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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삼신봉에서의 특급 조망

              ■ : 청학동 - 삼신봉 - 내삼신봉 - 쇠통바위 - 상불봉 - 상불재 - 불일폭포 - 쌍계사

              ■ : 12.5 km / 7 시간 소요

              ■ : 2010. 2. 6 (토)

 

 

자작나무위의 하늘 

 

고스락의 표정

 

외삼신봉과 삼신봉을 잇는 능선에 올라서자니

 

   코 앞으로 달려드는 지리산 천왕봉

 

 삼신봉에 올라선 산객들

 

대자연 앞에...

 

 삼신봉에서 조망한  천왕봉에서부터

제석봉, 장터목, 연하봉, 촛대봉, 세석평전, 영신봉, 칠선봉에 이르는 지리 라인

 

외삼신봉

 

 

 

 

 

 벽소령, 명선봉, 토끼봉 , 반야봉, 노고단, 왕시리봉으로 이어지는 라인

 

 내삼신봉에서 조망한 쇠통바위로 이어지는 라인

 

 내삼신봉에서

 

 

 

 

 

삼신봉에서 한벗샘, 음양샘, 세석평전으로 이어지는 라인

 

청학동 하경

 

 

 

 쇠통바위

 

 쇠통바위에 올라 조망한 지리 연봉

 

쇠통바위에서 조망한 청학동, 삼성궁(오른쪽), 묵계저수지

 

 쇠통바위 최정상에서

 

쇠통바위에서 조망한 천왕봉, 제석봉 일대

 

 

 상불봉

 

 '갱정유도회'의 이샹향 청학동 하경

 

 

 

 

불일빙폭

 

 

 

 

 

 불일암  앞 마당에 펼쳐진 산수화

 

불일암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 진감선사는 속성이 최씨(崔氏)이며 전주 금마(金馬) 사람으로서,

804년(애장왕 5) 당(唐)에 들어가 창주(滄州)의 신감선사(神鑑禪師)에게 득도한 후 830년(흥덕왕 5) 귀국했다.

진감선사의 법맥(法脈)은 구산선문(九山禪門)과 같은 독자적인 문호로 발전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세력을 크게 부식(扶植)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 비는 887년(정강왕 2)에 완성되었으며, 사비(四碑)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비문의 글씨는 최치원의 친필이며, 사비 가운데 가장 짧은 2,500여 자이다. 서(序)와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의 첫부분에서는 유(儒)·불(佛)·노(老) 삼교사상(三敎思想)의 근원을 파고 들면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다음에 진감선사의 생애와 경행(景行:밝은 행동)을 간단하게 서술했으며,

끝부분에서는 비문을 짓게 된 경위와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이중 특히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夫道不遠人人無異國)라고

시작되는 첫부분은 최치원의 3교사상에 대한 결론으로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비문은 우리나라의 불교사·불교사상사·선종사(禪宗史) 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쌍계사의 유래 및 불교음악인 범패(梵唄)가 언제 이 땅에 들어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어,

사찰의 역사와 국악사(國樂史)를 연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 사산비명(四山碑銘)에 대한 이해

 

▶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등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을 말 하는 것이다.

그중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찬(撰)뿐만 아니라 서(書)와 전액(篆額)을 아울러 했다.

숭복사지비는 인몰(湮沒)해 전모를 알 수 없다가 1931년 경주 동면(東面)에서 잔석(殘石)이 나와 그 편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문의 문체는 4·6 대우(對偶)와 6·6 대우가 주류를 이룬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이다.

특히 문장 밖에서 사실을 끌어와 뜻을 증명하고 옛것을 빌려 현재의 뜻을 증명하려는 용전(用典)이 많으면서도, 

대우구(對偶句)를 만들 때 필요한 고사(故事)나 고언(故言)을 잘라 모으는 전절(剪截)과,

발췌한 고사성어를 개역(改譯)해 자신의 글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는 융화(融化)의 방법을 잘 구사해

화려한 어사(語辭)의 수식과 함축미·전아미를 보여준다.

즉 불교를 상당히 이해하고 특히 선종에 공감하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런 사상적 내용보다는 문장 수식에 더욱 깊이 유의했음을 알 수 있다.

'사산비명'은 광해군 전후에 철면(鐵面)노인이라는 사람이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 孤雲集〉 중에서 뽑아내어 이름붙인 것이다.

불교학인들에게 송습(誦習)되면서부터 그 과외독본을 이루게 되었고, 순조와 헌종 때에 홍경모(洪景謨)가 주해를 더해 유행하게 되었다.

석전노사(石顚老師)는 다시 정주본(精註本)을 만들었는데, 이외에도 여러 주해본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사산비명'은 최치원 문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상사와 한문학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 위 해설 내용은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했음을 밝힌다 -

 

 

 

 

 

 


 

 

 

 

너무나도 청명하고 화창한 날.

삼신봉(三神峰)에 오른 경향각지 산객들 모두가 한 마디씩 던지는 감탄사 .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풍경과 날씨가..."

"너무 좋아"  "너무 멋져" ...

 

이토록 속 시원한 조망을 즐겨 본 지가 도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마치 쪽물이 배어나올 것 처럼 푸른 지리산의 하늘과, 일망무제로 뻗는 시야의 확보는

겨우내 부연 시야로 인해 답답했던 가슴을 일거에 씻어 내리는 청량제.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과 툭 트인 시야 속에 어찌 발걸음이 쉬 떨어질 수가...

비박 장비라로 가져왔더라면 당장에 주저 앉고 싶을 만큼의 특급 유혹.

내삼신봉과 쇠통바위에 올라 하염없이 즐긴 지리연봉을 비롯한 사방팔방 조망.

 

상불봉, 상불재를 거쳐

발바닥에 불이 날 만큼 바윗돌 투성이의 쌍계사에 이르는 기나긴 내리막.

덕분에 발 바닥이 얼얼.

 

오늘 삼신봉에 올라 즐긴 특급 조망의 가슴 시린 여운은 

 아마도  아지랑이와  매향 흩어지는 봄 날로  내내 이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