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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탐매

'09 탐매(探梅) 다섯 번째 여정

          ● '09 탐매(探梅) 다섯 여정

 

              ▶ 보해매원(寶海梅園) ~ 일지매(一枝梅)  ~ 고산매(孤山梅) ~ 다산매(茶山梅)

              ▶ 2009. 3 . 5 (목)

 

 보해매원(해남군 산이면 )

 

 

 

 

 

 

일지매(一枝梅) - 운림산방 -

 제자인 허소치가  향리로 내려가 산방을 열자

완당 김정희가'운림산방'이라는 당호를, 초의는 이 매화를 선물했다고 전해온다,

소치 타계 후 제자 임삼현이 26년간 운림산방을 지켜오던 중,

 산방이 팔리고 당시 의신주재소의 엔또 소장이란 자가 이 매화(2대목)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하자 임삼현의 아들 임순재가 진도읍 동외리로 옮겨 심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1995년 187년을 끝으로 수명을 다 했지만, 살아있을 당시 뿌리나누기를 해 둔

자목 한 그루를, 임순재의 아들 임태영이 일지매의 본향 운림산방으로 옮겨왔다.

 

일지매의 단아한 자태

 

경칩날, 비에젖은 허소치의 '일지매'

 

운림산방에서 가장 둥치가 굵은 매화

 

 

운림산방

"허소치(許小痴)는 화취(畫趣)가 지두(指頭)의 한 경지로 전전하여 들어가니

심히 기특하고 반가운 일이며 진작 그 농묵(弄墨)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로세. 이 사람의 화품은 요즘 세상에 드믄 것이니 모쪼록 많이 구해 두는 게 어떠한가."

 

- 이상은 "완당전집'에 실린 내용으로 완당이 오진사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이다. -

 

 

남계 박진주 작 (운림산방 전시관에서)

 

무림 박진설 작 (운림산방 전시관에서)

 

녹우당 전경

 

 

 누군가와 대화를나누는 듯,

쥔장이신 윤형태 선생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동국진체의 창시자격인 옥동 '이서'가 쓴 당호

 

 

열성어필(列聖御筆)

왕가의 종신 남원군 이설(1691 ~ ?)이 1725년 10월 11일 영조로부터 하사받은 서첩이다.

태조부터 경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의 친필을 음각으로 새겨 탁본한 서첩.

(녹우당 전시실에서)

 

춘강조수도(공재 윤두서)

_ 녹우당 전시실에서 -

 

사자나한도(공재 윤두서)

- 녹우당 전시실에서 -

 

고산매 (孤山梅)

 녹우당 바로 아래쪽의 매점. 녹우당 윤형태 선생의 사촌 형님 되시는 윤형식 선생님 댁이다.

당에 들어서면 잘 알려지지 않은 너무나도 준수한 매화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작고 앙증맞은 겹홍매

 

고매의 비틀림

 

렌즈에 비가 들이쳐서 사진이 엉 ~~~

 

그 댁에서 만난 또 한그루의 준수한 조선 오리지널 겹백매

 

 

녹우당 주차장 앞에 자리한 백련지와 송림

 

다산매(茶山梅)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귤동마을 윗쪽,

 "다신계" 회원들이 모이는 곳으로 추측되는 회관 건물 옆에 서 있는 매화.

 

백련사 사적비(보물 제 1396호)

 

백련사 하경

 

고성사(高聲寺) 전남 강진

 

보은산방

가경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도착, 동문 밖 주막집에서 우거하였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학래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야 다산에서 살았으니 통계하여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탐매의 여정에 펼쳐진 날씨 '차림표'를 일별하자니.

설중(雪中)에다, 우중(雨中)이요, 운중(雲中에다 풍중(風中)까지라.....

'09 탐매의 흥취는,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에다 변화무쌍이요, 흥미진진을 넘어 거의 혼절직전.

 

맨 먼저 달려간 곳은 해남 산이면의 '보해매원(寶海梅園)'

자그만치 14만 평에 이른다는 엄청난 규모의 매원은, 벌어진 입을 여간해선 다물기 여렵게 만든다.

과거, 여러번에 걸쳐 들랑거렸지만, 요번엔 좀 더 체계적인 접근을 해 본답시고

전 날, 장성 소재 '보해양조'까지 찾아가 임원되시는 분을 붙잡고 '매원'의 현황에 대해 물었더니

 당신네 그룹의 한 계열사라는 '보해매원'에 관한 얘기가 청산유수로 쏟아져 내린다.

 

게다가, 개당 8천만원이나 한다는 어마어마한 용량의 탱크 수 백개가 도열한 매실 저장고까지 안내하여,

당신네 회사의 매실에 관한 웅대한 저장 실태와 규모 그리고 매실주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돌머리에 넣어주시고, 각인(?)까지 시켜주시느라 혼신을 다 하고 있었다.

 

",,,,,,,,,,,,, ?"

 

근데, 내 정서와는 너무 코드가 안 맞는다. 그것도 아주 아주 많이......!

 

 일본에까지 가서 배워오고, 들여오고 한다는 매화나 매실의 수확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로지 꽃의 품격과 수령 그리고 품종의 다양성과 재배에 관한 현황을 알고자 함이었는데....

 

어찌됐던 '보해매원'에 당도하여 담당자의 안내로 사무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매원 전체를 부감해 보니, 과연 면적에 대한 광활함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겠다.

겨우 몇 송이 터진 매화를 붙잡고 늘어터지게 매향을 탐한 다음'진도' 땅으로 발길을 옮긴다.

 

당도한 곳은 '운림산방' 허소치의 일지매(一枝梅).

사연많은 일지매의 이력을 더 이상 중언부언 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다성(茶聖)이라 추앙받는 초의선사와, 해동제일 문사철의 고수 추사 김정희 그리고그의 제자

허소치에 이르는 라인에 왜 매화가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자 나름의 소고 쯤은 있어야 하리라.

 

눈과 안개, 바람에다 결국 오늘의 탐매 여정엔 비까지 내리며 렌즈의 시야를 가로막는구나...

허지만, 우중임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들이대야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나.

'운림산방' 뒷편, 운무 자욱한 .상록수림의 보고 '첨찰산'과 산방의 '연지'가 어우러지는 풍경에다

'일지매'의 가느다란 향이 코 끝에 와 닿는 이 환장하게 좋은 경게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허소치는 분명 이 선계에서 한 시절을 노닐다간 선인(仙人)이었을 거라는 해답을 얻고

 안내소를 찾아가 허소치의 누운 곳을 물었더니,

제주땅에 유배간 스승을 찾아 래왕하던 바닷가 언덕위 어디쯤 묻혀있다고 한다.

거기까지 찾아가기엔 일정상 도저히 소화하기가 버거워 아쉽지만 이 쯤에서 발길을 돌려

 해남땅, 두륜산 대흥사 가는 길목 좌측에 자리한 연동마을의 '녹우당'을 찾기로 한다.

 

조선땅 삼재의 하나라는 공재가 머물렀던 녹우당에 어찌 괞찮은 매화 한 그루 없을쏘냐...

매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야말로  똥배짱 하나만으로 찾아든 ' 녹우당'

 그랬었는데,,, 이 곳, 저 곳 아무리 둘러봐도 고매(古梅)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쥔장에게 여쭈려고녹우당을 기웃거리는데, 윤형태 선생과 여성 손님과의 대담은

끝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만 포기하고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청담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여그 멋지고, 삼삼허고, 준수헌 매화를 찾았응께 빨리 매점으로 올라와부쑈~~"

 

허겁지겁 달려 올라간 매점의 안채.

그러면 그렇지, 명색 남도 문사철의 곳간이라 불리운다는 '녹우당'이 자리한 연동마을에

괜찮은 매화 한 그루가 없어어야 어디 될 말인가.......!

너무나도 준수한 순 토종 오리지널 겹 홍매 한 그루가 마치 '라틴댄스'라도 추는 양,

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탐매객을 환장 수준으로 이끌기에 너무나도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기에다 건물 옆 매대(梅臺)에는 다소 둥치의 굵기는 작지만

 역시 오리지널 조선의 겹백매 한 그루가 야무진 자태를 뽐내며 매향을 사정없이 흩뿌리고 있었다.

 근데, 근데 말이다, 이 고매의 향기가 너무나도 핍진한 예술이 아닌가...!

오늘 매탐여정의 본전은 여기서 확실히 뽑고 남아 감히 주체하기에 버거울 정도.

 

매점으로 나와 저 매화에 대한 이력을 물어볼 양으로 문을 두드리니 꼿꼿한 어른께서 나오신다.

 주시는 명함엔 "고산 윤선도 14대 손 윤형식" 선생님이시라고 적혀 있었는데

 바로 윗쪽 '녹우당'의 윤형태 선생이 바로 당신의 사촌 동생이시라고.

홍매는 당신의 아버님이 심으셨고 약 100 여년 정도 되지 않았겠느냐고 말씀하시지만,

내 눈으로 어림잡자면 150 년이 훨씬 넘어 보였다.

백매는 해방되던 해 당신이 직접 구해다  심으셨다는데 그렇다면 수령은 약 70 년 정도 잡아야 할 터. 

 

서울의 모 임학자가 학술연구차 이 댁의 매화를 여러번에 걸쳐 찾아왔었고,

 어딘가에 등록까지 했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선생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고산매(孤山梅)라 이름짓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

품 명매임에 틀림없었다.

 

감동을 되새김하며 집을 나와 강진땅으로 넘어가 '다산초당'을 찾았는데 비가 너무 쏟아진다.

성심을 다해 '초당'을 올라가 보지는 못 하고, 귤동마을 여기저기를 들락거려 보는데

고매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다만 "다신계' 모임으로 쓰이는 듯한 건물 옆에 꽃을 피워내는

백매 한 그루가 보일뿐이었다. 나무에대한 내력을 물어볼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해서

자의적 판단으로 그냥 "다산매(茶山梅)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바로 옆 백련사로 올라가 둘러보는데 매향과는 거리가 먼 절 인듯,

전혀 매화는 보이질 않는다.

 

강진읍으로나와 '고성사'를 찾아 올라간다.

 '고성사' 대웅전앞에 커다란 매화가 있다는 정보를 갖고 찾아 갔는데,

내리는 빗물을 아무리 닦으며 둘러봐도 매화는 없고, 조금 큰 정도의 단풍나무 한 그루 밖에 보이질 않는다.

'고성사'는 다산이 강진땅으로 유배와 거처를 삼았던 곳 중의 하나다.

 

"아내가  헌 치마 여섯폭을 보내왔는데, 세월이 흘러 붉은 빛이 가신고로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고 그려 두 아들과 딸아이에게 주었다"는 내력이 전 해 질만큼

정다산 역시 매화를 엄청 사랑했음이 분명한데,

 다산과의 인연이 얽히고 설켰다는  고찰'고성사'에

준수한 매화 한 그루 없다는 사실이 '우중탐매'를 끝내려는 나를 한 없이 슬프게 할 뿐이었다.

 

- 정다산의 '매화와 새 -

- 넷 상에서 구한 자료인데 출처는 불명 -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華之旣榮 有賁其實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