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월봉서원과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
"제1차 영호남 선비문화 교류 답사"
- 제3편 -
○ 주최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욱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재)고봉학술원, 행주 기씨 문헌공 종중, 광곡(너브실)마을 주민 일동,
광산문화원, 광주향교 여성유도회, 광산구 문화유산해설사회
○ 돌째날 : 2011. 6. 4
○ 주제 : 천 년 古都 경주를 가다.
답사지 : 문무대왕수중릉 / 감은사지 / 장항리사지 / 신라인물관 / 천도교발상지
무겁게 가라앉은 감포 앞 바다.
한 무속인이 몇가지 제물을 진설하고 경전을 넘겨가며 열심히 주문을 외는 가운데
주위를 둘러 보니 밤새 태웠던 향과 초 그리고 쐬줏병의 행렬만이....
문무대왕 수중릉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이 돌아가니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 대석상(東海口 大石上/동해대왕암)에 장사했다.
속전(俗傳)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여 그 돌을 대왕암이라 한다.
왕의 가르침에 따라 가로되, (중략) 임종 후 10일에는 서국(印度)식에 의하여 불로 소장(燒葬)하였다".
보통의 우리네가 아는 문무대왕 수중릉은 바로 이곳 감포 앞 바다의 대왕암이다.
그런데 울산에도 대왕암이 하나 더 있다. 문제는 현지인 중에 진짜 문무대왕 수중릉은 바로 울산 대왕암이
맞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까?
아래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울산동구향토사연구회는 여러가지 정황 증거를 제시하며 울산동구대왕암이 진짜 문무대왕릉이 맞다는 입장이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자신을 화장해 (서라벌) 동쪽 바닷가에 수장해 나라를 지키도록 하라는 유언이 기록돼 있다.
기록으로는 문무왕릉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경주 감포의 대왕암이 문무대왕릉 사적으로 지정되던 1967년 무렵,
울산의 역사학자인 이유수 선생은 울산대왕암이 문무왕의 왕비 수중릉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역사서를 저술했다.
지구 공전·달의 만월 주기 완벽하게 일치
태극 원리도 주자 태극보다 400여년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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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에 있는 태극 장대석은 사찰에 존재하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과학적인 유물일 뿐 아니라
해와 달의 운행을 계산하는 고도의 천문학적 상징체계임이 밝혀졌다.
수학자인 백인수 부산외대 정보수리학과 교수와 김태식 경주대 군정보학과 교수는 최근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의 수리천문학적 의미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1권 제3호)란 논문에서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은 7세기 신라인들의 응집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오래된 천문교과서”라며
“사찰에서 책력 및 위도와 관련된 천문학적인 도형을 가지고 있는 석조물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라고 밝혔다.
태극 장대석은 통일신라시대인 신문왕 2년(682년)에 건립된 감은사지 금당터 동편 및 서편에 자리 잡은 막대 형태의 기다란 돌이다.
여기에는 양각과 음각으로 이뤄진 이등변삼각형이 새겨져 있으며, 중앙의 태극 문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동안 큰 관심을 모아왔다.
그러나 이 삼각형과 태극 문양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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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백 교수와 김 교수는 태극 장대석에 대한 기존의 금석학적인 접근 틀에서 벗어나 수리고고학적 관점에서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그곳에 담긴 놀라운 과학적 사실을 규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동편은 해에 관한 장대석이고, 서편은 달에 관한 장대석이다.
서편 장대석을 분석할 경우<그림1> 왼편 서쪽 끝의 이등변삼각형(동지점)에서 출발해 7일 후 태극의 변화를 거쳐 거꾸로 서있는
이등변삼각형을 따라 동쪽 끝의 이등변삼각형 지점(하지점)에 15일 만에 도달한다.
그리고 동쪽 끝의 이등변삼각형 지점(하지점)에서 출발해 다시 왔던 지점을 바로 서있는 이등변 삼각형을 따라 7일 후 태극의 변화를 거쳐
거꾸로 선 이등변삼각형을 따라 서쪽 끝의 이등변 삼각형 지점(동지점)에 14.5일 만에 돌아온다.
이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만월주기(滿月週期)인 29.5일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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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동편 태극 장대석은 오른편 동쪽 끝의 이등변삼각형에서 동지가 시작되며, 동지에서 춘분까지(겨울: 7), 춘분에서 하지까지(봄: 8),
하지에서 추분까지(여름: 8), 추분에서 동지까지(가을: 7.5) 계산할 경우 7+8+8+7.5=30.5이다.
여기에 12(황도 12궁)를 곱하면 365일, 즉 지구 공전주기인 365일 5시간 48분 46초에 매우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그림2>
당시 신라인들은 만월주기와 지구의 공전주기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태극 장대석에 그려진 이등변삼각형의 꼭지각은 35.8°를 이루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 수치는 경주의 위도와 일치한다.
또 태극의 기하학적인 구조에도 놀라운 비밀이 담겨져 있다. 즉 이곳 태극에는 황도(黃道) 경사 각도인 23.5°가 내재돼 있으며,
비대칭성을 이용해 백도(白道)의 경사각과 유사한 경사각(18.5°)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BAF=∠ABF=(경주의 위도)+(황도경사각)=35.8°+23.5°가 되는 F점을 잡고 선분 AB의 중점을 E라 두고,
다시 선분 EF의 중점을 원의 중심을 O라 한다. 이때 ∠FAC 및 ∠FBD는 90°에 대한 59.3°의 여각 30.7°이므로 경주의 동지고도와 일치한다. <그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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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는 당시에 날짜를 이용한 태양고도에서 자신의 위치가 속한 위도를 찾는 독해독법(讀海圖法)을 알고 있다는
증거라는 게 이들 교수의 설명이다.
또 위쪽의 뿔처럼 생긴 좌측 꼭지각 및 우측 꼭지각은 모두 경주의 위도 35.8°이며, 특히 ∠GBF는 지축경사 또는 황도경사인 23.5°이고
∠FAD(19.2°)는 백도경사인 18.5°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됐다.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은 주자학의 태극사상보다 400여년 앞서 태극의 원리뿐 아니라 황도와 백도의 경사각을 비롯한
천문학적인 이해까지도 담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백인수·김태식 교수는 “비록 오늘날 만파식적이나 진평왕 옥대라는 보물이 전해지지 않지만 감은사지 장대석은
그러한 보물에 못지않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이때부터 울산대왕암은 왕비의 릉으로 알려지며 점점 굳혀져 왔다.
하지만 이 저서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 울산 동구 출신이며 이 지역에 조선소가 들어설 때
자문 역할을 했던 김병희 박사(95)도 이곳이 왕비의 릉이 아니라 문무왕의 릉이라는 이론을 펴고 있다.
울산동구향토사연구회가 제시하는 증거 몇가지. 우선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된 문무왕의 비석 문헌을 든다.
비석 뒷면 비문에는 "경진에 수장하라"고 했는데 고래 '경'자와 나루 '진'자를 썼다.
문무왕과도 연관된 유물로, 정교한 누금기법 등 당대 최고의 기술과 노력으로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불교 공예품의 백미다.
울산에 있는 대표적 국보인 반구대암각화에 고래그림이 있는 등 울산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래도시로 알려져 왔고,
문무왕 비문에 있는 이 글이 울산의 문무왕릉이 맞다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
또 하나, 문무왕 당시 지리적 여건이다. 당시 서라벌과 울산대왕암은 말을 타면 하루 거리인데 반해
감포는 700미터가 넘는 토함산 자락이 가로막혀 3일이나 걸린 거리였다는 것.
경주와 감포간 직접도로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개통됐다.
또한 울산 경주를 오가는 강을 그 예로 든다. 경주의 입구인 입실에서 태화강에 이르는 동천강은 특이하게도
북쪽(입실)에서 남쪽(태화강)으로 흐르는데, 당시 경주에서 배를 타고 울산으로 왕래한 것이 그 증거라는 것.
또 입실에서 경주 사이에 난 남천강은 남(입실)에서 북(경주)으로 흐른다.
때문에 당시에는 두 강을 배로 왕복하며 경주와 울산을 오갔고, 이렇게 교통이 편리한 울산에 문무왕을
수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울산동구향토사연구회 정일호 사무국장은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도 울산대왕암을
조각 기법이나 여러 정황상 8세기를 대표하는 걸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댕방'이라 불렀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며 "댕방은 대왕바위를 줄여 부른 말이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 시대상으로 왕비의 릉을 수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한 울산대왕암이 왕비의 릉이라는
역사적 문헌이 아무것도 없다"며 "울산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확실하며 반드시 이를 바로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은사지
신라 때의 감은사 절터로 사적 제31호로 1963년 1월 21일 문화제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 우측, 길게 뉘여진 각주에 알 수 없는 태극문양이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 아래는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를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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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은 고도의 천문학 상징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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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백인수·김태식 교수 첫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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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22:39 입력 발행호수 : 1109 호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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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발견된 감은사지(感恩寺址) 서삼층석탑내유물(보물 제366호)인청동제사리기와 구조가 비슷하며, 바깥을 감싸고 있는 외함과
안쪽의 사리기, 그리고 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함의 네 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겼고 좌우에는 귀면화 모양을 새긴 고리가 배치되어 있다. 사리를 모셔 둔 내함은 기단부, 몸체,
천개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별도로 만든 사자가 있으며 기단면에는 안상(眼象) 모양의 장식을 크게 투조하였다. 투조된 내부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각각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몸체는 사리를 넣어둔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을
각 네구씩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기둥을 세워 천개를 받치고 있다.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은 높이가 3.65cm이며, 정교하게 금알갱이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 사리기 세트는 제작기법이나 유물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불교조각사와 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삼국유사』2,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의 기록과 관련하여 제작연대(감은사의 낙성연대: 682년)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유물로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와 전각형 사리기인 점은 같지만, 제작기법, 세부문양, 조형물 등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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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366호
1959년 12월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 감은사(感恩寺)터에 있는 감은사(感恩寺)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이다. 사리를 모시기 위한 청동제사각감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이다. 사리기를 넣었던 사리감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발견 당시 몹시 부식된 상태였다. 사각형의 깊숙한 상자에 완만한 원뿔모양의 뚜껑이 있는 형태로, 전체 높이가 약 31㎝정도 된다. 사리감의 네 옆면에는 각각 사천왕상이 1구씩 새겨져 있고, 그 양 옆에는 각각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다. 주위는 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모두 동판에 따로 새겨 작은 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무늬로 가득 메운 가는 장식판을 이용해 단을 돌렸는데, 뚜껑의 둘레에도 마찬가지로 단을 돌렸다. 네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은 그 자세나 옷의 무늬가 중국 당나라의 조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앙 아시아의 조각상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청동으로 만든 사리기는 정사각형의 기단과 사리병을 모셔 둔 몸체, 그리고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주의 3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목조 건축물을 연상케 한다. 사리기의 기단과 몸체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그 윗부분인 보개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었다. 사리기의 기단은 안상을 새기고 신장상을 배치하였으며, 기둥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단의 맨 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그 안에 4개의 주악상과 4개 동자상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사리병은 고리가 달린 그릇모양의 외피속에 넣고, 그 위에는 수정으로 만든 보주를 올려 놓았다.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感恩寺)터에 있는 감은사(感恩寺)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로서, 청동으로 만든 직육면체의 상자(감)로 뚜껑이 덮혀있다. 청동사각감(靑銅四角龕)은 깊숙한 장방형 상자에 방추형(方錐形)뚜껑을 덮고 4귀에 발을 단 형태이다. 측면에는 각각 사천왕상(四天王像) 1구와 그 좌우 8능형의 바탕에 새겨진 수환(獸環) 상하, 즉 측면 가장자리에 초화형(草花形)이 장식되었다. 이들 장식은 모두 별도로 동판(銅板)에 새겨서 잔 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을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르 어자문(魚子文)으로 메운 가는 장식판으로 단을 돌렸다. 밑에는 ㄱ자형의 받침이 4귀에 붙어 있다. 뚜껑 둘레에는 몸뚱이 부분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과 같은 문양(文樣)의 장식판으로 단을 돌리고 다시 초화형(草花形)을 연속시킨 장식판이 대각선으로 十자형을 이루고 있다. 꼭대기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과 같은 정4각형 장식판을 덮고 중앙에 4능형 고리를 달았다. 여러 조각 가운데 사천왕상(四天王像)들은 모두 주상(鑄象)이며 제작 당시부터 일부 손상을 입은 흔적이 있다. 모두 몸에 화려한 갑주(甲)를 입었고 그 중 2구는 복부(腹部)에 사자형이 있다. 머리에는 원형 두광(頭光)이 있고 한 손은 허리에 대고 한 손에는 탑(塔)·보주(寶珠)·극(戟)·금강저(金剛杵)를 들었으며 발에는 소(牛)·주유(侏儒)가 있다. 이 사천왕상(四天王像)들의 자세·옷의 무늬 등은 중국 당대(當代)의 조상(彫像)에서 볼 수 있는 바이지만 표현 기법은 오히려 중앙 아시아의 조상과 상통하여 매우 주목된다(사천왕상(四天王像) 높이 21.6cm내외). 이 감(龕) 안에 사리기(舍利器)를 넣었는데 신개(身蓋)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신부(身部) 두면(頭面) 상부(上部)에 소형 자물쇠를 붙이고 비녀못을 꽂았다.
불교미술사 전공이신 김정현 선생의 현장 강의
장항리사지
절터에는 5층서탑인 서탑과 파괴된 동탑 그리고 석조불대좌(石造佛臺座)가 있다.
현재 땅위에 노출된 건물터는 금당(金堂)자리로 본다고.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절에 대한 기록이 없어 동네 이름을 따 장항리 서 오층석탑이라 부른다.
2층 기단에 9m높이의 5층 석탑으로 이 역시 도괴되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신라시대 석탑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큰 규모의 석탑으로 상륜(相輪) 부분에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하층기단에는 양쪽에 우주(隅柱)를 새기고, 각면에 2개씩의 탱주(撑柱)를 새겼다. 2층 기단부에도 양 우주와 각 면에
2개씩의 탱주를 새겼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한 개의 돌로 만들었고, 1층 탑신 4면에는 문(門)과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하였다. 그 위의 각층 탑신에도 양 우주가 조각되고, 옥개석은 받침이 5단씩이다.
낙수면 상부에는 2단의 탑신굄을 새겨서 낙수면이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경쾌하다.
4귀의 추녀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다. 각 부의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의 수법도 우수하여 8세기 전반
석탑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신라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기단부의 조각 솜씨만 제데로 감상하려 해도 그야말로 하루 해가 짧을 지경 .
김정현 선생의 심도있는 해설에 모두들 귀를 세우고...
장항리사지 동 오층석탑
도괴되어 골짜기에 나뒹굴던 1층 기단부와 지붕돌을 수습하여 세운 것이다.
지세를 봐서는 결코 큰 절은 아니었을텐데
어떤 원력으로 이토록 장중하고 아름다운 석탑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장항리사지 석불대좌
석굴암 본존불과 비견되었을 거라는 평이 있을만큼 커다란 석불이 서 있던 대좌이다.
금당터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역시 도괴되어 반으로 갈라진 상태이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위에 서 있던 불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2단으로 구성된 대좌의 아랫단에 새겨진 사자상의 해학.
갑옷으로 무장한 신장의 위용
우리 문화재의 근 90 %가 불교와 직 간접으로 연결 고리를 맺고 있다 했던가...
신라를 빛낸 인물관
흥륜사 신라십성(興輪寺 新羅十聖)
아도화상, 위촉(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사파(사복), 원효, 혜공, 자장
천도교(東學) 발상지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3리
人乃天·待天主의 자유·평등사상
오늘 천도교에서 그 종지(宗指)로 내세우는‘인내천’(人乃天)은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의 ‘시천주’(侍天主)에 근원한 용어다. 즉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으니 그 사람 역시 이에 한울님’이라는 논리가 깃들어 있다.
시천주는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경신년(庚申年, 서력 1860)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선천(先天)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의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내놓은 천도교의 신관, 인간관, 우주관을 함유한 매우 중요한 천도교 용어이기도 하다.
시천주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곳은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논학문’(論學文) 중에서다. 특히 수운 선생은 이곳 ‘논학문’중 ‘주문’(呪文)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시천주’를 말하고, 또 풀이했다. 즉 시천주라는 용어는 천도교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주문에 담겨 있는 용어이기도 한 것이다.
시천주는 문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다. 즉 한울님이라는 우주적 존재가 다른 초월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모셔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만 한울님이라는 신을 인간 내면에 주체적으로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한 생명체로 태어날 때 우주적 존재인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우리의 본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동상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즉 하나의 생명체로 형성될 때 한울님을 내면에 모시게 된다는 것이 천도교의 가르침이다. 이때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울님의 성품을 그대로 지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한 생명체가 무형의 생명에서 유형의 생명으로 형성될 때, 모든 생명체는 한울님으로부터 본래의 맑고 깨끗한 한울님 성품을 그대로 품부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사람은 이와 같은 본래의 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본성이 상실된 삶을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삶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천도교의 종교적 수행은 곧 이와 같은 각자위심의 삶을 청산하고 본래 품부 받은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시천주는 다만 한울님이라는 신을 내면에 모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종교적 수행을 통해 각자위심(各自爲心)의 타락한 심성을 극복하고, 본래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천도교를 상징하는 궁을기(弓乙旗)가 휘날리는 용담수도원
또한 시천주는 다만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심성을 회복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한 심성에 의하여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또 이러한 삶을 현실 사회에서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천주의‘시’(侍)에 관해 수운 선생은 ‘논학문’(論學文)에서 이같이 풀이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一世之人 各知不移’(시자 내유신령 외유기화일세지인 각지불이), 즉 ‘시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氣化)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기 깨달아 옮기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즉, 안으로는 신령스러운 본래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밖으로는 무형의 생명에서 유형의 생명체로 형성되는, 포태(胞胎)의 그 순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시천주의 시의 순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이 다만 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본성을 지속적으로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 때 진정 시천주의 본의가 실현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천도교 용담수도원장님을 모시고
회복된 본성에의 사회적 실현과 실천이 없는 한 이는 엄밀하게 말해 올바른 실현이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면 때문에 수운 선생은 ‘侍’에 대한 설명으로 ‘一世之人 各知不移’라는 해설을 붙인 것으로 생각한다. 즉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그 깨달은 본성을 다른 마음으로 옮기지 않는 것(不移)이 곧 시천주의 본뜻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아 천도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시천주’는 다만 인간의 내면에 주체적으로 신(神)인 한울님을 모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품부 받은 본성에의 회복과 이 회복된 본성에 따른 올바른 실천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시천주는 본원적으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신인 한울님을 주체적으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본원적인 면에서 평등하다는 만인평등주의를 내면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평등주의적 종교사상은 조선조라는 봉건사회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것으로 반상(班常), 귀천(貴賤), 남녀(男女), 노소(老少)의 신분적 구분을 뛰어넘는 매우 근대적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천주가 지닌 평등주의는 단순한 근대적 평등주의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모신 한울님의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이룩하는 만인평등’이라는 점을 지니기 때문에 그 ‘평등’이 지닌 가치나 의미의 차원을 다르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평등의 가치’를 다만 어떠한 기준이 없는 무작위의 평등이 아니라, 진정 평등할 수 있는 차원에 이르러야만 진정 그 평등이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천도교가 지향하는 사회와 세상은 다만 평등의 사회가 아니라 본성을 회복하고 또 이를 실천해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평등의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를 수운 선생은 동귀일체(同歸一體)라고 불렀다. 즉 동귀일체는 ‘나’라는 개인, 또는 개인이 지닌 이기주의적 성향을 벗어나, 본성의 회복을 통해 이를 실천하는, ‘우리’라는 일체(一體)의 삶으로 모두 같이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기도 한 것이다.
용담정에 모셔진 최수운 초상
즉, 천도교의 핵심사상인 시천주는 곧 천도교가 지향하는 세상,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인 동귀일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는 곧 각자위심의 타락한 이기주의적 삶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 새로운 신념체계의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천도교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을 지니는 사상인 것이다.
/위 천도교 핵심 사상에 관한 글 모두는 넷 상에서 구한 자료로서윤석산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설파한 내용임을 밝힌다./
용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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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일렁임도 없는 감포 앞 바다.
무녀로 짐작되는 이가 제물을 모래밭에 진설하고 징을 두드리며 열심히 주문을 외는 모습.
기돗발이 받을만한 장소란 말인가? 문무대왕을 떠올리며 한동안 대왕암을 주시한다.
발길을 돌려 당도한 곳은 '감은사지'
보수를 하느라 상당 기간 장막에 가려있던 감은사탑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전, 스산한 가을 날 처음으로 감은사탑을 찾아왔던 때가 생각난다.
너무나도 장중한 모습에 압도되어 절로 두 손을 모을 수 밖에 없었던 생생한 기억.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기는 분명 그대로일진데 갈 수록 탑의 크기가 줄어 보이는 것은 무슨까닭?.
너무 눈에 익어서 탈이란 말인가...!
'장항리사지'
예전과 달리 접근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해야 할까?
계곡으로 내려서 폐사지로 올라서는 길에 번듯한 계단이 가설되어 있더라는 말씀.
정말 감상할 맛이 나는 석탑 두 기가 장중함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불교미술사를 전공하신 특급 해설사 김정현 선생의 생생한 현장 강의가 이어진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추스려 토함산 너머 불국사 입구에 자리한 동리 * 목월 문학관에 당도.
뻔질나게 지나다니기만 했지 들어가본 것은 막상 오늘이 처음.
'신라를 빛낸 인물관'도 문학관과 같은 공간에 들어 있다는 사실도 오늘에야 첨 알게 되었다.
진즉부터 가보고 싶었던 천도교 발상지 '용담정'
해발 594m 구미산 아래 깊은 골짜기, 경주에서 북동쪽으로 약10km의 거리라는데
서라벌의 금오산을 '남산'이라고 할 때 이 곳 구미산은 '서산'에 해당된다고.
팜플릿을 펼쳐보니 구미산(龜尾山)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었다.
"천년 고도 경주의 정기를 받아 안아 후천 다시개벽의 대성(對聖)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탄생을 예고하고, 천도 동학을 계시받으신 천도교의 발상지 용담정을 안고 있는 명산이다."
양반 천민 할것 없이 모두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라고 창도 정신을 세상에 외치기 시작한 수운(水雲).
머슴살이 출신으로 험난한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도(道)를 실천하고
생활 속의 도(道) 즉 '용시용활(用時用活)의 법설을 펼친 은도시대(隱道時代)의 해월(海月).
동학은 물론,
나라가 위기에 처 했을 때마다 구국의 횃불을 들고 앞장섰던 선각자 들 중
상당수가 천도교도 들이었다는 사실....
내가 꼭 '용담정'을 꼭 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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