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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탐매

'09 탐매(探梅) 여섯 번째 여정

          '09탐매(探梅) 여섯여정

 

              ▶ 노씨매( 盧氏梅)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 2009. 3 . 6 (금)

 

대고대(大高臺) 경남 향양군 지곡면 소재

 들판 가운데 커다란 바위 하나가 덜렁 놓여있다고 해야하나, 솟아있다고 해야하나?

 바위를 위에서 보면 거북의 형상이요, 아래서 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수승한 형상이라는데...


 

 

정면으로 다가가니 황도(黃道)라 씌여있는 기이한 형태의 조형물이 나타난다.

 

기와를 덮은 건물 한 채와 뒷편 바위엔 청근정(靑近亭)이 올라 앉아있다.

 

정자를 지나 대고대 위에 오르니 수 십명이 너끈히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면이 나타난다.

바위 주변엔 오죽(烏竹)을 비롯한 각종 수목들이 울창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비롯,

이전 저런 각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명현달사들의 시회 장소로 널리 애용되었던 듯.

 

 커다란 소나무 고사목 아래에는

추사가 직접 새겼다는 석송(石松)이라는 각자가 남아있다.

 

글씨를 새기기엔 장소가 불편해서 였을까...?

꽤 힘차 보이는 글씨체는 분명한데, 새긴 솜씨는 다소 엉성해 보였다.

 

대고대 옆으론 남강이 흐르고, 앞 쪽으론 88고속도로가 지난다.

 멀리 보이는 산은 '사구산성'과 '봉화대'가 있는 연화산(443.2m)이다.

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 곳에 올라 산더미 같은 시를 읊었다는데, 그 중의 하나.

 

 百尺孤臺一望通

 登臨景像浩無窮

 半天霞鶩夕陽外

 十里湖山秋影中

 酒席歡情兄及弟

 門欄勝事畵難工

 逢場莫浪催歸騎

 直待更深月出東

 

송탄집 松灘集  정홍서 鄭弘緖 1571-1648

 

 

 

 

 

청근정 아래 서 있는 구졸암양희신도비(九拙岩梁喜神道碑)

 

 

노둣돌을 밟고 들어가야 하는 함양 정여창 고택

 

솟을 대문에 이르러 위를 바라보면

 

충신, 효자 등의 정려를 계시한 패가 자그만치 다섯개나 결려있다.

 

일두 정여창 고택의 사랑채

 

석가산과 사랑채

 

안채

 

매대(梅臺) 그리고 측간

 

안채

 

 

추사가 직접 썼다는 "탁청재"

퇴계를 비롯, 조광조, 김굉필, 정약용, 김정희, 허련, 대원군,

근세의 허백련과 남농에 이르기까지 헤아리기 어려운 시인묵객과

명현달사들의 집합처요 사랑방이었다는 고택.

 

 

사랑채 방문 위에 결린 커다란 글씨

 

 

개평리 개울가 종바위와 우물

 

개평리 개울 건너 언덕엔 준수한 소나무가 도열해 있다

몇 년만에 다시 찾아갔더니 그 중 한 그루가 그만 죽고 말았다

 

개평리 노씨댁의 노씨매(盧氏梅)

 

함양 학사루(學士樓)

 

 

경남 통영의 옷칠 전시관에서

 

자개와 옷칠 그 환상의 조화

 

 

 

 

 

 

 

 

 

 

 

 통제영지(통영시 문화동)

조선시대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었던 자리

 

세병관(국보 제305호)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1605년 건립.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구조 단층 팔작집이다.

 

 

 

분명, 괜찮은 고매가 있을거라는 믿음을 갖고  찾아간 함양의 대고대(大高臺)

들판의 논 사이로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가니,

도저히 들판 가운데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바위와 함께 울창한 나무로 둘러쌓인 모습,

  마치 들판 가운데 섬 처럼 느껴지는 비밀스런 공간 앞에 서니,

황도(黃道)라 적혀있는 괴이한 형태의 문이 나타난다.

마당 건너 대고대를 배경으로 기와집 한 채가 서 있는게 보인다. 

그리고 뒷편 바위 위에는 정자 하나가 서 있는, 말 그대로 그림같은 곳.

이 곳까지 안내한 동행자가 마당에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선생님 계십니까...?"

 

이곳에 거주하는 분과는 이미 익숙한 사이인 듯.

안광이 번쩍이는 느낌의 쥔장께서 문을 열고 나오더니 어서 들어오라는 손짓이다.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잠시의 쉴 틈도 없이 달변을 쏟아내시는,

올 해 75세 되신다는 선생의 존함은 석정(石井) 정상기(鄭相基) 선생.

명함을 보니 누런 글씨로 "황도"라 적혀있고 그 아래로는 파란 글씨로

"광제원'이라 적혀있다.

"황도(黃道)가 도대체 뭘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탐매여정 중 이라는 말씀을 드리자 마자 ,

매화는 정절을 의미한다는 말씀에서부터  잠시도 꼬투리를 잡을

틈을 주지 않고 일사천리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가만 얘길 들어보니 일부 선생의 "정역"과 몹시 흡사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게 아닌가!

거기에다 과거  '모악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았노라는 말씀에다 

 이른바 '모악산'파 들의 역정과 부침에 대해서도 훤 하게 꿰고 있었다.

"황도"가 뭔지 감이 오는 순간이다. 

깡통에 담긴 달짝지근한 그 누런 복숭아 황도가 아니고,

누런길을 뜻하는 황도(黃道)말이다.

안내자의 얘길들으니 전국적으로다가 자그만치 4천명에 이르는 신도가 있다고 한다.

황(黃)은 하늘과 땅의 중앙이자 중심이라는 원리를 설파하시는데

아마도 황(黃)이 도(道)에 이르는 경지를 말씀하시는 듯...!

 

문제는 시간이라. 오늘의 탐매 일정은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데

초장부터 중대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자리를 털고 일어날 틈을 주지않고 폭포수처럼 말씀을 쏟아내며

다리를 붙잡는데야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대로 앉아 있다간 하루해가 아니라 석달 열흘은 간단히 흘러가고 말겠다.

소피를 핑계로 일어나니 그제서야 어쩔 수 없이 말씀을 접을 수 밖에... 

 

질기디 질긴 교주(?)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서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자리한 개평리로 들어선다.

몇 년만에야 다시 와본 고택, 겉모습은 여전한데 냉기가 돌고있었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니 그럴수 밖에...

서울에서 거주하는 고택의 종손조차도 이 곳에 내려와서 고택에 머물지 않고

여관에 머물 정도라니 무슨 말을 더....

안내자의 얘긴즉, "고택에 머물기가 무서워서라고..."

 

굳이 좌안동, 우함양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학자들의 족적이 화려한 동네인데

매화가 보이질 않는다.

 겨우 겨우 풍천노씨 댁에서 매화 몇 그루를 찾아내고서야 동네를 빠져나와

동행했던 안내자를 진교에 내려주고  통영으로 내려간 다음 지인을 만나고 돌아서니

오늘의 괴이하기만 한  탐매 여정은 별 소득도 없이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