담
산부추
불영봉 일대의 기암
거북바위
왼편 포봉의 정상의 바위에도 풍화혈이 보인다.
멀리 복원중인 탑산사 일대를 당겨 보았으나 이 역시 흐릿하기만하다.
왼편은 영락없는 바다사자요, 오른편은 거대한 복어를 닮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바다사자가 복어의 젖을 빠는 형상....??
가까이서 본 거북바위 머리 부분.
천관추색
포봉 뒷편 폐사지에 나뒹구는 기와 파편
포봉(浦峯)
포봉의 사면
원점회귀 직전에 올려다본 구룡봉 일대
/원점회귀/
구룡봉을 향해 계곡을 오르는데 왼편으로 아무런 표지도 없는 희미한 길 하나가 보인다.
한참을 따라 올라가 보니 석축이 막아서고 그 위로 불쑥 모습을 보이는 토굴 하나.
돌담으로 둘러쳐진 잘 정비된 샘물 입구엔 출입문까지 달아 놓은 깔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수행자는 어디 가고 굳게 닫아건 출입문에선 전혀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토굴을 나와 산자락으로 가늘게 난 길을 따라 가니 또 하나의 기막힌 형세의 토굴이 나오는게 아닌가.
거대한 자연 바위 아래 절묘하게 들어선 모습인지라 흥미가 발동해 가까이 다가서는데
출입문 바로 옆 부직포 틈새로 엄지손가락만한 말벌이 쉴새없이 윙윙대며 드나드는 모습.
이크~~~ !! 가을 말벌에 쏘이면 바로 죽음. '용무불문' 즉각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다.
다시 산자락을 이어가 커다란 자연석 아래 불상을 모셔놓고 자물쇠까지 채워놓은
구룡바위로 오르는 정 코스 상에 위치한 반야굴과 마주친다.
한참을 올랐을까?
옛 천관사지 쪽에 전엔 볼 수 없었던 건물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당도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탑산사 복원 불사 현장이라.
그러고 보니 얼핏, 언젠가 탑산사가 한국불교 최초 태동지 였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두 동의 전각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 스님을 찾는다.
법호를 여쭈니 '도성'이라신다. 질문을 채 던지기도 전에
복원불사와 탑산사의 유래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폭포수 처럼 쏟아놓는 도성스님.
"스님 그렇다면 이 곳 산위의 탑산사와 저 아래 주차장의 '탑산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저 아래 탑산사는 절이 아니고 당집입니다. 조계종이란 팻말을 내걸고 있지만 그건 사깁니다."
"얼마 전 이 금방까지 올라와 굿을 하길래 혼찌검을 내 쫓아버렸습니다."
"판넬로 지은 건물만 보셔도 알 수 있잖습니까? 어디 조계종 절들이 저런 모습입디까?"
청화스님의 신도회장이었던 사람이 지은 건물로 그 사람은 승려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
지금은 그의 아들이 이어가고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그렇다면 내 그 짝퉁 탑산사에 들어가 보지 않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다.
스님께서 내 주신 "천관산 탑산사 중창불사 상량문"의 일부를 잠시 살펴 보기로 하자.
// 지제 또는 천관산이라 이름 함은 화엄경에 이르길 "동남방에 보살 주처가 있어 지제산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모든 보살들께서 머물렀고 현재는 천관보살이 있어 1천명의 보살을 권속으로 하여
항상 그 곳에서 설법을 하고 있다" 고 하였다.
이에 당 천보년간 중국과 인도의 성적을 첨예하며 심왕보살을 만나 지제산 영부를 지시받아
화엄경 80권을 지고 곽동산을 심방하여 천관보살에 예한 후, 이 곳에 돌아온 원표대덕의 수행지로
또한 의상대사의 수행처가 있어 이에 연유한다, 일부 유가의 기록에는 중국 도가의 기록을 우선하여
천관산을 곽동산으로 보고, 사계동천, 영은동천, 청학동천, 옥계동천, 연화동천, 당번동천,의
6개 동천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 중략 -
//많은 선객과 수좌들이 앞 다투어 천관산 골짜기를 차지하여 수행정진 하던 89암자가 위치하였다.
그 중 탑산사는 산내 으뜸사찰로 법량대사, 담조, 심일화상, 침굉선사 등 많은 고승대덕의 수행처가
되었던 도량이다. 그러나 조선새대 임진왜란을 거치고 1732년 큰 흉년이 들어 스님들이 수행을 못하게
되었는가 하면, 1745년 화재로 인하여 조그마한 암자로 중건 하였으나 그나마 일제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퇴락하여 절 이름까지도 잊어지게 된 도량을 1966년 월태화상께서 초막을 지어 향을 사루다가
1983년 최연각 보살이 코굴 움막을 갖추어 오늘까지 법등을 밝혀왔다.//
- 하략 -
'동국역경원'에서 편찬한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 1, 2, 3, 4권 합본 까지 내 주시며
탑산사의 유래와 역사를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바, 무식한 산적 주제에 그야말로 황송 그 자체라.
집에 돌아와 스님이 주신 "대수긴나라왕소문경' 제1권 구마라집(鳩摩羅什)을 펴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공(空) . 무상(無相). 무원(無願)등 삼매에 나아가고 매우 깊어 보기 어려운 법을 잘 가지며
잘 달려 나아가 해탈에 드시나니 해탈의 길을 잘 아시는 이께 머리 조아립니다.
세존께서는 인연의 법을 잘 아시고 언제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잘 끊으며
인연과 없의 과보를 진실로 말씀하시나니 나는 머리 조아려 세간을 보시는 이께 예배합니다.
오는 것도 없고 또 가는 것도 없으며 교만도 없고 온갖 법을 잘 관찰하되
꼭둑각시나 아지랑이나 물 속의 그림자와 같다고 보나니 좋은 법의 눈에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생(生)은 무생(無生)과 같아 전연 생(生)이 없으며
생(生)도 멸함도 또한 무멸(無滅)과 같으며 그 머무를 곳에 법다이 머무르나니
부처님은 이런 곳에 잘 머무르십니다.
하시는 그 말씀은 진실하시고 여여(如如)에 잘 머물러 움직이기 어려우며
금강산과 같은 몸 흔들림이 없나니 움직일 수 없는 이께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위에 나오는 예배 사항만 잘 실천해도
시쳇말로 극락행은 무난하리라는 생각인데....!!
수 없이 가을 천관산을 찾았지만 올 해의 억새가 가장 꽝인 것 같다.
도대체 다 피어난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난망한 상태.
환희대에 이르면 여인네 들이 내지르는 감탄사와 괴성으로 떠들썩 한 법인데,
올 핸 모두 다 그저 심드렁한 표정이요 별무감동이라.
그렇게 형편 무인지경인 천관산의 억새였건만, 돌아오는데 장장 6시간 씩이나 소요되었다?.
그것은 억새 구경만이 천관산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
기기묘묘한 암릉에 시선을 얹다 보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저만치 달아나고, 어느새 자연과의 합일에 이른 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경에 빠진 괜찮은 산적 하나가 탄생되는 순간일러니....
문득 남은 해를 가늠해 보니 까딱하다간 날 저물게 생겼다.
시월 오후 따가운 햇살이 퍼붓는 연대봉에서 달콤한 아이스케키를 하나 사서 입을 얼리고 내려온 하산길.
어라~~~!
복원불사 중인 탑산사의 거북이가 어느새 나를 앞질러 날머리쪽 능선상에 와 있는게 아닌가???.
오늘 천관산 억새 산행은 완벽한 불법(佛法) 순례였음을 깨닫게 해 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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