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탐매
(庚寅探梅) ~13~
● 미암매(
眉巖梅) -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 2010. 4. 3 (토)
모현관 연지
미암(眉巖) 유희춘 (柳希春)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아버지는 계린(桂麟)이며,
부인은 여류시인인 송덕봉(宋德奉)이다.
처음에 최산두(崔山斗)에게 배우고, 뒤에 김안국(金安國)에게 사사(師事)했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며,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수찬·정언 등을 지냈다.
1546년(명종 1)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알력이 원인이 되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귀향했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종성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곳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황(李滉)과의 서신교환을 통하여
주자학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으며,이 지방 유생(儒生)들을 교육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석방되어
지제교·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예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낙향했다.
그는 당시 사류(士類)들과 같이 문장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에 몰두하여
선조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 강론에 주력했다.
또한 〈주자대전〉을 교정하고, 선조의 명을 받아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을 편찬했다.
이이(李珥)와 함께 경서의 구결(口訣)과 언해(諺解)를 상정(祥定)하는 등
유교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저서에 〈미암집〉·〈속몽구 續蒙求〉·〈속휘변 續諱辨〉·〈역대요록 歷代要錄〉·〈천해록 川海錄〉·
〈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강목고이 綱目考異〉·
〈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이 있다.
담양 의암서원(義巖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무장 충현사(忠賢祠) 등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 백과사전에서 발췌 -
미암일기 (眉巖日記)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柳希春:1513~77)이 남긴 일기.
보물 제260호. 11책. 필사본. 원래 14책이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1책뿐이다.
이 일기는 1567년(선조 즉위) 10월 1일에서 1577년(선조 10) 5월 13일까지 약 10년 동안
조정의 크고 작은 사건, 중앙·지방의 각 아문의 기능, 관리들의 일상생활,
저자가 홍문관원·전라도감사·사헌부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내용 등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보고 들은 바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제1책은 1567년 10월 1일에서 1568년 3월 29일, 제2책은 1568년 3월 29일에서 12월 5일,
제3책은 1569년 5월 22일에서 12월 30일, 제4책은 1570년 4월 24일에서 7월 8일,
제5책은 7월 9일에서 12월 25일, 제6책은 12월 26일에서 1571년 12월 3일,
제7책은 1572년 9월 1일에서 1573년 5월 26일, 제8책은 1573년 6월 1일에서 12월 30일,
제9책은 1574년 1월 1일에서 9월 26일, 제10책은 1575년 10월 27일에서 1576년 7월 29일,
제11책은 부록으로 저자와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개인 일기로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이이의 〈경연일기 經筵日記〉·〈석담일기 石潭日記〉와 더불어 실록편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전의 사료가 거의 없는 현재 상태에서
조선 중기의 정치사·사회사·경제사 연구의 기초자료가 된다.
특히 동서분당 이전의 정계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임체(任遞)와 순력(巡歷) 및 감사의 직무수행,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관의 관계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실려 있어
당시 수령제 및 지방제도 연구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외 사회일반의 풍속·문화·물산 등 당시 사회사·문화사를 알 수 있는 풍부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원래 일기 원본은 저자가 죽은 후 산일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9대 후손인 경심(慶深)·정식(廷植)이 일기 원본을 발췌해 〈미암집〉에 넣어 간행했다.
그후 1936~38년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사료총간 朝鮮史史料叢刊〉으로 5책을 간행했다.
일기 원본이 흩어져버렸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에서 〈미암일기〉를 간행할 때, 〈미암집〉을 바탕으로
일부분(1574년 10월 9일에서 1575년 3월 11일, 1576년 8월 3일에서 1577년 5월 13일까지의 내용)을 보충했다.
그리고 4권 4책의 필사본으로 현전하는 〈미암선생일기초록 眉巖先生日記抄錄〉은
〈미암집〉이나 〈미암일기〉 원본에 없는 내용이 일부 들어 있어 이것들을 보충할 수 있다.
- 백과사전에서 발췌 -
"미암일기"의 본향,
'연계정'과 '모현관'을 거느린 '미암종가'.
연지를 돌아 '종갓집' 돌담을 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쪽으로 '분홍미암매'의 우아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정도의 찬사를 부여 해서는 어쩐지 성에 차지 않는다.
적어도 '황홀한 아름다움' 이라는 수식 정도는 동원되어야만이
'미암매'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터.
명매와 고매의 라이브러리가 너무나도 차고 넘치는 곳 담양.
그 중에서도 '미암매'가 차지 하는 비중이랄까?
그 당당함의 포스는 군계일학이라 해도 절대 지나침이 없으리라.
은은한 분홍매의 색감에다, 천지분간 뭇 할 정도로 터지는 꽃송이.
기세 좋게 뻗어 올라간 줄기에다, 기묘하게 비틀어 댄 가지.
평지가 아닌 돌 축대 위에 자리한 '미암매'
당연히 올려다 볼 수 밖에 없는지라 훨씬 장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더더구나 주위에 몇 그루의 백매를 기세 좋게 거느리고 있는지라
그 배색의 아름다움까지 겹쳐져 '미암매'의 기품은 더욱 더 배가 되는 것이다.
둥치 아랫 부분엔 상사화의 초록 잎새가 두텁게 깔려있고
분홍매를 배경으론 푸른 청죽이 마치 병풍 을 두르고 있는 모습인지라
사군자 중, 꼭 국화 하나만 빠진 형상.
역사적으로 볼 때,
경인년(庚寅年)은 뭔가 터지는 등의 기(氣)발이 쎈 해라고...?
그래서 경인년의 '미암매향'도 이토록 핍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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