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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축령설뫼

 

 

 

설뫼

 

        - 백여 고 중 영 -

 

고운님 저고리 속 흰살은 저리 부어

비단결 소복한 은애(隱愛)로 쌓여도

그립다,

목 안에 머금어 지엄(至嚴)이니

 바람조차 심히 송구스러워 밟고 지나간 발자국 하나 남기는 법 없고

뛰놀던 메아리도 목청을 눕힌 여기서는

미미한 나부낌도 눈이 부시어

사람, 사람이 여태 저지른 짓 맑게 씻기니

참선에 든 고요만 저리 돋보일 뿐

묶였던 세상 일들이 비로소 끈을 놓네.

 

백결선생의 거문고 소리 돌아와

봉우리, 계곡, 능선 가리지 않고

스스로 열어 길을 닦느니

고운님 저고리 속 살 아파하실라

설피마자 벗어던진 햇살이

 맨발인 채

조심 조심 서편으로 가고 있는 중이네

 

 

 

전생에 대하여

 

 

            -백여 고 중 영 -

 

 

어느 천년 저쪽

물레의 원심력 위에서

빙빙 돌아가던 찰흙이

 청자가 되고

 백자가 되고-

 

 그 환생의 비밀을 지키려고

 비워둔 자배기에

 모진 세월이 그득히 담겼던지

 무게를 못 견딘 살갗에

 주룩주룩 잔금이 가면서

 속속 드러나는 전생이다.

 

 내 전생도 흙이었다지, 아마

 그래서 지긋해지면

 나이에 잔금이 가는 거라지-

 

 아하!

 어느 천년 뒤의 나도

 혹,

 누구의 가보가 되어있을까?

 

 

 

징조

- 백여 고 중 영 -

 

*복수초 소식이 들려오는 세월의 가장자리에서-

 

이 땅에 와선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봄이

 섣달 하순 기우는 달을 순산하느라

 용트림 시작한 삭망 저쪽 울타리 가

배앓이 참아오던 작은 새암의

 모처럼 썩썩 풀린 양수에 머리를 감더니

 겨우내 인색했던 손질 탓에 뒤엉킨 결을

 인정스런 햇살로 나긋나긋 빗고 있다.

 

 근동에서는 젤로 추워

 시집 간 뒤 석삼년은 배 녹여야 애가 들어선다는

일, 내원

 이, 장두

 삼, 초치 처녀들도 오늘은 저절로 풀려

 단전 아래가 쩌릿해 올지 모르겠고

 겨우내 볼떼기 잔뜩 부어있던

 구암 말 노총각 선동이네 뒤란의

 오지항아리 오줌통에서 자지러지는 오줌발 소리에

 모본단 진홍 겹 치맛자락을 흠씬 적신 동백이

 저 혼자 얼굴 붉히며 들숨 가빠하는 양을

 소대한을 건너오느라 속창시 시달린 입춘이

 머그믈 댁네 지시락물에 드리당창 엎드려

 목을 추기는 척

 뱁새눈 비껴 뜨고 훔쳐보는 눈치더라만

 

 겨울 꼬랑지 그거 길어봤자

거그서 거갈만 헐테지

 

 

 

다사도(多獅島)

 

- 백여 고 중 영 -

 

**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나부다.

 

솜같은 피로가 밀려드는 오후 여섯시 퇴근길

 공덕동 로타리를 지나다가

세월의 앙금을 벗기는 초침소리에 놀라

 다사도 가는 뱃길이 출렁출렁 떠오르면

 갈기봉 눈썹달 아래 서리밭을 갈며

 날 기다릴 누이의 맨발이 시렵겠구나.

 

 나 이제 풀어 헤칠 여장도 없이

 억센 팔뚝 휘두르는 해풍 속에

 잊힌듯 엎드렸을 다사도에 들어

 나 한번 다시 보기가 평생의 소원이라는

 아! 박속같은 누이의 손을 잡고

 쌓인 세월에 발목 푹푹 빠지는 갈기봉에 올라

 까치발 발갛게 언 누이의 손 호호 불어 지내리라.

 

주름잡힌 바다의 흰 머리카락 곱게 빗겨온

 착하디 착한 누이의 여생을 위해

 자운빛 은은한 꽃가마 엮으며 지새리라.

 거친바람 쓸린 흉터, 가슴깊이 박혀 끝내는 못잊을 작은 섬이여 **

 

 

 

길에서. 7

 

- 백여 고 중 영 -

 

며칠 째 벼르고 있었을까.

 

축령산 들독재를 구부정하게 오르다가 만나는

그 소리개 한마리-

 

날렵한 몸맵씨에 수려한 날개를 펴고

상승기류 속을 은은히 활강하는

내 젊은 날의 꿈도 같고

내 젊은 날의 사랑도 같은 그 비상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그래! 나도 한 때 너처럼 날았었지.

 

그말 해주고 싶은 심사를

딸꾹질 참듯 꾹꾹 참으며

훠-이

손 한차례 흔들어주며 배웅하고는

꺼칠한 입술에 침 한번 바르며

발뿌리에 시선을 떨구면

어느 결에 키보다 훨씬 웃자란 그림자 하나 

멀뚝하니 날 올려다 보는 정황을 

못생긴 詩 한편에 정성껏 담으려다

그만 놓치고

헛헛한 가슴 허둥대기 어제던가보네. 

 

세상 일 훌훌 털고 날아가다가 돌아보며

순장바다 속울음같이 꾸-우-억-

 

저도 나만큼은 외롭단 뜻인가?. 

 

 

 

/틈/에 대하여

 

- 백여 고 중 영 -

 

***

용마루에서 졸던 오후가 성큼 성큼

 지상으로 내려선다

. 길을 떠날 모양이다

. 낮잠 깬 바람의 바튼 하품에

 팔랑

조심성 없이 옮겨 앉던 낙엽의

 치마 속이 얼핏 드러나 버린다.

 

 호시절 누워 보내던 그늘이 실눈 흘기며

 츳츳- 츳츳츳

 

외벽과 내벽사이

 단열공사를 끝낸 은사시나무가

 몸에 붙은 검불을 털어내는 시간

 有, 無 사이에

 /와/라는 文字의 분비물을 끼워 넣으려다가

실패한 내가 돌아앉으며

 “씨팔”

잡혀가지 않을 만큼의 죄를 지어본다.

 

어떤 행위가 규정을 유보받는

 죄와 벌의 틈새기 속에서 우리는

 지닌 형량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

 

―「틈」의 전문

 

 

 

採集經濟 시절

 

- 백여 고 중 영 -

 

눈을 뜨면 아주 고전적인 햇살과

 세월을 머금고 공손히 엎드린 땅에서

 밤사이 이슬을 빚다간 어둠과

 귀목나무 가지에 걸터앉은 느려터진 바람과

 빈집의 허물어진 담벼락과 부서진 기왓장들

 모두 한 패지에 그려지는 풍경 속에서는

 주황색 잘 익은 찰감도 꽂발 딛은 손에 닿고

 망설임 없이 툭 내려 뛴 은행 알과

 철늦게 날아든 노랑나비 두 마리와

 나비 촉수같이 동그랗게 감돌아나간

 늦호박 가느다란 애끼손가락에 걸린 약속이

 미끈이 하늘소의 눈에 잘 뜨이기도 한다.

 

 몸짓 잽싸지 못한 늦가을이 서성대는

 이 산협에는 월동용 시금치 한 이랑의 콧노래도 파랗고

 깊이 찔러 넣은 아궁이에서 삭정이가 타는 시간

 줏어다 건 양은솥에서 물이 끓으면

 아침에 생략했던 세수를 해질녘에야 하는

 살집이 포동하고 실팍한 석양도 있다.

 

 사람살이 끝나면 모두들 돌아간다는데

 돌아가는 곳을 몰라 주소를 못 남기겠지만

 남녀가 사타구니 가릴 줄도 모르고

 풀뿌리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먹기 바쁘던

 그적으로 돌아와 보니

 건천수도 말라버린 새암 가장자리

 돌 틈 켜켜이 찔러두고 가신

 참다움에 대한 선인의 말씀들이

 푸른 이끼로 곰실곰실 자라있고

 스스로 그러함으로 그러했더라는

 敎書 속서에는 생각도 말씀도 조금씩 아껴 감춰두신 신중함이

 눈을 맑게 닦아야 보이는 풀씨로 곱게 여물어

 흙발로 돌아올 사람들 기다려 엎드린 채 엄숙하다.

 

 

 

 

김유정의 유정천리의-

 

- 백여 고 중 영 -

 

 고운 이에게 보낼 춘란 몇 촉을 캐려고

 입산금지 표시가 좌로 49도쯤 기울어져 있

는 돼지 불퉁재를 돌아 더 깊이 들어가다가

 버려진 빈집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쥔 없는 안방에 내려가 누운 봄볕이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를 읽는 장면과 만났다.

 

 불치병이 든 서방일망정 안 버리고 못 버리고

병구완할 약값을 벌어보겠다고

 다른 사내에게 몸을 파는

 기박한 그 아낙의 팔자를 읽는 대목에서

 예순 번도 넘게 재우쳐 목이맨 산바람이

 하마! 더는 지겨운지 부스스 털고

 휘적거리며 떠나는 장면에

 솔새 한 마리

 새로운 유행가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있었고

 그 노랫말을 받아 긁적거린 내 메모지에는

 /세상은 때로 슬픈 것이구나./라는 글귀가

느낌표 생략된 채 적혀 있었다

 

 

. ** 다천님 우리가 찾지 못한 이데아는 과연 있을까요.

 

 

 

산 그리메 

<茶泉 김환기 선생의 지리산 기행에 부쳐>

 

- 백여 고 중 영 -

 

 

                                                         무작정 높아도 좋은 저 影峰

                                                         나붓이 훑고 가는 숨결 묶느라

                                                         조선의 한 산아비

                                                         잽싸게 붓 놀렸겠다.

 

                                                         억새는 억새여서 억새고

                                                         바람은 바람이어서 바람인 이 봄나절에

                                                         生人의 몸으로 승천하셨다는 단군님

                                                         수염 근엄하게 나부낀 누리누리

 

                                                         만년을 지쳐간 세월의 발자국

                                                         들쑥날쑥 찍히고 

                                                         골짜기에 모여 웅성거리는

                                                         자작나무 가지 가지

                                                         뽀시시해지는 눈꺼풀 부벼쌌는

                                                         아! 지리산 성삼봉

 

                                                         말없고 동작없는 그대로

                                                         태고의 가르침 雄心으로 품고

                                                         떠나는 겨울도 찾아드는 봄도

                                                         무상한 세상사인줄로만 여기며

                                                         오늘은 오늘처럼

                                                         내일은 내일처럼

                                                         그곳에 있어 산일테지. 

 

 

 

 

 

 

촉(觸)

 

- 백여 고 중 영 -

 

땅 속에 숨었던 토끼

얼마나 추웠을까.

 

불끈 일어나는데

귀 퍼렇게 얼었네.

길에서. 8

겨울 모통이를 돌아가던 눈발이

수정고드름의 정강이에 걸려 비틀거리자

시간의 손톱에 찢긴 계절의 거튼 사이로

솔솔 불어라 봄바람.

 

버들개지 꿈 부풀어 도도라진 눈자위

봄방학 숙제인 양 열심히 드려다보며

양지쪽 매화봉오리 발그랗게 내비친

수줍음 타는 소녀는-.

 

 

 

 

 

 

 2010. 2. 12 (금)

 

 


 

 

 

 

설을 이틀 앞둔 축령산 자락의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