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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드 월봉

제1회 살롱드 월봉(salon de wolbong) (2부)

      -고품격 문화살롱-  salon de wolbong 

       제2부 /매화로 보는 우리문화/

 

강사 김 정 현

(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茶人茶話

 

 

최근 월봉서원 앞에 마련된 체험관

 

 

 

 

 

 

매화초옥도 梅花草屋圖

고람 전기田埼(1825~185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디 '매화서옥도'는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林逋)를  모델로 하여 그리기 시작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작가 자신의 고고한 심중을 표출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마치 천지분간 못 할 정도로 피어난 매림 초옥에서 매향을 호흡하며 친구를 기다리는 이는 녹의(綠衣) 오경석이요,

거문고를 어깨에 둘러 매고 벗을 찾아 다리를 건너는 홍의(紅衣)는 작가 자신인 고람 전기일 터.

 

 

매죽도 梅竹圖(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

10~11세기 필자미상, 경기도 개성 소재

 

개성에 소재한 태조 왕건흥 서쪽 벽에 그려진 것으로,

매화와 대나무 그리고 동쪽 벽에는 소나무가 있어 이를 '세한삼우'라 부른다.

가지에 비해  매화는 큰 편으로 아마도 만첩홍매를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인다.

 

 

 

매죽도 梅竹圖

1420년경, 경남 밀양 고법리 소재(부분)

 

정포은(1337), 목은 이색(1328~1396), 야은 길재(1353~1419)등과 함께 팔은八隱으로 불리우는

고려 말의 학자 송은松隱 박익朴翊(1322~1398)의 묘墓에 그려진 벽화이다.

갈필渴筆로 그린 바위 뒤쪽에 대나무와 함께 어우러진 매화로 줄기와 가지는 곧게 표현했고

다섯장의 꽃잎을 그려넣었으나 조선 중기의 전형과는 달리 개략적인 표현에 그쳤다

 

 

 

월매도 月梅圖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능숙한 필치의 그림으로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밑둥이 생략된 '절지법'으로 시작된 힘찬 기개의 가지에 꽃망울과 매화가 소담스레 피어났다.

곧은 가지 끝에 걸린 둥근달은 완벽한 구성의 정점을 이룬다.

오만원권 뒷편에 실릴 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 월매도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한 시절 이 야월매夜月梅의 정취를 느껴 본답시고 꽤나 설치고 나닌 기억이다.

 

 

 

묵매도 墨梅圖

호은壺隱 홍수주洪受疇(1642~170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형태의 절매折梅로서, 거친

가지의 끝 부분이 위를 향해 곧은 반전을 이룬 모습이 여간 흥미롭지 않다.

 

 

 

묵매도 墨梅圖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2~1791)

 조경옥 소장

 

8살에 이미 시를 지을 만큼 다재다능 했고 훗날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표암.

영조의 배려로 물경 61세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사대부 화인으로 높은 식견에다 안목까지 두루 갖춤으로서

당대 화단의 총수로 군림하였고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 등을 길러 내기도 했다.

굵은 줄기에서 양 옆으로 뻗은 가지에 홍매를 피워냈는데 채색과 농담의 세련됨이 일품이라 하겠다.

본디 화첩의 한 면으로 절친이었던 연객烟客 허필(1709~1761)의 평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묵매도 墨梅圖

정조正祖 1778년,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정조가 26세 때 그린 것으로 가지를 'V' 형으로 펼치고 가운데 부분에 제관題款을 한 것으로

작은 외숙에게 그려준 것. 힘찬 기개와 날카로움은 청년 시절의 군왕 정조의 심성과

사상의 편린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홍매도 紅梅圖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

국립중암박물관 소장

 

애매가愛梅家로 잘 알려진 우봉, 조선 말의 화단을 화려하게 채색하였으며 특히 홍매를 즐겨 그렸다.

전수식 매화병풍을 최초로 개척한 그의 화풍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강력하고 탄력있는 필선으로 그려낸 그의 매화도는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 온다.

농담을 잘 살려낸 매화 줄기의 거친 수피에다 채색의 농담으로 홍매를 피워올린데다

좌우로 배열한 제시는 묵매화의 비조라 할 수 있는 남송대南宋代 중인仲仁(12세기 활동)의

뜻을 차용했음을 임포의 싯구를 빌어 간접적으로 읇고 있는 것이다.

 

스미는 향기와 성긴 그림자, 시냇가 눈과 봄바람,

온누리의 광채를 원숙한 노인이 앞장서 살며시 취한다.

 

불꽃 일렁이는 명리 속에서 끄집어내 매화와 어울리며

강철 같은 마음과 돌 같은 심장이 모두가 매화의 기운이라.

 

 

 

개인적으로...

만약 우봉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다면 꼭 한 번 그려 달라 부탁 하고 싶은 홍매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담양 남면 독수정 윗쪽에 자리한 400년 수령의 홍매,

 바로 위 '독수매'를 말이다.

 

 

 

묵매도 墨梅圖

노치老癡 허련許鍊(1808~1893)

 

노치老癡 라는 호가 보여주듯 생의 후반기에 그려낸 작품으로서

다소 거친 듯 하면서도 활달한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추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초기 문인화풍의 간결한 매화 보다

구도가 더욱 자유분방하고 대담 해지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이다.

 

 

높은 누대에 기대어 젓대를 불지 말라,

사람들이 난간에 개대 선 것을 기억하고 있나니.

-노치-

 

 

 

홍백매도 紅白梅圖

혜산惠山 유숙劉淑(1827~1873)

조경옥 소장(부분)

 

'S'자를 그리며 휘어 올라간 긴 구도의 그림이다.

홍매에는 연분홍 점을 찍었고, 백매에는 권법圈法으로 그린 다음 호분을 칠했다.

줄기에다는 붓을 뉘어 나란히 청녹색의 태점을 찍었다.

홍백매가 함께 어우러진 화려한 구성은 19세기 매화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유숙의 10폭이 새로움을 다툰다"로 시작하는 박규수(1807~1876)의 발문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본디 10폭 병풍의 한 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생의 10폭 그림은 신기하기만 해, 대대로 보물처럼 전해지고 있다.

농염한 가지에 안개 어린 자태는, 조희사 아래 이른 봄이 찾아 온 때이다.

 

 

 

묵매도 墨梅圖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

오천익 소장(부분)

 

가학家學으로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 했으며 개화사상가의 역할을 자임했던 역매亦梅,

1857년 오경석이 청淸에 갔을 때 그곳의 문사인 유존인의 부탁에 따라 그려준 것이다.

그림 양편으로 유존인이 이듬해 봄 3월 19일과 20일에 단 제발題跋이 적혀있다.

 

 

 

묵매도 墨梅圖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1847~19160)

김민영 소장

 

전남 화순 출신의 문인화가로서 시를 곁들인 매화와 대나무를 즐겨 그렸으며

특히 꽃과 나비를 잘 그려 송나비라는 별칭으로도 불리운다.

 구 줄기가 교차하는 사선 구도에다 줄기 끝 부분에 이르면 한 붓으로 힘있게 쳐 올리는 형태다.

고매의 느낌을 살리는 태점에다 구성등 독특한 화법을 잘 살린 작품이다.

 

몽롱하게 싹이 터지는 것은 시에 의해 알려졌고.

노을이 가로 놓인 것은 옥이 벌어진 듯하다.

한고漢皐의 봄이 구슬 희롱하는 사람을 움직여도,

철석 심장가진 오나라 아이야 어찌 뜨거움을 알랴.

사호沙湖

 

 

 

탐매도 探梅圖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1662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화서圖畵署의 교수를 지낸 절파화풍節派畵風의 화원畵員으로

역대 화가 중 가장 거칠고 호방한 필치를 구사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원체 술을 좋아했던 탓에 대부분의 그림들은 취중에 그려졌다고 한다.

바위는 굵은 필치로 대담하게 표출되었으며 연두색 등의 연한 담채와 어울려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자유분방하면서도 날렵함과 더불어 강한 서정성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지팡이를 짚고 매화 감상에 나선 은일처사와 술병을 들고 움추러든 시자의 구도는

대부분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689~740)이 장안長安의 파교를 건너 설산雪算 들어가

탐매에 나섰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형상화 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파교심매도 파橋尋梅圖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겸재에게서 그림을 수학했고, 산수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그림에 두각을 보였다.

공재, 겸재와 더불어 삼재三齋로 일컫는다. 현재玄齋가 60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역시 맹호연의 고사를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눈덮힌 차가운 풍경과 위압적인 산세와 더불어 구불대는 필선등은

만년에 접어든 현재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추사의 제자였지만 나이는 불과 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던가?

자신의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影樓'라 이름 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시를 읇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차를 마셨으며 호를 '매수'라고 까지 자찬하였다니

그의 매화 사랑엔 그저 경의를 표 할 수 밖에...

먼산의 둥근 외곽선과 옅은 푸른 색감은 겨울날의 찬 기운보다는 차라리 선비의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우봉 특유의 거칠고 힘찬 필치가 덜 한 것이나,

추사 김정희가 즐겨 쓰던 우측 상단의 '고문지가古文之家' 비롯,

화제의 서체등이 농 익지 않은 것 등으로 볼 때, 대체로 그의 초기 작품일 거라는 평이다.

 

- 사진상 보이지 않는 그림 상단의 화제는 이렇다 -

 

하늘이 그림이라는 걸 내려준 건 얼마나 다행인가,

이것을 일삼아 남은 생을 보내리라.

이것은 본디 더없이 좋은 방편이어서,

수천 그루 복사꽃이 붓 앞에 펼쳐졌도다.

 

일찌감치 장다농이 손수 매감도를 그려서 ... 필의가 창연하고 ...

밝고 윤택하여 참으로 기묘한 솜씨였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제 그림의 이미지를 모방해 내 생각을 담아냈으니

실타래처럼 펼쳐진 붉은 노을과  굽이 산은 내가 보탠 것이다.

 

단전도인丹篆道人이 그림과 함께 제하다.

 

" ..." 부분은 그림이 탈락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전기古藍는 그의 작품에 "동국유생東國유生"이라는 인장을 자주 사용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문인화적 성향의 회화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목이기도 하다.

1849년에 그린 작품으로 안정된 구성, 완벽한 먹의 선염, 적절한 인물 포치,

그림에 맞는 좋은 화제와 글씨 등은 절정에 이른 작품으로 보인다.

여백과 사물 사이의 활달한 농담 기법은 호젓한 겨울날의 느낌을 더해주고, 속세와 절연된 모습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봉 조희룡은 전기의 그림을 '이화입시以畵入詩'의 경지에 이른

'상하 백년에 이를 작품'이라 했는데 바로 이에 상응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사진상에 보이지 않는 그림 상단의 화제는 이렇다.

 

눈 내린 숲에 매화가 피었거늘, 서풍이 불며 기러기가 날아가네.

산은 적적하여 사람 자취 없으니, 임포처사의 집을 불어볼 만 하네.

기유년(1849) 여름.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

수재壽齋 이한복李漢福(1897~19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어려서 부터 조석진과 안중식에게 전통화법을 수학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초기에는 일본화풍과 서양화법의 사실적 채색표현을 추구하였으나, 1930년 무렵 부터는

전통적 화국화 취향으로 되돌아가 수묵담채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온건한 필치로 그려냈다.

전반적으로 안중식의 '매화서옥도'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보다 장식적인 점으로 볼 때,

일본화풍이 가미되어 있으며 결코 독자적 화풍을 정립하진 못 한 것으로 보인다.

 

 

 

화조도 花鳥圖

허주虛舟 이징李澄(1581~ 1674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화원畵員으로 산수를 비롯 인문, 영모, 초충등에 두루 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화의 경우 보통은 줄기에 꽃만 그리는데 반해 잎까지 그려져 있어 일견 목숭아나무로도 본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매화로 보는게 타당할 거라는 중론이다.

곤충을 입에 물고 온 어미새와 둥지에서 먹이를 보채는 새끼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중기 화조, 영모화의 전형을 살필 수 있는 그림이다.

 

 

 

 

매상숙조도 梅上宿鳥圖

경암鏡巖 김익주金翊胄, 19세기 활동

국립진주박물관 소장(부분)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18세기 말의 인물로 지정하고, 산수에 뛰어남을 언급하고 있을 뿐,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 외엔 알려진게 거의 없다.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명암의 대비가 강렬한 화풍을 볼 수 있는데, '절파화풍'을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남종화법'을 수용한 양상을 보여준다. 본래 화첩의 한 면이었으며 1850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조선 중기 이래 '매상숙조도'가 여러 점 전하는데, 대부분 수묵으로 그려졌음에 비해

이 그림은 부분적으로 채색이 가미되었으며 새의 방향이 왼편을 향하고 있는 점에서

여타의 그림과 차별화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김익주는 산수화 외에도

여러 소재의 그림을 능숙한 필치로 그려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풍취난도 東風吹暖圖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윤영돈 소장(부분)

 

남화의 맥을 이은 대가로 평가되는 의재毅齋.

깊이 있는 운필을 통하여 남화의 정신세계를 가장 진솔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횡으로 긴 화폭에, 오른쪽에서부터 시작된 매화가지에 참새 세마리가 앉아 있는 구도로

 예서체로 '동풍취난東風吹暖'이라 적고 있는데 깔끔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이 일품인 그림이다.

 

 

 

 

백자청화매조문호 白磁靑畵梅鳥文壺

15세기 국보 제170호

높이 16.5cm, 입지름 6.15cm, 밑지름 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중국 明대 '관灌'이라 부르는 청화백자의 양식과 거의 유사한 항아리인데

문양에 있어서 만큼은 중국적 요소는 모두 사라지고 적절한 여백에다 조선의 정취를 자아내는

소재와 포치를 갖는다. 뚜겅을 위에서 보면 보주형 꼭지에 꽃잎 5장을 그려 넣어 정중앙에 큰 꽃이 자리하고

주위를 꺾이듯 과감하게 매화나무를 둘렀으며, 매화나무 아래에는 낮게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내경內頃하는 구연부에는 당초문이 배풀어져 있으며 몸체에는 매화나무가 주 문양이 되고 그 아래에 들국화가

소박하게 자리를 잡는다. 몰골법으로 그려진 매화는 살짝 번지는 모양새가 흐드러진 매화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매화 가지에 두 마리의 새가 노래하는 모습도 그려넣어 완성도 높은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조선 초기, 매년 사옹원의 관리가 도화서의 화원을 인솔하여 광주 관요에 나아가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 백자항아리에 그려진 이러한 원숙함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도화서 전문 화원의 솜씨일 터이다.

 

 

 

 

철화백자매죽문대호 鐵畵白磁梅竹文大壺

16세기 국보 제166호

높이 41.3cm, 입지름 19cm, 몸지름 37.9cm, 밑지름 21.5cm

국립중아악물관 소장(부분)

 

풍만하고 안정된 조형에다 뛰어난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16세기 대표적 철화백자이다.

쉽게 번지고 농담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철사안료를 이 항아리에서는 능숙하게 사용하였다.

구연부 아래는 선으로 당초문을 그렸으며, 어깨 부분에 소략화된 연판문이 돌려져 있다.

몸체 아래에 파선으로 한 줄을 돌리고  위 한 면에는 대나무, 한 면에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대나무는 몰골법으로 단숨에 그렸고,

다른 면의 매화는 굵은 등걸과 매화가 핀 곁가지가 힘차게

하늘로 뻗어 있는데 구륵법으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이 뛰어난 필치와 풍부한 농담으로 표현된 대나무와 매화나무는

당시 유행하던 묵매화나 묵죽화를 그리던 능숙한 전문 화인의 솜씨로 추정되며,

조선 중기 매화 그림으로 유명한 설곡 어몽룡의 묵매도와 구성과 표현이 유사한 것이다.

철화백자는 17세기부터 크게 유행하였으나 15~16세기에 몇 안 되게 전해지는 작품 중

품격이 높은 명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하겠다.

 

 

 

 

청화백자매죽문각병 靑畵白磁梅竹文角甁

18세기

높이 36.4cm, 입지름 5.6cm, 밑지름 19.2cm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18세기 무렵 제작된 청화백자에서 흔히 보이는 지선地線이 몸체 아래에 2줄 그어져 있고

그 위에 한쪽 면에는 대나무, 다른 쪽 면에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대담하게 굵은 등걸을 그리고 꽃이 핀 곁가지가 힘차게 뻗어 있다. 주 문양 사이에는 난초를 그려 넣었다.

청화의 발색은 약간 흐리고 어두운 편이다. 이 각병은 분원기分院期에 속하는 병으로

구연부는 결실되어 복원하였으며, 몸체는 긴 타원을 이루는 비교적 큰 병이다.

유약은 담청색을 머금은 백색이며 부분적으로 잡물로 인한 누런 부분이 있고 전면에 빙렬이 있다.

굽은 다리굽으로 모래 섞인 내화토 밭침을 받쳐 번조하였으며 굽 안바닥에도 일부 모래가 붙어 있다.

 

 

 

 

청자상감매죽초화문매병 靑磁象嵌梅竹草花文梅甁

13세기

높이 32.7cm, 지름 18.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상감청자매병 가운데 풍죽風竹과 매화나무 그리고 학을 한데 어울려 장식하는

포치를 갖는 작품이 많이 있는데 이 매병도 그 중에 하나이며, 문양이 단순하고 유태가 고르지 못해

격은 떨어지는 편이다. 구연부는 복원되어 있으며 길게 보수한 흔적이 있다.

형태는 어깨에서 급격히 팽창하였다가 S자 곡선을 거리며 굽에 이른다.

문양은 몸체를 여의두문如意頭文과 뇌문雷文으로 구획하고 그 안에 풍죽과 매화문을 상감하였는데,

표현에 있어 간결하고,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어 섬세한 맛이 떨어진다.

굽은 안굽이며, 굽바닥에는 모래와 내화토를 함께 사용하여 받친 흔적이 남아 있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필자미상 1542년경

국립광주박물관 소장(부분)

 

1531년 과거에 급제한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비롯한 7인이 1542년 즈음에 다시 모여

기념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 역시 조선시대 계회도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상단에 전서로 쓴 계회 명칭,

중단의 계회 장면 하단의 참가자 성명, 자와 호, 본관 그리고 관직 등을 기록한 좌목座目 그 좌우에

묵죽과 묵매가 있다. 여기에 그려진 그림은 독립된 그림은 아니지만 연대가 알려진 조선시대의 매화 그림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예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스듬한 사선 구도나 몰골법의 한 붓으로 그린 줄기와 가지 그리고 권법圈法으로 둥글게 그린 꽃모양에서

15세기 초에 조성된 박익묘 벽화의 매화 그림과 흡사하다.

계회도에 그려진 매화나 대나무는 이들이 상징하는 강인함과 꿋꿋함을 본받아 관직에 있으며

그러한 정신을 잊지 않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

희원希園 이한절李漢喆(1808~188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헌종, 철종, 고종의 초상화에 참여하였으며 조중묵(19세기 활동)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다.

다양한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산수에서는 대체로 전형적 남종화법과 김홍도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조선 말에 제작된 매화서옥도 중 가장 큰 그림이다.

 

내가 사는 고을 고산아래 향정 언덕에 고운 자태로 가로놓인 수십 폭의 매화가 있는데

임포선인이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해온다. 이곳에 꽃이 필 때면 반드시 그 옆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 양주에 우거하고 있는데 만치 한호충(산박지)처럼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채,

광경만을 떠올리며 언 손을 호호불어 그렸으니 아직 옛 보습을 잃지 않았지만 설직의 필법으로

여섯 마리의 학을 좌우에 그려 넣지 못한 것이 아쉽다.

 

김수문의 화제를 인용해서 쓰다.

번만인樊漫人

 

매화를 그릴 때는 풍격風格이 있어야 하며 수척해야지 살이 쪄서는 안 된다.

양보지楊補之는 화광화상華光和尙의 품 안 제자인데 그의 수척한 부분은

백로가 차가운 강가에 서 있는 같아 사람들이 가까이서 완상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

 

번만인樊漫人 다시 쓰다.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마지막 화원으로 전통시대의 화법을 근대에 전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오원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워 고종과 순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이 그림은 조선 말 유행했던 조희룡, 전기 등이 매화서옥도류를 따르고 있으며 구도 역시 유사한 면을 보인다.

백매가 흐드러진 서옥, 커튼이 드리워진 서실에 붉은 옷의 선비가 글을 읽고 있다.

일렁이는 산언덕과 바위에 작고 동그란 원 안에 붉고 푸른 점을 가득 찍어 넣었다.

강에는 배를 타고 떠나는 인물도 있고 전체적으로 둥근 원의 구성이 흥미롭다.

 

 

 

 

 

백자청화양각매죽문각병 白磁靑畵陽刻梅竹文角甁

19세기

높이 8.7cm, 입지름 1.9 / 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기형 중의 하나이다.

다채로운 형태의 연적이나 필통 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문된 문양의 소재는 선비들의 벗이라 할 수 있는 사군자가 주로 장식되어 이 병의 사용자를 짐작케 한다.

병 전체는 코발트 안료를 칠하였는데 사선으로 깎은 어깨부위에 양각된 대나무잎과 당초,

측면의 국화와 매화 등은 하얗게 남겨두어 푸른 빛의 몸체와 강한 대조를 보인다.

 

 

 

백자양각매화문사각연적 白磁陽角梅花文硯滴

19세기

높이 7.3cm, 가로 9.9cm, 세로 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푸른 물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유색에 섬세하게 양각된 장식은 갑번甲番한

분원 백자 특유의 세련된 미감을 엿볼 수 있다.

질 좋은 백토로 몸체를 간결하게 만든 다음, 측면에는 만개한 매화가지를 단아하게 양각하였으며

바깥으로 윤각선을 예리하게 넣어 한층 또렷하다. 윗면의 매화가지는 양각으로 장식하되

매화마다 구멍을 내는 변화를 주었다. 출수구는 18~19세기 유행한 다람쥐형 서수를 양각으로 붙여

장식하였는데 그 아래 음각으로 파도문을 가득 넣어 넓은 바다를 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산청 단속사지 정당월매 山淸 斷俗寺地 政堂月梅

1998년 이호신李鎬信 작

 

국내 최고 수령(약 650년)에다 심은 이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정당매政堂梅.

"양화소록'의 저자 강희안(1417~1464)이 책 속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강회백(1357~1402)이

심은 것으로 증언한다. 강회백의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기에 정당매로 부르는 것이다.

 

위 그림에 대한 작가의 변은 이렇다.

 

 나는 이 매화를 찾아 1998년에 그린 인연이 있다. 그 다시 이른 봄, 보름날을 잡아 평생 매화를 지키고 살아온

강낙중(강회백의 19대손) 노부부의 집에 머물며 매화를 완상하고 밑그림을 그렸었다.

정당매는 650년의연륜과 기상을 보여 주는데 높이 8m에 둘레가 1.5m, 뿌리에서 4본의 지간枝幹이 생겨

하늘로 치솟다가 사방으로 뻗는 기상 높은 명품이었다. 즉 생사生死의 가지와 꽃이 실로 조화로웠다.

나는 정당매 주변의 단속사지 삼층석탑을 끌어들인 월매月梅로 그렸는데 오로지 수묵만으로 표현하고

달과 매화는 흰 바탕 종이를 그대로 남겨서 그렸다.

그런데 이 정당매가 다음해(1999년)에 밑동만 남기고 무참하게 베어져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듬해 두 노부부마저 닷새 간격으로 연이어 타계하였으니

매화의 원형과 지킴이가 사라진 것이다.

이 같은 정당매 사연이 있기 전 해에 운명처럼 매화를 만나 사생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서글픈 매화팔자요,

나에게는 행운인가. 어쨌던 매화나무는 잘렸고 그림은 남았으니 후일 이곳의 암향暗香을 찾아

단속사지의 정당매 등걸을 어루만지며 옛 사연을 추억하는 일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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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쪽 4장을 제외한 모든 사진은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의 일환으로

지난 2009년 1월 22일 부터 3월 29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렸던

"探梅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 展에 출품되었던 작품을 필자가 직접 찍은 것에다가

특별전 도록에 실린 작품내용을 일부 카피한 것이다.

 작품 해설에 관한 내용 역시 도록에 실린 내용을  참고했음도 아울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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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문화의 수도를 지향하는 광주광역시의 플랜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문화의 격을 단 시일에 높인다는게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공감하기에.

 

 작금, 광산구 소재 '월봉서원'에 현대판 고품격 문화살롱을 지향하는'체험관'을 개관하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salon de wolbong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

 

서양에 '니체가 있다면 모름지기 조선엔 기대승 철학의 존귀함이 있다고 했다.

고봉의 사상이 살아 숨쉬는 월봉서원은 춘추대제  지내고서 문을 걸어 잠그는 따위의 

박제된 공간을 결단코 사양하는 것이다.

 

진즉부터 호남학의 산실로 자리매김 되어온 '너브실의 월봉서원 앞에

철인의 사상을 널리 펼치게 될 번듯한 공간이 하나 마련되었음은 기쁘기 한량없는 일.

개관기념으로 실내악 연주와 더불어  필자의 신앙으로까지 자리매김한 '탐매'를 주제로 삼는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고귀한 성품을 지닌 애일당 고봉학술원의  강기욱 선생님의 부름으로 행사에 참여했다지만

기실 선생의 초청이 아니었다고 해도 자진해서라도 그곳에 달려가고 말았을 터.

salon de wolbong의 첫 번째 주제로 ''매화로 보는 우리문화'가 초간택初揀擇된 것은

기고봉의 철학을 논하고 펼치는 서막으로서 너무나도 합당하고 당연한 것.

 매화가 지닌 이미지와 상징성을 놓쳐선 아니되기에 매화 그리고 암향暗香부터 초대한 것이리라.

장미나 백합이 예수를 상징한다면 불교는 연꽃이요, 유교라면 단연 매화 아니던가. 

설한풍을 견디며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야 말로, 청빈함 속에 대인의 기개를 펴는

君子의 덕스러움에다 향기로운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상징성에 있어 모름지기 완벽궁합.

 

 매화도를 비롯,

선비가 가까이 하는 매화의 모든 것에는 단순히  꽃을 완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의취意趣와 필의筆意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그런 은유성을 상징하는 매화이기에 고사들은 기꺼이 탐매길에 나서고

매화의 고결함을 닮고자  지극 정성으로 암향을 초대했던 것이리라.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점을 들자면

  탐매의 대상이 되어줄 고매古梅에 대한 대중의 인식 부재가 가히 통탄스러운 수준.

매화가 들어간 고미술품의 소중함은 철저히 챙기면서도

정작 살아 있는 우리 곁의 소중한 고매古梅에 대한 대접은 한마디로 허접 수준이라.

 

이 기회에 한 마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라 안 고매에 대한 관리 수준을 가히 국보급 수준으로 상향시켜 달라는 주문 말이다.

이건 결코 황당한 얘기가 아니다.

머지않아 토종 고매에 대한 관리 부실에 통탄할 때가 반드시 오고 말 것이기에.

 

대저,  문화라는 것은 유무형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 

모두들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시라.

높은 가격에다 명품으로 잘 알려진 국보급 골동품 한 점 보다

살아 있는 이 시대의 한 그루 고매가 훨씬 가치있고 소중하다는 필자의 굳건한 믿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