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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제1차 영호남선비문화교류 -제2편-

 

'2011 월봉서원과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

 

 

"제1차 영호남 선비문화 교류 답사"

제2편

 

    ○ 주최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욱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재)고봉학술원, 행주 기씨 문헌공 종중, 광곡(너브실)마을 주민 일동, 광산문화원,

                광주향교 여성유도회, 광산구 문화유산해설사회

 

 

 

○ 첫째날 : 2011. 6. 3 

○ 주제 : 천 년 古都 경주를 가다.  -

 

답사지 : 경주 양동(良洞)마을 일대

 

 

 

경주 양동(慶州良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우 농재 이언괄(李彦适)공을 추모하여1560년경에

건립한 정자이며, 큰 고목들이 건물을 감싸 안고 있다.마을로 들어서면 우측 성주봉 등성이 큰 고목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은편 북촌에 자리잡은 향단에 딸린 정자이다.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우

재(聾齎) 이언괄(李彦适)공을 추모하여 1560년경에 건립 하였다고 한다. 수정은 정자와 관리사로 구분된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정자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으며 ㄱ자로 겪인 모서리가 북촌을 향했으므로 대각남향(對角南向) 집이 되는 셈이다.

좌측에 담장을 따로 쌓고 건축하였는데 ㄱ자형 평면 양측으로 대청을 놓고 그 옆에 방을 두었다. 좌측으로의 대청에 붙은 방앞에는

후마루를 두어 양동마을 전체를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방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우측 대청옆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이 정자를 지키는 관리사로서 행랑채는 고격(古格)있는 소가(小家)로서 굵은 각주(角柱)와 마루귀틀, 청판 등 건실하게 구성된 집이다.

이러한 방, 마루 부엌으로 연속되는 一자형 구성은 남부지방 민가의 한 기본형으로 가장 흔한 유형 이지만

이 집은 부엌을 전면으로 연장하였기 때문에 ㄱ자형이 된 것이다.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조선 고종 4년(1867년) 경에 지족당 이연상공(李挻祥公, 1819년)이 세운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매우 안정감이 있고 소박하다.
인접한 초가와 함께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자리잡고 있다.이 건물은 조선 고종(高宗) 7년(1870)에 세운
여강 이씨(驪江李氏) 문중의 서당으로
손씨 문중의 안락정(安樂亭)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李淵祥)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면 건너편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지금 양동마을에는 이씨 문중의 서당이 두 채가 되는데,
이는 1970년 안계댐을 건설하면서 경산서당(景山書堂)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대문과 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ㄱ'자 건물로 각기 맞배집을 붙인 것이다. 오른쪽 본채에는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왼쪽에 온돌 안방, 오른쪽에 온돌 건넌방이 있다.

 대청 앞으로 마루방과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대청과 마루방은 여름에, 온돌방은 겨울에 대비한 것이다.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 서당 공부에 맞는

구성을 하였다. 동쪽에 있는 행랑채는 남부지방의 백성들 집으로 하나의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근암고택(謹庵 古宅) 사랑채 /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이 집은 이정수 선생이 세웠다고 하는데 5대손 이희구가 홍릉참봉을 지냈기 때문에 '참봉댁' 또는 '근암고택'이라고도 한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조선 정조 4년(1780)경에 지었다고 하며 일반적인 'ㅁ'자 평면을 따르지 않고 주거 공간의 기능에 따라 배치를 다르게 꾸미고 있다.

집의 구성은 크게 대문채, 안채, 사랑채로 구분할 수 있다. 대문채는 'ㅡ'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대문을 두고 왼쪽에 광, 오른쪽에 방을 두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이고 면이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부엌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 건넌방, 마루방을 놓았으며 부엌 밑으로

2칸짜리 방과 1칸 방을 만들었다. 안채 옆에는 앞면 4칸·옆면 1칸 크기의 헛간을 지었는데 지금은 외양간으로 쓰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 담밖으로

 떼어놓아 중부지방이나 호남지방에서도 보기 드문 배치방식으로 꾸몄다. 이는 집주인의 전통 남녀유별 사상이나 생활관이 작용한 결과로 짐작하는데

방 2칸과 대청 1칸의 작은 크기로 간소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소박하고 간소하게 지은 집으로 주거 공간의 기능에 따라 구성을 달리 배열한 특색있는

 변화를 보이고 있어 가치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양동이동기가옥(良洞李東琦家屋)'이었으나, 조선 정조 4년(1780)에 태로 이정수가

지었고, 그의 4대손인 홍릉 참봉 이희구의 호를 따라 '근암 고택'이라 불려지고 있어 ‘양동 근암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상춘헌고택 (賞春軒 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75호

 

이 집은 이덕록 선생이 살던 집으로 그의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 선생의 호를 붙여 '상춘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조선 영조 6년(1730)경에 지었다고 하며, 양동마을에서 일반적인 튼 'ㅁ'자형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ㅡ'자형의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안마당에서 볼 때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툇마루를 둔 건넌방, 왼쪽 끝칸에 안방, 안방 밑으로 부엌을 둔 'ㄱ'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보통 부엌을 두는 왼쪽 끝칸 자리에 안방을 놓은 점인데 이는 중부지방 민가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사랑마루, 사랑방, 사랑대청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기단에는 화단을 꾸몄고 사랑마당 북쪽으로 가묘를 두었다. 이 북쪽 기단에도 화단을 가꾸어 놓았는데 사랑채와 화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행랑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크기로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방 1칸, 왼쪽에 광 1칸, 마루방 1칸, 2칸을 터 통칸으로 만든 광을 배치하였다. 꾸민 화단과 사랑채가 멋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고, 양동 마을에서 보기드문 중부지방 배치형태를 보이고 있어 좋은 민속자료가 되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양동이원용가옥(良洞李源鏞家屋)'이었으나, 조선 영조 6년(1730)에 동고 이덕록이 지었고, 그의 후손 이석찬의 호인 상춘헌을 따라 '상춘헌 고택'으로 불려지고 있어, ‘양동 상춘헌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상춘헌 길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호당고택(沙湖堂 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74호

 

 안골로 들어가는 중간 위치 우측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진사(進士)를 지낸 사호당(沙湖堂) 이능승(李能升)공이 1840년경에 지어 살던 집이다. 변화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여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확실하면서도 문을 통해서 바로 연결되는 점이 특징이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마을에서도 가장 일반적 반가형(班家形)인 ㅁ 자형 기본 평면을 갖춘 집이다. 행랑채는 일자형인데 구조상 안채와 연접되어

있지않음으흔히 있는 있으므로 흔히 있는 튼 ㅁ 자형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비교적 드높은 축단(築壇) 위에 세웠으며 상대적으로

부엌 방에 행랑채는 용마루와 지붕고가 낮추어져 있다. 안방과 부엌과의 고패관계는 낙선당의 경우와 같으며 이 집의 부엌도 대략 3칸이나

되는 크기이고 그 끝에 안사랑과 그에 연접한 작은 누마루를 둔 것은 이 마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안바깥채의 여러 기둥 가운데

안 대청의 중심 기둥과 사랑채마루의 중심주 그리고 전퇴(煎退)의 모서리 기둥만은 굵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안채, 사랑채의 중심부를 일단

돋보이게 꾸미고 있다.중심주를 두리기둥으로 보강하는 것은 영남지방 큰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식이다. 또 건넌방의 위치를 마루방과

바꾸어 놓은 점은 일종의 특색이라 하겠다. 사랑방을 ㅁ 자형의 동변(東邊) 중심부에 두고 안마당 쪽으로 외여닫이를 달아 이방에서 곧바로

안마당을 내려다 볼수 있게 한 점도 흔한 방식이 아니다. 이 집에서 안채사랑채의 마루, 마루방의 변화 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은 매우 특이한

격식을 보여준다. 행랑채는 낮은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운 납도리집으로 부연없는 한식기와의 맞배집이다.

 

 

 

 

단아한 모습의 초가

 

 

 

 

서백당 (書百堂) /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경주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詹)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一자형의 행랑채와 ㅁ 자형의 몸체가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서 오른쪽 단에 광을 두고 바로 그 옆에 대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 우측으로는 마루 1칸과 방 2칸이 붙어 있어 행랑채 구실을 하며 그 옆 1칸 이 방에 불때는 함실이며 그 옆 2칸이 광이다.

안채에 해당되는 부분은 2칸의 부엌과 3칸의 안방이 일렬로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여기서 ㄱ 자로 꺾이어 3칸의 정면과 2칸의 측면, 도합 6칸의 넓은

 안대청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옆에 2칸의 건넌방이 붙어 있다. 건넌방 앞에는 1칸이 채 못되는 고방이 있고 그 앞에 1칸의 마루와 1칸의 방이 사

랑대청과 연결된다. 부엌 북쪽으로는 장독대가 놓이고 사방 1칸의 헛간이 있다. 사랑 마당 앞에는 동북쪽 높은 곳에 三門이 서있고 그 울타리 속에

사당(祠堂) 3칸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낮은 벽돌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소로받침은 없으며

삼량(三樑)구조로 홑처마에 한식기와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몸채는 행랑채보다 상당히 높게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는 막돌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정면의 기둥만은 모두 원주 4개로

처리하였다.가구는 일반상류주택으로는 예외적으로 삼량구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청 전면에는 아무런 창호가 없으나 후면에는

두 짝씩 판장문을 달았는데 문틀 중앙에 설주를 세운 것은 ‘안동 임청각'이나 ‘강릉 해운정',‘회덕 동춘당'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처마는

홑처마로서 한식기와의 팔작지붕모양 합각을 만들었으나 사랑채와 와서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안방 위에 다락을 만들고 대청쪽으로 작은 창을 단 것이 이채로운 점이다.

 

 

 

 

서백당 향나무 /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사당앞에 있는 향나무로 수령 600여년 추정.

 

 

 

 

낙선당(樂善堂) / 중요민속자료 제73호

 

 

낙선당(樂善堂) 손중로 선생의 종가집으로 월성 손씨의 종가인 손동만 가옥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종 35년(1540)에 지은 집으로

백당의 북측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손중돈 선생의 아우되는 손숙돈(孫叔燉)공이 분가한 집으로 지금은 낙선당 손종로(孫宗老)공의

파주손댁이며, 당시 양반 부잣집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문채는 3칸이며 가운데가 문간이고 남쪽 1칸은 행랑방이며 북쪽은 외양간이다.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는 넓은 마당이며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대청이 곧바로 건너다 보인다. 마당의 북변(北邊)에 4칸의 광채가 대문채에 접해서

一자로 세워 졌고 광채와 대문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연결짓고 있다. 이 광채는 3칸이 광이고 끝칸은 1칸의 온돌방이다. ㅁ 字안채에

一字사랑채가 부설되는 일은 보통 있는 예이지만 이처럼 넓은 사랑마당과 그 광채를 여유 있게 안배한 예는 흔치 않은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사랑채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당에서 나직한 기단 위에 一자로 세워진 5칸 집이며 2칸 대청과 2칸의 온돌방, 2칸 전퇴로 4칸이 구성되고

안쪽 1칸은 1칸반이 뚫린(2칸크기)의 부엌인데 안채의 부엌 아랫방 및 연접된 찬광(마루방)과 직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에서 안으로

내왕하는 쪽대문과 긴 토방을 이 부엌 앞에서 가로 내었다. 이 때문에 거의 연이어져있어 마치 모든 채가 한 채처럼 보인다. 안채는 ㄷ 자형

평면으로서 꺾인 곳에 부엌을 두고 안방 2칸과 대청 3칸이 전면에 일렬로 늘어서고 여기에 방이 꺾이면서 붙어 있다. 이 건넌방 옆은 불때는

실이고 그 옆은 광이 된다. 전체적으로 연속된 채로 보이나 실은 각 채가 각각 독립되어 건축된 주택이다. 대문간채는 막돌허튼층쌓기 기

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는 삼량(三樑)집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낙선당 대문

 

 

 

종택임을 알리는 문패

 

 

 

 

사랑채 전경

 

 

 

 

사랑채 내부

 

 

 

 

사랑채에 딸린 방

 

 

 

 

낙선당 고택에도 어김없이 상당한 수령의 향나무가 서 있다.

 

 

 

 

 낙선당 안채

 

 

 

 

낙선당 앞길에서의 조망

 

 

 

 

 

경산서당(景山書堂)

 

물봉골과 안골 사이의 능선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다.헌종조에 창건한 서당으로서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후손인 이의윤을 배향하며 사림(士林)들의 강학처소로 400여 년간 내려왔으나 1970년 3월 포항종합제철(浦項綜合製鐵)

안계댐의 부지로 전입됨에 따라 안계리에서 북촌 중앙 산등성이의 현재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서당부분과 관리사 부분으로 나누어 담장이 설치되어 있고 사이에는 일각문이 설치되어 있다.
서당은 강당(講堂)과 동재(東齋), 삼문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목조 한식 기와집인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끝으로 각기 방 한 칸씩을 두었다. 5칸 모두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중앙에 마루방 한칸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 한칸씩을 두었다. 대문간채는 삼문으로서 방이나

헛간 없이 순전히 두 짝 안여닫이 문들만 칸마다 달았다. 강당은 어느 정도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 한 높은 기단 위에

장대석으로 상단을 마무리하고 다듬은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의 짜임은 초익공계이나 익공에 쇠서가

두개 뻗어 마치 이익공처럼 보인다. 창방 위에는 소로받침을 놓아 굴도리를 받치는 장여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서 마루대공은 파련각을 하였으며 부연을 단 겹처마에 팔작기와지붕이다.

부속채 또한 어느 정도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 한 기단(基壇)이나 상단에 장대석(長臺石) 마무림은 없다.

기둥은 네모 기둥이고, 도리는 납도리로서 소로받침과 장여는 없으나 우주에서는 첨차모양의 각진 부재를 기둥머리에

끼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관리사는 안채, 문간채, 곳간채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목조 한식기와집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이고,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중앙에 대문칸을 두고

 좌우에 창고와 방 한칸씩을 두었다. 곳간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육위정

 

 

 

조선 선조24년(1591년)에 세운 건물로써 회재 이언적 선생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이의잠)공이 분가한 집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수졸당이 세워진 뒤에는 자손들이 6형제가 태어나고, 자손들이 번성하라는 뜻에서 육위 정이라 하였으며,

문중에서는 정자로 사용하고 있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수졸당(守拙堂) / 중요민속자료 제78호

 

 

 

회재 선생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李宜潛) 공이 1616년 초창하였고, 그의 호를 따라 수졸당이라 부른다. 북촌 중앙 산등성이의

중간지점 동측 언덕받이에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희재 선생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李宜潛) 공이 1616년 초창하였고,

의 호를 따라 수졸당이라 부른다. 그후 6대손 이정규공이 증축하였다고 하였다 하며, 정조임금 때 도승지와 대사간 대사헌을 지낸

양한당(養閒堂) 이정규(李鼎揆)공이 태어나기도 했다. ㄱ 자형 안채와 一자형의 아래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튼 ㅁ 자형을 이루었다.

남향한 사랑채와 대문채가 붙다시피 연접되어 있어 동향인 안채로 보면 동향집 남대문을 이룬 셈이다. 대개 동향집의 경우와는 달리

 사랑채와 안방의 위치가 반대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이 집의 진입로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 이라 하겠다.

사랑채나 대문채에서 보면 안방은 가장 안쪽에 위치하게 되는 원칙이 무리없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사랑방 우측은

바로 대문간이 되고 대문간은 一자형 평면의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실제로 4칸에 그쳤고, 그 동단(東端)에 분리해서

지붕을 조금 낮추어서 2칸의 대문채를 둔 것은 사랑방의 격식과 문간방이 달린 대문채의 격식과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으며

긴 사랑채의 1칸을 그대로 대문이나 중문간으로 하는 경우보다는 적격으로 보인다. 이 대문채와 사랑채와의 관계처리는 이 집만의

독특한 방식이라 할수 있다. 사랑채는 콘크리트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전면에는 4개의 원주를 세워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다.

안채와 행랑채 역시 콘크리트 기단으로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 집이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

 

 

 

 

 

무첨당(無?堂) / 보물 제411호

 

. 무첨당(無?堂) 해 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를 구성하고 있는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 무첨당이다.

별당건물이기는 하지만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큰 사랑채 격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별당이 외부인의 눈에 잘띄지

않는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반해 무첨당은 대문 옆에 자리잡고 있어 큰 사랑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요즈음도 제사를 지내거나

문중의 큰 일이 있을때 사용한다고 한다. 또한 사당의 위치는 가옥의 오른편 뒤 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의 사당은

왼편 뒤쪽에 세워져 있는점도 특이한 점이다.건물의 평면은 ㄱ 자형으로 중앙에 6칸짜리 대청을 두고 양옆에 2칸방을 하나씩

두었으며 왼편 앞쪽에 2칸짜리 누마루를 설치하여 건물을 돋보이게 하였다. 높직하게 달아낸 누마루는 바깥쪽으로는 널문을 달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반면 안쪽 마당으로는 난칸을 달고 개방적으로 만들어 내부를 향해 열린 공간을 만들었다.

오른편 방의 바깥쪽에는 툇마루방을 덧붙여 달고 부섭지붕을 붙였는데 영남지방의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무첨당은 막돌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삼량(三樑)구조로 되어 있고

 대청 전면(前面)에는 아무런 창호(窓戶)가 없으나 뒷면에는 판장문을 달고 벽체를 쳤는데 창방과 장혀 사이의 소로받침을 한

사이사이에는 벽체없이 터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무첨당 대청마루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향단(香壇) / 보물 412

 

 조선 중기 건물로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이언적(1491∼1553) 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것이다.

건물로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한 그루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견상으로 보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자재는 70년대 한 번의 보수공사로 대부분 새 부재로 갈아 끼운 것이다.

행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워 소로 받침없이 납도리를 받고 있는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같은 시단에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고 막돌처석을 놓아 원주(圓柱)를 세웠다.

구조양식은 초익공계(初翼工系)이고 가구(架構)는 5량이다. 안채는 낮은 막돌허튼층쌓기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 집이다

 

 

 

 

 一자형 평면구조로 몸채를 사이에 두고 좌측에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두고 행랑채도 일자형 몸채와 거의 연접해 있어

거의 한 동(棟)처럼 보이는 집약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 안마당도 극히 폐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부엌의 아래층은 헛간모양으로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채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워 일반주택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향단이 이처럼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탈피한 점이 특징적인 데

사실 이러한 점은 풍수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전한다.

 

 

 

 

향단 입구에서 바라본 하촌 일대

 

 

 

수운정(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

 

조선 선조 15년(1582년)경에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공의 증손인 청허재 손엽(淸虛 齋孫曄)공이 건립한 정자인데, “

물과 같이 맑고 구름같이 허무하다.”는 수청운허(水靑雲虛)의 뜻을 따서 수운정 (水雲亭)이라 한다.

마을 외곽 서북방의 높은 암석 위에 세워 안락천과 안강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수려한데, 특히 야경이 좋은 곳이다.

임진왜란때 태조의 수용영상(水容影像, 임금의 초상화)을 이 정자에 이안 (移安)하여 난을 피했다고 전한다. 정자와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목조 한식기와집이다.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전퇴를 갖추고 있으며 앞쪽으로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툇마루 아래에도 약간 높은 기둥을 설치하여 마치 누각처럼 보인다. 동측 2칸은 온돌방이고 서측 4칸은 대청이다.

행랑채는 온돌방과 마루가 1칸이다. 정자 변주는 모두 두리기둥이나 온돌방에 사용된 내진주만은 네모기둥의 모를

강하게 접어 사용하였다. 가구는 5랑가이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행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마을 언덕에 자리한 은행나무 등걸이 마치 주목을 연상시킨다.

 

 

 

 

 

관가정(觀稼亭) /  보물 제442호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특히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중앙에 중문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온 형태이다.

중앙에 중문을 사이로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를 두었는데,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누마루 부분에만 둥근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다른 부분과 차이를 두었고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써 정자의 효과를 거두었다.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부엌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을 그리고 부엌 위쪽에는 작은 대청 2칸, 방 2칸 그리고 꺾이어서 큰 대청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 자리잡았다. 안채의 건넌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광 2칸과 마루 1칸을 두어 연결시키고 있다.

원래의 관가정은 양쪽 측면과 뒷면만을 담장으로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트이게 함으로써 낮은 지대의 경관을 바라보게

하였었으나 1981년의 보수로 전면에도 담장을 쌓고 일각내문을 내어 본래의 조망이 감소되었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다. 그러나 사랑대청에는 4개의 원주를 세웠고

주두를 얹어 초익공계로 꾸몄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한식기와를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관가정은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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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강한 햇살 아래 양동마을 전체를 답사하기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뒷동네 다녀 오듯 광주에서 머나먼 경주를 다녀오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비록 주마간산 격일지언정 최대한 발품을 팔아 양동마을의 고샅과 언덕을 쉼 없이 오르내렸다.

 강한 빛과 짙은 녹음 탓에 단 한 장도 쓸만한 사진을 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저 나를 술푸게(?) 할 뿐.

 

시도 때도 없이 들이 닥치는 무뢰배같은 답사객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을지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집안 내부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은 너무도 큰 것인지라 진한 아쉬움과 허탈한 장탄식만이.

 

 

이럴 때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소리라도 들려왔더라면

천리를 달려온 이내 발걸음이 가일층(加一層) 가벼웠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