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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설악 탐승 / 마지막날 :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 2008. 10. 19 (일)~ 20 (월)

                ◆ 진동계곡(인제군 기린면) ~ 미천골 선림원지 (양양군 서면)

 

은비령을 향하면서 내려다본 한계령 

 

한계령 휴계소에서 오색쪽으로 300여 미터쯤 가면, 약 9부 능선쯤에서

인제군 기련면으로 빠지는 인제군도 10번 도로가 나 있다.

워낙 깊은 곳 이어서 은비령(隱秘領)이라고도 하고 워낙 눈이 많이 내려서

 은비령(銀秘領)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왼편의 점봉산과 오른편의 가리봉

사이를 구불거리며 내려가게 된다.

 

필례약수 

 

가리봉에서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능선 중간에서 기린면 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 부분에서 솟아나는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은 물론

숙취 해소에도 그만이라고 하는데 탄산수에다 철분이 많은 듯 벌건 색이다.

저 약수로 라면을 끓였더니 비릿한 맛이 났다.

한 병 담아가지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조금씩 마시는 중이다.

 

진동계곡을 찾아가는 중에 만난 자작나무 숲 

 

 인제군 기린면의 진동계곡

 

 

 예전, 이 곳을 찾아가기란 결코 만만치 않은 곳 이었다.

헌데 이번에 가 보니,

어지간한  골짜기까지 도로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

 

 수 많은 골골과 계곡이 이어지는 진동리 게곡.

점봉산과 방태산의 물이 합류하여 장장 70여리를 흐르게 된다.

우리나라 계류 중에서 가장 길다고 들었다.

이 물이 흘러 내린천으로 들어가고 끝내는 소양호에 담기게 된다.

 

청정옥수가 쉼 없이 흐르는 물 속에선

각종 어류가 풍부하게 서식 하는지라

이런 저런 낚시꾼들,

그 중에서도 계류 낚시꾼들에겐 메카 노릇을 한다고 들었다.

 

단풍 또한 시쳇말로 뻑 가고도 남음이 있는 곳 인지라 

 여행가들의 입소문을 통해 요즘은 꽤 많이 알려졌다.

 

진동계곡을 방동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지류중의 하나인 상치전과 하치전을 흐르는 계곡과 단풍

 

날던 새도 한숨 자고 간다는 조침령터널

 

터널 직전 왼편으로 나 있는 진동호 계곡을 잠시 돌아나와 

백두대간 조침령을 넘어 미천골의 선림원지로 향한다

 

조침령 터널을 동으로 빠져나와 영동지방으로 나오니

전혀 다른 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훨씬 부옇고 온도와 습도가 높은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백두대간을 경계로하여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림원지가 있는 양양 미천골 초입

 

머나먼 오지 미천골까지 정신없이 찾아온 이유는 바로

바로 아래의 선림원지를 찾기 위함이라...

 

선종사찰 폐사지 선림원지

 

1985년 7월부터 1986년 8월에 걸쳐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물들이 모두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9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절터에는 3층석탑(보물 제444호)·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 : 보물 제446호)·부도(보물 제447호) 등이 남아 있다.

 

이외에 1948년에 출토된 신라범종, 발굴조사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탑과 은제불입상,

각종 기와 등으로 미루어보아 큰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백과사전에서 발췌 -

 

 

 

 

'불바라기 약수" 가 있는 응복산(1359.6m)자락의 기나긴 골짜기 미천골.

골짜기가 좁은 관계로 그리 큰 절 터는 없어보이지만 길 옆 높다랗게 쌓아올린

축대 위에 올라서니 제법 넓은 터가 펼쳐져 있다.

 

선림원(禪林院) 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스님네들의 수도처가 분명.

 

1948년 이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범종.

그 범종의 명문에 순응법사가 제작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봐서

804년 법사 순응(順應)이 세운 것으로 본다고 한다.

 

그 명문이 들어있던 범종을 월정사로 옮겨 놓았는데

한국전쟁의 참화로 훼손되어버리고 범종의 파편 일부만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순응은 바로 802년 가야산의 해인사를 창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선림원은 의상대사가 이끌던 신라 최대의 종파

화엄종에서 지은 절이며

 

9세기 중엽 흥각선사

(절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의 주인공으로 선사라는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선종의 승려)

대대적인 중수를 하면서 선종 사찰로 전향(?)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당시 화엄종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최초의 사찰이라는점과 그 사실을 증명 해 주는

유물이 자리하고 있기에 선림원지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는 더더욱 크다고 하겠다. 

 

 

절터에 남아있는 부도비, 부도, 삼층석탑, 석등을 비롯해

쏟아져 나온 갖가지 기와들이 모두 9세기 후반의 것 들이어서,

이때 대대적으로 중수되었고

 

흥국선사를 비롯한 선종 승려들이 이 선림원에 들어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수도에 전념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

 

선림원터(禪林院) 삼층석탑 (보물 제444호)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이다.

높이는 약 5m 로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쌓아 올린 형식으로 상하층 기단에는 각각 우주와 탱주를 조각해 놓았다.

 

 상층 기단의 팔부중상 돋을 새김

 

 우주와 탱주 사이에 팔부중상 2구씩을 조각해 놓았는데

마멸이 심한 편이다

 

 

 

 탑신부는 각각 1매석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을 듬직하게 쌓아 올렸는데

지붕돌의 추녀는 수평으로 하고 5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전각에 약간의 반전이 있고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낙수면은 급하지도 완만하지도 않게 경사를 이루었다. 지붕돌 위에는 2단의

괴임을 두고 몸돌을 얹었으며, 몸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씩 체감 되는데

체감률은 비교적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노반이남아 있고, 그 위에 보륜 조각들을 적당히 쌓아두고 있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

 

 석탑 앞에는 안상이 새겨진 정례석이 놓여있다.

 

 

 선림원지 부도(보물 제447호)

 

일제 때 파괴되었던 것으 196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지대석위에 상.중.하대로 형성된 기단부만 온전히 남아있고

그 위에 있던 탑신부와 상륜부는 없어졌다.

 

사각의 지대석위에 팔각의 하대받침이 놓였다. 지대석과 한몸인 하대받침의

각면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안상 안에는 한 칸씩 건너가면서

사자 한쌍씩을 조각하였는데, 암수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상대ㅑ방을 돌아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에 면의 안상에는아무런

장식이 없다.

 

팔각의 하대받침 위에 놓인 것이 복련을 조각한 하대석, 곧 연화대좌인데

복련의 각 모서리 반전이 경쾌하고 긴장미가 넘친다.

복련 위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팔각의 굄대가 놓여 있다.

 

그 위에 한몸인 중대석과 상대석을 올려놓았다.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코와 입, 유려하게 조각된 가느다란 털,

윗입술에 붙여 길게 올려 내민 혓바닥 등은 상상의 동물인 용을

표현한 것 이지만 사실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흥국선사의 사리를 모신 이 부도는 대략 886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도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최초의 양식으로 여겨진다

상대석 윗면에는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높직한 굄대가 마련되 있다.

 

높이 1. 2m

 

-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

 

 선림원지 석등(보물 제 445호)

 

지대석 위에 간석(竿石), 상대를 모두 갖추고 화사석(火舍石)을 놓은 후

그 위에다 지붕돌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등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간석에서 기존의 석등과는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고

 

 지대석 위에 안상을 갖춘 팔각 하대받침을 두었으며,

그 위에 하대석을 올렸다.

 

하대석은 큼직한 귀꽃이 있는 복련과 구름무늬를 조각한

앝은 단 및 높은 괴임돌을 갗추고 있다.

 

하대석 위에 놓인것은 간석이다.

간석 상단과 하단에는 원형으로 구름무늬를 조각했으며

 

위아래로부터 가늘어지기 시자하여 가운데 이르러

제일 잘룩해진 부분에 꽃무늬가 조각된 벨트 모양의 띠를 둘렀고,

 

그 때 아래위로 복련과 앙련을 장식한 마디를 두었다.

마치 장구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간석위에는 복판 앙련을 장식한 상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한 면씩 걸러가며창을 낸

팔각의 화사석을 얹어놓았다.

 

각 면 아랫부분에 안상이 얕게 조각되어있는데,

처럼 화사석에 안상까지 조각된 것은 아주 드믄 예이다.

 

 지붕돌에는 하대석과 같이 귀꽃을 크고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나

이미 귀꽃 4개가 떨어져 나가고 없다.

꼭대기에는 다시 8엽의 연꽃이 앙증맞게 조각돼 있다.

 

상룬부는 대부분 없어지고 다만 복판 복련이 조각된 원형 석재가

하나 남아있을 뿐이다.

 

조각 연대는 선림원의 창건과 중건 시기로 추정되는 804년에서 886년

사이로 짚어본다고.

 

다소 가파른 느낌은 있으나 상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

 

 

 

분리하여 포장해 놓은  홍각선사 부도비(보물 제 446호)

 

  

선림원지에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고 비신의 일부는

국립중앙박불관에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귀부의 놓이 73cm, 이수의 높이는 53.5cm이다.

 

이수 중앙에 '홍각선사비명 (弘覺禪師碑銘)이 행서체로 새겨져 있다.

승려 운철이 신라말 널리 보급되었던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정강왕 원년(886)에 세웠다고 한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

라는 책에 따르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해박하고 경전을

암송하였으며 영산을 두루 찾아 선석(禪席)마다 참석했으며

수양이 깊어 따르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 답사여행의 길잘이에서 발췌 -

 

 

삼층석탑 뒷쪽으로는 불대좌의 흔적이 남아있는 금당터가 있는데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었던 듯 싶다

 

 이  구절양장 깊고 깊은 산중까지 들어와

하대신라의 맥을 잇는 석조물을 세우고,

 선 사상에 몰두했을 그 엣날의 승려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구룡령을 오르다 만난  정겨운 양철집

 

구룡령의 단풍

 

구룡령 정상에 올라 뒤 돌아본

양양 서면의 갈천리 일대

 

 

 

쉬엄 쉬엄 설악의 속살을 더듬으며,

산과 문화 그리고 역사와 인물의 향기를

동시에 아우르고자 했던,

요번 설악 탐승 일정.

 

설악산과 오대산의 중간 자락,

미천골 선림원지 탐방을 끝으로

대강의 일정을 마무리 짓고 구룡령에 오르니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흘림골과 주전골 탐승을 마치고 한계령을 출발,

은비령과 조침령,구룡령

리고 속사에 이르는 운두령까지.

 

물경 다섯개의 엄청스런 강원도 땅의

고개 고개를 오르고 넘고 넘어

 영동고속도로에 오르니

 

온통 자동차 행렬의 뒷 꽁무니 불빛만이

화려한 모습으로 끝간데 없이 늘어서서 도무지 요지부동.

 

설악에 몰렸던 단풍 감상파 모두가 

어둠과 함께 동시에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리라.

 

 

설악.....

 

그곳은 정녕,

 

한국인 모두가 기를 쓰고 찾아와,

감동의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돌아가기에 충분한

요소들로 차고 넘치는 곳.

 

*

*

*

 

 

아.... ! 

벌써부터 겨울 설악이 기다려지는 것을.