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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제1차 영호남선비문화교류 -제5편-

 

'2011 월봉서원과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

 

 

"제1차 영호남 선비문화 교류 답사"

- 제4편 -

 

    ○ 주최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욱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재)고봉학술원, 행주 기씨 문헌공 종중, 광곡(너브실)마을 주민 일동,

산문화원, 광주향교 여성유도회, 광산구 문화유산해설사회

 

 

○ 돌째날 : 2011. 6. 4 

○ 주제 : 천 년 古都 경주를 가다. 

 

답사지 : 양산 통도사 / 청도 운문사

 

 

 

 

 

통도사에 이르는 소나무 숲길

 

 

 

 

영축총림

 
영축산 통도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절이다.  
부처가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 해서 통도사라 이름했다고 일컬어진다.
영축산이란 본래 부처님 재세시(在世時)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그리드라(Gdhra : 鷲, 독수리)라는 산(봉우리)이다.

 

 

 

 

부도원의 승탑 행렬

 

통도사 창건 설화를 살펴 보기로 하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그러던 어느 날  꿈에 훌륭하게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주었다. "동국에 부처님을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스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하여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율사는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축산에 이르러 보니 큰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이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자장율사스님께서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바로 통도사이다.

 

 

 

 

강기욱 선생님과 연락이 닿은 문화유산해설사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신라 · 고려시대를 거치며 왕실과 대중의 비호속에 한국 불교의 구심처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시대의 억불과 임진왜란에도 굴하지 않고 중창을 통하여 면면히 법등(法燈)을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16개 대표사찰가운데 경상남도의 대본산(大本山)이 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本寺)로 국내

최대의 사찰을 형성하여 구하(九河) · 경봉(鏡峰)대선사와 같은 고승이 계셨으며, 이후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9대

종정이신 월하대종사(月下大宗師)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장율사스님의 계율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

(靈鷲叢林) 통도사는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통도사의 사격(寺格)은 신라시대에는 계율 근본도량이 되어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었으며, 또 고려를 지나

조선초기에는 나라에서 각 사찰을 기도장소로 지정할 때 수위사찰(首位寺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정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전국 16개 수사찰(首寺刹)을 정할 당시 경상남도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고, 또 전국에 본산을 정할 때에도 선교양종(禪敎兩宗) 대 본산(本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불보사찰

(佛寶寺刹)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자장율사스님의 불사리 봉안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

교구 본사로 경남불교를 이끌고 있으며 자장율사스님의 창사(創寺)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통도사 홈피에서 발췌한 내용/

 

 

 

 

수녀님들께서 사찰 견학에 나서신 모양이다.

일주문에 내 걸린 플래카드의 내용이 영 마뜩찮다는 느낌인데 그것은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저런 내용을 내건 대중이나,  내 걸도록 내버려 둔 사찰측이나...

명색 '불보사찰'을 자임하는 통도사 일진데 말이다.

 

 

 

 

임준성 교수님과 쪼깐이 보살님의 미소.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그려~~~ ^^*

 

 

 

 

극락보전


 

 

반야용선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떠나는

극락보전 후면 벽화

/넷상에서 구한 자료/

 

 

 

 

용화전 미륵불

 

 

 

용화전 미륵불 후불탱화
조선(1798年), 견본채색(絹本彩色), 183 × 172cm

/넷상에서 구한 자료/


 

 

 

통도사 봉발탑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가운데·윗부분으로

구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통도사 석등

 

관음전 전방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높이는 약 300㎝로서 그 조성수법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여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가운데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 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고,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으며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양식뿐만 아니라 화문(花紋)의 조식(彫飾)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전체 높이는 약 350cm이고,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37조도품(助道品) /왼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37가지의 방법을 말합니다.

즉 4염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역(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수행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도사 해장보각 호랑이 벽화

 

 

 

 

장경각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 창건의 근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세기 중반에 처음 축조되었고,

그 뒤 일곱 번에 걸친 수리가 있어서 지금은 원래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은

석종형의 부도, 각 상들의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문헌 기록상 가장 오래된 계단이며, 같은 성격을 띤 금산사나 용연사의 것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조형미도 뛰어

나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계단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것이다. 계단 주변에는 석문(石門)과 석조 난간을

둘러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4천왕의 입상이 있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계단의 하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새겨 놓았고, 상층 면석에는 불보살

및 비천상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하층보다는 상층의 양식이 유연한 수법이 월등하다. 두 손은 무기 대신에 천의

(天衣) 자락을 쥐고 있는 듯한 신장(神將)의 퉁방울눈이 인상적이다. 계단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형 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 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안양암

 

 통도사8경 가운데 하나인 안양동대(安養東臺)에 위치한 암자이다. 1295년(고려 충렬왕 21) 찬인대사

(贊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1865년(고종 2) 우담대사(雨潭大師)가 중창하였다. 그 후 1968년

우송화상(友松和尙)이 중수하였다. 안양(安養)은 곧 극락세계를 뜻하므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하는 암자이다.

 

 

안양암에서 조망한 영축산

 

 

 

 

청도 운문사 솔밭길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9.4m,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법륜상이 경내에 놓였다.

 

 

 

 

비로자나불

 

 

 

 

운문사 동 서 삼층 석탑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각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이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에 새겨진 부조

 

 

 

 

극락교

 

 

 

예전 운문사 은광스님의 안내로 잡인 절대 출입금지 지역인 위 극락교를 건너

보리수 향기 가득한 비구니 스님들의 청정지역을에 들어가본 적이 있었다.

학장스님의 처소가 있는 지역  칼같은 정정적이 흐르는 茶室 내부.

 

 

 

 

백작약이 한창 흐드러졌다.

 

 

 

 

운문사 석조 석가여래좌상

 

살상투가 뚜렷하며,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법의가 수직으로 무겁게 내려져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6각 불상 받침대좌의 특이한 형태는 다소 딱딱한 느낌을 보여준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으로서 다소 어색한 감이 있고 결가부좌한 양발 사이에는 부채꼴의 주름이 잡혀 있다.

 이 불상은 부피감이 없고 상 자체가 나약하고 위축된 점, 조각에서 형시고하가 많이 진전된 점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운문사 사천왕 석주

 

 

 

 

이 상천왕 돌기둥은 현재 작압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 곳에 세워진 탑신 4면이나 안의 벽면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삼고저를 든 중장천왕, 탑을 든 다문천왕,

 불꽃을 든 광목천왕, 칼을 든 지국천왕 등은 천의 자락이 휘날리는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선 자세이다.

 이들 사천왕상의 높이를 보면 제1 돌기둥은 114cm, 제2 돌기둥은 118cm, 제 3 돌기둥은 128cm, 제4 돌기둥은 122cm이다.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는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가냘픈 체구, 부드러운 인상, 갑옷의 굵은 띠주름 등으로 미루어

보다 형식미가 진전되었던 신라 말 후삼국 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운문사 만세루

 

 

 

호거산 운문사.

 

만세루 용마루 뒷편에 보이는 산이 바로 호거산이다.

 

 

 

 

돌담길을 따라 운문사를 나서는 것으로

"영호남선비문화교류"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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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에 나서는 첫 날.

리무진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강기욱 선생께서 내 놓은 일성인 즉,

 

"우리네 DNA 는 불교문화를 배제하곤 도대체 얘기가 불가능 합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사이 답사할 곳의 심도있는 정보는 물론,

선생께서 깨우치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경에서만 터득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를

특유의 실눈 웃음에다 재빠른 언변을 동원 거침없이 설파해 가신다.

 

 들려 주신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무릎을 치지 않고 배길 수 없었음은 물론이요,

무지렁이의 우두머리 격인 나로서는 참으로 복인이라는 생각을 내내 떨칠 수가 없었다.

 

 일만권의 서적을 독파하셨다는 김준성 교수의 수준 높은 공력의 세례.

 수 없는 날 들 우리 문화유산을 답사해 오신 김정현 선생의 해박한 불교사 해설.

판소리에다 가요까지 넘나들며 시대의 변천사를 유장하게 엮어 주신 의회 의원님.

 

비록 입을 꼭 다물고 경청에 그치고는 있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공력의 소유자임이 한 눈에 드러나는 여러 선생님 들.

답사를 주관한 교육문화공동체 "결" 그리고 행주기씨 문중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한 분, 한 분 모두가 나의 스승이자, 세삼 무지렁이 임을 재 확인 시켜준 거울이었는 사실. 

 

의관을 정제 했대서 죄 선비이며,

열 수레 분량의 문자를 머리에 집어 넣었다고 다 선비는 아닐 터.

 

우리가 추앙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학문은 물론이요, 모두다 한결같이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 닦았기에 시공간을 건너 오늘날 까지 큰 빛을 발하고 있었음을

금번 "영호남선비문화교류" 여행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