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
● 2010. 2. 20 ~ 21
소풍가(笑豊家) 일출
웃음이 넘쳐나는 집이라 ...!
언필칭, 쥔장의 철학적 사고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당호가 아닐수 없다.
대목장 윤정우 선생께서 공력을 다해 지었다는 소풍가 본채.
경쾌한 팔작지붕에다 굵직한 육송 기둥,
금강송으로 정성을 다해 짜 맟춘 문살에다 황토 흙벽돌로 마감한 벽체,
피튼치트 향이 일품인 편백으로 마감한 높다란 천정.
야생화에 정통한 손길로 정성을 다해 가꾼 꽃 들과 멋스럽게 도열한 세 그루 소나무에 이르기까지.
모평 마을의 아름다움과 소풍가의 툭 트인 분위기.
넉넉한 오지랖과 품격 높은 대화로 객을 맞아주는 쥔 내외,
이런 처소에 들어 조용히 나를 들여다 볼라치면
행여, 심안(心眼)의 열림과 환희를 맛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모평 한옥 마을
'소풍가' 쥔 내외의 융숭한 접대 속에 하룻밤을 묵고나서
아침 산책에 나섰다.
맞배집, 우진각집에다, 팔작집과 초가집에 이르기까지 모평마을은 각종 건축물의 비교 전시장.
멋스런 마을 담장길을 따라 들어 오면
모평마을의 보물 천년샘(안샘)에 이르게 된다.
햠평(咸平)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1409년(태종 9년) 부터라고.
고려때 부터 각각 치소(治所)가 있었던 함풍현과 이 곳 모평현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두 현의 지명에서 한 글자씩을 취합하여 함평으로 불리우게 되었다는데,
위 샘물은 과거 동헌 내야에 있었던 우물로 그 역사가 자그만치 천년에 이른다고.
동네 뒷편 임천산의 줄기가 마무릴 짓는 지점으로, 죽로차가 자라는 울창한 대숲을 거쳐 샘물이 솟구친다.
차밭과 대밭을 거쳐 솟는 물이라면야 더 이상의 중언부언은 사족에 불과.
안샘 앞에 자리한 古家 '모평헌'
울창한 대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의 합창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집.
목재를 7년 동안 바닷물에 담군 후 꺼내서 자그만치 15년을 말린 다음
장장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지었다는 고가(古家).
모평헌 쥔장 내외의 세련된 품성을 기웃대는 맛 이야말로
이 민박집에서 느끼고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수확이라 확언할 수 있다.
또 다른 古家
해보천을 따라 조성된 하천 보호림
영양재(潁陽齋)
조선조 천석꾼 윤상용이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원래는 저 계단 아래 연못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음이 아쉽다.
네 개의 기둥에 내 걸린 주련(柱聯)의 내용인 즉,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공자님의 말씀.
‘非禮勿視(비례물시) 非禮勿言(비례불언) 非禮勿聽(비례물청) 非禮勿動(비례물동)
영양재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반드시 임천산 산책에 나서볼 일이다.
삼나무, 소나무, 편백, 대나무 등등의 평이한 수종에다
야생차나무와 호랑가시나무 군락에 이르기까지.
뒷동산 수준의 임천산 등로가 주는 상큼함은 매력이 철철 넘친다고 해야겠다.
물레방아 너머로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았다는 고려조 문숙공 윤관(1040∼1111년)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수벽사가 있다.
그 옆으로는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병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다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신천강씨 부인을 기리는 "열녀비"가 서 있다.
열녀비 옆에 선 또 다른 비석은 충노(忠奴) 도생과 충비(忠婢) 사월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 노비부부인 도생과 사월은 신청강씨 부부가 죽자 주인의 어린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과거에 급제시켰다고. 훗 날, 그 아들이 유언으로 노비부부의 비를 세우라고 했기에 지금까지도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노비부부의 제를 지극정성으로 올린다고 한다.
수벽사 내부의 정자
산림 유전자 보호림
느티나무 30본, 팽나무 12본, 왕버들 1본.
최고수령은 300년, 수고 15 ~30m, 둘에 1 ~ 4.5m
인공으로 조성된 방풍림
왼편으로 보이는 정자는 연지 가운데 자리한 임곡정으로 구름다리가 놓여있다.
동여정
모평마을 뒷편, 파평윤씨 세장산 자락에 세운 정자로 연지를 조망하는 곳에 위치.
지금은 연지의 크기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엔 정자 아랫쪽까지 물이차 있었던 모양.
맑은 날엔 광주 무등산을 비롯 시원한 풍광이 펼쳐진다는데...
한 말의 애국지사이자 의병장이였던 면암 최익현을 비롯, 여타 여러 인물들이 찾았던 곳이다.
정자 내부에 걸린 중건기 등의 편액은, 지각없는 자 들이 하도 탁본을 떠 가는 바람에
읽어 내기가 난망할 정도의 상태.
동여정 뒷편 파평윤씨 세장산에 들어선 까닭은
"호랑가시나무" 군락을 보기 위해서.
겨울 날,
빨간 열매와 초록광택 호랑가시 이파리 그리고 소담스런 흰 눈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최곤데.
올 핸 빨간 열매도 전무하고 눈 도 없고...
운곡마을 정자
모평마을에서 '송산제'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운곡마을이 보인다.
1460년께 윤길(尹吉)이 90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의 산수에 반해 정착하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모평의 파평 윤씨 입향조인 윤길은 당시 ‘골짜기에 끼는 구름이 신선도를 보는 듯
천하일품의 경관’이라고 감탄해 마을이름을 ‘운곡(雲谷)’이라 명명했다고 전한다.
운곡마을 정자에서 조망한 월양산(지도상에 월암산으로 표기340m)
등로가 잘 나 있는 가벼운 코스로 작은 높이 임에도 불구하고 조망은 매우 뛰어난 산이다..
해보 상곡리 운곡 지석묘군
남방식 계열이 대부분으로 총 22기가 분포되어있다.
송산제
저수지 둘레로 약 4km의 아름다운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송산제 옆 길가에 선 망향정
잠월미술관에서 바라본 불갑산 연실봉
함평 용천사 저수지에 선 비룡승천상
잎과 꽃의 영원한 별리
용천사 꽃무릇 군락 초록 이파리
용천사 대웅전 돌계단의 난간 부분에 새겨진 연화문
내가 꼽는 용천사 최고의 보물
내가 용천사를 즐겨찾는 까닭은 오로지 이 석조 연화문을 보기 위함이라
용천사 석등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 -
석등 8각 간석에 새겨진 명문
숙종 11년에 조성했다는 내용과 시주자 이름을 새겨 놓았다.
" 때르릉 ~~~~~~~ "
" 어이~~ 동생인가? "
"나 '소풍가' 尹 일세, 보고 싶으니까 지금 빨리 오시게나,
한 삼십분이면 모평까지 오시것제...?"
불문곡직, 악셀페달을 바닥에 붙인채 달려간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
간만에 뵙는 '소풍가'와 '모평헌'의 두 분 형님 내외.
다양한 이력과 깊이 있는 인생 역정에서 체득하신 지혜를
아낌없이 들려주신다.
형수님들께서 정성으로 차려주신 주효에다 감성 만정의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함평천지의 밤은 이미 진즉에 깊은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이틑날 새벽.
차나무와 대밭에서 걸러져 나오는 '안생'을 찾아가 물 맛의 여전함부터 확인.
모평천지 해오름.
너무나 매력적인 동네를 찾아와서일까?
너무나도 열정적인 일출이었고 유난히도 붉은 색감이었다.
'자연 > 산행·여행·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따라 찾아간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을 김천(金泉) (0) | 2010.03.02 |
---|---|
팔공산 (八公山) (0) | 2010.02.24 |
축령설뫼 (0) | 2010.02.12 |
삼신봉에서의 특급 조망 (0) | 2010.02.07 |
만복대(萬福臺)능선에서 지리 연봉 감상 (0) | 2010.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